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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디자인 오피스] 오픈니스 스튜디오 작지만 강하고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스튜디오를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대학원에서 조경 설계를 전공한 뒤 현장 중심의 설계 경험을 쌓기 위해 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에 입사했다. 주로 장인처럼 정원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을 하는 회사였다. 작은 설계 스튜디오에서 전통적인 도제 방식으로 디자인을 배웠다. 일상에서 스승의 작업을 보조하면서 어깨너머로 배우고, 스승의 습작을 트레이싱하면서 감각을 키우는 방식이었다. 디자인을 이끌어가는 방법뿐 아니라 클라이언트와 소통하는 방법, 현장에서 작업자들과 원만하게 어울리는 방법 등 모든 것을 가까운 거리에서 배울 수 있었다. 입사한 지 5년 정도 되었을 때는 서툴지만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그럭저럭해 내는 방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6년 차가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고민하던 무렵 우연히 한두 가지 개인 프로젝트를 맡게 되어 자연스럽게 독립하게 됐다. 현재 스튜디오의 구성원은 몇 명이며, 최종 규모는 어느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대표 포함 8명으로 구성된 스튜디오다. 최종적으로는 10명 정도의 규모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 정도면 대표 디자이너가 모든 디자인 결과물을 살펴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작고, 동시에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다룰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기 때문이다. 디자인 스튜디오의 경우 규모가 너무 커지면 대표 디자이너는 전업 매니저의 역할을 맡게 되기 쉽다. 반대로 규모가 너무 작으면 할 수 있는 일의 종류가 제한되기 때문에 적정 규모가 중요하다. 작은 스튜디오의 장점은? 작은 스튜디오는 생각보다 장점이 많다. 운영 측면에서 간접비를 줄이고 일의 효율을 높여 원하는 일만 선택할 수 있는 자유도를 가질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클라이언트가 담당 팀장이 아닌 스튜디오의 대표와 직접 소통한다는 점에서 신뢰를 줄 수 있다. 한 프로젝트를 디자이너 여러 명이 지원하는 구도에서 만족을 얻는 클라이언트가 있는가 하면, 대표 디자이너 한 명과 긴밀하게 소통하기 원하는 클라이언트도 있다. 후자의 경우 작은 스튜디오가 더 큰 강점을 갖는다. 내부적 관점에서 본다면 작은 조직은 큰 조직에 비해 프로젝트 단위로 팀을 유동적으로 개편하기 때문에 업무에 대응하기 쉽다. 촘촘한 직급 체계와 인사 구조를 가진 대형 사무실이라면 적용하기 어려운 대응 방식이다. 프로젝트마다 발 빠르게 팀을 재구성해 대응하는 방식은 때로는 구성원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지만, 다양한 역할을 해볼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구성원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원동력이 된다. 오픈니스 스튜디오의 팀원들을 소개해 달라 최재혁 대표 디자이너는 일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가감 없이 말하는 편이라 때로는 돌직구 상사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뇌피셜’에 따르면) 속마음은 따듯하고 팀원들을 배려하고자 늘 노력한다. 김지학 디자인 매니저는 오픈니스 스튜디오에서 이제 5년째다. 프로젝트의 핵심을 파악하고 효율적인 진행 계획 수립과 업무 분담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여준다. 디자인 능력과 시공 기술 또한 훌륭해 정원박람회에서 대상을 받은 경력도 있다. 변인환 컨스트럭션 매니저는 나이는 많지 않지만 시공 쪽에서 잔뼈가 굵은 인재다. 식물에 대한 애정이 깊고 여행과 사진을 즐긴다. 전문가 수준의 사진 촬영 능력을 갖추고 있다. 김제인 시니어 디자이너는 디자인 감수성이 뛰어나다. 시와 피아노를 취미로 즐기는 그녀가 만든 디자인 결과물에서는 특별한 온기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장찬희 시니어 디자이너는 타고난 설계가 기질이 있는 디자이너다. 누구보다 꼼꼼하고 정확한 편이고 빠른 손을 가졌다. 박수미 디자이너는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조경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디자인적 직관과 판단력이 좋고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팔방미인 디자이너다. 이우정 디자이너는 일러스트 작가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2D 이미지 작업에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 박경자는 2021년부터 고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조경기술사이자 문화재기술자다. 디자인 스튜디오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실험 정신과 유연한 사고방식, 그리고 디자인한 것은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물론 우리가 모든 것을 디자인하고 다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프로젝트에 임하고자 노력한다. 스튜디오를 개소한 2017년, 한강예술공원 시범사업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지름 8m의 거대한 튜브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지키기 위해 지방의 고무 보트 제작 업체를 수소문하고 다니면서 몇 차례 고비를 겪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어떻게든 만들어 냈을 때 느꼈던 성취감과 즐거움이 여전히 오프니스 스튜디오의 설계 DNA에 각인되어 있다고 믿는다. 오픈니스 스튜디오의 디자인 스타일이 있다면? 어떤 대상이든 복잡하게 디자인하면서 품질을 떨어뜨리는 일은 쉽고 단순하게 만들면서 높은 품질을 내는 일은 어렵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더 나아가 감동을 주는 공간을 디자인을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그런 작품이 고전이 된다고 생각한다. 