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속한 세계에서 잠시 떨어져 있기
핸드폰을 들어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켠다. ‘내 위치’ 아이콘을 눌러 지도의 중심을 바꿔준 뒤 검지와 엄지로 지도를 조금씩 축소한다. 일정 크기의 녹색이 나타날 때까지 내 주변 어딘가 있을 공원을 찾는 과정이다. 언제부턴가 출장이든 여행이든 낯선 도시에 가면 공원부터 찾는다. 사람 북적이는 곳은 싫고 남들 다 좋다는 건 슬그머니 피하는 내게 공원은 꽤 괜찮은 관광 스폿이다. 공원엔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 대는 인간도 없고 주변엔 그저 어슬렁거리거나 여유를 즐기는 움직임 뿐이니까. 무엇보다 한 군데라도 더 보러 갈 시간에 공원에 와 있다니,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행동인가! 돈으로 사치 부릴 형편은 아니니 시간으로라도 사치 좀 부리겠다는 속셈이다. 또 하나 좋은 점은 잠시나마 ‘이 도시에 속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느릿느릿 걷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 순간만큼 누가 뭐래도 나는 파리지앵이고 도쿄 피플이다. 일련의 이유로 낯선 도시에 가면 늘 공원을 방문한다. 하지만 서울에서도, 그것도 매일 반복되는 지난 일상 속에서도 공원을 찾는다. 물론 이유는 정반대다. 이 도시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잠시 탈출하기 위해, 나를 짓누르는 것들로부터 얼마간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점심 약속이 있어서 따로 먹겠습니다!” 내가 종종 사내 메신저 창에 입력하는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점심 약속이라는 건 나 자신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회사를 다니며 점심 시간 혹은 야근 중 잠시 사무실을 이탈해 근처 녹지나 작은 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곤 했다.
비흡연자인 내겐 이 시간이 담타(담배 타임)나 다름없었다. “혼자 걷는 사람은 주변 세계와 함께 있으면서도 주변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다.”(각주 1) 리베카 솔닛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속한 세계를 아주 떠나지 않으면서 되도록 거리를 두기 위함이랄까. 아주 도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잠시라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때엔 공원만 한 데가 없다. 대로변은 차 다니는 소음이 영 정신 사납고 걷다가 지하철역이라도 눈에 띄면 집에 확 가고 싶어지니까. 고작 십 몇 분 있을 건데 카페 가서 돈까지 내긴 억울하고. 공원 주변에 온통 풀과 나무, 돌 같은 것들이니 그중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오해 받을 일 없어 좋다. 그저 눈과 마음이 가고 싶은 대로 향하도록 자유롭게 두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 번뇌와 고민이 푸시시 바람 빠지듯 새어 나간다.
우연한 발견
최근까지 내 근무지는 강남구 논현1동이었다. 강남이지만 강남 같지 않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들이 공존하는 동네다. 낡은 빌라와 상가 건물이 모여 있는 골목에서 멀지 않은 데에 유력 인사들 이 살았다던 담장 높은 저택들이 듬성듬성 서 있다. 소속사나 매니지먼트 회사, 촬영 스튜디오 등 엔터테인먼트 관련 업종이 이면도로 중층 빌딩이나 개조된 주택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가 하면, 대로변에는 각종 성형외과와 약국이 걸음마다 눈에 띌 정도로 빼곡하다.
신사역, 신논현역, 학동역으로 둘러싸인 이 복잡한 동네 한가운데 학동근린공원(이하 학동공원) 은 외딴섬처럼 존재한다. 한적한 주택가 사이에 우뚝 서 있는 산지형 공원이지만, 그보다 더 높고 두툼한 건물들에 둘러 싸여 대로변에선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코앞까지 가야 ‘여기 공원이 있 네’ 싶다.
