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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웃거리는 편집자] 마지막 수업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바닥을 살피는 습관이 생겼다. 정확히는 바닥에 있는 무언가를 확인하는 행동이다. 사람, 자동차, 쓰레기, 풀… 길 위엔 많은 것이 있다. 개중 대체로 작고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본다. 실은 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보지 않으려 하니 오히려 눈이 더욱 밝아진다. 일단 눈에 띄고 나면 그게 뭐가 됐든 ‘한때 살아 있던 것’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나는 길 위의 쓰레기를 보면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 되었다. 쓰레기는 떨어지기 전후의 이야기를 상상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떤 날은 날개, 어떤 날은 꼬리였다. 친구와 걷다 골목 한가운데 맨홀 위에 펼쳐진 날갯죽지와 깃털을 보았고, 4차선 간선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줄무늬를 이루는 등허리와 꼬리의 털을 보았다. 운이 안 좋다느니 조심성이 없다느니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 길 위에 놓인 것들을 생각하다 전설처럼 이름만 전해져 오는 존재들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이빨을 드러내는 것들, 날카로운 발톱과 뿔 같은 게 달린 것들. 혹은 작고 징그러운 것들, 쉽게 부서지는 것들.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도시의 규칙과 질서, 안전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은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거였다. 그래서 ‘인간이 아닌 생물체가 살만한 곳’을 만들라는 ‘생물체 설계공모’(26~47쪽)는 좀 충격이었다. 일차적으로 사람을 배제하고 어떤 공간을 만들라는 요구 자체가 낯설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은 크게 새삼스러워졌다. “인간이 아닌 생물체를 의뢰인으로 선택하고 그의 요구 사항을 규정”하고 “의뢰인의 삶을 개선하는 장소, 구조, 사물, 체계 또는 과정을 설계”하라는 공모의 전제는 ‘생태 공간’, ‘서식지 조성’ 같은, 그간 수없이 배우고 들어온 말을 다르게 풀어쓴 것뿐이었다. 한 유튜브 영상을 보고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20편의 짧은 영상으로 구성된 ‘마지막 수업’ 시리즈. 영상 속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별로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데 열심이었다. 영장류학자 이윤정은 긴팔원숭이가 특히 좋아하는 나무 열매를 알려주었고, 극지 연구자 이원영은 젠투펭귄이 친구들과 소통할 때 내는 ‘꽉꽉’ 소리를 따라했다. 그들은 영상에 직접 출연하지 못하는 동물을 대변하는 듯했다. 해충으로 여겨지는 곤충이 왜 해충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인도네시아 숲 인근 전깃줄에 왜 원숭이들이 죽은 채 매달려 있는지, 바이러스와 잘 공존하고 있던 박쥐가 왜 전염병의 원흉으로 지목받게 됐는지 따위의 이야기였다. 생태학자 김산하는 야생동물의 정의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물을 이야기할 때 너무 당연한 말처럼 생각하면서도 잊고 있는 게 뭐냐면, 동물은 서식지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냥 있어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동물=동물+서식지’의 개념이라는 거죠. … 서식지와 동물이 아예 하나의 개념으로 묶여 어떤 관계망을 갖지 않고서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동물, 그것이 야생동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흔히 피라미드 구조의 먹이사슬 정도로 생각하는 생태계에는 포식, 피식, 공생, 편리공생, 별 상관없는 사이, 기생과 같은 온갖 관계가 무수히 중첩되어 있어서, 어떤 동물의 멸종은 하나의 소우주가 사라지는 것, 모나리자 같은 명화가 불타없어지는 것과 같다고 호소했다. 이윽고 덧붙인, 현존하는 포유류 중 4%만이 야생동물이라는 숫자가 무척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여기저기서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더 아름답고 친환경적인 도시, ‘사람 중심’의 스마트 도시, 자율 주행의 상용화가 코앞이라는 소식이다. 잘 닦인 길을 보며 길 위의 모나리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한때 머물렀을 바위틈, 땅속의 굴, 물풀이 무성한 늪, 우거진 덤불을 생각했다. 문득 누군가 바라고 기대하는 모든 것들이 그저 시시하게만 느껴졌다. ‘마지막 수업’은 2020년 생명다양성재단이 주최한 생태 교육 프로젝트다. 김산하, 이윤정, 이원영, 장이권, 최재천이 강사로 참여해 짧지만 굵직한 이야기를 전달한다. 강의 영상은 생명다양성재단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다.www.youtube.com/c/TheBiodiversityFoundation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귀여워할 때만 나를 사용해도 좋아