클라이언트의 뜻에 휘둘리고 어쩔 수 없이 그 뜻을 따라갈 때가 많지만, 우리는 늘 이런 관점에서 일을 시작한다. 단순함과 모던함, 그리고 자연스러움이 이제껏 오픈니스 스튜디오가 추구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트렌드의 변화를 의식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트렌드를 좇아 가볍게 소비되는 이미지를 담은 공간을 디자인하는 건 지양하는 편이다. 그보다는 색과 질감, 스케일과 조형 등 기본적인 공간 요소를 균형감 있게 어우러지게 함으로써 공간 안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둔다. 공간에서 시각적 균형미가 한눈에 드러나게 만드는 것에도 늘 신경을 쓴다. 식재 디자인의 경우 대상지의 미묘한 환경적 변수들을 감지하여 지속가능한 공간을 구현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그 후에 미적·사용자적 관점을 고려한다. 시설물 디자인에서는 부피감과 무게감의 표현에 각별한 신경을 쓴다. 너무 투박하게 디자인해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부담감이 느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반대로 너무 가벼워서 공간에 안착하지 못하고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도록 디자인한다. 복잡한 형태와 어려운 디테일에 큰 관심이 없고, 가장 기본적인 조형성을 가장 맵시 좋게 드러내기 위해 쉽고 확실한 디테일 디자인에 집중하는 편이다. 디자인 스튜디오 창업을 꿈꾸는 디자이너들에게 조언한다면?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쉽다면 쉬운 게 자신의 스튜디오를 여는 일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하되 한 가지만 기억하면 좋을 듯하다. 디자인하는 게 즐겁고 그것에 보람을 느껴야 한다는 점이다. 일을 일로 대하는 순간 일은 떠나간다. 반대로 일을 친구 삼아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걷는다는 생각으로 가까이 두고 친하게 지내고자 하면 어느새 자신이 기대하던 것보다 많은 일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스튜디오도 성장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열심히 단련한 뒤 자신감을 가지고 시작하면 좋다. [email protected] 오픈니스 스튜디오(Openness Studio)는 외부 공간의 디자인 빌드 분야에 강점을 가진 디자인 스튜디오다. 단순하고 모던한 조형, 자연스러운 내러티브와 편안한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다수의 개인 정원 및 공공 공간을 설계하고 시공했으며. 생태적 관점을 바탕으로 공공 예술과 전시 프로젝트에도 폭넓게 참여해왔다. 한강예술공원,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국립현대미술관 예술놀이마당 전시에 참여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외부 환경 개선 설계를 수행했다.
  • [모던스케이프] 나무를 심자
    예로부터 ‘나무를 심는 일’은 기념할 일이 있을 때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으로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마당에 심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민간의 전통이다. 오동나무는 속성수에 목질도 가벼워서 딸이 시집갈 때 혼수로 가지고 갈 가구의 재목으로 사용하기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밖에 우리는 결혼. 회갑, 승진 등 경사가 있을 때도 나무를 심는 것으로 축하를 했는데, 오늘날에도 종종 볼 수 있는 기념식수의 전통이 멀리 있었던 건 아닌 셈이다. 왕실에서도 나무를 심었을까 싶어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봤다. 왕실의 가족묘인 능소(陵所)와 원소園所에 보토補土하여 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대부분이다. 검색어를 식목(植木)으로 걸러봤다. 왕릉 일대에 식재한 것을 제외하면, 영남 지방 여러 고을에는 민둥산 때문에 재해가 빈번하니 벌목을 금하고 나무를 많이 심어 토양 유실을 막는 것이 필요하다고 상소한 헌납(獻納)1 권엄의 의견이 유일하다. 나무 심기를 통해 상징과 기념을 넘어 실용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다.2 근대가 되면 동서를 막론하고 나무를 심는 일이 도시의 위생과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수단으로 주목받는다. 한국에서는 독립협회 회원들이 식목의 기능에 가장 먼저 주목했다. 해외 도시를 경험한 바 있는 그들은 나무 심기가 노력에 비해 효과가 크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종목일, 즉 식목일을 만들어 국민이 나무를 심게 할 것을 권장했다. “우리가 바라건대, 조선의 농상공부에서도 종목일을 작성하여 봄가을로 한 번씩 전국의 인민을 시켜 동네 빈터에 나무를 심게 하고 …… (그러면) 몇 해 지나지 않아 좋은 공원이 생길 것이고 그 나무들이 다 자라 쓸 만하게 되면 해마다 얼마씩 베어 팔아 그 돈을 가지고 공원을 정비하는 등 시민을 위해 쓸 일이 많을 것이다. …… 속성수인 백양목을 비롯하여 단풍나무, 전나무, 가죽나무 등을 일 년에 한 번씩만 심는다면 큰 수고로움 없이도 큰 효과를 볼 수 있다”3 하였다. 그러고는 식목의 효과로 첫째는 산사태 방지로 산 아래 농가들이 농사를 안정적으로 지을 수 있다는 점, 둘째는 공기 정화에 효과가 있다는 점을 꼽았다. 또한 셋째로는 나무로 공기가 깨끗해지면 전염병이 예방된다는 점, 넷째로는 그늘과 맑은 공기를 제공해 백성들의 휴식처가 마련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당시 조선의 주요 도시는 산업화로 인해 망가지지는 않았으나, 비위생적이고 무질서한 도시 환경은 근대로의 개혁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 해결책으로 식목에 주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각주 1.헌납은 조선시대 사간원의 정4품 관직이다. 각주 2.『정조실록』 12권, 정조 5년 10월 22일. 각주 3.「독립신문」 1896년 8월 11일. *환경과조경408호(2022년 4월호)수록본 일부 박희성은 대구가톨릭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중 문인정원과 자연미의 관계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에서 건축과 도시, 역사 연구자들과 학제간 연구를 수행하면서 근현대 조경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했다. 대표 저서로 『원림, 경계없는 자연』이 있으며, 최근에는 도시 공원과 근대 정원 아카이빙, 세계유산 제도와 운영에 관한 일들을 하고 있다.
