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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스케이프] 인류세를 위한 동화 『나무를 심은 사람』
코로나19로 인간이 발걸음을 끊자 다시 살아나는 환경이 전 세계적 화제가 되고, 자연을 가꿔 소생시킨 이들의 일화가 새로운 영웅담으로 등장한다. 이때 자주 등장하는 수식어가 ‘현실판 나무를 심은 사람’인데, 그 원작인 『나무를 심은 사람(L’homme Qui Plantait des Arbres)』(1953)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나무를 심은 사람』은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Jean Giono)의 단편 소설로, 현대의 고전 중 하나다.(각주1)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의 고산 지대를 여행하던 화자가 홀로 묵묵히 도토리 열매를 심는 목자를 만났고, 그의 평생에 걸친 작업을 통해 숲이 만들어지고 다시 삶터가 소생하게 되었다는 회고담이다. 정독을 해도 30분이 걸리지 않을 이 작품이 이토록 오래도록 널리 회자되는 이유를 생각해 본다.
20대의 ‘나’는 고산 지대로 도보 여행을 떠났다. 마을에는 물이 말라붙었고, “낡은 말벌집” 같은 버려진 마을과 먹이를 앞에 둔 “짐승들”처럼 으르렁대는 바람이 분다. 이런 곳을 몇 시간이나 홀로 걷다 양치기를 만나 목을 축이고, 그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양치기는 밤마다 도토리 자루를 가지고 와 씨알 굵고 금 간 데도 없는, 상태가 완벽한 도토리 100개를 고른다. 다음날 이 도토리를 물통에 담그고 양떼를 몰고 나간다. 초지에 이르면 양떼를 개에게 맡겨두고 그는 산등성이에 도토리를 심는다. 그 땅이 사유지인지 공유지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날마다 도토리 100개를 정성스럽게 심는 게 중요하다.
*환경과조경403호(2021년 11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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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나무를 심은 사람』은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완역본(김경온 역, 두레, 2018; 김화영 역, 민음사, 2009)과 프레더릭 백의 삽화가 포함된 판본(햇살과나무꾼 역, 두레아이들, 2002) 등이 있다. 프랑스 출신의 캐나다 애니메이터 프레더릭 백의 ‘나무를 심은 사람’의 영상은 유튜브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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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옥상 정원이 전하는 공생 이야기
원형정원 프로젝트 ‘달뿌리–느리고 빠른 대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은 서울대공원 깊숙한 곳, 청계산과 관악산에 아늑하게 둘러싸여 있다. 이 미술관의 옥상에 주변의 풍부한 자연과 조응하는 원형정원 ‘달뿌리–느리고 빠른 대화’가 조성됐다. 2층과 3층 사이 원형의 옥상에 만든 달뿌리 정원은 정원 디자이너 황지해의 작품이다. 황지해는 정원을 원예와 조경의 한계를 넘어선 더 확장된 가치의 예술로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다양한 정원을 만들어왔다. 원형정원 프로젝트에서는 미술관 주변 산야의 식생을 정원에 들여 자연환경과의 공존을 제안하고, 종의 보존과 고유한 유전자원의 가치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달뿌리는 한국 하천가에서 자생하는 달뿌리풀에서 따온 말이며, 대상지에 대한 황지해의 첫인상을 담은 단어이기도 하다. 그는 원형정원 한가운데 놓인 원통형의 엘리베이터 시설이 식물의 줄기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 정원이 하늘의 달을 지탱하는 뿌리가 된다는 의미를 담아 정원에 달뿌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낙지다리, 노박덩굴, 단양쑥부쟁이, 때죽나무, 배초향, 섬개야광나무, 큰바늘꽃, 한라부추를 주요 수종으로 삼아 섬세하고 자연스러운 한국적 경관을 연출했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에서 적응하며 진화한 자생 식물군으로 인간의 개입이 최소화된 원초적 상태를 재연한 것이다. 주요 수종으로 선정된 식물들은 한국 자생종일 뿐 아니라 멸종 위기에 처해있거나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 예로 습지 식물인 낙지다리는 개발로 인해 자생지가 파괴되고 있고 단양쑥부쟁이, 섬개야광나무, 큰바늘꽃은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에 속한다. 노박덩굴의 열매는 수컷 멋쟁이새의 붉은 깃털 색을 유지하는 먹이이며, 한라부추는 세계적으로 분포역이 좁은 한국 특산 식물로 주로 한라산과 지리산에서 자란다.
