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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
태어난 곳은 서울과 산자락 하나를 공유하는 경기도 어디쯤. 보통 뜻하지 못하게 가난을 맞닥뜨리면 더 외곽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라는데, 부모님은 특이하게도 서울 북쪽에 어중간하게 놓인 동네로 기어드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내 최초의 기억은 다세대 주택과 단독 주택이 뒤섞인 동네 한구석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여태 서울의 귀퉁이를 떠돌고 있다. 메가시티 같은 그럴듯한 수식어가 어울리는 시민은 못됐다. ‘서울 촌놈’이라는 표현이 등장했을 때, 딱 나를 위한 단어라고 생각했다. 집과 학교 근처만 뱅뱅 맴돌아 경험이 얄팍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번도 도시를 떠나본 적 없는 나는 시골 풍경을 마주하면 한참 눈을 떼지 못한다. 뿌리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끼기도 한다. 왜 그럴까. 이유를 궁금해하다 보니 어릴 적 기억에 가닿았다.
할머니는 괴상한 마을에 살았다. 꽤 번화한 도시 가까이에 있지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에 칭칭 감겨 있어서 촌이라는 말이 어울렸다. 버스는 두 시간에 한 번 오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면 차를 타고 이십 여분을 달려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지 않으면 부엌 바닥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지만, 고구마밭에서 포대 자루로 썰매 타기에 바빴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미닫이식의 중문을 열면 우리 집보다 큰 마당이 보이고, 넉넉하게 비워둔 외양간에서 통통하게 살찐 송아지가 울었다.
마당 밖에는 시야를 닫는 높은 건물이 없었다. 좁은 방과 고불고불한 골목길이 익숙했던 나에게 할머니의 마을은 남부럽지 않은 여행지였다. 크고 높고 넉넉했다. 이상하게도 그 안에 서면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풍경이 모두의 것처럼 느껴졌다. 막 모내기를 마친 논이나 고춧대가 자라고 있는 밭에 분명 주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굽이치는 고랑과 이랑, 힘없는 줄기를 받쳐주는 지지대를 따라 일렬로 선 작물 모두 사람의 손이 닿은 흔적인데도 자연의 일부 같았다. 아마 논밭의 식물들이 뒤편의 작은 숲과 똑같이 햇빛을 받고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풍경은 계절의 흐름을, 또 자연 앞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인간의 존재를 깨닫게 한다. 갖은 노력을 다해도 야속한 장맛비는 이제 막 잎을 틔운 작물의 허리를 꺾고, 자비 없이 바닥으로 내리꽂히는 뙤약볕은 잎끝을 태운다. 그럴 때면 땅은 그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또 누구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잎 하나 줄기 하나 최선의 모습으로 관리한 것처럼 보이는 정원보다 한 전시장에 깔린 카펫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도 같았다. 지난 5월 22일, 제17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이 개막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귀국보고전을 열지 않은 대신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주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는데, 전시장의 한복판에 낯익은 풍경 하나가 낮게 누워 있다.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의 ‘블랙 메도우Black Meadow: 사라지는 자연과 생명의 이야기’다. 이 카펫은 비엔날레의 주제인 ‘이주, 디아스포라의 확산, 기후변화의 충격, 사회적·기술적 변화의 속도’를 논의하는 공간적 바탕으로, 먼 훗날 기후변화로 인해 생명이 사라진(Black)초지(Meadow)를 은유한다. 금강 변에서 채취한 갈대꽃과 동남아시아에서 흔히 쓰는 사탕수수 두 종으로 만들어진 카펫은, 사실 빗자루 천여 개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해 만들어졌다. 이미 한참 전에 생명을 잃은 식물로 만든 풍경인데도 블랙메도우는 나를 순식간에 어딘지도 모르는 강가로 데려간다. 숨죽이면 강물 소리가 들려오고 바람이 불면 나도 갈대와 함께 스러져버리고 싶은 풍경 속으로.
