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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환경과조경, 500호 시대를 향해
400번째 『환경과조경』이다. 1982년 7월 창간한 『환경과조경』은 한국 현대 조경의 성장사를 기록하고 저장해왔으며, 국내외 조경 설계와 이론의 쟁점을 발굴하고 그 지평을 확장해왔다. 39년의 긴 여정, 변함없이 함께해주신 독자 여러분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지면 곳곳에 녹아든 여러 조경가, 필자, 편집자, 디자이너, 사진가, 번역자의 노력과 정성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올해는 다양한 기획 지면을 통해 『환경과조경』의 발자취를 되짚었다. 396호(2021년 4월호)에는 그간의 표지와 책등을 한데 모아 특집 ‘표지 탐구, 책등 탐방’을 구성했다. 잡지의 얼굴 역할을 한 39년간의 표지와 책등을 넉넉한 리듬으로 훑어보면서 『환경과조경』이 그려온 지형의 주요 지점을 조감하고자 했다. 397호(5월호) 특집 ‘편집자들’에는 추억 속의 편집자 김정은, 백정희, 손석범, 양다빈, 조수연, 조한결을 초대했다. 그들은 “당신에게 『환경과조경』은 어떤 잡지였으며, 조경이란 무슨 의미였나요?”란 질문을 받고 그들이 엮었던 옛 기사와 꼭지들을 소환해 당시의 시각으로 다시 살폈다.
398호(6월호) 특집 ‘읽는 행위를 설계하는 법’에서는 『환경과조경』의 편집 디자인 변천사를 다뤘다. 40년 가까운 긴 세월, 잡지의 콘텐츠뿐 아니라 그것을 담는 형식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판형, 글꼴, 줄 간격, 글줄의 길이, 여백, 그림과 사진 배치, 머리말.꼬리말과 쪽수 위치 등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촘촘히 되돌아봤다. 399호(7월호) 지면은 추억의 연재물들로 채웠다. 지난 3월과 4월에 진행한 독자 대상 설문 ‘다시 읽고 싶은 연재는?’의 결과에 편집부의 기획을 보태 옛 연재 여덟 꼭지를 재구성한 ‘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꾸렸고, 열다섯 명의 필자가 기꺼이 참여해주었다.
1월(393호)부터 지난달(399호)에 걸쳐 실은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특집은 편집자 김모아, 남기준, 배정한, 윤정훈과 편집위원 박승진, 박희성, 최영준, 최혜영이 옛 『환경과조경』을 50권씩 나눠맡아 재독하고 재조명한 연속 기획물이다. 이달 400호에는 이 특집 원고 여덟 편을 다시 묶어 싣는다.
이번 호에는 『환경과조경』 400권의 목차를 모두 모았다. 『환경과조경』 39년 역사를 세로지르는 총목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현대 조경의 궤적을 담은 아카이브 역할을 하리라 기대한다. 잡지 400권의 목차 모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은 마치 국어사전을 ㄱ에서 시작해 ㅎ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처럼 지루하겠지만, 마음먹고 한번 도전해보시길 권한다. 한국 조경 50년사의 큰 줄기를 따라 걷는 유장한 산책을 즐길 수 있을 것이며, 산책길 곳곳에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보석들이 박혀 있을 것이다.
400호 교정본을 넘기다가 문득 500호가 발간될 시점이 궁금해졌다. 연필로 끄적여 따져보니, 2029년 12월이다. 400호를 낸다는 것, 그것은 멀지 않은 500호 시대를 준비하며 조경 저널리즘의 새좌표를 찾는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이번 400호 발간과 내년 7월 창간 40주년을 계기로 편집부는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며 500호 시대의 『환경과조경』을, 2030년대 한국조경 저널리즘의 지향을 질문하고 그 답을 구해볼 작정이다.
이 프로젝트에서 늘 경계해야 할 점은 『환경과조경』이 국내 유일의 조경 전문지라는 사실이다. 경쟁이 없으면 지향을 잃기 쉽다. 실험과 창의를 스스로 막거나 늦춘다. 안주하기 마련이다. 100m 달리기이든 42.195km 마라톤이든 혼자서 뛰면 자기 기록을 깨기 어렵다. 힘든 조건을 감내하며 분야 유일의 전문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는 점, 『환경과조경』의 자부심이다. 하지만 유일하다는 조건 때문에 자칫하면 『환경과조경』은 제도권 조경계만을 대변하는 유사 기관지 혹은 지향점 없이 모든 걸 쓸어 담는 백화점식 잡지로 흐르기 쉽다.
이러한 난맥을 스스로 경계하면서 『환경과조경』이 500호 시대를 향해 묻고 답할 과제는 무엇일까. 첫째는 한국 조경의 전문성(professionality)과 수월성(excellence)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그것은 곧 영역을 지켜야 한다는 불안감과 넓혀야 한다는 강박에 이중으로 피로한 한국 조경계에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둘째는 조경 저널리즘의 역할을 기록과 비평을 넘어 이슈 생산과 소통으로 확장하는 과제다. 셋째는 젊은 세대 조경가와 미래 세대 비평가를 발굴하고 그들과 함께 한국 조경의 2030년대를 기획하는 일이다. 세 가지 과제를 다각도로 풀어갈 도전적 노정에 독자 여러분도 참여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박명권 발행인과 남기준 편집장을 도와 편집주간 이름표를 달고 『환경과조경』에 동승한 게 309호(2014년 1월호)부터다. 400호에도 참여하게 된다면 독자 400명을 초대해 심포지엄과 파티를 결합한 환상의 이벤트를 열겠다는 구상이 코로나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취소가 아니라 연기라고 합리화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무한 공급 맥주와 함께 펼쳐질 신나는 향연을 약속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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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총목차 001–400
『환경과조경』 총목차 001–400
1982. 07.
창간에 즈음하여 오휘영
조경수상: 전통적인 환경과 오늘 박용숙
나무 그리고 인간: 만수원 김명원
정원기행: 성북동 B 화백 외
보여주고 싶은 경관: 보길도
특집: 조경이란 무엇인가
조경이라는 것 유병림
좌담: 대학의 조경 교육 그 밖의 문제점 권상준 외 5인
조경 분야로서의 사회적 인식 정충식 외 3인
조경, 실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조경과 도시설계, 터전을 가꾸는 두 일손 황기원
건축과 조경의 해후 윤승중
원예와 조경의 협력 염도의
명작 속에 나타나는 경관 천승세
옥외 환경 조각의 기능과 역할 엄태정
도시벽화
환경적 커뮤니케이션 김정헌
도시 환경의 발전을 위한 슈퍼그래픽 노려
해외 조경, 중동 조경
중동 조경의 진출과 그 전망 고성하 외 3인
중동 지역의 조경 심우창
중동 지역의 식물별 특성
전통 조경 양식의 탐구
한국인의 얼이 담긴 장소에 관한 고찰, 마당론 이규목
인간·자연, 교섭과 융화의 장소, 정자 정영선
우리들의 평범한 경관: 시작
사진으로 본 경관: 자연 속에 나타나는 경관
조경용 식물의 개발과 이용 정순오
1983. 02.
조경수상: 소쇄원, 그 품격 있고 남루한 이조거인? 조동화
정원기행: 제주도 동감녕리 정원 외
나무 그리고 인간: 한림농원 한태현
보여주고 싶은 경관: 충남 예산군 고택 이재근
특집: 관광지 조경 실태와 현황
관광 개발의 허실과 과제 김사헌
수도권 국민 관광 개발의 방향 이장춘
관광지 조경의 실태와 개선방향 이영희
국립공원 종합개발계획
우리들의 평범한 경관: 제주도
사진으로 본 경관: 자연 속에 나타나는 경관 강운구
세계의 조경: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파리 이대우
나무시장의 실태: 조경 산업의 증가와 조경 수목 재배 붐 라성숙
세계 조경가 시리즈: 밀러의 작품 세계
프로젝트: 서울대공원 조경 / 금호도 개발 기본계획
주거 환경과 실내 조경 조성열
실내원예 송순이
전통 조경양식의 탐구 윤국병
환경과 조각 유근준
옥외 공간속에서의 조각 최민
조경용 식물의 개발과 이용 정순오
1983. 06.