*환경과조경403호(2021년 11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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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우리 곁의 조경
가장 어려운 일은 하나를 고르는 것이다. 대상이 많을수록 고민의 시간이 길어진다. 고민의 시간이 길다고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니다. 어떨 때는 타고나는 것이란 생각도 든다. 이런 이유로 이 사진을 빼고, 저런 이유로 저 사진을 제외하고 남는 사진이 단 한 장이면 좋으련만 그런 경우는 없다. 늘 몇 장의 사진이 남는다. 어떻게든 선택해야 한다. 우선 머리를 맑게 비운다. 가까이서 보고 멀리서 보았다가 잠시 그 사진들을 잊는다. 그러다가 꼭 이 사진이어야 하는 이유를 궁리한다. 왜 저 사진이 부적합한지를 스스로에게 되뇐다. 납득시키고자 애쓴다. 그렇게 한 장의 사진이 남는다. 때론 인쇄소에 송고하기 직전까지 고민하고 망설인다. 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요즘 들어 결정의 시간이 확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잡지든 단행본이든 표지 사진을 고르는 것은 늘 어렵다. 포스터의 메인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세상 모든 에디터와 디자이너들은 정답 없는 취향과 맞서고 있다.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리고 있는 제4회 파주건축문화제 ‘우리 곁의 조경’(각주1) 전시장에 들어서서 여섯 개의 키워드에 눈길을 주다가 만난 “지구상의 모든 뭍은 그 끝에 이르면 결국 물을 만난다”란 문구 앞에서 이 문장을 골랐을 이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많고 많은 문장 중에서.
전시는 조경이 다루는 근본 요소인 땅, 물, 식물, 시간, 사람 그리고 도시라는 키워드를 화두로 여섯 개의 공간을 펼쳐 보인다. 하나의 키워드마다 하나의 문장이 달렸고, 예닐곱 개의 사례가 순백의 하드커버에 혹은 하나의 사례가 한 편의 영상, 한 장의 패널, 하나의 모형에 오롯이 담겼다. 그러다가 주신하(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교수)가 찍은 사진 한 컷이 이 구역의 키워드가 ‘땅’임을 혹은 ‘물’임을 웅변하기도 한다. 직업병 탓이겠지만 하늘거리는 재질의 패브릭에 인쇄된 문장 앞에서 서성거리다 셔터를 눌렀다. 그것도 각도를 달리해서 여러 번. 전시는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뉜다. ‘땅’을 밟고 ‘시간’을 거스르다 보면 그 사이에 여러 장의 하늘거리는 ‘식물’들이 걸음을 느리게 한다.
한 장, 두 장, 세 장, 네 장, 그러다가 맞닥뜨리는 밝은 조명을 배경으로 그 문장이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지구상의 모든 뭍은 그 끝에 이르면 결국 물을 만난다.” 그런데 유독 이 문장에만 출처가 없다. 어쩌면 그래서 한 번 더 곱씹어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전시장은 그리 크지 않다. 그 문장을 (그 문장이 프린트된 패브릭을) 들어 올리곤 물을 주제로 한 인터뷰 영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했다. 누가 쓴 문장일까, 누가 저 문장을 골랐을까. 검색창에 문장을 입력했다. 또박또박 띄어쓰기도 신경 써서. 하지만 뭔가 검색되리란 기대는 없이. 결국 전시를 총괄한 큐레이터 김아연(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에게 물었다.
문장은 누가 골랐나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졸업생인 김희원과 재학생 손영호, 조경설계 서안에 재직 중인 김정인이 키워드별로 여러 개의 문장과 작품 후보를 골랐어요. 저 문장에만 출처가 없어요. 의도인가요? 사실은 실수입니다. 앗, 그렇군요. 출처를 물어봐도 될까요?
“조경은 정원과 공원, 길과 광장처럼 빛, 바람, 땅, 비, 식물과 같은 자연을 만나고, 휴식과 놀이와 만남의 공간을 만들며, 파괴된 생태계를 복원하고, 생명 윤리와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건강한 삶의 터전을 가꾸는 지구적 실천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곁의 조경’을 통해 자연과 도시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고 우리 삶 속에 스며있는 자연과 풍경, 그리고 조경 공간을 만드는 창작의 과정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전시장 입구에 고딕체로 쓰여 있는 김아연의 글이다. 『텍스트로 만나는 조경』이란 단행본의 보도자료 카피를 정리할 때가 떠올랐다. 조경의 가치를, 의미를, 역할을 몇 문장으로 어떻게 축약해야 할까? 고심하던 시절이었다.