슬프게도 블랙메도우는 오롯이 상상에 기대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청소기의 등장으로 갈대 빗자루는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였고, 풍성한 갈대밭을 자랑하는 금강하굿둑은 생태계 교란으로 서서히 망가지고 있다. 이런 풍경은 칼로 도려낸 듯 말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함께 얽혀 있는 작은 새와 동물 더불어 식물들까지 함께 데리고 떠나 강 주변의 풍경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좋아하는 단어가 사라지는 꿈을 꿨다”(오은, ‘아찔’)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어느 날 잠에서 깨니 집도, 땅도 없는 내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풍경이 사라졌다면 어떤 기분일까. 시 속 화자가 보고 있던 “거울 속 할 말이 없는 표정”이 어느새 나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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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스마트폰처럼 다양한 기능을 갖춘 ‘스마트 퍼걸러’
이용자의 움직임을 감지해 쾌적함과 에너지 효율을 높인 휴게 시설물
세인환경디자인이 출시한 ‘스마트 퍼걸러’는 스마트폰처럼 하나의 제품 안에 여러 시설을 탑재한 휴게 시설물이다. 에어 커튼, UV.LED 살균기, 프리 필터, 헤파 필터, 냉난방기, 디스플레이, 무선 충전기, SOS 벨 등 이용자의 건강과 편의를 증진하는 다양한 기능을 갖췄다.
퍼걸러 반경 3m 안에 사람의 움직임이 감지되면 필터를 갖춘 흡입기와 LED 살균기, 에어 커튼이 작동된다. 미세먼지를 거르고, 각종 바이러스와 세균을 없앤 깨끗한 공기를 분사하며 이용자의 몸에 붙은 유해한 물질을 제거한다. 내부에서의 움직임 또한 센서가 인식하여 자동으로 에어컨, 모니터, 온열 벤치를 작동시키는데, 에어컨은 실내 온도에 따라 냉방, 난방, 송풍 모드를 스스로 조정한다. 퍼걸러 하단부에 설치된 와류 토출구는 냉난방기에서 나오는 바람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게 막아준다.
실내외 공기 질을 측정해 이용자에게 알려주는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내부에 설치된 모니터를 통해 온습도, 미세먼지 등에 관한 정보를 인포그래픽으로 알기 쉽게 전달한다. 휴대폰 충전이 필요할 땐 내부에 마련된 책상의 무선 충전기를 이용하면 된다. 퍼걸러 내부에 사람이 없으면 자동으로 모든 기능이 종료되어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다.
TEL. 02-877-8811WEB. www.seindesig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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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편집자로 산다는 것
책을 편집하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것 못지않게 복합적인 작업이다. 특히 『환경과조경』 같은 디자인 전문 월간지의 편집은 기획, 조사, 취재, 인터뷰, 작품 섭외, 필자 섭외, 교정과 교열, 사진 촬영, 편집 디자인, 마케팅이 한 번에 뒤섞여 돌아가는 도전적인 작업이다. 편집자가 멀티플레이어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매달 일정한 날짜에 잡지를 내야 하므로 편집자는 항상 시간과 싸운다. 필자가 원고 마감을 지키지 않더라도, 약속한 날까지 사진이 도착하지 않더라도, 데드라인 전날 편집장이 원고 교체를 결정하더라도 무조건 정해진 날 편집을 마무리해야 한다. 편집 일을 하며 무척 당혹스러운 건 한 달을 먼저 산다는 점이다. 12월에 다음 해 1월호를 만들면 막상 새해 첫날이 와도 감흥이 없다. 칼바람 부는 2월에 새봄맞이 3월호에 집중하다 보면 계절을 착각하기 십상이다. 겨울에 봄옷 입고 가을에 겨울옷 입는 편집자가 적지 않다. 무더위가 한창인 늦여름에 낭만적인 가을 풍경 이야기를 쓰다 보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조경 저널리즘의 최전선을 질주하고 있는 김모아, 윤정훈 편집자의 한 달을 잠깐 들여다보자. 하루에 한 시간이라도 빼서 늘 집중해야 하는 건 기획 업무다. 기획의 스펙트럼은 참 넓다. 1년간 어떤 흐름으로 무슨 주제와 콘텐츠를 구성할지 계획하는 장기 기획,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주제를 발굴하고 엮는 특집 기획, 콘텐츠의 일관성과 연속성을 보장해주는 긴 호흡의 연재 기획. 물론 면밀한 조사와 성실한 취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머리를 쥐어짜며 작성한 기획서가 곧바로 채택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의 기획서에 대한 편집주간과 편집장의 반응은 기껏해야 ‘한 번 더 생각해 봅시다’ 아니면 ‘더 발전시켜 봅시다’다.