조경칼럼: 양적인 팽창보다 질적인 성장을 정영선
정원기행: 삼선동 우씨 정원 외
특집: 올림픽을 위한 조경
동경올림픽, 뮌헨올림픽, 몬트리올올림픽, LA올림픽
올림픽과 달라질 환경, 달라져야 할 디자인 황기원
’88서울올림픽 준비 상황 류동주
좌담: 올림픽을 전후한 서울의 도시 구조 개편 강병기 외 5인
특별기획: 우리들의 도시, 어떤 문제를 안고 있나?
사진에 나타나는 도시 경관 정동석
도시 환경–대단히 둔감한 서울 시민 홍사중
회색화된 도시, 그 위협으로부터 해방 안봉원
우리는 싫건 좋건 간에 시각 환경의 홍수 속에서 헤매고 있다 이대일
도시화에 따른 환경 녹지 문제 김장수
나무 그리고 인간: 나무할아버지 김이만
명화로 본 경관: 몽유도원도 원동석
’83프로젝트: 춘천호반 관광지 개발계획
보여주고 싶은 경관: 성낙원을 찾아서 박문호
전통 조경양식의 탐구: 한국담장의 문양 임영주
세계 조경가 시리즈: 버얼 막스의 작품 세계 이춘홍
스스로 꾸미는 가든아이디어: 여름철의 수경
(이하 후략)
*환경과조경400호(2021년 8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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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그 편지
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풍경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풍경은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을 거느리고 풍경과 사물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가망 없는 일이었으나 단념할 수도 없었다.
거기서 미수에 그친 한 줄씩의 문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걸 버리지 못했다.
― 김훈, 『내 젊은 날의 숲』 중에서
올해 초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어였던 고정희 대표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3.SPACE MAGAZINE: 꼭 하고 싶은데 질문을 안 해서 못한 말이 있으면 지금 해 달라. / 남기준: 대중적인 종이 잡지들도 휴간과 폐간의 고비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조경 전문 잡지인 『환경과조경』이 올해 8월에 통권 400호를 맞이한다. 외부에서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한 호 한 호 어렵게 펴내고 있다. 2013년에 환경과조경에 다시 복귀하면서 “한국 조경 분야에 월간 『환경과조경』 같은 전문 잡지가 하나쯤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후원하시는 마음으로 정기구독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을 몇 번이고 썼다가 지운 적이 있다. 내게는 호소력 있는 글을 쓰는 재능이 없구나, 라고 한탄했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독자가 구독하고 싶은 잡지를 만드는 게 우선이지 따위의 원론적인 다짐을 하기도 했다. / 3.SPACE MAGAZINE: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위의 그 편지를 썼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지금이라도 쓰면 안 될까? / 남기준: 그 편지는 올해 400호를 맞아서 한번 써보려 한다(https://plants-ingarden- history.com).
인터뷰를 했던 때가 1월인데 7개월 동안 ‘그 편지’를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400호 마감일이 다가왔다. 그 사이에 400호를 돌아보는 여러 특집과 연속 기획이 진행되었고, 1월에는 처음으로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던 『가든 플랜트 콤비네이션』(이병철 지음)이 출간되었다. 2월에는 『기억의 장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상석 지음), 『한국 조경의 새로운 지평』(성종상 엮음), 『그리는, 조경』(이명준 지음), 『꽃보다 꽃나무, 조경수에 반하다』(강철기 지음) 등 한 달에 네 권의 단행본을 펴냈다. 뜻하지 않게 마감이 겹친 탓이지만, 동시에 네 권을 펴낸 적은 처음이었다. 이번 달에는 비매품 책자 두 권도 마무리된다. 그 와중에 작년 봄부터 진행했던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코로나19로 인해 올해 5월로 연기되어 개최되었고, 제3회 LH가든쇼 운영관리 용역 제안서를 제출해 최종 선정되기도 했다. 2월부터는 내년 8월 광주광역시에서 개최되는 제58차세계조경가대회 사무국을 맡게 되어, 로고 디자인부터 메인 포스터 디자인, 개소식 행사, 홈페이지 구축, 홍보 영상 제작, 학생 서포터즈 운영, 공공기관 협의 등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부터 주최·주관에 참여하고 있는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은 3월에 ‘건강 도시와 조경’을 주제로 공고되었고 다음 달에 작품 접수가 진행된다. e-환경과조경은 어제도 오늘도 매일 9건의 뉴스를 내보내고 있고, 400호를 기념하여 진행한 ‘다시 읽고 싶은 연재는’이란 설문조사와 한국 조경 50년을 기념하는 ‘한국 현대 조경 대표작’ 설문조사도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7개월이 흘렀다. 하지만 ‘그 편지’는 마무리하지 못했다.
400호를 맞아 축하광고를 여러 단체, 기관, 업체, 학교 등에 부탁했다. 감사하게도 200여 곳에서 축하 인사와 함께 광고를 해주셨다. 모두가 어려운 시기임에도 염치없는 부탁을 드린 까닭은 예전에 비해 일은 대폭 늘었지만 잡지사의 경영 상태는 여전히 빨간불이기 때문이다. 일을 많이 할수록 빨간불이 더 크고 선명해지는 경우도 있고, 거의 수익이 나지 않는 일들도 적지 않다.리뉴얼을 단행한 2014년 이후의 누적 적자는 차마 밝히기 어려울 정도로 민망한 수치다. 물론 광고와 구독이 꾸준히 줄어드는 상황을 타개하지 못한 우리의 책임이다. 잡지사나 출판사도 하나의 기업일 뿐이니까. 그래서 ‘그 편지’를 쓰지 못했다.
물론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신문사든 잡지사든 출판사든 종이 매체의 어려움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새로 창간하는 독립 잡지가 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도 들리지만,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잡지의 폐간 소식이 더 크고 아프게 다가온다. 모색하고 변화를 꾀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지 못한 채, 결국 ‘그 편지’ 대신 400호 축하광고를 부탁드리며, 이런 인사말을 준비했다.
“1982년 창간 이후, 크고 작은 어려움 속에서도 단 한 권의 결호도 없이 무사히 통권 400호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한국 조경’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번쯤 일간지면의 뉴스를 통해 접하셨겠지만, 종이 매체의 어려움은 비단 『환경과조경』만 겪고 있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핀터레스트만 검색해도 잡지가 제공하는 정보보다 더 유용한 이미지를 손쉽게 취득할 수 있습니다.이처럼 종이 매체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잡지가 먼저 한국 조경 분야에 꼭 필요한 담론과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점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다만 정보의 홍수 시대에, 약간은 긴 호흡으로 “한국 조경의 어제와 오늘을 기록하고, 새로운 조경 문화를 설계하는” 종이 잡지가 하나쯤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통권 400호’라는 의미 있는 결실을 앞둔 지금,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을 다잡습니다. 무엇보다 『환경과조경』에 보내주신 많은 분들의 성원과 격려를 잊지 않고, 앞으로도 한국 조경 발전을 위해 전문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늘 항상 언제나 잊지 않겠습니다.”