“여의도 샛강을 주차장으로 만든다고 하더라고요. 막 눈앞이 캄캄한 거에요. 그래서 샛강을 큰돈 안 들이고 물고기도 살고 풀도 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겠다고 했지요.” ‘물’을 주제로 한 영상이 쉼 없이 재생되던 모니터 옆에 새겨져 있는 정영선(조경설계 서안 대표)의 말이다. 글이나 문장이나 문구가 아닌 말. 그것도 진심이 느껴지는 말.
마음속으로 밑줄을 그으며 전시장을 나왔다. 참, 출처는 독립출판 방식으로 제작된 『박승진 텍스트_북』 374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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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이 전시 이외에도 강연, 영화 상영, 어린이를 위한 일일클래스, 영화마을 오픈하우스 등이 11월 14일까지 진행된다. 전시 장소는 파주출판도시 서축공업기념관 1층, 총괄 큐레이터는 김아연 + 이진형(조경설계 서안 소장). ‘노 플라스틱’을 지향하여 전시품들은 모두 종이와 나무와 천으로 제작되었다. 골판지 책꽂이며 지관으로 주상절리를 표현한 전시물 등 흙 색깔을 닮은 종이 전시품이 모두 근사하다. 여섯 개의 키워드를 구성하는 프로젝트는 ‘도시: 파주출판도시의 풍경, 시간: 서울숲, 땅: 제주 중문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경관설계, 사람: 소년문제해결 디자인프로젝트 ‘마음풀’, 물: 여의도 샛강 프로젝트, 식물: 베케정원과 아모레퍼시픽 원료식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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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이맘때면 귀신처럼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이 매서워진다. 옷장을 뒤엎어 정리하며 생각했다. 올해도 수능한파가 만만치 않겠구나. 십 년도 더 지났지만, 수능 하면 손안을 가득 채웠던 말랑말랑한 귤이 생각난다. 시험 응원을 온 동아리 후배가 핫팩과 함께 준 것이었는데, 건네받을 때 닿았던 손은 차갑기 그지없었으면서 귤에는 따끈한 기운이 가득했다. 과일은 무조건 차갑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였지만, 그날만큼은 그 따뜻한 귤이 너무 좋았다. 점심 도시락을 비운 뒤, 그 작고 말랑말랑한 동그라미를 아껴가며 까먹었다.
시험 한 번 망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었는데 참 많이 떨었다. 그래서인지 작은 응원이 어마어마하게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뜻밖의 위로가 또 있었다. 언어 영역(지금은 국어 영역으로 바뀌었더라) 시험지 상단에 적힌 필적 확인 문구가 그것이다. 부정행위를 막기 위해 2006학년부터 도입된 제도인데 모든 수험생은 12~19자 사이의 짧은 문구를 답안지에 자필로 적어야 한다. 그해의 문구는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 한 구절이었다.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워낙 유명해 수도 없이 본 문구가 갑자기 낯설게 읽힌 까닭은, 시험지를 빼곡하게 채운 수많은 글자 중 이 열두 자만이 문제 풀이를 위한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의도, 숨은 뜻 같은 것을 다 내던지고 시를 시로, 소설을 소설로, 수필을 수필로 만날 수 있는 순간. 그게 뭐라고 마음이 찡하고 서러웠다. 물론 째깍거리는 시계 초침이 다시 나를 지문으로 뒤덮인 전쟁터로 내몰았지만.
애석하게도 무언가를 발견하겠다고 갈망하며 들여다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될 때가 있다. 마포새빛문화숲(14쪽)을 찾은 건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한창 뜨거운 볕이 바닥을 달구던 여름이었다. 한강과 홍대 사이,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도시 발전소를 모토로 계획된 공원은 1930년 건설된 한국 최초의 화력발전소가 있던 곳이다. 상수역에서 나와 걸으면 멀리서부터 복잡해 보이는 발전 시설과 높은 철책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버려진 공장을 되살린 뒤스부르크-노르트 공원과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탈바꿈시킨 테이트 모던을 생각하니 심장이 동동 뛰었다.