  • 공예의 새로운 태도 사물을 대하는 태도
    지구는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플라스틱 폐기물로 땅과 바다가 오염됐고, 공기 속에서 퍼지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가 존재하는 ‘인류세’와 ‘자본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 여러 분야에서 인간과 사물, 자연의 수평적인 관계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공예에서도 생명 없는 재료로만 취급해온 다양한 사물과 생명체에 대한 존중, 천연 자원의 남획과 인공 재료의 남용으로 인한 환경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인간 중심의 ‘일방적 세계화’와 ‘자본세’에 맞설 공예의 윤리적·사회적 실천, ‘기계적 유기체(AI, 사물인터넷)’와 공존하는 공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시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현시대에 대응할 새로운 공예와 디자인을 모색하는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한 공예의 태도와 실천을 보여준다. 인간 중심의 공예에서 벗어나, 재료, 사물, 기계, 환경 등과 수평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다. 인간을 위한 공예도 필요하지만,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들을 함께 존중하는 태도가 이 시대 공예의 새로운 윤리이며 사회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류세와 자본세에 포위되어 소외되고 고립된 공예, 작가들의 존재와 가치를 복원하는 길이다. 대지, 생활 그리고 반려까지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2021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공예를 통해 조망했던 전시로 현지에서 찬사를 받았다. 당시 전시를 개최했던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한국 관객들을 위해 동명의 주제로 이번 전시를 마련했으며, 2021년 밀라노 한국공예전 출품 작품과 더불어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공간에 재구성했다. 공예, 디자인, 사진, 영상 등 참여 작가 38팀의 290여 작품은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룬다. 1층은 하늘과 땅, 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대지의 사물들’, 2층에서는 한국의 다양한 생활문화를 담은 공예 ‘생활의 자세들’, 인간과의 지속적인 삶을 이어가는 소중한 반려로서 공예를 바라보는 ‘반려 기물들’을 이야기한다. 공예는 인간, 사물, 자연이 상호 매개되고 결합된 광범위한 결과물의 총체다. 이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는 결합 과정에서 그 의미가 끊임없이 변화되고 새롭게 생성된다. 공예는 단순히 고정된 물건이 아니라 인간, 사물, 재료, 기계 등과 결합과 배열을 통해 새로운 상징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전시는 ‘대지의 사물들’을 통해 전통과 현대, 공예와 예술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공예의 사물성을 보여준다. 또한 코로나19와 관련된 메시지를 던지기도 했다. 한선주 작가는 코로나19로 지친 일상을 위로하고, 일상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길 고대하며 화려한 색감의 대형 직물 ‘봄날은 온다’ 시리즈를 1층 중앙홀에서 선보였다.
  • 자연과 기술이 공존하는 도시를 꿈꾸며 포스트 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 울산시립미술관 개관 특별전
    미래형 미술관을 꿈꾸는 울산시립미술관 조선 후기 울산도호부 관아의 흔적인 남은 울산 동헌, 그 옆으로 울산 최초의 공공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지난 1월 6일 개관한 울산시립미술관은 미디어 아트 중심의 ‘미래형 미술관’을 표방한다. 울산만의 지역 특색을 바탕으로 “시대적 변화에 맞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제시”하고 자연과 기술, 산업과 예술의 조화를 모색하는 전시와 사업을 선보일 계획이다. 개관을 기념해 ‘블랙 앤드 라이트: 알도 탐벨리니’, ‘대면_대면 2021’, ‘노래하는 고래, 잠수하는 별’, ‘찬란한 날들’, ‘포스트 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의 5개 전시를 마련했다. 17개국 70명의 작가가 참여한 전시를 통해 평면, 입체, 설치, 공연, 디지털 미디어 아트까지 최첨단 미술을 경험할 수 있다. 포스트 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 개관 특별전으로 기획된 ‘포스트 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을 나누어 온 우리의 이분법적 시각을 되돌아보게 하는 전시다. 후, 뒤, 다음을 뜻하는 포스트(post)와 자연을 뜻하는 네이처(nature)를 결합한 ‘포스트 네이처’는 먼 미래에 도래한 세계를 의미하는 단어다. 단순히 인류가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생태를 넘어 역사와 문화, 정치가 얽힌 복잡한 감각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을 통해 “함께 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다층적 계기를 제공하고자 했다. 프랑스, 미국, 루마니아,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16인의 영상, 설치, 퍼포먼스, 프로그램 등이 마련됐다. *환경과조경408호(2022년 4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별 볼 일 있는 사람