작품과 필자를 섭외하고 원고 일정을 관리하는 일 앞에는 늘 난맥이 놓인다. 오히려 해외 작품 섭외에는 ‘루틴’이 있어서 공력이 적게 든다. 설계사무소 홈페이지, 뉴스레터, 웹진, 소셜미디어에서 신중히 고른 후보작 리스트를 두고 편집회의를 한다. 후보작을 좁힌 뒤 이메일로 섭외를 시작하는데, 대개 해외사에는 홍보 담당 부서나 직원이 있어서 바로 반응이 온다. 도면, 사진, 설명을 한 묶음으로 정리한 ‘프레스 키트’가 금방 도착한다. 정작 막막한 건 국내 작품의 발굴과 섭외다. 실을 만한 근작을 수소문하기 위해 갖가지 레이더를 총동원한다. 의외로 섭외 성공률이 낮다. 섭외되더라도 진행 과정이 순탄하지 않다.
정리된 도면과 출판 가능한 사진이 없는 경우, 정제된 형식의 작품 설명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집과 연재 원고에 맞는 필자를 찾고 섭외하는 일에는 다양한 조사와 공부가 필요하다. 필자와 소통하며 원고를 맡기고 받는 일은 잡지 편집의 중요한 과정이다. 필자는 원고 마감일을 어기기 일쑤다. 요즘은 편집자의 애를 태우는 ‘잠수형’ 필자가 거의 없지만, 연이은 독촉 연락에 이제 곧 보낸다는 말만 반복하는 ‘철가방형’ 필자가 여전히 드물지 않다. 최악의 상황이 언제든 일어난다. 도착한 원고가 편집자의 기획 의도와 완전히 다르거나, 필자와 편집자의 소통 과정에서 서로 조율한 방향과 크게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다시 써달라고 요청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많은 시간이 들고 손이 가는 편집 과정은 교정과 교열, 그리고 편집 디자인이다. 외부 필자의 원고와 취재 기자의 기사가 도착하면 우선 모니터로 일독하며 오탈자를 바로잡고 잡지사의 띄어쓰기 원칙, 외래어 표기법 규칙에 맞게 원고를 수정한다. 편집자와 디자이너가 머리를 맞대고 수정 원고와 이미지들을 배치하고 구성하는 편집 디자인이 시작된다. 출력한 초벌 편집본을 놓고 1교가 진행된다. 디자이너의 수정을 거쳐 재출력한 버전으로 편집자를 바꿔가며 2교와 3교를 진행한다. 교정과 교열은 오탈자 정도만 고치는 작업이 아니다. 문법과 어법에 맞지 않는 단어나 문장을 잡아내고, 정확하지 않은 사실이나 표현을 적확하고 자연스러우며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걸러내고 다듬는 일이다. 글이 더 잘 읽히게, 지면이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재구성하는 일이다. 4교에서 책임자의 ‘OK’가 떨어지면 인쇄 이전의 과정이 끝나고, 다음 달의 역동적인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여러 멀티플레이어 편집자들이 1982년 7월부터 2021년 5월까지 『환경과조경』 397권을 만들며 어제와 오늘의 한국 조경을 기록하고 내일의 조경 문화를 설계해 왔다. 이번 호 특집 ‘편집자들’에 그들을 초대했다. 『환경과조경』을 거쳐간 김정은, 백정희, 손석범, 양다빈, 조수연, 조한결 편집자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환경과조경』은 어떤 잡지였으며, 조경이란 무슨 의미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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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스트로브잣나무와 개
사철나무, 서양측백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이 나무들은 그 자체보다무언가를 가리고 막는 쓰임으로 익숙하다. 이 식물들을 보면 떠오르는개 한 마리가 있다.