1단계 부지만 완성된 터라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잔디광장을 뺀 다른 곳은 지형이 역동적이라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며 숨을 헐떡여야 했다. 이마에 난 땀을 훔치며 이만하면 볼 만큼 봤으니 돌아갈까 할 즈음이면 노란 크레인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개비온이 나무 뒤쪽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호기심을 자극했다. 좀 쉬었다가 둘러보면 될 걸, 그날의 나는 알 수 없이 초조해 쉼 없이 공원을 돌았다. 무언가를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결국 절여진 배추처럼 축 늘어져 그늘진 곳으로 들어섰는데, 웬걸 거기에 지금까지 보지 못한 한강의 풍경이 있었다. 두어 개의 도로가 직선으로 흐르고, 뒤편으로 너른 면이 된 강이 어물거리고 있었다. 눈높이에서 차도가 지나고, 그 아래로는 자전거를 타거나 달리는 이를 위한 또 다른 다리가 있다. 시선을 아래로 당기면 잠깐 강이 나타났다가 곧장 버려진 파이프나 용도를 알 수 없는 시설의 조각들이 등장하고, 이어 비탈을 따라 웃자란 식물이, 땅을 딛고 선 내 두 발이 보인다. 자동차와 자전거와 사람이 각기 다른 빠르기로 달리고, 잔잔한 한강은 그와 상관없이 느긋하게 제 속도를 유지하고, 산업 시설의 잔해는 천천히 낡아가고, 그 사이를 막 자라나는 식물들이 채운다. 시간의 층위, 그런 상투적인 표현을 눈으로 확인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흔히 숲을 가까이 둔 아파트가 그 녹지를
앞마당이라고 홍보하니, 지금 눈 앞에 펼쳐진 한강도 마포새빛문화숲의 것이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이 풍경을 공원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라 이야기해도 될까. 고민하다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면 맞는 거지 뭐 하고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공원을 빠져나올 때 지하에 발전 시설을 품고 있다는 잔디마당 위에 가만히 서보았다.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지지 않을까 잠깐 기대했는데 잠잠했다. 아쉽지는 않았다.
이제 밤에도 늘 빛나던 발전소의 불빛은 없지만 산책과 운동, 작은 공연을 즐기러 온 사람들이 이곳을 밝힐 것이다. 지면을 편집하며 마포새빛문화숲의 야경에 오래전 맛본 찰나의 ‘별빛이 내린 언덕’을 겹쳐보았다. 대학에 입학해 한동안 잊고 살았던 필적 확인 문구를 동생이 수험생이 된 해에야 다시 만났다. 동생이 만난 문구는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황동규, ‘즐거운 편지’). 갑자기 날씨가 추워질 무렵이면, 그때의 작은 위로를 회상해본다. 2021학년도의 필적 확인 문구를 소개하며 글을 닫는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나태주, ‘들길을 걸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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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ANY] 오리온햄프로
노인용 운동기구 보급해 노인 공간 복지를 선도하는 기업
오리온햄프로는 보다 밝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라는 비전으로 1997년 설립된 헬스·레저·스포츠기구 및 용품 전문 기업이다. 헬스기구에 대한 독자적 노하우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헬스장의 개념을 야외로 확장한 시설물을 개발하고 이를 조경 시설물, 조합 놀이대와 접목해 차별화를 모색해왔다.
최근 야외에서 휠체어를 타고 운동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고, 성장 발육에 도움이 되는 기구를 개발해 놀이터에 적용하는 등 독특한 기획력을 가미한 특화 제품을 보급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처럼 신체 건강에 초점을 맞춰 길러온 전문성은 현재 노인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신체 능력 향상을 돕는 ‘한국형 노인 야외운동기구’ 개발에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2025년 한국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예측된다. 초고령사회에 들어서면 가정 부양 부담, 복지 비용 증가, 노인 우울증 발생 등으로 다양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노인의 다양한 여가 욕구에 부합하는 장소와 프로그램의 부재도 문젯거리다. 현재 노인의 활동 공간은 노인복지관, 경로당, 노인교실 등 정적 활동 중심의 실내 시설에 치중되어 있다. 이들의 활동을 야외로 끌어내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공간으로 ‘노인놀이터’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이에 호응해 서울시는 2025년까지 노인을 위한 ‘시니어파크’를 전 자치구에 설치하겠다고 발표를 하는 등 그 움직임이 점차 확산되는 추세다.