    잊을 수 없는 밤이 있다. 고향의 동네는 하루에 버스가 다섯 대밖에 오지 않는 시골이다.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우리 집은 나름 배산임수(?)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5분이면 정상을 찍을 수 있는 야트막한 구릉이 병풍처럼 서 있고, 실개천이 집 앞에 졸졸 흐른다. 명당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민망하지만, 탁 트인 시야 덕분에 밤하늘을 감상하기엔 아주 좋다. 우리 가족은 여름날 은하수가 뜨는 밤이면 평상에 오순도순 누워 반짝이는 별들을 구경했다. 산 바로 아래 집이라서 여름밤이라도 공기가 차가웠던 탓에 우리는 크고 얇은 여름 이불을 다 같이 덮은 채로 누워서 밤하늘을 보며 수다를 떨었다. 유성우가 떨어지는 날엔 다 같이 손을 모아 소원을 빌기도 했다. 별이 유난히 빛났던 그 밤들은 한 이불을 덮는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줬다. 먼 우주를 매일 올려다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천체물리학자를 꿈꿨다.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이름 자체가 어려워 보여서 뭔가 특별해 보였던 것 같다. 어릴 때 경찰, 소방관, 드라마 PD, 흉부외과 의사 등 장래희망 칸에 썼다 지운 직업이 수두룩했는데, 천체물리학자의 꿈은 오랫동안 간직했었다. 스티븐 호킹처럼 우주 분야에 새로운 역사를 쓰는 천체물리학자가 되겠다는 야심도 있었고, 호주의 사막 한가운데에서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며 연구하고 있을 미래의 나를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뼛속부터 문과생이었던 탓에 수학의 벽을 넘지 못했고, 꿈은 블랙홀에 빠져버린 인공위성처럼 사라졌다. 함수에게 꿈을 도둑맞았다. 잊고 있던 추억을 떠올린 것은 지난 3월호에 소개했던 단 로세하르더(Daan Roosegaarde)의 시잉스타(Seeing Star) 덕분이었다. 시잉스타는 도시의 모든 조명을 소등함으로써 도시에서 보지 못했던 별을 감상할 수 있게 만든 프로젝트다. 로세하르더와 협업했던 네덜란드 유네스코 의장 카틀레인 페리르(Kathleen Ferrier)는 “모든 사람은 오염되지 않은 밤하늘을 통해 별을 볼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차가 있었다면 그 권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당장 고향집으로 달려가거나 근사한 천문대를 찾아갔겠지만, 무면허의 뚜벅이었고 코로나19는 조금 무서웠다. 멀리 갈 용기 대신, 약간의 오기를 발휘해 도시에서 별을 볼 수 있는 궁리를 하다가 우연히 과학 동아 천문대를 알게 됐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천문 교육 프로그램이 많았는데, 일일 관측 프로그램은 어른도 참여가 가능했다. 서울에 천문대가 있는 것도 신기한데, 위치가 용산 전자상가 부근으로 나와서 더 흥미로웠다. 전자상가 인근의 천문대는 국회의사당 지붕에 산다는 태권V 전설처럼 낯설고 신기했다. 가족 단위로 온 이들이 많았는데, 프로그램 가이드 앞에서 각자의 별자리 지식을 뽐내는 혈기왕성한 꼬맹이 틈바구니에서 같이 별을 구경했다. 최첨단 시설을 자랑하는 으리으리한 천문대는 아니지만 건물 옥상에서 소박하게 별을 구경할 수 있는 천체 망원경과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야광별이 달린 돌림판을 보면서 별자리를 손으로 그려보고, 한쪽 눈을 찔끔 감고 천체 망원경을 통해 별을 구경했다. 아득하게 멀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별이 좋지만, 망원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별도 좋았다. 오랜만에 목이 뻐근할 정도로 올려다보면서 별자리를 찾아보고, 아이들을 보면서 대한민국 과학의 미래가 밝다(?)는 것을 느끼며 소소한 밤하늘의 추억을 하나 쌓고 왔다. 집에 오는 길에 시잉스타의 서울 버전을 한번 꿈꿔봤다. 불 꺼진 거리에서 뭇별을 오롯이 볼 수 있을까? 아니면 항의로 인해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서버가 폭발할까? 둘 중 어느 것을 장담할 수는 없다. 다만 가끔은 별을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삶이 별 볼 일 없을 만큼 시시하더라도 종종 땅 대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별을 세고, 별자리를 이어 보는 것이다. 카틀레인 의장의 말처럼 별을 보는 건 우주라는 한 이불을 덮고 있는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일지도 모른다. 별 볼 일이 있는 사람. 잃어버렸던 꿈을 새롭게 다시 써본다. [email protected]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한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
    과천에 사는 K는 평생 그 동네를 떠나지 않을 작정이다. 걷기 좋은 천변과 길고양이도 넉넉하게 품는 공원이 가까이 있어 좋다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전시와 공연을 사랑하는 K를 단번에 과천국립현대미술관과 예술의전당으로 데려다주는 버스가 오간다. 중학생 시절 성악을 배운 K는 여전히 클래식을 즐겨 듣는다. 먼 훗날 그의 오빠(?)인 슈베르트 묘가 있는 젠트랄프리드호프(Zentralfriedhof)를 방문하고, 겸사겸사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는 것이 꿈. 어느 순간 내가 그 여행의 동반인으로 결정되어 있었는데, 슈베르트와 나란히 베토벤이 묻혀 있고(베토벤의 팬인 슈베르트는 그와 가까이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멀지 않은 곳에 K의 또 다른 오빠인 모차르트의 가묘가 있어 꽤 오랜 시간 둘러볼 계획인 것 같았다. 아는 것도 많고 그 지식을 재미있게 풀어낼 줄 아는 K 덕분에 알아두면 좋을 이야기들을 공짜로 얻어듣곤 한다. 가끔은 꼬드김에 넘어가 공연을 본다. 봄을 앞두고 느닷없이 눈이 내리던 날에 함께 예술의전당에 갔다. 1부는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 Op.43, 2부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e 단조 Op.95 ‘신세계로부터’. 입문자를 위한 공연이라 연주에 앞서 지휘자가 간단히 곡 설명을 해주었는데, 2부 전에 들려준 드보르자크의 말이 너무 괘씸했다. “기관차를 내가 발명할 수 있었다면 내가 쓴 교향곡 전부를 포기해도 좋을 텐데.” 그런데 지휘자의 설명에 따르면 드보르자크는 엄청난 기차 마니아였다고 한다. 아홉 살이 되었던 해, 그가 살던 프라하 교외의 넬라호제베스(Nelahozeves)에 기차역이 들어섰다. 희뿌연 증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거대한 기관차에 온 마음을 빼앗긴 그는 매일 아침 기차역에 찾아가 열차 번호와 특징을 수첩에 기록했다. 새로 개발된 기차를 관찰할 시간이 부족하자 제자인 요세프 수크(Josef Suk)를 보내 기관차 제조 번호를 적어 오게 한 일화를 듣고 나니, 그에게는 기차 마니아보다는 기차광이라는 수식어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를 향한 애정은 그의 음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영화 ‘죠스’에서 긴장감을 돋웠던 신세계로부터 4악장의 도입부를 다시 떠올려보자. 점층적으로 커지는 오케스트라는 명백히 점점 속력이 붙는 육중한 기차의 바퀴 소리와 웅장한 경적을 연상시킨다. 드보르자크가 작곡한 피아노 소품 7번 ‘유모레스크’ 역시 레일 위를 구르는 기차 바퀴의 리듬에서 힌트를 얻은 곡이다. 연주를 듣는 내내 그가 처음 마주친 기차의 모습이 궁금했다. 