‘그 편지’라는 파일명을 붙여 놓은 한글문서를 열어놓고 딜리트와 백스페이스 키를 부지런히 누르다가, 더 이상 삭제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때면 책을 읽었다. 그러다 ‘가망 없는 일이었으나 단념할 수도 없었다’는 대목을 만났다.
이제 401호를 준비한다. ‘그 편지’는 잠시 외장하드에 넣어두고, 우선 400호를 축하해주신 분들의 고마움을 떠올리며, 단념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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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그때 그 지면을 추억하며
짙은 한여름 냄새로 후끈한 7월, 『환경과조경』은 400호 맞이 특집으로 추억의 연재물들을 소환한다. 지난 3월과 4월에 걸쳐 독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조사 ‘다시 읽고 싶은 연재는?’의 결과에 편집부의 기획을 보태 옛 연재 여덟 꼭지를 다시 지면에 올린다. 리부트(reboot), 리메이크(remake), 오마주(hommage, 세 갈래로 변주되는 형식을 취했다.
리부트. 예비 조경가들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했던 인기 꼭지 ‘그들이 설계하는 법’(2014년 1월호~2018년 12월호)에 최윤석(그람디자인)과 강한솔+김태경+오승환(얼라이브어스)을 초대해 다음 여정을 향한 시동을 다시 건다. ‘또 다른 그들이 설계하는 법’인 셈이다. 2014년 잡지 리뉴얼과 함께 공들여 기획한 ‘그들이 설계하는 법’은 5년간의 긴 항해를 이어가며 동시대 한국 조경가 스무 명(팀)의 작업 과정과 성과를 선보이고 그 이면의 생각을 독자들과 나눴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은 조경가 스스로 설계 사유를 정리하는 기회이자 동료 조경가와 학생들에게 토론의 소재를 펼치는 계기였으며, 한국 현대 조경의 한 시절을 담는 생생한 아카이브이기도 했다.
리메이크. 열독률 높았던 연재 글들의 필자를 다시 초대해 미처 못 마친 이야기, 그간의 변화,새로운 물음과 답을 청취한다. 김아연(서울시립대)과 정욱주(서울대)가 번갈아 가며 조경설계 과정의 열두 개 열쇳말을 풀어갔던 연재 ‘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2009년 1월호~2010년 3월)는, 설계 스튜디오에서 머리를 싸매며 밤을 밝히던 학생들에게 등대 역할을 했다. 십 년을 훌쩍 넘겨 다시 만난 그들은 대담 형식으로 구성한 이번 리메이크 버전에서 설계 스튜디오 안팎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질문들을 던진다.
개념 상실하기, 말로 때우기, 분석만 하기, 맥락 무시하기, 그림 안 그리기, 그림만 그리기, 베끼기, 꿈꾸기, 유치해지기, 저항하기, 남에게 미루기, 딴짓하기.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다른 정반대의 가치들, 정正이 아닌 반反의 설계를 모색한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2014년 1월호~2015년 1월호)의 김영민(서울시립대)은 이번에는 ‘지향하기’를 제시한다. “함께 지향하고, 따로 지향하라.” 그가 말하는 좋은 조경설계의 필요조건이다.
좋은 도시란 무엇인가. 이 복잡한 난제에 도전하며 한국 도시설계의 이론적 경계를 확장한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2015년 1월호~12월호)의 김세훈(서울대)은, 연재의 막을 내린 지 5년 반이 지난 지금도 같은 화두를 놓지 않고 있다. 2021년 여름, 그는 “좋은 도시란 다양한 변화에 활짝 열려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그러한 도시는 “과거에 개발이 완료되어 구조와 외관, 즉 겉면은 바삭하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충분히 말랑말랑해 지금보다 좋아질 여지가 큰 ‘겉바속촉’의 도시”다.
여러 도시의 재생과 문화적 풍경을 탐색한 연재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2016년 1월호~2017년 1월호)의 심소미(독립 큐레이터)는, 이번 리메이크 글에서 팬데믹 이후의 도시 공간과 문화·예술의 지형 변화를 포착한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코로나19로 봉쇄된 도시 공간에서 비제도권 예술가, 문화 활동가, 여러 시민 주체가 익명의 거리 예술가로 등장하면서 연대하는 흐름을 목격할 수 있다. 315호부터 374호까지 60회를 이어간 ‘시네마 스케이프’(2014년 7월호~2019년 6월호)는 그 어느 지면보다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은 인기 꼭지였다. 2년 만에 다시 초대된 서영애(이수, 보라)는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통해, 일상의 소소한 행복과 긴밀히 접속하는 소박한 공간들의 의미를 짚는다.
오마주. 옛 연재 글의 주제와 형식을 다른 필자의 시각으로 전개한다. 김영표(대구대)의 ‘스케치업으로 하는 3D 조경설계’(2005년 2월호~6월호)를 비롯해 컴퓨터 조경설계와 관련된 여러 연재물을 오마주하며 나성진(서브디비전)과 조용준(CA조경)은 계속 진화하고 있는 설계 매체의 가능성을 진단한다. 나성진의 “그래스호퍼로 하는 조경설계”와 조용준의 “곡선으로 하는 조경설계”는 재현의 도구를 넘어 생성의 매체로 작동하고 있는 컴퓨테이셔널 디자인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준다.
김아연, 김용택, 박승진, 이홍선, 정욱주, 다섯 명의 조경가가 매달 답사와 토론을 통해 들려주던 ‘공간 공감’(2014년 1월호~2016년 12월호)을 이번에는 한 독립 잡지의 젊은 편집자들이 맡았다. 도시 경관과 지역 사회의 다채로운 현상과 사례를 이론과 비평의 틀로 포착하는 『ULC』의 박영석, 신명진, 임한솔이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의 장소성과 공간감을 서로 다른 시선으로 해석한다.
40년 가까운 긴 시간, 399권의 『환경과조경』에는 많은 필자의 연재 글이 차곡차곡 쌓였다. 연재 글쓰기는 스스로 ‘글 감옥’에 갇히는 일이고 피 말리는 마감의 늪으로 자신을 내모는 일이다. 필자들의 분투와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통권 400호 발간을 맞아 매달 50권씩 『환경과조경』을 다시 읽는 연속 기획, 이번 달이 마지막 차례다. 윤정훈 기자가 2013년 5월호(301호)부터 2017년 6월호(350호)를, 최영준 편집위원이 2017년 7월호(351호)부터 2021년 7월호(399호)를 리뷰한다. 다음 달, 드디어 400호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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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한때 나무가 있던 자리
대학교 정문 앞 광장은 원래 작은 숲이었다.군대에 다녀오니 가장 큰 나무 세 그루만 띄엄띄엄 남은 채 광장이 되어 있었다.학기가 지날수록 나무들의 잎은 적어졌고 줄기에 박힌 주사는 많아졌다.생태연구실 사람들은 공사 과정에서 뿌리가 많이 상했고 급격히 변한 환경에 오래된 나무가 적응하지 못해 죽어가는 것 같다고 했다.안타까웠다.