오리온햄프로는 노인놀이터와 시니어파크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기 전부터 전문가와 긴밀히 협업해 노인을 위한 기구와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했다. 오리온햄프로의 조합 놀이기구, 야외운동기구 및 편익 시설 브랜드인 아트앤드는 유럽 등 해외 사례를 토대로 개발한 제품을 설치한 후, 이용자 대상 현장 인터뷰와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제품을 한국형으로 개선한 엘디핏ELDYFIT을 출시했다. 또한 제품 제조, 생산뿐 아니라 공급, 사후 관리까지 가능한 체계를 구축했다.
엘디핏은 노인 공간 복지 실현이라는 사회적 요구에 부합하는 노인용 야외운동기구다. 계단 오르기, 물건 옮기기 등 일상에 필요한 움직임을 운동에 적용해 노화로 인해 약화된 균형 감각, 유연성, 민첩성을 기르고 근량을 증진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러한 야외 활동은 육체적·정신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뿐 아니라 인간관계 향상에도 도움을 준다.
함장영 대표는 “노인 인구는 늘어나는데 그들이 갈만한 장소가 없다. 앉아서 휴식할 수 있는 공간도 부족하다. 경로당은 규모가 작고 늘어나는 노인의 수를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전문적인 노인 공간을 만들어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정부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며 엘디핏의 개발 배경을 풀어놓았다.
유럽형 노인용 야외운동기구는 주로 외나무다리 건너기, 손가락 계단 오르기 등 정적 운동을 유도한다. 이에 반해 엘디핏은 계단 오르기, 앉았다 일어나기, 앉아 균형 잡기, 서서 균형 잡기 등 좀 더 동적인 운동을 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어린이놀이터와의 연계성을 고려하고, IoT사물인터넷 센서를 설치해 체온, 심박수, 호흡수를 확인할 수 있는 질병 예방 솔루션을 더한 점이 특징이다. “유럽의 노인용 야외운동기구는 주로 인지 능력을 높이는 정적 활동 기구로 구성된다. 한국 사용자들은 이와 달리 좀 더 동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기구를 원했다. 건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길 원하기도 한다. 인지 능력 발달과 기본적인 운동 기능뿐 아니라 동적인 운동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했다”는 것이 함 대표의 설명이다.
엘디핏은 어깨와 팔의 기능을 높이는 ‘팔 벌리기+어깨 돌리기’, 비탈이나 울퉁불퉁한 길에서도 바르게 걸을 수 있도록 균형 감각을 자극하는 ‘외나무다리 건너기+스텝바 건너기’, 안정된 자세를 유지하는 근력과 감각을 길러주는 ‘앉아 균형 잡기+서서 균형 잡기’,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계단 오르기+앉았다 일어나기’, 손을 사용해 물체를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링 작게 이동하기+링 크게 이동하기’, 손목과 손가락 사용 능력을 높여주는 ‘손목 움직이기+손가락 계단 오르기’의 여섯 가지 기구로 구성된다. 이를 공간의 특성과 목적에 맞추어 변형해 설치할 수 있다.
함장영 대표는 아파트 단지에 어린이놀이터가 의무적으로 설치되듯 노인놀이터 역시 제도적으로 반드시 마련해야 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기존의 놀이터 영역을 공유하거나 확장해 조성되는 복합 형태로 변화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미 민간 시장에서도 기존 놀이터를 노인을 배려한 공간으로 바꾸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고, 연구 자료를 공유해줄 수 있느냐는 문의도 많이 오고 있다. 그는 마지막으로 노인놀이터의 지향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건강이라는 키워드로 기구를 연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유아기, 아동기, 청장년기, 노년기의 각 특성을 반영한 제품군을 갖출 수 있었고, 제품 간 보완을 통해 생애주기를 아우르는 놀이터를 조성할 수 있게 되었다. 오리온햄프로의 제품을 사용하면 노인놀이터인 동시에 어린이놀이터인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성격이 다른 운동 기구가 서로를 보완하며 시너지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이는 커뮤니티 케어를 위한 필수 사회 시설이며, 노인놀이터가 지향해야 할 지점이다.”