한적한 강가의 작은 마을, 푸줏간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드보르자크에게 철도 위를 쏜살같이 달리는 기차는 넓은 세계의 상징 같았을 것이다. “다양한 부품이 수많은 부분을 구성하는데 그 모두가 제각기 중요하잖아. 부품 모두가 각기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작은 레버를 움직이면 큰 지렛대가 움직이기 시작해. 크고 육중한데도 토끼처럼 재빠르게 움직이잖아.”1 그가 기차를 사랑하는 까닭은 꼭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여러 악기를 떠오르게 한다. “한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사람도 있다.”(@days4tripper/twitter) 드 보르자크가 음악을 선택한 이유와 결국 만들고자 했던 것 모두가 기차는 아니었을까. 자꾸 그의 마음을 짐작하게 된다.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에게 한때의 기억은 유년시절 가족을 따라 여행했던 뉴잉글랜드와 뉴욕 북부 등지의 풍경일 테다. 특집을 매만지는 내내, 드보르자크의 기차를 상상하듯 어린 옴스테드의 눈 앞에 펼쳐졌을 전원 풍경을 그려볼 수밖에 없었다.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을 도시 한복판에 구현한 “옴스테드식 공원은 이후 수없이 복제되고 확대 및 재생산됐다. 어쩌면 아직도 전 세계의 공원은 옴스테드의 우산 아래 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조경진, 46쪽) 유진 하그로브(Eugen C. Hargrove)는 이러한 도시공원을 저급한 자연의 모조품이고 상상을 통해 인간의 결함을 감추는 설계된 자연이라고 비판했지만, 신세계로부터를 떠올리면 자연을 모사한 공원들을 잠시 변호해주고 싶어진다. 물론 새로운 형식과 가능성을 가진 도시공원이 필요하지만, 옴스테드를 답습하고 있는 도시공원의 풍경은 공원 설계가가 어딘가에서 맞닥뜨린 ‘한때의 기억’일 테니 말이다. 게다가 조경의 재료 대부분은 자연이다. 본래 같은 재료로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어려운 법이다. [email protected] 각주 1. 유윤종, 드보르작 “내가 쓴 교향곡 모두 포기하겠다” 말한 이유는?, 동아일보 2020년 9월 7일.
  • [PRODUCT] 나노 탄소 면상발열 온열의자 맞춤 디자인에 따뜻함을 더한 쉼터
    추운 겨울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따뜻하게 보낼 수는 없을까. 겨울철 버스 정류장을 이용하는 승객을 위해 넥스트원은 나노 탄소 면상발열 온열의자를 만들었다. 탄소 나노 튜브Carbon Nano Tube(이하 CNT)는 탄소 원자로 구성된 매우 작고 얇은 물질로 벌집 모양이 특징이며, 다양한 복합 소재 분야에서 활용된다. 넥스트원의 온열의자는 CNT 신소재와 강화 유리를 접목했으며, 전통의 구들장을 재해석하여 전통 발열 방식으로 재연한 제품이다. 최소 전력으로 열을 내는 방식으로 기존 발열 제품의 20~30% 정도 전력만 소비해도 벤치가 따뜻해진다. 보일러 방식을 사용한 제품은 데우는 데 보통 1시간 이상이 소요되지만, 이 벤치는 30분 이내에 넓은 면 전체에 열이 쉽게 전달된다. 영하 30도 환경에서도 40도를 유지할 수 있다. 또한 대리석의 8배 강도를 가진 강화 유리를 이중으로 사용해서 내구성이 좋다. 와이파이 기능을 탑재하고 있어 원격 제어를 통해 전원이나 시간 및 온도 설정을 할 수 있다. 현재는 서울 서초구, 노원구 등 전국 20여 개 이상 지자체에서 활용 중이다. 로고, 패턴을 입혀 앉음부를 디자인할 수 있어 광고면으로 쓸 수 있다. 세라믹 인쇄 공정을 택해 디자인이 탈색되거나 변색되는 현상을 예방했다. TEL. 055-293-8411~2 WEB. www.nextview.co.kr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집요와 집착 사이
    1. 며칠 전, 두어 달 가량 설계가 진행되고 있는 장소에 다녀왔다. 상하이는 비행기로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비교적 가까운 도시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현장을 자주 방문하기가 쉽지는 않다. 도면으로 구조를 파악하고 사진으로 현장을 살펴보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따른다. 준비해 간 도면을 펼쳐보는 순간 ‘아, 이건 좀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면에서는 그럴듯했는데, 현실 공간을 마주하다 보니 뭔가 설계안에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디자인(혹은 설계 작업)은 항상 어렵고 두렵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시작된 그 작업에 대한 여러 가지 복잡한 궁리는 긴 밤까지 이어졌고, 골똘한 생각에 결국 그날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2. 설계 작업은 실재하는 어떤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창작 행위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창작 행위는 때때로 얼토당토않은 어떤 궁리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태동된 궁리(窮理)는 작업하는 내내 집요(執拗)와 집착(執着) 사이를 무한 반복하다가 결국은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지쳐 멈춰 서게 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차츰 정리된 설계 도면으로 진화한다. 그러면 모든 설계 작업(적어도 나의 경우에 있어서)의 시발점인 ‘궁리’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내가 이 말을 좋아하는 것은 우선 그 어감이 가지는 소박함에 있다. 권위적이지 않고, 어떤 발칙한 생각을 해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그저 궁리일 뿐이니까). 정리되지 않은, 아직 불확정적인 생각들을 이리저리 상상해 보는 것이므로, 아니다 싶으면 누가 눈치 채기 전에 간단히 포기해 버릴 수도 있다. 아무도 내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궁리에는 장소의 제약이 거의 없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회의장에서도, 하염없이 막히는 도로 위에서도,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가능하다. 그런데 궁리는 가만히 한곳에 멈추어 있지 않고 집요와 집착이라는 두 지점을 부지런히 오간다. 이게 문제다. ‘집요함’은 때때로 좋은 에너지를 유발한다. 반면에 ‘대충’ 혹은 ‘대강’이라는 말은 생활 현장에 있어서 지혜로운 단어로 이해될 수 있지만, 디자인에서는 독이 되는 단어들이다. 좋은 디자인은 집요함이라는 동력을 필요로 한다. 이에 반해 집착은 집요함이라는 동력이 너무 세게 작동한 경우다. 