    닫히지 않던 마스크 상자가 헐거워졌다. 다시 상자를 채워야겠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지난해의 혼란이 떠올랐다. 금요일마다 약국 앞에 줄을 서고, 방 안에 틀어박혀 달고나 커피를 휘젓고, 벚꽃놀이는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속 풍경으로 대신했다. 일상이 멈추자 지구가 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고요를 찾은 브라질 해변에 바다거북이 찾아오고 인도의 한 공장이 기계를 가동하지 않으니 호수에 홍학 떼가 날아들었다는, 그런 소식들 말이다. 그래서 적어도 인간들이 거리를 두고 지내는 동안 동식물들은 행복할 줄 알았다. 어떻게든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인간들이 또 무언가를 죽이고 있는 줄은 정말로 몰랐다. ‘생물체 설계공모’의 ‘달빛 파티’(28쪽)가 다룬 맹그로브투구게 이야기다. 맹그로브투구게(이하 투구게)는 아시아 연안에 서식한다. 먹을 순 있지만 살이 적어 인기가 없고, 4억5천만 년을 견디고 살아남은 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이렇게 강인한 생물체의 멸종을 걱정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혈액이 세균에 매우 민감한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어 백신의 오염 여부를 확인하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매년 수많은 제약 회사가 수십만 마리의 투구게를 채혈하고 바다로 돌려보낸다. 일정량의 피만 얻고 본래 있던 곳으로 보내준다고 하니 얼핏 평화로워 보이지만, 바다로 돌아온 투구게 중 상당수는 더 살아가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김정화 박사가 투구게는 “갑각류가 아닌 협각류”고 “삼엽충을 닮은 생물체”라고 설명했지만, 내 눈은 이미 푸르스름한 조명과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이 만든 신비로운 패널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투구게라니, 꼭 투구 모양의 모자를 뒤집어 쓴 꽃게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나. 신이 나 인터넷 검색창에 일곱 글자를 적어 넣었다가 펼쳐진 이미지에 소름이 돋은 팔뚝을 열심히 문질러야 했다. 투구게는 꼭 외계 생명체처럼 생겼다. 가오리처럼 납작한 몸체를 가졌는데, 게보다 거미나 전갈에 가까운 생물체임을 증명하듯이 온몸이 딱딱한 석회질 갑각으로 덮여 있다. 긴 꼬리가 달려 있고, 배에는 거미의 다리와 꼭 닮은 다리 여섯 쌍이 나 있다. 징그럽게 생겼다는 감상은 곧 섬뜩함으로 바뀌었다. 제약 회사 연구실의 벽에 투구게를 묶어 놓고 공장처럼 피를 뽑아내고 있는 사진 때문이었다. 투구게를 향했던 시선이 인간의 행위로 옮겨갔고 혐오감이 일었다. 투구게가 보편적으로 귀여워 보이는 외형이었다면 내 생각이 인간의 행동이 혐오스럽다로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을까. 아마 투구게를 불쌍히 여기는 데 더 오랜 시간을 쏟지 않았을까. 기리보이의 노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귀여워할 때만 나를 사용해도 좋아”라며 애정을 갈구한다. 노래의 제목은 ‘호구’, 필요할 때 또 귀여워할 때만 날 찾으라는 게 사실 자신을 아무렇게나 내다 버리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할 시절 인간은 동물과 동등한 생물체로 살았다. 하지만 야생동물을 가축으로 삼고 반려동물로 들이는 과정에서, 동물을 보호하고 돌봐야 하는 대상으로 이미지화해왔다. 이제 사자와 호랑이, 곰 같은 맹수들에게도 귀엽다는 표현을 쏟아낸다. 여러 매체와 동물원이 그들을 귀여워하도록 만들었다. 귀여움은 어떤 대상에게 쉽게 마음을 붙이게 하지만, 대체로 내게 해를 끼치지 못하는 무해한 대상에게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귀여워하는 어떤 생물의 삶에는 보통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어떤 일과를 보내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처럼, 내가 투구게를 파란 피가 흐르는 묘하고 가여운 동물로 바라 보려 했던 것처럼. 또 다른 당선작 ‘파묻힌 땅’(32쪽)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 작품은 호랑이도롱뇽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전용 터널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그존재를 느끼게 한다. “도롱뇽의 울음소리, 움직임, 굴을 파는 행동은 소리, 바람, 바닥 패턴, 불빛 등으로 재현되고, 인간은 온몸을 동원해 이를 감지한다.” 생물체 공모가 요구한 것은 인간이 아닌 생물체가 살 수 있는 장소, 구조, 사물, 시스템, 프로세스였다. 그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것은 ‘파묻힌 땅’이 제시한 것처럼 생물체의 존재를 어떤 이미지도 씌우지 않고 인식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닐까. 물리적 공간은 낡기 마련이지만, 어딘가에 뿌리를 내린 생각과 인식은 점점 자라날 테니까.