TEL. 02-2602-5750 WEB. ehampr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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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천연 목재의 나뭇결을 느낄 수 있는 ‘이로코 벤치’
친환경적이고 견고하며 따스한 감성을 선사하는 쉼터
벤치의 핵심 소재인 목재는 친환경적일 뿐만 아니라 따스한 감성을 자아내는 재료다. 그중 이로코Iroko는 수명이 긴 아프리카산 원목으로, 목재의 내구성을 다루는 유럽연합표준 EN350-2에서 1~2등급으로 규정된 천연 목재다. 목재에 함유된 천연 오일 덕분에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잘 견디며, 유해 곤충에 대한 저항성이 강해 오일이나 바니시로 관리할 필요가 없어 더욱 친환경적이다. 내구성이 뛰어난 티크Teak 목재와 견줄 만큼 견고하고 쉽게 변형되지 않는다. 따스하고 풍성한 색조를 가진 이로코는 어떤 색과도 잘 어울려 어디에나 사용하기 좋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색이 깊어져 격조 있는 분위기를 더한다.
예건의 ‘이로코 벤치’는 ‘좋은 목재가 좋은 벤치를 만든다’라는 모토로 천연 목재 이로코의 장점을 담아 만든 벤치다. 천연 목재의 부드러운 색상이 곡선형의 철재 프레임과 어우러져 온화한 풍경을 연출하고, 내구성이 좋아 유지·관리가 편리하다. 벤치에 앉으면 목재 특유의 포근함과 천연 원목 고유의 나뭇결을 느낄 수 있다.
TEL. 031-943-6114 WEB. yek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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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공터의 힘
개관과 동시에 장소 덕후들의 성지로 등극한 안국동 서울공예박물관. 400년 수령의 장엄한 은행나무, 테라코타 관을 둥그렇게 쌓은 크레이프 케이크 형태의 파사드, 곡선형 콘크리트로 유려하게 지형 틀을 잡은 경사 초지, 지극히 이질적인 이 세 요소를 한 프레임에 담으면 대충 찍어도 어느 각도에서나 그림이 나온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도배하고 있는 장면이다.
공예박물관 안마당의 이 매력적인 풍경은 포토제닉할 뿐 아니라 고즈넉한 산책과 휴식도 넉넉히 담아낸다. 그러나 공예박물관의 도시적 잠재력은 감고당길과 안국역 쪽으로 담장 없이 활짝 열린 박물관 앞마당에서 펼쳐진다. 이 공터는 2017년까지 70년 넘게 풍문여고의 운동장으로 쓰였다. 겹겹이 쌓인 기억의 지층은 훨씬 더 두껍다. 감고당길 입구에는 ‘안동별궁 터’ 표지석이 서 있다. “조선 초부터 왕실의 거처였다가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처로 사용된 궁터.” 안동별궁은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별궁으로 쓰였고, 세종이 승하한 곳이자 문종의 즉위식이 열린 곳이며, 고종이 건물을 개축해 순종의 혼례를 역사상 가장 성대하게 치른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근대 여성 교육을 이끈 학교로 변모했다가 이제 공공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안동별궁과 풍문여고를 함께 써넣어 검색해보면 풍문여고 교정 안에 안동별궁이 있는 1950년대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뜬다. 근대식 교사에 옛 별궁 한옥들이 이어져 있고 그 앞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줄 맞춰 조회를 하는 기묘한 광경이다. 게다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인사동과 북촌 사이라는 도시적 맥락까지 겹친 장소성, 만만치 않다. 설계공모 당선 이후 박물관 건축을 주도한 송하엽 교수(중앙대)의 말처럼, 이곳은 “시간을 걷는 공간”이다.
하지만 공예박물관 외부 공간이 뿜어내는 힘의 원천은 시간도, 기억도 아니다. 그 힘의 열쇠는 빈 땅 그 자체에 있다. 안국역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모두에게 열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터와 담장을 둘러친 학교 운동장의 차이를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여름과 가을의 기 싸움이 팽팽하던 오후, 조경 설계로 이 빈 땅의 잠재력을 극대화한 박윤진 소장(오피스박김)을 만나 공터 곳곳을 느릿느릿 산책했다. “처음 방문한 날, 풍문여고 흙 운동장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어요. 설계비만 계산하면 손해일 게 뻔했지만 무조건 프로젝트를 맡기로 마음먹었죠. 담장만 걷어낼 수 있다면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인 오픈스페이스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어요.”
