집을 지으면 십 년 늙는다’라는 말이 있다지만 정작 나는 수년 전 제주에 집을 지으면서 오히려 십 년은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물론 난생 처음 집을 짓는다는 설렘 때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족에게 맞는 좋은 기획과 합리적인 설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설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점은 최소의 비용과 관리로 지속가능하게 유지될 수 있고, 미래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장소’를 만드는 것이었다. 집의 준공과 함께 그 일환으로 시작한 것이 벌써 4년 차로 접어든 ‘최소의 정원’ 프로젝트다.
최소의 정원은 최소의 조성 비용 그리고 고작 한 달에 한두 번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최소한의 관리만으로 정원을 통해 얻는 최대의 기쁨이라는 역설적인 슬로건으로 시작했다. 최근 뜨거운 정원 열풍 속에 지자체나 공공 기관을 중심으로 공원을 정원으로 둔갑시킨 공공 정원 영역은 점점 커지고 있지만, 개인 정원의 경우 유지·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직접 정원주가 되는 일에는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정원주의 목적과 관리 수준에 맞는 꼭 필요한 만큼의 정원이라면 관리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동에 비해 훨씬 큰 기쁨과 삶의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정원을 누리는 참 기쁨은 단순한 관상적 가치에 머무르지 않고 오랜 시간 식물과 교감하며 쌓아가는 가드닝이라는 과정에서 시나브로 찾아온다. 이 글은 제주에 가족을 두고 서울에서 기러기 아빠로 살아가는 기성 조경가이자 초보 정원사가 가꾸는 제주 중산간의 조그마한 정원에 대한 이야기다.
동백나무의 재발견
정원 조성에 앞서 유지·관리를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별반 관리를 하지 않아도 수십 년 동안 잘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줄 기존 식생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우리 정원엔 도로 경계를 따라 최소의 정원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거대한 동백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4년 전 처음 이 땅에 방문했을 때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저 멀리 웅장한 한라산 전망이 시원하게 펼쳐진 제주 바다가 아니라 어지럽고 볼품없이 웃자란이 동백나무였다. 당시 마을 이웃들과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는 이 동백나무들을 지장물로 여겨 베자고 했지만, 끝내 고집스러운 조경가의 전지 작업을 거쳐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지금까지 우리 마을과 정원의 터줏대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나무란 본래 그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내향적 정원
보통 전원주택에 살면 수시로 정원을 드나들며 다양한 외부 활동이 많을 것이라 예상하지만, 우리 가족은 특이하게도 이런 좋은 환경에 살면서도 지극히 외부 활동을 즐기지 않는 내향적 성향이다. 특별한 외출이 없는 날엔 대부분의 시간을 실내에서 보낸다. 가족들의 행태를 감안해 모든 정원 식물의 구성과 위치는 집에서 밖을 내다보는 창과 시선을 기준으로 연출했다. 특히 가장 창이 크고 자주 지나치는 중정 영역에 집중했다.
중정은 우리 가족이 수시로 모여 담소를 나누는 대청마루와 같은 곳인데, 피아노 외에는 다른 가구가 없어 대개는 바닥에 편하게 앉아 정원을 바라보는 일이 많다. 이 공간은 서 있을 때는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며 공간의 개방감을 느낄 수 있고, 앉아서 머무를 땐 아늑하게 위요감을 줄 수 있는 입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정 앞 정원에 심은 대부분의 식물은 키가 크지 않은 초본류로 구성했다. 보는 시선에서 다양한 초장의 식물들을 중첩해 계절마다 다채로운 풍경을 유도했다. 바람이 잦은 기후적 특성을 감안해서 가늘고 긴 줄기나 잎을 가진 식물을 배치해 자칫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정원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휴케라, 은쑥, 바위고사리 같은 짧은 초장이지만 개성이 강한 초본류를 가까운 곳에 심어 색채나 잎의 질감을 직관적으로 감상하게 했다.
베케(돌무더기) 뒤에 숨은 체리세이지는 슬그머니 보여주는 화려함을, 여린 바람에도 흐느적거리는 가우라는 정원의 리듬감을 보여준다. 식물이 지닌 고유의 자연 수형으로 맘껏 키워낼 생각으로 식재 간격을 넉넉하게 해서 딱히 처음부터 많은 식물이 필요하지는 않다. 대신 잡초 관리와 함께 항상 정돈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정원 전면에 제주 파쇄석을 포설했다. 멀칭 방식은 잔디에 비해 용이한 유지·관리는 물론 정원의 유연성을 더해준다.
목본류는 정원의 골격 구성과 꼭 필요한 기능을 담아 딱 세 주만 도입했다. 무늬중국쥐똥나무는 한 주만 심어도 왕성한 생장력으로 짧은 시간에 근사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5월엔 짙은 꽃향기를 맡을 수 있는 방향수다. 테라스 근처에 심어둔 덕분에 봄철 중정을 지날 때마다 집안으로 스며든 꽃향기가 달달한 분위기를 만든다. 무화과나무는 식용으로 수확하지는 않지만 이국적인 잎의 질감으로 정원의 포인트를 주며, 무엇보다 주변의 새들을 정원으로 초대하는 정원의 전도사 역할을 담당한다. 마지막으로 삼색버드나무는 이색적인 색채와 함께 정원의 최전방에서 개방된 중정의 사생활을 확보해 주는 든든한 발screen의 역할을 한다.