본가 아파트 단지에는 샛길이 있다. 쪽문으로 드나드는 발걸음이만든 짧은 지름길인데, 적절히 나무를 심어둔 단지 내 보행로와 달리식재 밀도가 낮아 길에서 1층 세대의 집 안이 보였다. 베란다에 그개가 늘 있었다. 검고 큰 덩치에 순한 인상, 리트리버 종류가 아니었나싶다. 어머니는 주인과 산책하는 걸 가끔 보았다고 했지만 나와마주칠 때는 늘 그곳에 조용히 누워 바깥을 보고 있었다.
그 개가 보던 창밖은 어땠을까? 특별한 풍경은 아니었다.그래도 그 집 앞에는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하얀 봄맞이꽃이며 개망초같은 풀꽃, 누군가 심어둔 노란색 낮달맞이꽃, 소국 같은 화초들이계절마다 피고 졌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맺힌 붉은 산수유열매에는 직박구리와 참새가 날아들었고, 스트로브잣나무 숲에서는까치가 울었다. 사람들은 그 풍경을 가로지르며 여름이면 진창을찰박거리고 겨울이면 쌓인 눈을 뽀드득 밟는 소리를 냈다.
언제부턴가 그 개가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여쭤보니 이사를간 것 같다고 하신다. 그 집 앞은 여전한데. 검은 개는 지금 어떤곳에서 무엇을 보고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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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아날로그 시대의 끝자락
남들 하는 건 다 해보라는 부모님 말에 따라 (이러란 뜻은 아니었겠지만) 반년 정도 재수생 생활을 했다. 일명 ‘반수생’, 고작 6개월밖에 안 되는 시간이 어찌나 지루하고 길었는지 수험생 신분을 다시 한 번 벗어던질 때의 해방감과 그해에 일어난 일들을 유독 선명하게 기억한다. 오답 노트 복기에 열을 올리던 2008년 하반기, 미국 대선이 치러졌다. 한창 조경에 관심을 두던 때라 버락 오바마가 기후변화와 관련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게 생각난다. 이듬해 벚꽃이 필 무렵에는 북미 지역을 중심으로 신종플루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열이 나나 싶더니 사흘을 꼬박 앓아누웠다. 무엇보다 휴대 전자기기가 무서운 속도로 변해갔다. 전자사전은 구식이 된 지 오래, PMP가 진화하나 싶더니 가볍고 성능이 좋은 노트북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의 필수품이었던 MP3의 설 자리가 좁아지고, 터치폰에 좀 익숙해졌나 싶을 즈음 아이폰이 국내에 등장했다. 카메라, 음악 플레이어, 게임기, 웹 서핑은 물론 애플리케이션만 깔면 휴대폰에 수많은 기능을 더할 수 있다니! 손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신입생 때만 해도 책 읽는 일은 조금 유별나거나 고루한 취미로 여겨졌다. 당시의 나 역시 책보다는 바깥이 흥미로웠다. 도서관보다는 영화관이나 전시관에 자주 들락거렸다. 활자가 얌전하게 배열된 종이는 무한 확장이 가능한 액정과 스크린 속 세상보다 좁아 보였다. 이곳저곳 쏘다니기 바빴던 내가 『환경과조경』을 펼치게 된 건, 순전히 설계 수업 때문이었다. 텅 빈 도면에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하는데 아이디어는 없고, 참고 자료만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노트북은 없었고 핸드폰 액정은 너무 작았고 2층 컴퓨터실과 1층 설계실을 오가기에는 버려지는 시간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내 시야에 한쪽 서가에 주르륵 꽂혀 있는 잡지들이 들어왔다. 검색을 대신해 원하는 키워드를 책등에서 찾아 쏙쏙 뽑아들었다. 에디터의 손길이 닿은 종이 묶음은 무수한 자료의 망망대해를 헤맬 필요 없이 양질의 콘텐츠를 쥐여 주었다. 그때 책상 위에 『환경과조경』을 펼쳐 놓은 모습을 다시 회상하니 큐레이션이 잘 된 전시장이 떠오른다. 어쩌면 그때부터 종이 매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한국 현대 조경을 대표하는 작품은?