  • [PRODUCT] 주거 단지에 소통과 여유를 선사하는 ‘복층형 티하우스’ 안락한 휴게 공간과 전망대를 갖춘 티하우스
    주거 단지의 외부 공간은 쾌적한 출퇴근길과 귀갓길을 넘어 휴식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공원이자, 이웃 간 소통이 이루어지는 마을 광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세인환경디자인의 복층형 티하우스는 단지 외부 공간에 요구되는 다양한 역할을 충족하도록 돕는다. 단순한 그늘 쉼터에서 벗어나 이용객의 다양한 활동을 수용하고, 계절에 관계없이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다. 복층 구조의 티하우스는 안락한 모임 공간과 전망대를 갖추고 있어 작은 카페를 연상케 한다. 1층에는 폴딩 도어를 설치해 개폐가 유연한 환경을 조성했으며, 넓은 6인용 테이블이 있어 노트북 사용이나 소규모 모임에 적합하다. 야외 테이블이 있는 티하우스 왼편에는 온도를 낮추는 미스트가 설치되어 더운 여름철 바깥 활동을 장려한다. 2층에서는 탁 트인 전망을 즐기며 소파에 앉아 한층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가족 혹은 이웃과 삼삼오오 모여 소소한 티 타임을 갖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통의 플랫폼이 되길 바랐다. 내구성을 고려해 철골 프레임을 구조재로 사용했으며,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꾀하고자 외벽은 하드 우드, 고밀도 목재 패널, 석재로 마감했다. 향후 여러 유형의 조경 공간에 부합하도록 다양한 모델을 추가로 개발할 예정이다. TEL. 02-877-8811 WEB. www.seindesign.co.kr
  • [에디토리얼] 400호 시대를 맞으며
    1982년 7월, 국내 최초의 조경 전문지 계간 『조경』이 창간됐습니다. 1985년 6월에는 『환경 그리고 조경』으로(통권 9호), 10호부터는 『환경 & 조경』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습니다. 1987년 1월에는 한 해에 네 번 나오는 계간지에서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격월간으로 전환됐고(통권 15호), 월간지로 바뀐 1992년 1월호(통권 45호)부터 쓰기 시작한 제호 『환경과조경』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습니다. 2013년 10월, 박명권 발행인 체제로 옷을 갈아입은 『환경과조경』은 2014년 1월호(통권 309호)를 기점으로 laK 브랜드를 새로 내걸며 대대적인 리뉴얼을 했습니다. 개편 첫 호 에디토리얼의 몇 구절이 생각납니다. “『환경과조경』은 ‘조경 문화 발전소’를 꿈꾼다. ‘한국 조경의 문화적 성숙을 이끄는 공론장’, ‘조경 담론과 비평을 생산하고 나누는 사회적 소통장’, ‘동시대 세계 조경의 보편성과 지역성을 수용하고 발굴하는 전진기지’ 이 세 가지 비전을 지향한다.” 한 차례의 결호도 없이 간행되어온 『환경과조경』은 한국 현대 조경의 살아있는 아카이브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조경의 성장사를 기록하고 저장해왔으며 동시대 조경의 담론과 쟁점을 발굴하고 그 경계를 확장해왔습니다. 통권 400호가 더 중요한가, 창간 40주년이 더 의미 있는가. 2021년 8월호는 400호, 2022년 7월호는 40주년 기념호입니다. 작년 늦가을 어느 오후의 편집회의, 다음 해 지면의 큰 흐름과 줄기를 구상하다가 예정에 없던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일이 커지고 말았습니다. 느슨하게 시작된 편집 구상이었는데, 400호 기념 일회성 콘텐츠를 기획하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2021년에는 『환경과조경』의 발자취를 다각도로 되돌아보며 한국 조경의 현대사를 촘촘히 되짚는 지면을 ‘매달’ 배치한다는 대형 기획으로 확장됐습니다. 연중 기획의 하나로 이번 호부터 7월호(399호)까지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가 시작됩니다. 여덟 명의 필자가 매달 50권씩 과월호를 리뷰하는 기획입니다. 창간호부터 통권 50호까지 시간 여행을 떠나는 첫 주자는 무려 20세기부터(1999년 1월호부터) 『환경과조경』을 만들어온 남기준 편집장입니다. 다음 달에는 최장수(2014년 1월호~현재) 편집위원인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로사이)이 51호부터 100호까지 이어 읽기를 맡습니다. 여러 편집위원과 편집자가 매달 50권씩 릴레이 리뷰를 이어갈 것입니다. 4월호에 다룰 편집 디자인 변천사는 독자 여러분의 아련한 추억을 소환하게 될 것입니다. 5월호에는 전직 편집자들이 참여합니다. 우리 기억 속에 희미하게 묻힌 특집 기사와 작품을 그들의 기억을 통해 다시 길어 올리는 지면을 꾸립니다. 7월호에는 『환경과조경』의 옛 얼굴, 399장의 표지와 재회하는 기획을 마련합니다. 잡지 한 권으로 40년 가까운 긴 시간을 가로지르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가장 궁금한 건 통권 400호인 8월호의 내용과 형식이겠죠? 독자 여러분의 테이블에 잡지가 놓이기 전까지는 일급 비밀이랍니다. 독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방안도 다듬고 있습니다. ‘다시 읽고 싶은 연재 원고는?’이라는 설문에 곧 독자 여러분을 초대할 계획입니다. 