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만 남은 그 여인의 정원
‘그 여인’은 물론 이름이 있다.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Elisabeth von Arnim)(1866~1941), 베스트셀러 작가. 본명은 마리 애넷 보샹(Mary Annette Beauchamp).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첫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었다. 1898년, 서른두 살 되던 해에 첫 소설을 냈다. 당시 귀족 부인이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당치않은 일이어서 무명으로 발표했는데, 뜻밖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자들이 대체 작가가 누구인지 매우 궁금해하다가 끝내 알아내지 못하자 주인공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라 부르기 시작했다. 후일 본명이 밝혀졌지만 이미 모두가 그녀를 엘리자베스라 불렀고 그녀 역시 스스로 엘리자베스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
엘리자베스의 이야기를 전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그녀의 정원과 자연에 대한 끝없는 애착 때문이다. 도시 생활을 혐오했고 마치 자석에 끌리듯 평생을 전원에서 전원으로 전전하며 살았다. 그녀의 명료한 시각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영국인이었지만 독일 남편을 둔 까닭에 수십 년 동안 독일, 스위스, 프랑스 등 유럽에서 생애를 보냈다. 60세까지는 무척 행복한 삶을 살았으나 히틀러가 나타나면서 엘리자베스의 행복도 기울기 시작했다. 처음엔 많은 사람이 히틀러에게 열광했다. 그 시절 엘리자베스의 일기를 보면 히틀러와 당시 독일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해 정확히 짚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딸 둘이 살고 있던 미국으로 이민을 결심하기 전, 이런 정치 상황 속에선 살아갈 수 없다고 여겨 여차하면 목숨을 끊을 수 있게 약물까지 준비해 두었었다. 남프랑스에 살던 때였는데 히틀러가 틀림없이 전쟁을 일으켜 전 유럽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건 엘리자베스가 특별히 정치적이어서가 아니라 ―정치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긴 했지만― 시대의 흐름을 읽는 남다른 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감각이 엘리자베스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원천이었을 것이다. 가감 없이 시대와 사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
엘리자베스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참 많은 정성을 쏟았다. 실은 지난달에 소개할 예정이었는데, 사진을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순서를 바꿔서 손아래 비타 색빌웨스트를 먼저 내보냈다. 그러고도 사진은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엘리자베스의 유작과 유품을 관리하는 재단에 연락이 닿았고 사진을 출판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사진은?” 하고 문의하니 알아서 찾아서 쓰란다. 아직 디지털 작업이 안 된 듯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은 많지만 기왕이면 원본을 쓰고 싶었는데 포기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원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회의가 일었다. 엘리자베스의 전기 두 권을 다 읽고 그녀가 쓴 소설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계속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라는 인물과 삶은 정말 흥미롭지만 그녀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예를 들어, 비타 색빌웨스트는 둘도 없는 훌륭한 정원을 남기고 갔다. 그리고 백 년 뒤에 찾아올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천천히 자라는 목련 한 그루를 심었다. 얼마나 멋진가. 제인 라우던은 “우리도 삽질할 수 있다”라는 명언과 함께 『젊은 여성들을 위한 식물학』이라는 책을 쓰고 가드닝 지침서를 여러 권 남겼다.
엘리자베스 폰 아르님의 경우 평생을 네 곳의 으리으리한 성 내지는 저택에서 살았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정원 일에는 어린 시절부터 열심이었다. 그러나 지금 남아 있는 정원이 하나도 없다. 독일 북동쪽 포메른 지방에 있던 성과 정원―가장 애착했던 곳―은 전쟁중에 폭격을 맞아 사라졌다. 스위스 산기슭에 지은 산장은 지금 호텔이 되어 정원의 모습이 완전히 변했다. 프랑스 남부 코트다쥐르에 지은 집과 정원 역시 호텔이 되어 풀장이 있는 모던한 정원으로 바뀌었다. 영국 데번셔에 있던 으리으리한 저택의 정원은 어떤 운명을 맞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 환경과조경 449호(2025년 9월호) 수록본 일부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