학동공원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논현동으로 회사를 옮긴 지 두 달쯤 됐을 어느 가을날, 점 심 먹고 회사 주변을 거닐다 골목에서 쏟아지는 감국꽃 무더기를 마주한 것이다. 어찌나 흐드러지게 폈는지 높은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였다.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켜보니 공원이 있었다. 그것도 사무실 바로 뒤, 두 블록가량 떨어진 지점에. 그날부터 나는 이 공원을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공원
1992년 조성된 학동공원은 사실 조경적 관점에서 썩 훌륭한 공원은 못 된다. 아마 공원 설계 수 업 대상지로 낙점될 법한, 손 볼 곳 투성이인 공원이다. 입구에는 궁서체로 쓴 ‘학동공원’ 네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돌이 떡하니 놓여 있고, 그 뒤로 펼쳐지는 작은 공터에는 언제 누가 왜 만들었는 지 모를 팔각정, 다소 조악한 그네와 운동 시설, 테니스 코트 등이 엉성하게 놓여 있다. 공터 너머 작은 오솔길을 오르다 보면 난데없는 출입 금지 구역이 나타난다. 공원보다 앞서 1976년 들어선 군사 시설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 비밀스러운 공간은 공원 전체 면적의 절반가량 차지한다. 제4공화국 시절의 군기지라니. 나름 합리적인 음모론이 떠오르지만 어쩌면 이 뜬금없는 장소 덕 분에 강남 한복판에서 그나마 이 정도의 녹지가 존속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스트 비짓
학동공원은 이래봬도 ‘머스트 비짓(must visit)’이다. 무려 서울시 선정 BTS 성지다. 과거 빅히트 사 옥이 인근에 있던 시절 연습생 신분의 BTS 멤버들이 이곳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고 한다. 멤버들이 서로 다투고 화해하는 장소이며 놀이터 바닥을 쿠션 삼아 텀블링을 연습하고 유독 생각이 많아지는 새벽에는 연습실을 탈출해 공원을 거닐었다고. 데뷔 초 학동공원 그네에 앉아 라이브 하는 영상도 여전히 유튜브에 떠돌고 있다. 그래서 학동공원에는 낮밤, 좋은 날 궂은 날 할 것 없이 내 최애의 풋풋하고 고달픈 시절을 추억하러 오는 아미들이 많다. 얼마 전 싸락눈이 내린 날, 옅게 쌓인 눈 위로 누군가 남겨 놓은 슈가와 제이홉의 이니셜을 볼 수 있었다.
한숨과 회귀의 공간
사실 학동공원은 셀러브리티를 좇는 사람들만의 성지가 아니라 일대 주민들과 근로자들처럼 보 통의 하루를 견디는 이들을 위한 만인의 성지일지도 모른다. 공원은 저마다 처한 상황을 안고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말없이 받아준다. 이런 의미에서 내게 학동공원은 한숨과 회귀의 공간이 다. 길을 잃은 것만 같은 날엔 나는 이곳으로 와 궤도를 찾았다. 유독 운세가 사나웠던 하루, 쉬이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머리가 지끈거린 날, 반복되는 야근 속에서 학동공원은 내게 임시 대피소 같은 존재였다. 여름엔 촌스럽고 무성하며 겨울엔 고요하고 황량한 이곳의 자연 속에 있다 보면 내 안의 어떤 바람이나 고민도 무색해진다. 일시적으로 명랑해진 마음은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되찾게 해준다. 혼자 또는 둘이서 천천히 걷는 사람들, 심신 단련을 위해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주민들, 잔뜩 생각을 떠안고 있는 듯한 사람, 반대로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사람까지. 그 속에서 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연대감을 느낀다. 그들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조심스럽게 인식하는 가운데, 각자 지닌 한 줌의 평온함을 말없이 나눠 가질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공원의 숨은 장점 아닐까 싶다.
누군가에게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동네 공원』은 동네 공원에서 우연히 만나 대화를 이어가는 두 남녀의 대화 에 관한 이야기다. 처지를 비관하는 여자는 어떻게든 현실을 벗어나려 하고, 남자는 자유와 낭만 을 좇다 현실에 뿌리내리는 법을 망각한 듯하다. 처한 상황도 삶을 대하는 태도도 양극단에 있는 두 사람의 대화는 내내 평행선을 달린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는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다.
물론 현실의 공원에서 이런 ‘고독한 개인의 지극한 대화’ 같은 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가올 어느 계절, 학동공원에 앉아 있을 누군가를 위해 소설 속 인물의 말을 벤치 아래 남겨 두 고 싶다. 이건 언젠가 그곳에 있었던 나를 위한 말이기도 하다. “실례하자면, 그쪽 분이 무슨 일을 하시든,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시간이 나중에는 그쪽 분을 기억하실 지금이라는 시간은 눈부시도록 정밀하게 채워질 거예요. 그럴 수밖에 없을 거예요. 아직 시작 되기 전인 거 같아도, 이미 뭔가 하고 있거든요. 답을 찾으러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를 돌아보니까, 와, 답이 내 뒤에 있는 거예요.”(각주 2)
**각주 정리
1. 리베카 솔닛, 김정아 역, 『걷기의 인문학』, 반비, 2017, p.48.
2. 마르그리트 뒤라스, 김정아 역, 『동네 공원』, 문학동네, 2024, p.42.
윤정훈은 조경을 공부하고 『환경과조경』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건축 매거진과 라이프스타일 매거진을 거쳐 이젠 예술까지 기웃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