다시 읽을 잡지는 통권 201호부터 250호, 2005년 1월부터 2009년 2월호까지다. 내가 2009년 봄 조경학과에 입학했으니, 신입생이 되어 접한 조경의 바로 직전 소식들이 담겨 있는 셈이다.
2005년을 여는 첫 달은 『환경과조경』이 통권 300호를 향해 나아가는 첫걸음인 201호가 발간된때다. “어느 칼럼니스트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 있듯이, 10년, 20년 혹은 100호, 200호와 같은 인위적인 눈금은 우리의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우리에게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계기를 마련”해준다(오휘영, “월간 『환경과조경』 통권 200호 발간에 즈음하여”, 2004월 12월호). 『환경과조경』도 이뜻깊은 숫자를 기념해 표지를 비롯해 전반적인 편집 디자인을 정비하고, 새로운 필진을 발굴하고조경 담론과 조경 비평을 활성화하자는 목표를 되새겼다.
더불어 올린 특집 ‘열 개의 공간, 다섯 가지 시선’은 무려 118쪽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한 굵직한 기획이었다. 당시는 국내에 현대적 의미의 ‘조경’이 들어온 지 30여 년을 지나던 때였는데, 이쯤해서 그간 축적된 조경 작품을 조명할 필요가 있다고 편집부 내부에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2014년 11월, 조경설계 실무자를 비롯해 담당 교수, 비평가 200여 명을 대상으로 조경 작품에 관한 이야깃거리를 끌어낼 수 있는 설문 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는 152명, 참여율도 높은 편이었다. 이 결과를 토대로 201호에 열 개의 조경 공간을 새롭게 소개하고, 개별 공간에 대한 비평과 설문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경향과 특징, 문제점을 다룬 다섯 편의 글을 수록했다.
편집부가 던진 질문은 다섯 개였다. 나름대로 다채로운 결과가 도출될 수 있도록 고민했을 텐데, 아쉽게도 순위권에 오른 작품의 스펙트럼은 그리 넓지 못하다. 순서만 조금씩 달라질 뿐 계속해서 엇비슷한 이름이 등장한다. 그 질문과 결과를 옮겨 적는다.(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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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들
조경의 테두리 안에서 의미 있고 흥미로운 콘텐츠를 찾는 편집자의 발걸음은 늘 사람과 공간 사이를 떠돈다. 특집을 기획하고, 취재를 다녀오고, 필자를 독촉하고, 늦은 밤까지 기사를 편집하고, 교정지와 눈싸움을 하다보면 어느새 달이 바뀌어 있다. 한 달 혹은 그보다 오랜 시간을 쏟아 만든 잡지 한 권에는 독자를 위해 세심히 선별한 다양한 이야기가 실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주 사적인 결과물이기도 하다. 잡지를 기획하고 구성하는 편집자의 취향과 사유가 은근히 반영되기 때문이다. 만든 사람만 아는 크고 작은 의미가 종이 묶음 사이사이 숨겨져 있다.