버려진 것을 향한 경의
정원 연출에 필요한 딱히 정해진 재료는 없다. 살아 있는 식물이 아니더라도 멀칭재를 배경으로 색채나 질감, 형태 등 디자인의 원리를 통해 시각적인 볼거리가 될 수 있다면 좋은 정원 요소로 활용할 수 있다. 공사를 마치고 사방에 버려진 폐자재들이나 매년 동백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들, 식물을 심고 캐낸 부산물인 돌멩이들도 정원 요소로서 새로운 질서와 관계를 부여하면 꽤나 근사하고 의미 있는 점경물이 된다.
해가 지날수록 점점 짙게 녹슬어가는 고철이나 이질적으로 널려 있던 콘크리트는 더 이상 버려질 폐기물이 아니라 이 마을의 시작과 현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의 산증인으로 이 정원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처음 장난스럽게 시작한 이런 요소들이 이제는 제법 진지해 보이기까지 한다.
정원을 초대하다
작지만 풍성한 정원을 누리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정원을 집안으로 들이는 일이다. 복슬복슬한 수국, 향기로운 프렌치라벤더와 체리세이지는 매년 봄마다 화병에 담아 집안으로 초대하는 단골 손님이다. 마을 진입부에서 후정이 바로 보이지 않도록 시선을 가리기 위해 팜파스 세 주를 심었는데 그 위용이 상상했던 것보다 대단하다. 매년 8월이면 우쭐대며 쑥쑥 자라는 팜파스 꽃을 한 움큼 수확해 드라이플라워로 만드는데, 일 년 내내 그 풍성함을 유지해 볼 때마다 정원주를 흐뭇하게 한다.
바랭이 정원
정원 관리에 뭐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지만 막상 관수나 시비, 병충해 방지 같은 작업들은 딱히 자주 해줄 필요가 없다. 가끔씩 웃자란 식물들을 전지하며 다듬는 일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그냥 잡초 뽑기에 시간을 보내는 것 같다. 그중 유독 나를 힘들게 하는 잡초는 다름 아닌 정원의 불청객 바랭이였다. 처음엔 열심히 뽑아가며 어느 정도 유지했지만, 문득 이 끝나지 않을 전쟁을 계속할 자신도 없거니와 본 정원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라면 살짝 다듬어 유지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 다듬어놓으니 황량한 멀칭재와 대비된 푸릇한 모습이 마치 잔디처럼 보기 좋았고, 수년째 그렇게 정원의 한 영역을 맡아주고 있다. 때론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다면 공존을 위한 타협이 필요한 법이다.
두 번째 세대
초여름에서 가을까지 줄곧 꽃을 피우며 다양한 연출이 지속적으로 가능한 가우라는 그 생장력만큼 왕성한 번식력을 가진 식물이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가우라 주변으로 발아한 새싹들을 뽑아내 자칫 흩트러질 수 있는 정원의 밸런스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어쩌다 적당한 위치에 딱 알맞게 발아한 새싹을 발견한다면 굳이 뽑지 않고 잘 키워 보는 것도 좋은 선택지가 된다. 의도하지 않은 우연성을 통해 마주한 생명은 언제나 경이롭고, 남이 뭐라고 하든 정원의 자랑스러운 이야깃거리가 되어주니 말이다. 현재 처음 심었던 1세대 가우라에서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자연 발아된 2세대 가우라를 2년째 키우는 중이다.
정원과 경계의 상호작용
정원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정원을 담고 있는 경계와의 관계성이다. 물론 정원 자체를 근사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건축물이나 배경이 정원과 함께 작동할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면 그 감동은 배가 된다. 비일상적인 정원의 풍경을 경험하게 하는 창의 위치나 식물의 자태를 은은하게 투영하는 건축물 재료는 시간에 따라, 감상하는 위치에 따라, 확장되고 변형된다. 건물 서측의 동백나무 정원은 한낮의 햇살이 기울어지며 석양빛이 드리울 때부터 정원 등이 꺼지는 자정까지 이웃한 건축 요소와 상호작용하며 그간 감추고 있던 화려한 매력과 함께 우리 정원의 주인공을 맡게 된다.
조경가의 실험장
정원은 자연과 달리 누군가에 의해 돌봄을 받지 않고서는 그 원형을 유지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최소한의 유지를 위한 얼마간의 노력과 관심을 요구하는 성가신 대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류는 고대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 성가신 것을 포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마음 저편에는 에덴동산과 같은 각자의 이상적 정원이 있다.
최소의 정원은 작지만 충분히 풍성하고 소박하지만 되려 간편한 현대의 실용적 정원 모델을 제시해 보려는 어느 조경가의 얄궂은 실험장이다. 이 정원과의 공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최소한의 관심과 돌봄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다만 인간의 욕심엔 끝이 없는 건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이제는 더 이상 최소가 아닌 ‘최소의 정원’에 민망할 따름이다.
김훈연은 경직되고 획일적인 도시 경관을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한 자신의 언어로 풀어내는 개성 있는 조경가다. 간삼건축 G.scape에서 주요 실무를 쌓았으며 연세대학교 백양로, IBK 본점 선큰, 거제 벨버디어 해안 옹벽 등을 설계했다. 현재는 일터인 서울을 오가며 자신이 직접 기획한 제주의 마을에서 정원을 가꾸며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