독자들이 뽑은 10대 연재물의 옛 필자를 초청하는 지면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편집부와 편집위원회는 조경설계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국 현대 조경 대표작’을 묻는 설문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이 기획은 2022년 세계조경가협회IFLA 학술대회 광주 개최 및 한국 조경 50주년을 맞아 출간될 『한국 조경 50+50』(가제)과도 연계됩니다. 400호 시대를 맞이하는 2021년, 『환경과조경』은 한국 조경의 지난 50년을 기록하고 다음 50년을 설계하는 최전선에 서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기다립니다. 2021년의 문을 여는 이번 호는 ‘제3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인 최영준 특집입니다. 중국과 미국, 한국을 넘나들며 다국적 조경설계사무소 랩디에이치(Lab D+H)를 이끌고 있는 최영준, 그의조경관을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어휘는 오피스 이름의 H, 곧 희망(hope)입니다. 특집 지면에 담은 그의 에세이, 열두 가지 설계 키워드, 인터뷰에서 우리는 “디자인을 통해 희망과 사회적 책무를 구현”하기 위해 “이웃을 향한, 이웃을 위한 조경”을 실천해온 그의 젊은 조경 정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와 협업해온 건축가 이치훈(SoA)이 말하듯(본문 63쪽), “최영준의 젊음은 조경…이 처한 사회적 조건의 불합리함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정확하게 대응”합니다. “불합리함에 불평하기는커녕 조경가가 다루어야 하는 공간의 구조에 관한 다채로운 제안으로 대응”합니다. “변죽을 울리는 일 없이 늘 핵심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런 태도를 기반으로 한 그의 “지속적 작업은 한국 사회에서 조경가의 유의미한 역할 모델을 만들어가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번 호 지면뿐 아니라 그의 3년 전 연재 원고 “그들이 설계하는 법”(2018년 1월호~3월호)도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새 꼭지 ‘나의 미개봉작 상영기’를 엽니다. 3개월씩 이어갈 꼭지의 첫 필자는 이남진(바이런소장)입니다. 윤정훈 기자의 지면은 ‘편집자의 서재’에서 ‘기웃거리는 편집자’로, 본문 마지막 쪽 김모아 기자의 지면은 ‘CODA’에서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로 새 제목을 답니다. 물론 이름만 바뀐 건 아니겠죠?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 [풍경 감각] 햇빛을 주워가도 될까요?
    모교의 새 건물을 보고 떠오른 생각은 ‘햇빛 안 쓸 거면 나한테 주지’였다. 해가 들창을 하나도 내지 않고 벽돌로 외벽 전체를 마감했기 때문이다. 솔방울 날개처럼 어슷하게 배치된 벽돌 한 장 한 장에 떨어지는 작은 그림자들이 아름다웠지만, 내 방 창으로 드는 조각 빛을 조금이라도 더 쬐여주려 아침저녁으로 화분을 옮길 때마다 할 수만 있다면 건물에 닿는 햇빛을 주워 오고 싶었다. … (중략) *환경과조경393호(2021년 1월호)수록본 일부
  • [『환경과조경』 400호 돌아보기] 4.12m 이어달리기
    올해 8월, 통권 400호가 출간된다. 책상 바로 앞에 있는 창간호부터 2020년 12월호까지 총 392권의 잡지를 줄자로 재보았다. 4.12m였다. 페이지로는 7만 장이 훌쩍 넘을 것이다. 무게도 재볼까 싶었지만, 김모아 기자가 그러다가 한 권씩 밖에 없는 보관본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냐며 고개를 저었다. 김기자가 퇴근한 후 재볼까, 아주 잠깐 고민했다. 다행히 사무실에 줄자는 있는데 저울은 없었다(나보다 많이 무겁겠지 따위의 싱거운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400호 돌아보기’란 숙제를 끌어안고 시작된 고민은 쉽게 해결되었다. 일단 나눴다. 그래서 8과 50이란 숫자를 얻었고, 나누기를 먼저 주장한 탓에 첫 스타트를 끊게 되었다. 1호부터 50호까지가 내 몫이다. 1998년에 입사한 탓도 있다. 잡지사에 제일 오래 다녔으니, 가장 오래된 파트를 맡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있었다. 나는 역으로 편집부 막내인 윤정훈 기자를 적극 추천했지만, 편집주간이 나를 지목하자 윤기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던 것 같다(뭐, 기분 탓이었겠지만 말이다). 1990년대나 2000년대였다면 400호에 대한 감흥이 조금은 달랐을 것이다. 영화 잡지만 해도 『씨네21』, 『키노』, 『스크린』, 『프리미어』, 『필름2.0』, 『무비위크』 등등 다종했고, 『씨네21』은 한 때 주간 판매 부수 7만부를 기록했다. 한 달이면 20만부를 훌쩍 넘는 부수다. 문학 잡지나 패션 잡지는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은 독립 잡지들이 속속 생겨나서 잡지 생태계의 다양성은 커졌지만, 휴간과 폐간의 고비를 넘기며 장수하는 종이 잡지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여기까지 쓰고 나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살짝 힘이 들어간다). 