『환경과조경』을 거쳐 간 편집자를 초대하는 기획은 오래전부터 편집회의에 오르내린 소재다. 마땅한 특집 아이디어가 없을 때, 잡지가 기념할 만한 숫자를 관통할 때마다 소환했다가 다음을 기약하며 다시 서랍 속에 봉인하기를 거듭했다. 올 8월 발간될 통권 400호를 기념해, 천천히 오랜 시간 살을 붙여 완성한 이 기획을 지면에 올린다.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섯 명의 OB 에디터를 초청했다. 『환경과조경』에 실린 작품과 특집, 연재, 독특한 꼭지를 편집자의 시점으로 다시 살피며 당시 조경 분야의 이슈와 경향, 잡지의 변천사는 물론 편집자들의 일상과 고민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원고를 청탁하며 던졌던 질문을 독자 여러분에게도 건네고 싶다. “당신에게 『환경과조경』은 어떤 잡지였으며, 조경이란 무슨 의미였나요?” 진행 김모아, 윤정훈 디자인 팽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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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들] 그때는 맞고 지금은 다르다
주제의 변주
얼마 전 지금 몸담은 『SPACE』의 1980년대 기사들을 찬찬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30~40년의 시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주장들은 ―예를 들어 설계공모 시스템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좌담의 내용은― 지금 기사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도 했다.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반복되는 이슈에서는, 다루는 방향이나 동반되는 키워드에 따라 그사이 우리 사회와 분야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다.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처럼 동일한 하루(이슈)를 반복하지만, 조금씩 다른 선택과 행동으로 다른 결과로 나아가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번 기회에 2014년 1월호부터 2018년 5월호까지 『환경과조경』에서 내가 참여했던 특집들을떠올려보자니, 마지막 특집 ‘따로 또 같이, 느슨한 연대를 실천하다’(2018년 5월호)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특집 기획서는 “다른 방식의 모임이 생겨나고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분야를 넘나들며 연대하지만 개인은 존중하는 소위 ‘젊은’ 조경가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소개하려는 의도를 담았다. (지금 보니 2016년 5월호의 특집 ‘설계사무소를 시작한다는 것’은 이 특집을 예비하기 위한 기획이 된 셈이다.) 이런 종류의 기획은 분야의 떠오르는 주자들을 소개하고 경향을 읽어내려는 전문지의 고전적 아이템이다. 그리고 그때 갈무리한 새로운 세대의 특성은 비단 젊은 조경가와 그들이 만드는 조직만의 것은 아니었다. 건축 전문지인 『SPACE』의 특집 ‘1980년대생 건축가 그룹이 나타나다’(2018년 11월호), 그리고 ‘모여서, 건축을, 말하다: 이 시대의 건축 플랫폼’(2020년 11월호)을 진행하면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건축인들 역시 느슨하게 연대하며 업역을 다양화하려는 경향을 보며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 자전거 출근기 2.0
좀 더 개인적인 관심사와 연관된 특집이라면, ‘자전거 타고 싶은 도시’(2015년 4월호)를 꼽고 싶다. 이 기획은 자동차 위주의 교통 패러다임에 대한 반성, 해외의 자전거 인프라 소개, 레저에서 일상으로 확산되는 자전거 문화 조명 등 자전거와 연관된 다양한 스펙트럼을 담기 위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지면에 대한 사사로운 애정은 아이템의 최초 제안자였던 조한결 기자의 “서울 자전거 출근기”에서 비롯한다. 그때 조 기자는 홍대 인근의 집에서 방배동의 회사까지 대략 13km의 거리를 자전거로 출근하는 체험기를 썼는데, 그의 필력을 믿고 리얼리티와 재미를 위해 체험을 부추겼던 기억이 생생하다.(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김정은은 건축과 조경을 공부했다. 『건축인(POAR)』, 『SPACE(공간)』, 『건축리포트 와이드(WIDE AR)』, 『환경과조경』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 『SPACE』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건축과 도시,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금 여기’의 건축 문화를 기록하고, 전문가와대중 사이의 접점을 모색하며 저널리즘의 지평을 넓히는데 관심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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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들] 기록, 매체의 힘
봄을 알리는 꽃망울이 터지던 어느 날, 편집부 재직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특집을 회상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여전히 남들보다 이른 한 달을 살고 있는 편집자의 목소리는 한동안 놓았던 글쓰기에 대한 부담보다 반가움으로 다가왔고, 선뜻 수락한 책임은 원고에 대한 불안과 마감 임박에 배가된 부담감이 되어 나를 짓누르고 있다. 이 불안은 다음 호가 출간될 때까지 내 주변을 배회하겠지.