그렇지만 새로 생긴 광장이 좋기도 했다.정문을 가로막는 어두운 숲과 달리 탁 트여 시원해보였기 때문이다.깔끔하게 포장된 광장엔 때때로 알록달록한 축제 부스가 들어섰다.학생들은 기타와 젬베를 연주하곤 했다. (후략)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 문답』을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jo_hnj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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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어떤 잡지의 존재감
“‘400호 돌아보기’란 숙제를 끌어안고 시작된 고민은 쉽게 해결되었다. 일단 나눴다. 그래서 8과 50이란 숫자를 얻었고, 나누기를 먼저 주장한 탓에 첫 스타트를 끊게 되었다. … 나는 역으로 편집부 막내인 윤정훈 기자를 적극 추천했지만, 편집주간이 나를 지목하자 윤기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던 것 같다.”(남기준, “4.12m 이어달리기”, 2021년 1월호)
부하 직원을 꿰뚫어 보는 상사의 눈이 이렇게나 무섭다. 400호 돌아보기 순서를 정한 때는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올해 초. 편집부는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마스크 너머의 내 표정이 어떻게 읽혔는지 알 수 없지만 그때의 나는 웃고 있었다. 천연스러운 눈에 그렇지 못한 입꼬리. 그래도 스타트는 편집장이 끊어야 하지 않냐는 편집주간의 말은 대학 시절 과제 제출 기한을 연장해주는 교수님의 은혜로운 선언처럼 들렸다(할렐루야). 단지 순서가 미뤄져 기쁜 건 아니었다. 태어나지도 않은 1980년대의 잡지를 리뷰하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막막했으니까. 그리하여 돌아본 호수는 301호부터 350호까지(2013년 4월호~2017년 6월호). 공교롭게도 이 시기의 나는 한창 퀭한 눈으로 설계실을 드나들던 조경학과 대학생.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나마(?) 조경에 가장 관심이 많던 때였다.
국내 최초의 국제정원박람회
2학년 1학기. 지방으로 가는 첫 답사였다. 학교 정문에서 단체로 버스를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당시만 해도 정원박람회는 낯선 말이었다. 국내 최초의 국제정원박람회이자 ‘국가정원’이라는 거창한 타이틀 때문이었을까? 수도권에서 거리가 상당함에도 사람들이 바 글바글했다. 조경 내부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판단했는지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는 그해 『환경과조경』에 줄기차게 등장했다. 그야말로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의 모든 것을 다뤘다. 세 달(300호~302호)에 걸쳐 박람회장 실시설계안을 소개했고, 별도의 특집을 꾸려 301호(2013년 5월호)와 302호(2013년 6월호)에 나눠 수록했다. (보는 사람은 영 부담스럽지만) 조충훈 순천시장이 단독으로 302호 표지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막바지 공사가 한창인 4월 초부터 기자들은 현장을 찾아 다양한 관계자를 인터뷰했다. 정원 조성에 참여한 조경가는 물론이고 시공을 담당한 조경 회사 직원, 박람회 조직위원회 소속 화훼관리팀장까지, 다양한 역할에 고루 주목했다(‘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 시공일지’라는 꼭지가 있을 정도다). 박람회장의 메인 공간을 설계한 찰스 젠크스Charles Jencks 인터뷰가 눈에 띄었다. 그 나선형의 언덕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순천호수정원’에 대해서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는데, 좀 생뚱맞다고 생각한 순간 방문객들이 빙글빙글 돌며 언덕을 올라가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쨌거나 사람들은 즐기고 있었다. 좋은 공간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잠깐 생각했던 것 같 다. 다가오는 2023년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가 다시 열린다. 10년 만에 찾는 박람회장은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잡지가 예뻐졌다
“예쁘면 다야.” 괜히 발끈(?)하게 되는 말이지만, 어떨 땐 순순히 인정하게 된다. 전공 수업 시간, 한 친구가 발표를 하다 교수님에게 파워포인트 디자인도 설계의 일부라며 한 소리를 들었다. 디자인이라는 게 타고난 감각이 따라야 하는 법이라, 조경학과에서 이 ‘감’이 없는 학생들은 상당히 애를 먹기도 했다.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대학 4년 동안 얻는 건 PPT 만드는 스킬이라고 할 정도로 디자인은 힘이 셌다. 청중의 시선을 잡아끌고 그 속에 담긴 내용을 더욱 근사하게 보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덤으로 교수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 수 있고). 책도 그렇다. 2012년도에 조경학과에 첫발을 들였지만 『환경과조경』을 제대로 펼쳐본 건 잡지가 예뻐졌을 때부터다. 2014년 1월호(309호)부터 판형, 서체, 콘텐츠, 표지 및 내지 디자인이 확 바뀌었다. 특히 표지에 박힌 ‘laK’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이 강렬한 제호 때문에 친구들 사이에서는 ‘환경과조경’보다 ‘엘에이케이’라고 불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만 ‘락’이라고 부르는 애도 있었다). 이따금 잡지를 펼쳐보며 생각했다. 이런 멋진 잡지를 열심히 보다 보면 나도 근사한 설계를 할 수 있겠지? 슬프게도 헛된 기대였지만.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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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조경의 매운맛
『환경과조경』은 나에게 특별한 잡지다. 성경을 제외하면 가장 많이 손에 쥔 책일 것이고, 심지어 나이도 같다. 요즘엔 조경을 스마트폰으로도 배울 수 있지만, 조경을 책으로만 배울 수 있었던 시기를 (아마도) 마지막으로 겪은 세대이기에 더 의미가 크다. 입대 후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다 나온 일병 휴가 때, 스스로도 믿기지 않지만 처음으로 찾은 잡지가 『GQ』나 『맥심』이 아닌 『환경과조경』과 『토포스(Topos)』였다. 20년 묵은 불평이지만, 조경학개론 수업조차 조경이 무엇인지 절대 쉽고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았었다. 조경이 무엇인지 가시적인 감을 잡아준 첫 길잡이는 『환경과조경』이었다. 그 후에도 매달 수록된 이미지와 텍스트가 전해주던 뉘앙스가 내가 느끼는 한국 조경의 온도와 색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태평양 건너편에서 10년간 머무르면서도 『환경과조경』을 한국 예능이나 드라마만큼 자주 돌려봤다. 한국 조경에 대한 향수와 관심, 때로는 동경과 선망이자 비판과 아쉬움을 모두 원격으로 바라보게 해준 채널이었다.
해외리포터로 시작해 이제 편집위원으로 이름을 올리고 종종 두렵디두려운 원고 요청이 오면 졸고를 올리긴 했으나, 지난달 최혜영 편집위원의 고백처럼 나 또한 그리 성실한 애독자가 되지는 못했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변을 한마디 붙이자면 종이 잡지는 3분도 안 걸려 눈으로 스캔하듯 훑어본 적이 있어도, 적어도 환경과조경 홈페이지(lak.co.kr)는 다른 포털 사이트 방문 빈도 못지않게 하루 세 번 이상은 접속한 지 오래다. 페이스북 뉴스피드를 그냥 넘긴 적도 없다. 사실 이것은 변명 삼을 일도 아닌, 동시대 종이 잡지의 현주소이자 어쩌면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임을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400호 돌아보기’라는 이번 기획도 아마 『환경과조경』이 조경 분야에서 보여준 고유한 매력과 추억들을 되새기면서, 예전과 다른 위치일 수밖에 없는 『환경과조경』의 미래를 그려볼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400권을 50권씩 끊어놓은 분절 주기에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지만, 돌아보기의 첫 호인 351권이 발간된 2017년 7월경을 돌이켜본다. 고 박원순 시장의 긴 임기 중 7년 만에, 대통령과 서울시장의 뜻이 같은 방향으로 정렬되기 시작된 때다. 351호는 서울로 7017에 대한 꽤나 묵직한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서울로의 정치적 수단화와 절차적 문제는 잠시 덮고 당시 원고를 되짚어본다. 비난 일색의 상황에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글을 읽기 시작했지만, 약 2년 안에 광속으로 설계와 시공을 진행했던 설계 팀과 진행 부서의 내막과 고충을 듣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다 이유가 있고, 다 계획이 있는 법. 흥미로웠고 지금도 이따금 생각하는 논점은 서울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 ‘서울로는 정작 무엇인가?’ 연결 통로? 목적지? 육교? 식물원? 도시숲? 높이도 여건도 맥락도 판이하게 다른 뉴욕 하이라인의 벤치마킹을 강요한 결과로 서울로 7017는 유별난 점박장하며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다. 서울로 7017는 구도심의 복잡함에서 벗어나 전에 없던 경험을 주는 공중 보행로이자 오랜 시간 안정화된 도시 조직의 상부 층위에서 새로운 개발 계획을 따라 진화해가는 서울만의 길, 서울만의 보행 네트워크다.