1998년 12월에 입사해 1999년 1월호인 129호부터 마감에 참여했고, 중간에 3년 동안 나무도시 출판사를 운영한 기간을 빼면 19년 동안 잡지사에서 일했다. 대략 230여 권의 잡지 제작에 직간접으로 손을 보탰다. 내 몫이 된 통권 1호부터 50호까지와는 무관하지만, 400호와 관련된 일련의 기획을 준비하며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201호에 실었던 ‘열 개의 공간, 다섯 가지 시선’이란 특집이다. 조경설계 전문가 200인을 대상으로 ‘한국 조경 대표작’ 설문조사를 진행한 후 그 결과를 토대로 다섯 편의 리뷰 원고를 꾸렸다. 어떤 일은, 어떤 시기에만 할 수 있거나 어떤 시기이니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4월에서 5월로 넘어가는 순간과 12월에서 1월로 넘어가는 시기는, 아무래도 다르다. 정리하고 돌이켜보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1월이 제격이다. 129호나 400호나 그저 잡지 한 권일 뿐이지만 400호니까 ‘할 수 있는’ 기획이 있다(‘할 수 있는’ 기획을 꼭 해야 하는 건 아닌데, ‘할 수 있는’을 ‘해야만 하는’으로 느끼는 건 역시 기분 탓일 게다). 월간지라면 통권 50호까지 펴내는데 만 4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환경과조경』통권 1호부터 50호까지는 10년이 걸렸다. 창간호는 1982년 7월, 50호는 1992년 6월에 발행되었으니 정확하게 만 10년이다. 계간지로 시작해 격월간(통권 15호)을 거쳐 월간지(통권 45호)로 자리 잡아서다. 제호도 『조경』에서 『환경 그리고 조경』(통권 9호), 『환경 & 조경』(통권 10호)을 거쳐 지금의 『환경과조경』(통권 45호)으로 바뀌어 왔다. 종로의 공평동 한미빌딩에서 시작해 뚝섬 시대를 지나, 내가 입사했던 역삼동 사무실에서 분당의 오피스텔로, 첫 사옥이었던 파주출판단지에서 지금의 방배동 사무실까지, 편집부의 책상도 일정 시기마다 옮겨 다녔다. 2007년도에 『조경세계』가 창간될 때까지만 해도 국내 유일의 조경 잡지였지만, 지금은 정원 잡지도 많이 생겼고 라펜트, 한국조경신문 등 조경 매체 상황도 꽤 달라졌다. 통권 306호인 2013년 10월호부터는 박명권 발행인 체제로 바뀌어 영문 제호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변화가 시도되었다. 그럼에도 1호부터 392호까지 펴낸 38년 동안 바뀌지 않은 점이 있다면, 직사각형 국배판을 유지한 판형과 제호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조경’이란 두 글자다(TF팀을 구성하여, ‘조경’이란 두 글자를 빼고 제호를 ‘스케이프’, ‘랜드스케이프 플러스’, ‘Landscape KOREA’, ‘L and Scape’ 등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를 100일 넘게 추진한 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 (중략) *환경과조경393호(2021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조경가 최영준
    이웃을 향한,이웃을 위한 조경_최영준 열두 가지 해시태그_최영준 낙관주의 경관_남기준 허들을 뛰어 넘는 젊음_이치훈 상하이 믹시몰 설계의 낮과 밤_타이하오 “고정되는 순간 살아있다는 감각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특집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첫 문장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를 최영준의 말에서 찾았다. 제3회 젊은 조경가로 선정된 그의 작업은 특정 단어나 스타일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는 미술관 중정에 선 파빌리온부터 상업 광장, 기업 휴게 공간, 한강변을 따라 흐르는 긴 보행로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스펙트럼의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설계 철학이 무엇이냐 물으면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답하고 싶어 한다. 열두 가지 해시태그는 종잡을 수 없는 그의 설계 태도를 엿볼 수 있는 키워드다. 독특한 성정으로 얻은 별명, 일종의 다짐, 우연히 발견하게 된 조경의 특성 등에 얽힌 경쾌한 에피소드를 통해 그의 기호와 설계 경향을 살필 수 있다. 남기준의 인터뷰는 조경가로 성장해가는 그의 발자취를 좇는다. 함께 걸어가다 보면 설계사무소의 새로운 운영 방식을 고민하는 혁신적인 리더의 면모를 목격할 수 있다. 특집을 여닫는 에세이는 틀에 갇히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가 유일하게 지키려 하는 원칙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진부한 표현이지만 또 그보다 순수한 말이 없는 것 같다는 그의 이야기가, 조경가를 꿈꾸는 이들의 마음 한구석을 따스하게 밝히기를 기대한다. 진행 남기준, 김모아, 윤정훈 디자인 팽선민 자료제공 최영준
  • 이웃을 향한, 이웃을 위한 조경 [email protected]