잊고 있었던 편집부에서의 기억들. 통권 300호(2013년 4월호)를 만들며 500호도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졌던 것도 불과 몇 년 되지 않았다. 영원히 글쟁이일 줄 알았던 나는 그 사이 다양한 시공간을 지나 조경 식재 전문 면허를 취득하고 뿌리는 같지만 결이 다른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 펜을 놓고 삽을 들었지만 내게 『환경과조경』은 열정 가득한 나의 청춘이고, 아련하고 애틋한 고향이다. 대학 시절 학생기자 제도인 통신원을 시작으로 편집부 기자, 편집장, 임원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환경과조경』을 통해 생성된 무수히 많은 관계 속에서 성장하여 지금의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미완의 특집 주제, 용산공원
재직 기간 참여한 잡지를 꼽아보니 통권 146호(2000년 6월호)부터 326호(2015년 6월호)까지 총 181권이다. 15년, 강산이 한 번 반은 바뀌었을 시간이니 기억에 남는 특집은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매호 콘텐츠의 중심이 될 특집을 기획하면서 시사와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며 회의를 했고, 양질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필자를 발굴하고 원고를 청탁하며 남들보다 앞선 시간을 살았다.
인문학적 감성이 담긴 신선한 구성이라 회자되었던 ‘열 개의 공간, 다섯 가지 시선’(2005년 1월호), 의외로 뜨거운 감자가 되어 매체의 역할에 한층 신중해진 계기가 된 ‘모방과 창조, 그 경계에서’(2006년 10월호)가 기억에 남는다. 선유도공원, 월드컵공원, 서울시청 앞 광장, 서울숲, 청계천, 북서울꿈의숲 등 대형 프로젝트를 다룬 특집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집 주제로 가장 많이 거론되고, 기고나 논의의 반복 빈도도 제일 높았으며, 최근까지도 놓을 수 없는 주제인 용산공원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백정희는 조경을 전공한 자칭 조경 중독자다. 비전힐스CC, 인천국제공항 등의 조경 현장에서 일하다 2000년 환경과조경에 입사해2015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예건에서 디자인연구소장 및 본부장으로 재직했으며, 2020년 조경공사업 면허를 내고 가든스토리를 설립했다. 조경건설업을 기초로 한 가든 인포테인먼트 전문 회사를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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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들] 응답하라 2006~2013
"저 잠깐만요. 지금 원고 써달라고 전화한 거 맞죠?” 『환경과조경』이 곧 400호를 맞는다며 전화를 건 기자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감이 왔다. 낯선 이와 통화하는 어색함을 과장된 어조와 다소 들뜬 억양으로 무마하고, (이왕이면 한 번에 성공하면 좋을) ‘부탁’이란 걸 할 때의 부담과 초조를 적당한 넉살로 이겨내야 하는 순간! 익숙한 느낌에 원고 청탁 전화라는 걸 금세 눈치채고 말았다.