이 시기에는 서울로 7017을 비롯하여 광화문광장, 용산공원 등 랜드마크의 위상을 갖는 오픈스페이스의 조성 및 재조성에 대한 논의를 이끄는 시도가 있었다. 367호의 “광화문광장 설계공모에 참가하는 조경가들에게”(배정한, 에디토리얼, 2018년 11월호)와 “새 광화문광장에 관한 풍문들”(최정민, 2019년 3월호), “광화문광장에 대한 논의, 이제 시작이다”(박상현, 2019년 3월호) 등의 다양한 비평과 설계공모 당선작 및 참여작을 실은 371호의 목차만 훑어보아도 뜨거운 비평 의식과 문제의식을 느낄 수 있다.
당시의 또 다른 특징은 환경과조경이 ‘2016 서울정원박람회’의 주관사로 선정되었고, 각종 정
원박람회가 조경계의 중추적인 행사 중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정원 연출이 가장 화려한 시점이 봄의 끝자락이나 가을의 시작점이다 보니, 정원박람회의 시기가 고정되어 매해 11월은 코로나 이전까지 서울정원박람회를 꾸준히 담는 데 할애했다. 355호의 칼럼에 쇼가든의 한계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우려와 의견이 담겨있는데, 꾸준히 긍정적인 진화를 해오고 있다고 본다. ‘2017 서울정원박람회’가 여의도공원으로 그 무대를 옮기고 쇼가든의 존치가 일반화되면서 작가정원과 근린공원의 공생이 본격화됐다. 2018년에는 ‘피크닉’이란 주제로 공원과의 더 적극적인 동거를 달성하며 여의도공원을 방문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되어 주었다. ‘2019 서울정원박람회’는 도시의 한복판으로 침투하여 도시재생의 도구로서 정원 조성과 주민 참여를 실험하고 황화코스모스의 오렌지색을 각인시켰다. 최근 코로나 상황에서도 적잖은 호응을 이끌어낸 394호의 서울국제정원박람회SIGS에 이르기까지, 『환경과조경』이 정원에 대한 콘텐츠를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지면에 소개한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후략)
*환경과조경399호(2021년 7월호)수록본 일부
최영준은 『환경과조경』과 나이가 같은 조경가다. 『환경과조경』 통해 조경을 이해하게 되었고 오랜 팬이다. 지금은 종이 잡지보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조경을 섭취하기도 한다. 서울 근교에서 랩디에이치(Lab D+H) 서울 사무실을 운영하며, 한국과 중국의 다채로운 프로젝트와 새로운 성과물을 통해 조경설계를 매번 다르게 보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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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다음이 더 궁금해지는 결말이 있다. 『환경과조경』에는 짧게는 두세 달, 길게는 4~5년간 다양한 연재들이 머물며 독자와 함께 호흡해왔다. 오는 8월 맞이할 통권 400호를 기념해 지나쳐간 연재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살피는 지면을 마련했다. 모든 연재는 글이기 이전에 필자들이 세상에 던지는 화두였다. 그들은 당시의 이슈를 말하기도 했고, 시대를 분문하고 마음속에 넣어둔 채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하는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어떤 질문들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콘텐츠가 범람하고 트렌드가 시시각각 변하는 지금, 지난 이야기를 들추어보는 이유는 못다 한 이야기를 계속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 이야기들이 시간이 흘러 흐릿해진 질문을 다시 또렷하게 드러내고, 새로운 논의를 촉발하는 도화선이 되기를 기대한다.
‘다시 읽고 싶은 연재는?’ 설문 조사(과정과 결과는 다음 장 참조)에 보내준 독자들의 의견을 토대로 몇몇 연재 꼭지를 다시 지면에 올린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에는 얼라이브어스를 이끄는 강한솔, 김태경, 오승환과 그람디자인의 최윤석을 초청했다. 새로운 그들이 설계하는 법은 도면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룹을 조직하고 운영하는 방식, 누군가를 설득하는 태도, 일정 조율 역시 설계의 영역이라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생각보다 실용적 정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요.” 한 독자가 보낸 의견에 지난 목차를 한참 뒤적였다. 식물 정보, 조경 법규 등 실무 정보를 다룬 여러 연재가 있는데, 제도판과 연필 대신 컴퓨터가 새로운 설계 도구로 떠오른 뒤에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루는 연재가 연이어 계속됐다.
‘조경 분야에서의 마이크로 컴퓨터 응용’(김성균), ‘피라네시를 이용한 2.5차원 이미지 제작’(김충식), ‘스케치업으로 하는 3D 조경설계’(김영표)가 그 예다. 다양한 설계 프로그램을 떠올려보다가 ‘...으로 하는 조경설계’라는 새 꼭지를 상상했다. 그래픽 툴을 이용한 설계 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는 서브디비전의 나성진과 CA조경의 조용준에게 이 빈칸을 채워 주기를 요청했다. 이들의 글에서 그래픽 툴이 재현의 도구를 넘어 설계 도구 그 자체로 작동하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는 김아연과 정욱주가 번갈아 쓴 글이다. 두 필자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연재를 통해 던졌던 설계에 대한 질문들이 지금도 가치를 갖는지, 그에 대한 답변 역시 유효한지 되짚었다. 조경설계를 막 배우기 시작한 학생들에게 길잡이가 되어주고자 설계 스튜디오를 들여다보던 둘은 이제 설계 스튜디오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다양한 키워드 위를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오가는 대화를 통해 좋은 조경 프로젝트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민은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를 읽은 학생 독자들이 이제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조금은 삐딱하고 남들과는 다르게 설계하는 법을 알려주는 대신 동료 조경가로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의 말처럼 “어쩌면 이 글은 연재를 다시 돌아보는 글이 아니라, 그때 미처 끝내지 못하고 미루어두었던 연재의 마지막 원고”인지도 모른다.
좋은 도시를 탐구하는 김세훈의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가 끝난 후, 5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2021년, 그는 “좋은 도시란 다양한 변화에 활짝 열려 있는 도시”라고 정의한다. 과거에 개발이 완료되어 구조와 외관, 즉 겉면은 바삭하지만 안은 말랑말랑해 지금보다 좋아질 여지가 큰 ‘겉바속촉’의 도시. 이 새로운 도시 탄생의 가능성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대미술과 도시, 건축, 조경을 매개한 전시를 연구하며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를 쓴 심소미는 지난해부터 팬데믹 이후의 도시 공간과 공공 공간의 재구성을 리서치하고 있다. 공간이 변화하면 그에 담기는 프로그램 또한 달라지기 마련이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 공간뿐 아니라 그곳에서 일어나는 전시 경험을 전혀 다른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이를 한계로 인식하지 않고 새로운 미학적 가능성으로 탐색하는 심소미의 관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시네마 스케이프’의 서영애는 여전히 영화에 푹 빠져 지낸다. 그를 사로잡은 영화 속 경관 이야기를 통해 “일상 속 자잘한 행복을 위해 지천에 널려 있어야 하는 소박한 공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조경을 경험하고 도시를 탐험하며 다양한 글감을 모아 온오프라인으로 출판하는 그룹 ‘유엘씨프레스’를 ‘공간 공감’의 새 필자로 초대했다. 용산공원 부분개방 부지를 답사한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지점에 시선을 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을 만끽한다. 이 글을 통해 “설명할 수 있는 설계 어휘를 사용하여 장소 애착의 이유를 들어내는 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유의미한 작업”(2014년 1월호)이라는 ‘공간 공감’의 취지를 되새겨보기 바란다. 진행 김모아, 윤정훈 디자인 팽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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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다시 읽고 싶은 연재는?