이미 블로썸 파크(『환경과조경』 2016년 9월호)와 경기도 북부청사 광장(2020년 5월호)뿐 아니라 민간과 공공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작업에서 바닥면 실험과 지형 설계 혁신을 실천해온 오피스박김은, 빠듯한 예산과 층층시하 간섭이라는 서울시 프로젝트의 고질적 난맥을 설계 역량과 노하우로 극복하며 도심 공터의 장소적 가치를 가시화하는 성과를 거뒀다. 애초의 생각처럼 폐쇄적 담장을 허무는 데 성공했음은 물론이다. 풍문여고 담장을 헐면서 옛 안동별궁 담장의 기단석과 행각 터가 발견되었고 문화재위원회는 노출 전시를 결정했다. 야심 찬 계획과 달리 허술하게 완결되기 마련인 공공 도시·건축 프로젝트를 조경가의 안목과 솜씨가 어떻게 살려냈는지, 세세한 설명은 아끼기로 한다. 가보면 바로 느낄 수 있다. 조경가의 안목과 지혜를.
감고당길을 사이에 두고 서울공예박물관 맞은편에는 이건희미술관의 유력 후보지인 송현동 숲이 자리한다. 박물관 교육동 전망대에 오르면 야생의 숲처럼 장엄한 송현동 일대의 녹색 풍경이 멀리 인왕산을 배경으로 넓게 펼쳐진다. 주변 고층 건물에서 찍은 조감 사진은 고밀한 도시 조직, 송현동 숲, 공예박물관 공터의 극명한 대조와 긴장을 전시한다. 열린 공터의 도시적 잠재력을 감각적으로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감고당길에 서서 박물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관람 목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 못지않게 목적 없이 ‘그냥’ 들고나는 사람이 많다. 모처럼 도심 산책을 즐기다가, 즐거운 퇴근 걸음으로 안국역으로 향하다가 뻥 뚫린 공간을 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공터에 들어서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 뭐지? 외마디 혼잣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의 매력, 담 없는 도시 공터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공예박물관 앞마당은 길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부지 서쪽 감고당길과 동쪽 윤보선길을 가로지를 수 있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연결 통로인 셈이다. 박윤진 소장과 나도 통과 동선으로 박물관 앞마당을 사용하는 이들 뒤를 쫓아 윤보선길로 접어들었다. 인왕산에 걸린 노을을 따라 골목을 걷다 보니 마침 그럴싸한 노포 호프집이 등장했다.
유달리 높고 파란 하늘과 불타는 노을 사진으로 SNS가 북적이는 이 가을, 잠시 틈을 내 가볼 만한 조경 작업과 전시도 풍성하다. 오피스박김의 ‘서울공예박물관’뿐 아니라 이달 지면에 모은 김아연의 ‘가든카펫’(덕수궁, ‘상상의 정원’ 전), 김봉찬·신준호의 ‘어반 포레스트 가든’과 정영선의 ‘나의 정원’(피크닉, ‘정원 만들기’ 전), 안마당더랩의 ‘일분일초’(소다미술관, ‘오픈 뮤지엄 가든: 우리들의 정원’ 전)에서 반나절 가을 나들이의 여유를 맛보시길.
아쉬운 소식을 전한다. 2018년 6월호(362호)부터 함께 지면을 만든 윤정훈 기자가 402호를 끝으로 환경과조경 생활을 마무리한다. 마흔한 권 잡지 곳곳에 밴 그의 흔적을 기억하며, 새로운 도전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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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스노볼의 파수꾼
한낮 버스에 앉아 창밖 보는 걸 좋아한다. 파란 하늘 아래 산들거리는 가로수와 제각기 다른 차림으로 오가는 사람들. 신호등 불이 자리를 바꾸면 자전거가 멈춰 서고 버스가 다시 움직인다. 평범한 풍경이지만 버스 창문 너머로 보면 무엇이든 안온하고 괜찮아 보인다. 늘 평화로운 스노볼처럼.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이런 감상은 모두 휘발되어 사라진다.뭉개진 은행나무 열매 냄새와 간판을 가리는 무성한 가로수에 불평하는 목소리가 도시의 소음과 뒤섞여 시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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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공예박물관
Seoul Museum of Craft Art
구법의 기술
처음 방문한 풍문여고의 흙 운동장에 반해서,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무조건 프로젝트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적어도 지금의 폐쇄적인 담장만 허물 수 있다면, 도시의 인상적인 오픈스페이스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공공 공간을 설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프로젝트 초청 당시 서울공예박물관장이 오피스박김에게 보여준 신뢰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자문과 심의 그리고 동료의 불평 불만 속에서 초기안은 당연히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그동안 만들고 구현한 ‘박김사례’의 과정과 결과를 보여주었고, 그 안에 담겨진 구법의 기술은 수많은 사변을 넘어서는 동력이 되어주었다.
