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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환경과조경

월간 환경과조경
정원이 속삭이다
Garden Whispers
  • 최혜영
  • 환경과조경 2025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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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으로의 여정

시작된 인연, 그리고 변주곡

프로젝트는 2025년 1월초, 최연길 책임(현대건설)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한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잠시 숨 고르기를 하던 내게 그는 RHS 플라워 쇼 정원 설계공모 소식을 전해주었다. 1913년 시작된 영국 왕립원예협회RHS(Royal Horticultural Society) 플라워 쇼는 정원 디자인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행사 중 하나다. 이번 웬트워스 플라워 쇼는 영국의 대표 문화유산이자 대저택인 웬트워스 우드하우스(Wentworth Woodhouse)에서 개최되어 더욱 주목받았다. 말번(Malvern)에서 시작해 첼시(Chelsea), 햄프턴 코트 팰리스(Hampton Court Palace)를 거쳐 올해 플라워 쇼의 마지막 행사였다는 점도 의미를 더했다. 뜻깊은 행사인 만큼 여유 시간을 활용해 설계안을 제출했다.

 

2018년 태화강 정원박람회에 ‘영원한 고래’라는 정원을 선보인 적이 있다. 당시 높이 2.2m의 흰색 메탈 폴(기둥)을 일정 간격으로 세워 현대적 감각을 더하면서도 정원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인 ‘위요감’을 구현했다. 그 경험은 내게 하나의 디자인 언어가 되었고, 언젠가 작곡가가 변주곡을 만들 듯 변형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했다. 이번이 바로 그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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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결치는 메탈 폴

 

 

정원이 속삭이다

‘정원이 속삭이다’는 말 그대로 정원이 사람에게 은근히 말을 거는 듯한 감각을 담고 싶어 붙인 이름이다. 여덟 가지 높이(80~185cm, 15cm 간격)의 흰색 메탈 폴은 서로 다른 높이에서 미묘한 파동을 만들고, 햇빛과 바람 속에서 물결처럼 흔들리는 착각을 준다. 해의 위치가 바뀌면 그림자도 춤을 추고, 햇살이 폴 표면에서 반짝이며 부서지는 순간에는 마치 바람이 풍경을 울리는 듯, 파도가 밀려와 사라지는 듯한 ‘소리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정원의 가장 중요한 성질은 ‘위요감’이라고 생각하지만 공공 정원에는 개방감도 필요하다. 그래서 폴 사이의 투시성을 살려 시각적으로 열려 있으면서도, 내부로 들어서면 다년생 초화와 교목 네 그루가 만드는 포근함이 느껴지도록 했다. 폴이 주는 단단하고 현대적 인상과 식물이 주는 부드럽고 말랑한 감정이 서로 대조를 이루며 정원 속에서 묘한 긴장과 온기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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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낮이가 다른 폴이 만드는 리듬감과 그림자의 파동

 

코지 룸과 벤딩 폴

정원 안쪽에는 ‘코지 룸(cozy room)’이라 부르는 다섯 개 의 콘크리트 패드를 두었다. 폴을 등지고 앉아 중앙 식물을 바라보며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중 두 곳은 폴이 부드럽게 휘어져 연결되는 밴딩 폴 구조로, 일반적인 차양 대신 공간의 리듬을 극대화한다. 각도를 다섯 가지로 달리해 전체 정원의 흐름이 차양 위에서 더 강렬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바닥은 흰색 콘크리트 패드, 폴 아래 짙은 회색 화산석 자갈,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지는 밝은 회색 자갈길로 구분했다. 재료 간 경계는 곡선으로 마감해 식물, 자갈, 콘크리트가 하나의 흐름을 이루도록 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의 질감과 소리가 달라져 무의식적으로 감각의 변화를 느끼게 된다. 