    설계 철학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펜을 들었는데, 솔직한 마음으로는 “철학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쓰고 싶다. 어떠한 특성으로 규정되지 않고, 스스로도 규정할 수 없는 새로움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선언적 목표를 의도적으로 피하며 아직은 열린 다양성을 추구하려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자 젊은 조경가로서의 오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헤드라인을 적어야 한다면, “조경은 작가도 설계도 이론도 아닌 작품으로 말하는 것.” 조경은 단독 작업이 될 수 없다. 팀원과 협력해 빛나야 하는 작업이고, 설계만이 아닌 여러 전문가와 발주처 그리고 책임감 있는 시공이 있어야 완성도 높은 장소가 지어진다. 실천력 없는 조경 이론은 감흥과 영향력을 줄 수 없음이 드러난 지 이미 오래다. 미디어가 활성화되고 장소의 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지속적으로 증대하면서, 하나의 완성도 있는 조경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주장할 수 있으며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울림이 되는 “작업이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본다. 질문은 이렇게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작품으로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2018년 초, 3개월간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재를 마무리한 말이 기억난다. “다음에 이렇게 (내 작업을) 돌아볼 기회가 있을 때는 (설계가 이렇다 저렇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변의 이웃들을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든 이야기를 담을 수 있기를 바라보며 연재를 마친다”(『환경과조경』 2018년 3월호, p.103 참조). 내가 조경 작품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웃들을 향한, 이웃들을 위한 이야기이고 싶다. … (중략) *환경과조경393호(2021년 1월호)수록본 일부 최영준은 서울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을 졸업하고 오피스박김, PWP, SWA 그룹 로스앤젤레스 오피스 등에서 실무를 경험했다. 2014년 디자인을 통한 희망적 가치와 사회적 책무 구현을 목표로 랩디에이치(Lab D+H) 조경설계사무소를 공동 설립했으며, 2018년 서울 오피스를 세워 국내외 다양한 조경 설계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상하이 믹시몰과 공원, 삼성 반도체 실리콘밸리 본사 캠퍼스, 광저우 반케 클라우드 시티 등이 있다. 2019 한강변 보행네트워크 조성 설계공모에 당선되었고, 용칭 지구로 2020 미국조경가협회상(ASLA Awards) 도시설계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 최영준
  • 열두 가지 해시태그
    열두 가지의 키워드를 통해 조경가 최영준의 작품을 새롭게 돌아본다. 각 해시태그에는 그의 설계 경향, 조경에 대한 믿음과 기호가 담겨 있다. #맥시멀리스트 #서자도내자식 #강박적쾌감 #레퍼런스매칭게임 #홀로서기 #센터본능 #팀플레이네버루즈 #함께걷는파트너십 #파빌리온심기 #편식은금물 #짜증유발자 #완공카타르시스 #맥시멀리스트 설계할 때 직관적인 답이 초반에 떠오르기도 하지만,그것을 완전히 신뢰하진 않는다. 하나의생각에 갇혀 있으면 발전이 어렵다. 그야말로 갇히게 된다. 적어도 세 가지의 다른 생각이필요하고 때론 무리해서라도 더 많은 대안을 만든다. 학생 시절부터 불렸던 맥시멀리스트라는별명은 우회 경로를 반복적으로 탐색하는 내 설계 전략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생각지 못한좋은 대안이 나오기도 하고, 각 대안을 평가하고 발전시키면서 프로젝트의 내러티브와 상상의폭이 확장된다. 설계안을 발표할 때 모든 대안이 드러나지 않아도 하나하나의 시도에서 펼쳐진이야기가 최종안에 담겨 풍부한 결과로 전달되는 것을 경험했다. 하나의 아이디어는 도면이나 모형에 담겨 대상지에 놓이기 전까지 무형의 상상에 그친다. 아이디어는 아주 간단한 형식으로라도 표현, 평가, 수정되는 경로를 거쳐야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은 알 수가 없으며 여러 갈래의 길을 걸어가 본 사람만이 무엇이 가장 좋은지 안다. 가장 성공적인 조경 작업의 열쇠는 넓게 확장된 가능성의 그림을 그려보고 이를 가장 적절한 강도의 제안으로 좁히는 데 있다. 발주처의 요청으로 여러 대안을 모색하기도 하지만, 스펙트럼을 확장하는 작업을 자청하는 편이다. 초기 계획뿐만 아니라 상세 디자인에도 적용하는 원칙이다. 이러한 시도들은 버려지지않는다. 다른 프로젝트에서 비슷한 조건이 주어지면 그대로 활용할 수 있고, 팀의 ‘어휘’가 된다. 경험적으로 축적된 교훈과 어휘는 다음 논의에서 더욱 성숙한 방향으로 빠르게 진화한다. 아이디어는 죽지 않는다. 잠시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일 뿐, 언제든 빛을 볼 수 있다. 대안은 서로 다를수록 좋다. 형태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다를수록 좋다. 팀원들이 저마다 다른 안을 발전시킬 때 다름이 만드는 풍부함을 강력하게 경험할 수 있다. 