다시 읽고 싶은 연재는?
오늘 8월, 『환경과조경』은 통권 400호를 맞이합니다. 새로운 시작에 앞서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문득 독자 여러분이 즐겁게 읽었던 연재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매달 1일을 설렘으로 기다리게 했던 연재, 유용한 정보가 많아 늘 메모장을 꺼내게 만들었던 연재, 나른한 주말 오후 휴식이 필요할 때면 생각났던 연재, 영화의 속편처럼 꼭 한 번 보고 싶은 연재,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지난 3월 15일부터 4월 5일까지, 독자 여러분이 가장 애정한 『환경과조경』의 연재가 무엇인지 묻는 “다시 읽고 싶은 연재는?” 설문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1983년부터 2020년까지 『환경과조경』에 실린 63개의 연재를 후보로 올리고, 최대 8개를 고를 수 있게 했습니다. 188명이 설문 조사에 귀한 시간을 내어주었습니다. 그 결과, 1위부터 20위를 차지한 연재를 가나다순으로 소개합니다. 연재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독자들이 남긴 코멘트 하나를 뽑아 함께 수록합니다.
1983년 명화로 보는 조경(명화로 보는 경관) 원동석
1988년 조경용 수목 김영두
1989년 조경분야에서의 마이크로 컴퓨터 응용 김성균
1990년 조경수의 보호관리 강전유
1990년 한국의 옛조경(한국의 고정원) 정재훈
1994년 전통조경구조물 박경자
1995년 조경설계 시공시 고려해야 할 재료별 특성 황용득
1996년 잃어버린 서울을 찾아서 손기찬, 정충식
1996년 조경사적 외국정원 강철기
1997년 공원따라 발길따라 장태현
1999년 세계의 공원순례 김홍규
2000년 우리나라 근대 조경 태동기의 숨은 이야기 오휘영
2001년 동시대 조경 이론과 설계의 지형 배정한
2001년 쉽게 익히는 조경설계프로그램 정태영
2001년 쉽게 풀어쓰는 조경 이야기 진양교
2001년 월별 조경수 관리 강전유
2001년 조경설계의 철학과 방법론 찾기 변찬우
2002년 가로환경 읽기 홍형순
2002년 세계도시문화산책 원제무
2004년 Designer’s Garden 윤상준
2004년 유럽정원산책 김인수·조경진
2004년 이규목 교수가 본 세계의 도시경관 이규목
2004년 정기호의 전통조경이야기 정기호
2005년 릴레이비평 조경비평 봄
2005년 스케치업으로 하는 3D 조경설계 김영표
2005년 피라네시를 이용한 2.5차원 이미지 제작 김충식
2005년 한국의 명원 이석래, 최종희
2006년 터무니 없는 조경 황기원
2008년 우리는 누구나 놀이터가 필요하다 김연금, 유다희
2009년 구조로 보는 조경이야기 유승종
2009년 스튜디오 101, 설계를 묻다 김아연·정욱주
2009년 우연한 풍경은 없다 김연금, 유다희
2009년 조경가 인터뷰 남기준
2010년 Competition Review 김영민
2010년 고정희의 식물이야기 고정희
2010년 이야기 따라 밟아본 삼국지 유적과 경관 이규목
2011년 Garden Story 박원순
2011년 소통+장소, 조경 김연금
2012년 Something in the Place 현경아
2014년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고정희
2014년 공간 공감 김아연, 김용택, 박승진, 이홍선, 정욱주
2014년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김영민
2014년 그들이 설계하는 법 박승진, 김현민, 김아연, 차태욱,
박윤진+김정윤, 오형석, 조리나, 김연금, 서예례, 안세헌,
진양교, 박준서, 이수학, 백종현, 전진현, 이재연, 최영준,
김호윤, 최재혁, 이호영+이해인
2014년 시네마 스케이프 서영애
2014년 유청오의 이 한 컷 유청오
2014년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최이규
2015년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 김세훈
2016년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심소미
2016년 조경의 경제학 민성훈
2017년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안동혁
2017년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최이규
2017년 명사의 정원 생활 성종상
2017년 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11가지 방식 진나래
2017년 이미지 스케이프 주신하
2017년 정원 탐독 오경아
2019년 공간의 탄생, 1968~2018 김충호
2019년 도면으로 말하기, 디테일로 짓기 나성진, 조용준, 김기천,이홍인, 김창한
2019년 당신의 사물들 박경탁, 김상윤, 윤일빈, 안연수
2019년 그리는, 조경 이명준
2020년 공간잇기 서준원
2020년 북 스케이프 황주영
2020년 비트로 상상하기, 픽셀로 그리기 나성진
2020년 풍경 감각 조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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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끝나지 않은 이야기] 그림은 거들 뿐
변방의 설계가
서울이 아닌 경기도 부천에 사무실이 있다. 공동 주택 조경보다 도시공원 및 녹지를 주로 설계한다. 신규 대형 공원 설계보다 중소형 공원을 리모델링하는 일이 많다. 녹지 정비에 관한 설계도 한다. 공원 설계공모에 참여하고 싶은데 참여 조건도 못 맞추고 기회도 별로 없다. 종종 건축 설계공모에 포함되는 조경 공간에 대한 의뢰가 들어온다. 조경에 대한 심사나 배점도 없으니 적당히 하려 한다. 정원 문화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원이 유행하면서 공공 정원 일이 많아졌다. 민간 정원은 가급적이면 클라이언트 본인의 취향대로 직접 가꾸기를 권한다. 정원 설계부터 시공까지 책임지는 디자인 빌드(design-build)를 추구한다. 설계만으론 먹고살기 힘들다.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 운영이나 전시 기획에도 이따금씩 관여한다.
그들이 설계해 준다, 우리가 설계하는 법
어떤 발주처 담당자가 핀터레스트에서 찾은 멋진 이미지를 들이민다. 순발력을 발휘해 이 그림 같은 설계를 실현할 수 없는 이유를 풀어 놓지만, 결국 되는 이유나 당위성을 만드는 것이 우리 몫이다. 어떤 자문위원 혹은 심의위원이 당연한 말을 시작으로 이상한 결론을 내준다. 정면 반박은 일을 복잡하게 만드니 당연한 말을 시작으로 최소한으로 수정하며 ‘부분 반영’이라는 결론을 낼 방안이 있는지 머리를 굴린다. 어떤 건축가가 조경 공간에 대한 계획을 그려온다. 공감하고 이해하기 어려워도 선부터 다듬어줘야 한다. 처음엔 식재 수종에 관한 전문성만 요구하지만 건물 밖에 해당하는 부대 토목, 설비, 조명 일체를 다 우리가 해결하길 바라는 눈치다. 외주 설계비가 머릿속에서 맴돌고 “그런 건 우리도 잘 몰라요” 해도 잘 안 믿는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아”라는 듯한 대화가 오간다.
그래도 대부분 일의 시작엔 설렘이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빨리 끝내고 싶다며 내려놓기 시작한다. 의욕적인 디자이너에서 무욕의 엔지니어로 전환하는 기분이다. 우리의 디자인이나 아이디어가 ‘까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네 글자로 압축하면 ‘실력 부족’이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스스로 자책하는 절대적 기준에서다.