집착은 버려야 하는 것이다. 너무 멀리가면, 혹은 너무 오래 머물면 되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완전히 그 아우라에 장악되어 폐인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관계에서나 디자인에서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 치명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중에는 비상(砒霜)처럼 경우에 따라 약이 되는 것도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관성(慣性)이다. 이것은 제어할 수 없는 힘이다. 집착에 갇힌 궁리는 좋은 디자인으로 진화하지 못하고, 고사하고 만다. 얼핏 보면 그냥 낙서 같은 드로잉이지만 때로는 아주 중요한 설계의 단초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이렇게 기록된 이미지들은 그 자체가 동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통해서 더 발전된 생각으로 진화한다. 3. 이쯤에서 다시 정리해 보자. 설계 작업에 있어서 궁리는 아주 유용한 행위이며 그 주체는 전적으로 디자이너 자신이다. 이것은 충분히 즐길 만한 가치를 가지지만 집요함이라는 동력을 얻어야 하고 집착을 경계해야 한다. 집요와 집착 사이를 이리 저리 오갈지라도 최종 종착지에서 집착까지의 거리는 멀수록 좋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들이 기록되고 관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천재가 아니므로. 4. 나는 ‛design’, ‛incubator’라고 새겨진 두 개의 스탬프를 가지고 있다. 십여 년 정도 된 것 같다. 작업 과정을 메모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 그러니까 ‘궁리’들을 모아놓은 노트에 부여하는 작은 별칭인 셈이다. 몇몇 학교에서 설계 스튜디오를 진행하면서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에게도 이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design incubator’에는 덜 익은, 날 것 같은 생각에서부터 설계 치수가 제법 구체적으로 명시된 드로잉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이미지들이 두서없는 텍스트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어차피 인큐베이터의 속성이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정상적으로 출산된 아기에게 인큐베이터가 필요 없듯이, 이 노트는 잘 정리된 책자와는 완전히 격(格)이 다른 물건이다. 지면에 기록하는 이미지들은 가장 기본적인 도구들, 즉 연필 혹은 펜으로 생성된다. 무엇보다 간편하기 때문이다. 용도가 단순한 물건일수록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드로잉들이 무슨 예술적인 가치를 가지거나 그래픽적으로 아름다운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럴필요가 없다. 집요와 집착 사이를 부지런히 오고 갔던 생각들을 그저 형상화해서 기록하면 되는 것이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오래된 노트들을 다시 열어볼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이미 시공 단계를 거쳐 준공된 작업들도 여럿 있지만, 열정적인 작업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한 이유들로 인해 사산(死産)된 작업들, 어정쩡한 집착과 치기어린 객기 때문에 좋은 디자인으로 진화되지 못한 채 지면에 감금된 작업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민낯을 공개하는 것 같아 민망하다. 5. 작업의 초기 드로잉은 대체로 간단한 메모로부터 시작된다. 상상 속에서 사이트를 대략 가늠해보고 중요한 키워드 혹은 기호 비슷한 것들을 끼적여본다. 작업의 순서는 전혀 의미가 없고 생각나는 순서대로 기록한다. 몇 십만 평의 대지를 다루는 작업에서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철제 펜스의 기둥 두께를 가장 먼저 메모하기도 한다. 그래도 어느 정도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평면도 비슷한 드로잉이라도 생산해 낼 수 있었다면 그날의 궁리는 성과가 좋은 셈이다. 6. 평면과 단면은 공간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드로잉이다. 조경 설계는 기본적으로 공간을 구축(構築)하기보다는 공간을 직조(織造)하는 행위에 가깝다. 여러 조형 요소들이 수직적으로 적층되어 있기보다는 수평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이룬다. 그것들은 빈틈없이 하나의 평면을 긴밀하게 구성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 구성이 가지는 기능을 잠시 삭제해 보면 남는 것은 패턴뿐이다. 평면도라는 것은 결국 패턴으로 시각화된다. 물론 도상의 모든 패턴들은 단순한 그래픽이 아니라 기능을 가진 형태로서 기능하지만, 어떤 요소들은 동일한 성능을 발휘하면서도 다양한 패턴으로 형상화될 수 있는, 그러니까 기능보다 형태가 좀 더 중요한 디자인 요소로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 경우 어떤 형태(혹은 패턴)를 만들지는 전적으로 디자이너에게 우선권이 있다. ‘우선권’이라기보다는 ‘책임’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겠다. 아무튼 디자이너가 생산해내는 드로잉의 대부분은 바로 이 작업에 집중되어 있다. 7. 공간을 직조하는 행위, 즉 최종적으로 패턴을 디자인하는 작업 방식에는 대체로 두 부류가 있다. 첫 번째는 드로잉을 우선하는 부류다. 이들은 대부분 설계 경험이 많은 사람들인데, 손이 빠른 사람들이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대안들을 생산해 낸다. 편차가 많기는 해도 그 속에 썩 괜찮은 대안이 존재할 확률은 대단히 높다. 두 번째 부류는 궁리를 우선하는 부류다. 나도 이 부류에 속한다.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기 전까지는 가급적 드로잉을 시작하지 않는다. 많이 망설이면서 작업하는 스타일이다. 생산되는 대안의 수는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궁리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시행착오는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런데 이 부류가 가지는 치명적 단점은 궁리가 길어질수록 집착이 강해지고 결국은 자가당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8. 편의상 ‘W프로젝트’라고 부르겠다. 작은 지방 도시에 있는 오래된 온천장을 제법 규모가 큰 온천형 리조트로 조성하는 작업이었다.