오늘도 각자 다른 안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비평과 질타 섞인 피드백을 교환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안을 다듬어 가장 빛나는 안을 1번 타자에, 그 녀석과 가장 다른 대안을 2번에 세운다. 그리고 그들에게 외친다. 굿럭! 프로젝트가 끝나고 나면 결정된 안이 결국 좋은 선택이었음을 느낀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도 아쉬움이 남는 디자인이 있다. 선택받지 못해 빛을 발하지 못한 아이디어들,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 서자와도 같은 제안이 몇 가지 있다.픽셀 콘셉트로 조성된 ‘광저우 반케 클라우드 시티 2단계Vanke Cloud City Phase 2 Mi Cool Display Area’(『환경과조경』 2016년 7월호, pp.44~55 참조) 중정에 디자인을 강조하는 요소이자 이용객의 상호 작용을 돕는 다목적 시설물을 제안했다. 해가 잘 들지 않아 식물이 자라기 힘든 대상지에 수목의 그늘과 공간감을 대신하는 수직적 요소다. 소방도로를 피하면서도 각 중정의 공간감을 강조하며 프로젝트의 정체성을 살리는 제안이었다. 발주처의 긍정적인지지를 받았지만 공사비가 삭감되어 실현하지 못하고 소극적 제안으로 변경되었다. #서자도내자식 ‘치바오 믹시파크(Qibao MixC Park)’는 압도적인 크기의 대형 오피스 건물을 녹지 체계 안에 녹여내는 프로젝트였다. 유난히 날 선 건물 입면의 루버를 조경과 조화를 이루게 하면서도 남북에 위치한 녹지와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였다. 루버의 평행선이 만드는 선형의 질서와 유선형의 녹지를 혼합하는 과정에서 도출된 대안이 있었는데, 최종안보다 온화하면서도 과감하게 대지를 감싸는 제안이자 상이한 두 가지 형태를 잘 조화시킨 안으로 기억한다. 최근 제안서를 냈지만 건축적 제안이 중심이 되어 기회를 놓친 ‘상하이 타임스퀘어(Shanghai Times Square)’가 완공된 것을 보았다. 치바오 믹시파크에서 실현하지 못했던 이중적 형태 전략이 건물의 외피부터 인테리어, 조경에까지 적용되어 있었다. 아쉬웠지만 미움받던 서자가 입신양명한 것처럼 뿌듯했다. … (중략) *환경과조경393호(2021년 1월호)수록본 일부
    • 최영준
  • 낙관주의 경관
    문화적 지평을 확장하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지원서를 천천히 다시 읽어봤습니다. 청소년기에 조경 분야를 접했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수능 성적에 맞춰 학과를 정하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청소년기라고 했지만, 조경을 알게 된 시점은 수능을 본 후예요. 본래는 건축학과에 가고 싶었어요.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프랭크 게리가 만든 건물을 봤죠. ‘LA 월트디즈니 콘서트홀’로 기억합니다. 이런 건물이 있다니 하며 놀랐어요. 건축의 멋에 취한 거죠. 여담이지만 미국에서 일할 시절 그 건물 건너편에서 2년 정도 살기도 했습니다.” -그럼 조경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간혹 고등학교 선생님이 추천해주는 경우가 있다고 하던데요. “친구의 아버님이 임승빈 명예교수님(서울대학교)과 지인이었어요. 그때 조경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는데 건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꼈어요.” -오래전부터 공간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던 거군요. “네. 어려서부터 미술과 발명, 창작이 접목되는 분야를 좋아했어요. 17살 무렵에는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분명한 목표도 설정했고요.” -그래서인지 학부생 시절부터 다양한 공모전에 참여했어요. “군대에서 제대한 후 복학하기 전에 처음으로 학생 공모전에 도전했어요. 공모전 참여가 당선 여부와 관계없이 조경가로서 역량을 배양할 수 있는 유용한 경험 도구라는 걸 깨달았죠. 선배들의 도움으로 조경설계사무소 소속으로 공모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세종문화회관 주차장 공원화 설계공모’, ‘동대문운동장 공원화사업 국제 설계공모’, ‘행정중심복합도시 중앙녹지공간 국제설계공모’, ‘마곡 워터프런트 설계공모’ 등에 참여했죠. 프로젝트 성격에 따른 특성도 배우고, 건축과 토목 등 다른 분야 전문가와 교류하는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제2회 젊은 조경가 수상자인 박경탁 소장(동심원조경)이 ‘제1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 대상 수상자였는데, 최영준 소장은 ‘제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하셨네요. “제 나름대로 의미가 커요. 환경조경대전은 하나의 관문이었어요. 설계를 열심히 하고는 있는데 장래를 걸 법한 재능이 있는지 판단하고 싶었어요. 그때가 2007년인데 의학전문대학원, 약학전문대학원이 생겨나던 때였거든요. 마침 제가 수학을 좋아하고 잘해서 옆에서 바람을 넣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학원 가서 조금 공부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식의 얘기였죠. 