그럼에도 좋은 발주처, 좋은 파트너, 좋은 설계비, 가슴 뛰는 대상지는 있다. 이러한 프로젝트를 마주할 때 떠오르는 몇 가지 생각을 나열하고자 한다. 정해진 법칙 같은 것은 없다. 그때그때 다르다. 정리하려니 뭔가 특별한 게 없는 것 같아 자신감이 하락하고 있다. 내가 가진 디자인 철학은 ‘쉽고 명쾌하게’. 일단 쉽게 가보기로 한다.
오래, 자주, 샅샅이 보기
어떤 대상을 마주하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단계는 현황
분석과 문제점 도출이다. 대상지뿐만 아니라 사회적 인식이
나 유행도 분석 요소가 된다. 의뢰인의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기 위함일 수도 있지만 설계가로서 마주한 상황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간의 정원박람회나 공공 정원 프로젝트에서 사용한 전략은 후자에 가깝다.
정원 만들기에 관한 고민은 예산에서 시작되고 예산 때문에
끝난다. 부족한 예산에 대처할 해결책을 현장에서 찾기도
한다. 나름대로 호평을 받은 서울숲 ‘엄마의 정원’(『환경과조경』
2017년 8월호 참조)은 서울숲에 방치된 자재들을 새롭게 활용한 정원이다. 2015 대한민국 한평정원 디자인전에서는 체재비와 경비로 사용하기에도 빠듯한 조성비가 업사이클링 가든이라는 콘셉트를 도출시켰다.
일련의 디자인빌드 경험을 통해 얻은 쓸모에 관한 관심은 설
계 화두로 이어졌다. 현장에서 존재감 없는 무언가가 새로운
공간에서 어떻게 가치를 드러내게 할지 고민한다. 물론 프로젝트의 경제성은 기술 심의나 계약 심사 단계에서 알아서
끌어올려지지만 설계자의 입장에서는 자재 변경, 물량 축소,
감액보다는 기존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장소 고유의 가치 발견이라는 덤까지 취할 수 있는 설계를 지향한다.
2018 경기정원문화박람회에 조성한 ‘길 위의 상상 그리고
작은 발견’ 역시 오래, 자주, 샅샅이 보고 얻은 아이디어의
총합이다. 우리가 흔히 지나다니는 골목길, 정원의 오브제,
대상지의 장점에 주목했다. 골목길에서 볼 수 있는 낡은 포장재와 버내큘러(vernacular) 디자인이 엿보이는, 투박한 시설이 즐비한 정원을 떠올렸다. 주변 지인들에게 각종 건설 현
장에서 나온 여분 자재를 받아 사용했고, 길을 다양한 재료로 구성해 구간마다 다른 느낌을 주었다. 정원 이름에서 표
현했듯 다양한 오브제를 통해 상상과 발견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곳곳에 숨긴 작은 금속 조형물은 당시 여덟 살이던 아들이 그린 낙서 같은 그림을 그대로 본떠 만든 것이다.
정원의 오브제가 꼭 거대하거나 값비싸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정감 가는 그림과 형상이 정원의 맛을 살
렸다. 대상지는 내가 살던 집에서 가까웠는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거의 모든 시간대의 대상지를 경험한 것이
식재 방향성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대상지는 바닥에 이
끼가 무성하며 햇볕이 언뜻언뜻 내리쬐는 반음지였다. 해가
넘어감에 따라 음지에서 양지로, 양지에서 음지로 바뀌는 모습이 변화무쌍했다. 기존의 느티나무들은 그대로 두고, 해의
움직임에 따라 정원에 드리우는 나무 그늘과 빛의 변화를
빠르게 느끼도록 유도했다.
쓸모에 대한 고민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하는 도시공원은 서울숲이다. 구성과
계획이 훌륭하고 설계 디테일은 아직도 실무에서 참고하고
있다. 민간 위탁 운영(서울숲컨서번시)을 통한 남다른 활성화 방식은 공간의 완성도에 방점을 찍는 요인이다. 하지만 조성된
지 약 16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울숲에도 훼손되거나
잘 활용되지 못하는 공간이 생겨났다. 이러한 공간을 기업
사회 공헌 사업의 일환으로 재활성화하는 공공 정원 프로젝트에 몇 년 전부터 참여했다.
‘설렘정원’(2019)의 대상지는 방문자 센터에서 진입할 때 바로
만나게 되는 공간이었다. 마사토 포장의 원형 마당은 푸르
른 녹음과 꽃을 찾아온 방문객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듯 했다. 서울숲에서는 야외 웨딩 촬영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
는데, 서울숲컨서번시와 함께 이 공간의 활성화를 고민하던
중 스몰웨딩이라는 트렌드에 착안해 웨딩가든을 콘셉트로
잡았다(임대 공간으로 오해할 수 있어 시민 공모를 통해 설렘정원이라는 이
름을 새로 붙였다). 빈 곳이라도 공간을 작동시키는 테마가 개입
하는 상상을 할 때 그곳이 장소가 되는 기대감이 생긴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장소가 되려면 테마에 따른 이벤트나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공간이 조성되는 중에도 서울숲컨서번시와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고민했고, 매년 리마인드 웨딩이나 기념 명판 설치 등의 이벤트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벤
트 참여를 위해 사람들이 보내 온 사연도 인상적이지만 정
원에서의 결혼식은 그들의 기억 속에 깊게 남을 것이라 믿는
다. 풍경적 요소에 더해 장면을 고민하는 것이 우리 작업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숲 속 쉼터인 ‘겨울정원’(2020~2021) 역시
다른 공간에 비해 이용률이 낮은 곳이었다. 왕성한 관목들로
둘러싸여 하절기엔 어두울 정도였고 동절기엔 마른 가지들이 무성했다. 관목을 이식하고 간벌을 통해 공간을 밝혔으며
서울숲컨서번시와의 워크숍을 통해 겨울에도 즐길 수 있는
풍경을 만들기로 했다. 이 정원에서 봄부터 가을은 겨울을
상상하게 하는 시간이다. 겨울에 보는 정원의 모습을 열 가지로 추리고 올해 두 가지를 더해 완성했다. 숲 속 쉼터라는
기본적 기능에 겨울 정원이라는 아이템이 더해져 좀 더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됐다.
제목 혹은 이름 짓기
대상지에서 파악한 여러 요소엔 장소를 구상하는 힌트가 들어 있다. 프로젝트의 화두일 수 있고, 나름대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일 수도 있으며 정제되지 않은 콘셉트나 희
망하는 장소성을 내포한 명칭일 수 있다. 머릿속을 떠다니
는 단어를 조합하거나 하나를 선택해 공간의 이름을 짓는다. 설계 초반부터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인데 고심 끝에 탄생한 제목 혹은 이름은 디자인의 일관성을 유지해주기
때문이다. 이름만으로 공간이 풍기는 이미지가 생겨 설계 의
도를 더 쉽게 전달할 수도 있다. 아이에게 태명을 지어주고
이후 정식 이름을 짓듯 이름엔 스토리나 정체성, 바람이 담긴다. 여담이지만 이런 괴상한(?) 집착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기 몇 달 전부터 성명학과 이름 짓기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그림은 거들 뿐
제목다음은 줄거리다. 대개 일의 초반에 제안서를 작업하는
데 딱딱하게 구성하기보다는 서사를 풀어내려 한다. 시놉시스는 설계 아이디어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기본 매체다. 아직
그려지지 않은 공간의 형태를 글로 설명한다. 그래픽이 아니라도 이 정원에서 일어날 ‘장면’을 설명하면, 작업 과정에서
즉흥적 아이디어가 더해져 더 풍부한 장면을 가진 정원을
만들 수 있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클라이언트나 협업자에게 제안할 땐 스케일이 반영된 계획도보다 사진과 글이 오히려 효과적일 때가 많다. 도면이나 그림만으로
첫 논의를 하면 중요 콘셉트나 맥락을 건너뛰고 이미지 자체에 대한 궁금증이나 의견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설계가라면 노란 트레이싱지와 한몸이 되어야 하는데 그 기름종이를 써본 지 오래됐다. 손에 땀과 기름이 많아서 그런
지 나랑 잘 안 맞는다. 매번 마스킹 테이프로 귀퉁이를 붙이기 귀찮기도 하다. 초안을 스케치할 때면 베이스 맵을 A3
사이즈로 여러 장 출력해 그 위에 사인펜과 볼펜으로 몇 번
그려본다(그다지 큰 스케일의 프로젝트가 없는 것도 이유다). 개인적으로 손 스케치가 뛰어나지 않고 오래 앉아 있는 성격도 아니라 시놉시스를 구상하는 시간이 더 많은 듯하다. 사무실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기보다 이동 중에 생각의 스위치를 켜놓는다. 뭔가 떠오를 때마다 메모장 애플리케이션에 수시로 적고 고친다. 그림이 편할 때도 있는데 그마저도 글로
저장한다. 이렇다 보니 부끄럽게도 이 지면에 첨부할 멋스러운 손 스케치가 없다. 이 글도 메모장 앱으로 쓰고 있다.