특집 제목과 기획 의도를 듣고 나니 의아했다. 그 내용과 형식이 요즘 『환경과조경』이 보여주고 있는 기조와 사뭇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 정해놓고 하는 청탁이라는 걸 잘 알기에 일단 원고를 쓰기로 했는데, 생각보다 더 부담이 되었다. 특히 내가 근무했던 2000년대 초반은 조경 분야는 물론 『환경과조경』 자체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던 시기인지라 이 변화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점점 고민이 되었다. 자칫 ‘라떼는 말이야’하는 고루한 회고로 흘러갈 수도 있기에 글의 형식을 정하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원고 청탁서의 내용을 기반으로 스스로를 인터뷰하는 글이다. 400호를 기념하기 위한 특집이니 혼자서라도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북 치고 장구 치는 잔치를 벌여보고자 한다.
이번 특집의 의도는 예전 『환경과조경』 편집자의 시선으로 당시의 지면을 다시 살펴보는 데있다. 가장 흥미로웠던 기사를 꼽는다면?
재직 시절 나는 자칭 수상작 전문 기자였다. 글을 쓰기보다 설계공모 당선작의 패널이나 보고서를 보는 일이 더 잦았고, 이를 잡지에 싣기 위해 워드프로세서보다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같은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마디로 취재 기자보다는 편집 기자에 가까웠는데, 그렇다고 취재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작품 중에서 꼽아본다면 ‘광화문광장’이 떠오른다. 지리적 맥락이 워낙 중요하기도 하고, 특집(‘광화문광장과 세종로’, 2008년 2월호)을 통해 아이디어 공모(광화문광장 조성사업 아이디어 현상공모)부터 최종 설계안(광화문광장 조성사업 당선작)까지 편집해 소개했으며 이후 완공작을 직접 취재해(‘광화문광장’, 2009년 9월호) 개인적으로 의미가 크다. 작품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뤄보고자 개최한 집담회(‘광화문광장 집담회’, 2009년 9월호)는 당시 편집부 나름의 새로운 시도였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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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들]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수화기 너머로 윤정훈 기자가 원고 청탁의 운도 떼기 전에 이번 원고는 무조건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환경과조경에 다닐 때부터 OB 에디터 특집은 남기준 편집장이 종종 비장의 카드로 만지작거리던 회심의 한 방이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매달 특집 이슈를 발굴해내느라 지쳐 있던 편집부 풍경에도 화색이 돌았다. 환경과조경을 거쳐간 전설(?) 같은 에디터 중에 누구를 섭외할지 웃음꽃을 피우며 한창 이야기 하다가도, 언젠가 맞이할 400호 특집을 기약하며 아쉬운 마음으로 기획을 접곤 했다. 메마른 편집 회의의 분위기를 생각만으로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던 특집에 섭외되다니 반갑고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기대와 초조가 반쯤 뒤섞인 마음으로 메일함을 열던 에디터의 마음으로 돌아가 그 시절 나를 가장 설레게 한 연재 두 꼭지를 꼽았다.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고정희 박사의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2014년 1월호~2016년 12월호)는 국어국문학를 전공해 조경에 무지했던 나를 조경 전문 잡지 에디터로서 성장하게 해준 연재다.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는 특히 대학생 독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필자의 재치 있는 입담과 해박한 지식을 따라가다 보면, 나같이 조경에 입문하는 사람도 조경이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어떻게 오늘날에 이르게 됐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있었다. 고정희 박사는 이야기를 ‘이야기답게’ 만드는 탁월한 구성력을 갖춘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100장면의 제목과 주제를 미리 기획하고 연재를 시작했는데, 얼마나 치밀하게 이야기를 구성했는지 장장 3년에 걸쳐 연재하는 동안 처음 기획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후략)
*환경과조경397호(2021년 5월호)수록본 일부
조한결은 기술과 예술 사이에서 무언가 아름다운 것이 만들어질 수있다고 믿는다. 서강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환경과조경에서 에디터로 일했다. 새로운 배움을 찾아 서강대학교 대학원아트&테크놀로지학과에 진학하며 뮤지엄 테크놀로지를 연구했다.현재는 양평군립미술관에서 교육·전시기획 학예사로 일하며 미디어아트 웹진 ‘앨리스온’ 에디터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