솔직히 순간 흔들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만약 이 공모에서 상을 받으면 평생 조경을 해야지, 밑거름을 다질 겸 유학도 가야지 하고 다짐했죠.” -객관적 평가를 받아보려던 시기였네요. 각오가 대단했으니 굉장히 열심히 했겠어요. 어떤 작품이었나요? “졸업반 여름 내내 학교에서 살았어요. 서울에 막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버스전용차로를 이용해서 녹지 시스템을 구상했는데, 교통 인프라와 오픈스페이스를 결합한 창의적 시도를 했다는 평을 받았죠. 이후로도 모의고사를 본다는 마음으로 6개월에 한 번씩은 공모에 도전해보려고 했어요.” -유학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설계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유학을 가기도 했죠? “저 역시 그래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최영준 소장 세대의 특징이 있는 것 같아요. 본격적 2세대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요. “21세기의 첫 학번인데, 당시 활발히 일어난 도시 개발과 함께 진행된 수많은 프로젝트를 직접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경험한 세대죠. 아날로그 작업에서 디지털 작업으로 전환이 이루어지던 시기이기도 하고요. 전통적 조경과 차별되는, 도시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는 조경의 이론적, 실천적 전이가 일어나기도 했죠. 이런 변화를 지켜본 덕분에 폭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 것 같아요. 그런 만큼 좋은 설계가 무엇인지 더 궁금해졌고요. 폭넓은 경험과 배움을 기대하며 유학길에 올랐다고 볼 수 있겠네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유펜, Upenn)에서 좋은 설계가 무엇인지 답을 구했나요? “답까지는 구하지 못했지만, 조경 설계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 있었어요. 대형 신도시를 계획하고, 미시적 생태계의 구성 원리를 이용해 도쿄 만 기반 시설의 미래를 계획하기도 했죠. 순수 기하의 집적을 통해 조직되어 작동하는 옥외 공간의 표면을 만드는 실험적인 설계를 하 기도 했고요. 개념적, 규모적 한계나 문화의 국경 없이 조경 진화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적용해볼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특히 다양한 배경의 친구들과 교류하다 보니 문화적 지평을 확장할 수 있었어요. 졸업 무렵, 친한 동료들, 또 강사들과 팀을 이뤄 뉴욕의 재개발지를 대상지로 2년마다 신진 건축가를 선정하는 공모전에 참가했어요. 기능을 상실해 방치됐던 뉴욕 브롱크스(Bronx)의 송수교를 생태와 문화의 인프라로 재생시키는 안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대상을 수상하여 신진 건축가의 타이틀도 얻었죠.” -표정에서 당시의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유학 중 힘든 점은 없었나요? “물론 고생도 했죠. 특히 첫 학기에 부족함을 많이 느꼈어요. 전투력은 최고였던 시기라 포기할 줄을 몰랐죠. 첫 학기가 끝난 뒤 두세 달 혼자 작업을 더 하기도 했으니까요. 노력한 게 아까워서 당시 수업 교수였던 제임스 코너에게 결과물을 메일로 보내기도 했어요. 답장은 안 왔는데, 6개월 뒤에 뜻하지 않은 연락이 왔죠. 전 세계 건축, 도시, 조경 관련 대학의 졸업 작품 중 학교의 추천을 받은 작품을 2년마다 경쟁시키는 ‘아키프릭스 인터내셔널(Archiprix International)’이라는 공모가 있어요. 그 공모에 유펜 디자인 대학원 대표로 참가하라는 소식이었죠. 본선 최종 결선작으로 선정되어서 캠브리지 MIT와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했고, ‘바르셀로나 유럽 조경 비엔날레(European Barcelona Biennial of Landscape Architecture)’에 출품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작품인지 궁금해지네요. “코펜하겐 북항을 대상지로 한 프로젝트였어요. 녹지와 도시 공간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풀어내고자 했는데, 도시의 구조와 정체성을 녹지 공간이 주도적으로 끌어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상을 받아서 기뻤다기보다, 설계 과정에서 무척 헤맸던 프로젝트인데 노력하면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고 누군가가 그걸 알아봐 줬다는 게 감사했어요.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오기로 끝까지 파고 파다보면 뭐가 되는구나 생각하게 됐죠. 당시 맥시멀리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여러 가지 작업을 많이 했거든요. 뭐든 적당히 하는 데서 멈추지 못했죠.” -한계에 그렇게 대처했군요. 파고 파다 보면 결국 물이 나온다는 마음으로, 물이 나올 때까지 팔 각오로. “요즘엔 몸이 안 따라줘서 못 하고 있지만요.”(웃음) … (중략) *환경과조경393호(2021년 1월호)수록본 일부
    • 남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