구법의 진화
형태나 형상이 아닌 과거의 물성―풍문여고의 흙 운동장, 안동별궁 터의 지형 언덕―을 구현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 재료 실험을 했고 수차례에 걸친 목업시공을 통해 배수가 잘되며 하이힐을 신고도 편히 다닐 수 있는 흙 포장을 구현할 수 있었다. 관행적인 흙포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이 새로운 흙 포장은 야구장에서 착안한 것으로, 마사토와 섞였을 때 점성이 생겨부드럽지만 단단한 경도를 갖는다.
수직으로 단절된 축대 위에 놓인 400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완만한 지형 언덕을 구상했다. 이미 사라진 안동별궁의 지형을 재현하되 오피스박김만의 진화된 방식으로 제안했다. 선형의 콘크리트는 지형의 높이와 함께 경관에 변화를 만들어내며, 지형의 미세한 차이를 더욱 드러낸다. 우리는 이 선형의 콘크리트를 ‘지형틀’이라고 불렀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설계 및 시공 감리 오피스박김(박윤진, 김정윤)
시공 아이엠유건설(김충호)
발주 서울공예박물관
위치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3길 4
면적12,830m2
준공2021
사진 김종오
오피스박김(PARKKIM)은 2004년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박윤진, 김정윤이 설립한 조경설계사무소다. 2006년 서울로 이전했고, 2018년 김정윤 대표의 하버드 GSD 교수 임용을 계기로 보스턴 지사를 개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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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메도우
Black Meadow
의도한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연작’이라고 부를만한 것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들을 관통하는 것은 ‘바닥’이다. 낮게 깔리는 것, 내려다봐야 하는 것, 수평적인 것, 그리고 우리가 하찮게 여겨왔던 것.
풍경을 구성하는 근원적인 기하학은 바닥 면과 그에 직각으로 선 것들이다. 인류는 직립 보행을 시작하며 손의 자유를 얻었고, 그로 인해 두뇌가 발달하며 다른 동물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됐다. 나아가 지표면에 수직적인 것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대표적 사례가 건축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조경 작업을 건축적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 힘들어졌고, 자연과 경관에 내재한 고유의 언어와 법칙으로 우리의 작업을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품고 산다. 아마도 수직에 저항하는 것, 높은 것에 반대되는 것, 보잘것없는 배경이나 바탕으로 치부되는 것, 손이 아닌 발의 영역에 속한 것에 대한 반항적 끌림이 지구의 표면, 풍경의 바닥으로 향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지구의 표면에는 어마어마한 생태계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인 메도우(meadow)는 천이의 초기 단계에서 볼 수 있는 초지로, 숲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사람들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는 취약한 생태계다. 2021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에 설치된 블랙메도우(black meadow)는 초록과 생명이 사라진 자연을 의미하는 바닥 설치물이자 빗자루로 만든 카펫이다.
*환경과조경402호(2021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작가 김아연
디자인팀시대조경(안형주,최진호,송민원,김현근,나준경,이온),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김희원,김선주,이필립,이주은,윤정원,진소형,오혜지,손영호,김단비,박정은,김현정,박공민,한지훈,강건희,강성수,이현우,이영현)
전시 기획2021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전시추진단
위치 이탈리아 베니스 카스텔로 공원 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면적50m2(지름 약8m)
재료 빗자루,마대
설치2021. 5.
사진 김아연, 2021베니스비엔날레 국제건축전 한국관 전시추진단
김아연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와 동대학원 및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했다.조경 설계 실무와 설계 교육을 넘나드는 중간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다.국내외 정원,놀이터,공원,캠퍼스,주거 단지 등 도시 속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담당해 왔으며 동시에 자연과 문화의 접합 방식과 자연의 변화가 드러내는 시학을 표현하는 설치 작품을 만들고 있다.자연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상상을 현실로 만드는 일이 조경 설계라고 믿고,이를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일을 중요시한다.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 교수이자 스튜디오 테라 대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