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이 프로젝트는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니까 드로잉과 설계 도면만 존재할 뿐이다. 온천욕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업이었다. 이 프로젝트에서 조경 설계의 중요한 작업은 야외 스파 공간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러 나라의 노천 온천이나 스파 리조트 같은 곳들을 다녀보긴 했지만, 설계 작업을 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초기안의 디자인 제안은 스파(spa)와 식물원(botanic garden)을 결합하는 아이디어로 출발했다. 이른바 ‘보태니컬 스파(Botanical Spa)’. 여느 워터파크나 스파 리조트에서 보듯이, 식물 요소들은 대체로 수 공간 주변을 치장하거나 기능적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반면에 우리가 제안한 W프로젝트는 마치 식물원 안에 야외 스파를 만드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어떤 새로운 개념을 잘 설명하려면 적절한 도구가 필요하다. 특히 건축주가 경험이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드로잉은 디자이너의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지만, 의사소통을 위한 최적의 도구는 아니다. 좀 더 친절하고 읽기 쉬운 그래픽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화된 드로잉’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W프로젝트를 위한 진화된 드로잉은 좀 더 구체화된 평면 이미지(패턴 이미지)와 그것을 입체화한 개념 모형이었다.이 개념 모형은 우리가 설계 작업 과정에서 생산해내는 ‘스터디 모형(study model)’과는 좀 달랐고 상당히 사실적인 표현이 가미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드로잉들이 건축주의 공감을 끌어내는 것에 실패했다. 그것은 이미지, 패턴 혹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왜 식물원과 스파를 결합해야 하는지를 효과적으로 설명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건축주는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이 개념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두 번째 대안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직선은 공간을 장악하는 힘이 강하다. 아무리 가는 선이라도 시점과 종점을 단번에 거침없이 연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막강한 힘을 가진다. 직선은 곡선과 반대되는 말이지만 ‘자연’과도 대척점에서 있는 말이기도 하다. 두 번째 대안은 주변의 자연과는 사뭇 구분되는, 직선이 강조된 형태였다. 다양한 높이에서 야외 스파 영역을 부감할 수 있는 조건에서는 공간이 가지는 조형적 질서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평면도는 공간을 가장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기는 하나 주관적인 시점을 상실하기 때문에 공간을 역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모형을 만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형은 설계자의 생각을 검증하는 유용한 도구이면서, 타인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효과적인 장치다. 여기에 더해 다양한 카메라 작업을 통해 그 효과를 배가 시킬 수 있다. 아무튼 두 번째 대안은 건축주의 동의를 얻음으로써 설계안으로 발전할 동력을 얻게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첫 번째 안에 대한 미련을 접을 수 없었다. 이런 것이 집착이다. 그런데 집착도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기본 설계가 어느 정도 정리될 무렵, 우리는 또다시 세 번째 대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건축주도 참 집요하다. 적게 잡아 이번이 세 번째 대안일 뿐 그동안 소소한 조정안까지 포함하면 열 번 이상의 조정 과정을 거치는 중이었다. 설계 작업이라는 것이 원래 이런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번 대안은 직선 요소를 대폭 완화시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자연과 분리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완전히 다른 대안이 되어 버린다. 이 지점에서 디자이너는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진다.작업은 여기까지만 진행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정리된 설계안은 결국 현실 공간에 등장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이 중단되었다고 들었다. 9. 설계 작업은 어떤 의미에서 집착이라는 수위를 넘나들면서 집요하게 ‘궁리’를 지속시키는 과정이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흥분과 걱정이 동시에 존재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금전적 대가는 바로 그 과정을 견디고 지나는 수고에 대한 보상인 셈이다.이 시간에도 수많은 조경가들이 이 지난한 통로를 지나고 있다. 드로잉을 생산하고, 설득하고, 목청을 한껏 높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어디 이것뿐이랴. 재미가 있지 않은가. 고요한 작업실에 앉아 백지를 잠자코 바라보는 순간이 행복하다. 이 궁리의 끝이 어디인지를 상상해보는 것도 즐겁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박승진은 아직까지 조경 설계라는 마당을 떠난 적이 없으며, 이 마당에 맞닿아 살고 있는 다양한 이웃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웃거리고 있다. 조경이라는 특징을 잘 보여줄 수 있는 가치 있고 정교한 작업을 늘 꿈꾸지만 그것도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읽고, 쓰고, 가르치며, 배우는 일상에 감사하고 있다. 1965년 서울 생으로, 성균관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 디자인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 조경설계 서안에서의 설계 실무를 거쳐, 2007년에 디자인 스튜디오 loci를 열었다.