빛과 시간의 정원

조명도 중요한 요소였다. 낮에는 기둥 사이로 빛이 스며들고, 비가 오는 날이면 폴 끝의 폴리카보네이트 조명이 은은하게 빛을 발한다. 전시 시간(오전 10시~오후 5시)과 여름 영국의 해지는 시각(밤 10시)이 다른 탓에 완전히 어두운 밤의 풍경을 보여줄 순 없었지만, 날씨와 시간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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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공병 조각을 흩뿌린 콘크리트 패드

 

지속가능성을 심다

RHS는 친환경성과 지속가능성을 중요한 평가 요소로 보았다. 이에 바닥과 가구에 친환경 재료와 기술을 적용했다. 현대자동차그룹과 협업해 자동차 헤드라이트 플라스틱을 재활용해 곡선미가 돋보이는 의자를 3D 프린팅으로 제작했다. 이 방식은 비정형 구조를 구현하면서도 재료 낭비를 15% 이상 줄이고 제작 시간을 60% 이상 단축한다. 약 180㎏의 폐플라스틱과 탄소 배출량 40%를 감축한 셈이다. 콘크리트 패드에는 아모레퍼시픽의 화장품 공병을 재활용해 햇빛에 반짝이는 오브제를 만들었다. 이는 업사이클링 재료의 심미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했다. 


계절의 결을 그리다

정원의 중심부에는 계절에 따라 표정이 바뀌도록 다양한 초화류를 심었다. 디기탈리스, 오이풀, 뱀무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에키네시아와 러시안세이지, 브론즈 펜넬이 다채로운 색을 더했다. 보랏빛 에린지움과 그라스류는 공간에 깊이를 주었으며, 폴 아래 고사리는 땅 가까이에서 식재의 완급을 조율했다. 


우연한 조우의 즐거움

폴과 중앙 식재 공간에 걸쳐 세 마리의 작은 새 조각 상을 숨겨 두었다. 설계 단계에서 폴의 리듬감을 강조하기 위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의 이미지를 넣었던 것을 실제 공간에서도 구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만, 의도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사람들이 우연히 발견하도록 했다. 그렇게 마주한 작은 발견이 짧은 놀라움과 미소를 선사하고, 그 경험이 공간에 대한 긍정적 기억으로 남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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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감과 색이 어우러진 식재


함께 만든 사람들

조성 결정부터 완공까지 약 4개월, 그 시간은 문제 해결의 연속이었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난관이 기다렸다. 정원이 속삭이다가 실버길트 상을 받은 것과 관계없이, 이 정원이 완성되어 대중 앞에 설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열정 덕분이다. 

 

메탈 폴 8종과 차양 구조 5종을 단 11일 만에 시공하기 위해, 한국 팀과 영국 팀은 매주 줌으로 회의하며 제작과 시공 방법을 찾아나갔다. 폴과 가구를 담은 여섯 개의 대형 컨테이너를 항공 운송하는 것도 큰 도전이었다. 현지 시공사조차 처음 겪는 일이라 통관번호 발급부터 쉽지 않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시공 첫날, 주문해 둔 식물 상태가 좋지 않아 이후 5일간 팀이 직접 영국 중부를 누비며 식물을 다시 구입했던 일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뜨거운 햇살 아래서도, 폭우 속에서도 묵묵히 제 역할을 해준 영국 팀(Lee Nuttall, Lewis Nuttall, Junior Naszvadi, Carol Foster)과 한국 팀(오랑쥬리 주례민 대표, 이현덕 이사, 윤경원 실장, 성균관대 학생 김나경·김재권, 사진작가 유청오)이 함께했다. 입술이 부르트면서도 새벽같이 나와 “괜찮아질 거야”라며 서로를 다독인 팀워크야 말로 이번 프로젝트의 가장 큰 성과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젝트를 이끈 최연길 책임이 있었다. 값진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 현대건설, 산림청, 한국수목원정원관리원에도 감사를 전한다. 

 

글 최혜영 성균관대학교 교수

사진 유청오


설계 및 조성 총괄 최혜영(성균관대학교)

기획 및 조성 총괄 최연길(현대건설)

시공 총괄 이현덕(오랑쥬리)

식재 총괄 주례민(오랑쥬리)

설계 및 시공 보조 김나경, 김재권(성균관대학교)

식재 보조 윤경원(오랑쥬리)

현지 시공 Lee Nuttall, Lewis Nuttall, Junior Naszvadi, Carol Foster(CGM Landscape (Yorkshire))

폴 제작 아이디티산업

3D 프린팅 벤치 제작 3D Factory

조명 제작 광우

항공 운송 대행 플레이잼

드론 영상 유청오

영상 리플릿 제작 문찬욱(성균관대학교)

위치 Wentworth Woodhouse, Wentworth, South Yorkshire, England

규모 165.6㎡(18×9.2m)

완공 2025. 7.


최혜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를 거쳐 다시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설계 실무와 교육, 연구를 병행하며, 우리 삶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공간은 무엇인지, 또 그러한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탐구해 왔다.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경험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대학원 조경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