엔지니어링, ‘장그래’처럼
종종 실무와 관련한 강의를 요청받으면 늘 제목은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다. 창의적이고 멋진 디자인이 끝이 아니고 엔지니어적 소양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실시
설계보다는 기본계획에 더 흥미를 느끼고 그런 일만 열망하
던 초년 시절이 있었다. 우연히 읽게 된 『마징가Z 지하기지를
건설하라』(2005)는 공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의미 있고 중
요하는 걸 알게 했다. 디자인적 관점 못지않게 엔지니어링적
관점이 설계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현재
진행하는 모든 조경 프로젝트는 시공을 전제로 하기에 구조, 공법, 자재 선정, 내역 등을 면밀히 살핀다. 모든 분야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기에 도입하고자 하는 새로운 것에 대
해서는 다른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배운다. ‘버티컬 가드닝
Vertical Gardening’(돈의문박물관마을 수직정원 설계공모 당선작, 2019)
에서도 이러한 견지는 유지되었다. 일단 구상이나 계획안을
그려놓고 당선되면 실시설계를 고민하는 대신, 공모 준비 초기부터 수직정원 관련 업체, 구상하는 구조물 제작이 가능
한 시설물 업체를 만나 제출안을 마련했다. 새로운 디테일은
드라마 ‘미생’의 신입사원 장그래처럼 뭐가 뭔지 몰라도 일
단 배우며 감을 잡는다. 새로움에 대한 설렘과 실패의 두려
움이 공존하지만 협업하는 엔지니어들을 믿고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시설물 업체에 읍소하고 구슬리고 닦달하며 수직
정원 구조물의 도면과 견적을 뽑았던 기억이 있다.
한편 짧은 기간이나 일방적 시각 때문에 더 좋은 시공 아이디어를 담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실시설계가 끝나고 시설물 업체에 회전형 플랜터에 대한 샘플 제작을 종용했다. 철
물을 담당하는 업체에서 더 좋은 구조물의 회전 방식을 제
안해 왔다. 수동식 개별 회전 방식이 아닌 체인을 이용한 동
시 회전 방식이기에 더 편리하고 효율적이었다(시제품을 보고 탄
성을 내뱉었을 정도로 놀라웠다). 설계 변경을 하더라도 이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계약상 우리의 역할은 이미 끝난 후였다. 이 개선 사항은 반영되지 못했다. ‘그들이 감독하는 법’
이라는 게 있을 테니까.
설계자, ‘정마담’ 혹은 ‘마카오박’
요즘 진행하는 프로젝트 상황을 지켜보니 내가 하는 일이
조경설계보다 다른 의미의 설계에 가까운 듯하다. 한동안 잠
잠하다가 마치 짠 것처럼 한 순간에 여러 프로젝트가 중구
난방으로 들어온다. 스트레스는 건강의 적이니까 마음을 가다듬고 영화 ‘타짜’의 정마담이나 ‘도둑들’의 마카오박처럼 작전을 짠다. 여기에 이걸 의뢰하고, 저기에서 견적을 받고, 넌
이걸 맡고, 넌 저걸 맡고 끝나면 저기 붙어서 도와주고…….
시공 현장에서도 스케줄을 짠다. 일 단위뿐만 아니라 시간
단위로 치밀하게 짜려고 한다. 왜 전장의 사령관이 아닌 정
마담이나 마카오박에 비유했냐면, 영화처럼 계획은 다 틀어지니까. 그럼에도 계획은 짠다. 그래야 안심이 된다.
순발력과 우연성
실시설계 도면은 ‘최대한 자세하고 친절하게’를 표방하지만
직접 시공을 전제로 하는 도면에는 핵심만 표기한다. 반드시
정확하게 구현해야 할 요소나 예산과 직결되는 물량은 예외지만 그 외는 현장에서 설계하기 때문이다. 경험상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변덕이나 변수는 늘 있기에 현장에서 순발력
있게 창의성을 발휘해야 한다. 예상한대로 진행되는 편안함
보다 즉각적으로 변수에 대응하는 설계가 짜릿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공장에서 제작된 제품을 단순 배치하는게 아니라면 설계안대로 될 거란 100%의 확신이 없다. 언제나 조마조마하다. 자연물은 늘 우연성을 내포한다.현장에서 배치하니 예상한 느낌과 다른 경우도 있고 의외로 기대하지 않은
형태가 딱 들어맞을 때도 있다. 식물의 변화 역시 예상하기
어렵다. 생각보다 생육이 불량하기도 하고 지나치게 잘 번식
하는 경우도 생긴다(식물의 세계에 있어서는 아직도 공부가 한참 더 필요하다). 이러한 우연성이 일을 매력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좌절에 빠지게도 만든다. ‘도깨비와 요정들의 숲정원’(광릉숲길 어린이정원, 2021)에서 기존의 고사목 통나무와 거대한 사각 방부
목을 배치한 도면은 어디까지나 물량 산출을 위한 계획에 불과했다. 시공 작업자들이 하차 후 잠시 쉬는 동안 이리저리
좋은 각도를 봐가며 즉석에서 배치도를 다시 그렸다. 덕분에
태풍 피해로 부러진 대형 고사목을 하나의 조형물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 이리저리 놓다 가장 좋은 각도를 찾은 고사목은 하나의 생명체처럼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경설계가로 임하는 것
사실 몇 해 전 진지하게 조경설계를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설계 용역에서 발생하는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나름의 소명 의식을 잠식하는 상황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가 해결해주었지만) 설계 규모가 크건 작건, 작업에서 본인의 기여도가 크든 작든, 좋은 공간을 만드는 시작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조경가들이 설계할 때 갖는 마음일 것이다. 그림은 거들 뿐이라는 말
은 드로잉이 전부는 아니라는 의미다. 실제로 뭔가를 그리는
행위는 설계 과정에서 극히 짧게 느껴진다. 오히려 다른 과정의 총합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한다. 어떤 시간대에서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묵묵하게 나아가는 모든
조경가를 응원한다.
최윤석은 경희대학교에서 환경조경디자인을 전공하고 선진엔지니어링종합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혀 2008년 그람디자인(gramdesign)을 설립했다. 정원 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작업을 통해 창의적이고 감성적인 장소 만들기를 추구하는 집단 정원사친구들에서 2011년부터 활동해 오고 있다. 조경설계도 하고 정원 시공도 하며 어떠한 장소나 소재의 가치를 발견해 돋보이게 만드는 데 관심이 많다.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명쾌한 아이디어와 디자인을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