  • [에디토리얼] 성큼 다가온 광주 IFLA 2022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가 반년 앞으로 다가왔다.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광주광역시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릴 이번 행사의 주제는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다. ‘다시, 조경의 공공성’을 소환해 기후 위기 시대의 조경을 논의할 IFLA 2022는 코로나19의 긴 터널을 통과한 국내외 조경가들의 열띤 토론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3월호에는 IFLA 2022의 주제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미리 만나보는 특집을 마련한다. 더 상세한 내용은 대회 공식 홈페이지(ifla2022korea.com)에서 살펴볼 수 있다. 기획 의도를 밝힌 조경진 조직위원장(한국조경학회 회장)의 글에서 볼 수 있듯, IFLA 2022는 전 세계 조경가들이 모여 조경의 미래 좌표를 구상하는 자리일 뿐만 아니라 국내 조경계의 활로를 여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가 말하듯 이번 행사는 세계 조경의 최신 흐름과 글로벌 의제를 공유하는 기회이자 한국 조경의 성과를 알리는 기회이며 조경 문화의 과거와 미래를 잇고 엮는 역할을 할 것이다. 배정한(조직위 학술위원장)의 글은 대회 주제의 의미를 짚어본다.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는 동시대 도시가 마주한 기후변화, 인구 감소, 도시 쇠퇴와 재생, 도시 정의와 형평성, 라이프스타일과 미감의 다양성 등 복합적 난제를 풀어갈 조경의 사회‧문화적 좌표라고 할 수 있다. 김아연(조직위 기획위원장)은 IFLA 2022의 일정과 장소, 강연, 답사 등 다양한 사전 행사와 본 행사, 사후 행사의 주요 내용을 꼼꼼히 소개한다. 2월 말로 마감한 논문 초록 접수는 추후 연장될 예정이므로 마감 날짜를 놓친 독자들은 홈페이지의 공고문을 꼭 확인하시기 바란다. 오화식(조직위 산업‧재정위원장)은 대회 기간 중 한국조경협회 주관으로 개최될 조경산업전(K-랜드스케이프 아키텍처 엑스포)의 방향, 프로그램, 조직을 안내한다. 이번 산업전은 한국 조경 업계가 내일을 향해 ‘리:스타트’하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은다. 김영민(조직위 학생위원장)의 글은 IFLA 학생설계공모전과 학생 샤레트의 주제, 진행 방식, 의의를 소개한다. 그의 말처럼 IFLA 2022의 학생 프로그램은 다음 세대 조경의 새로운 향방을 미리 그려보고 지역의 한계를 넘어 세계적인 비전과 안목을 공유할 기회가 될 것이다. 서영애(조직위 홍보위원장)는 IFLA를 비롯한 여러 국제 행사 참가 경험을 되돌아보며 초록 접수와 등록, 개회 행사와 기조 강연, 발표와 포스터 전시, 폐막식 등의 이모저모를 살핀다. 김태경(한국조경학회 수석부회장)의 글은 30년 전 가을, 서울, 경주, 무주에서 열렸던 IFLA 1992의 추억과 에피소드를 재생한다.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듯, 1992년은 세계조경가대회 개최를 계기로 한국 조경이 도약한 해였다. 편집부 이수민 기자가 옛 잡지를 다시 펼쳐 IFLA 1992의 다양한 장면과 기억을 재구성한다. 아울러 이달 지면에는 IFLA 2022의 기조강연자 중 한 명인 단 로세하르더(Daan Roosegaarde)의 최근 연작, 드림스케이프를 싣는다. 네덜란드 출신의 아티스트이자 글로벌 혁신가인 단 로세하르더는 사람, 기술, 공간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상상력 넘치는 작업을 선보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디자인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는 그의 작업 태도를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스혼헤이트(schoonheid)’다. 김모아 기자의 인터뷰에서 볼 수 있듯, 이 네덜란드어 단어는 “창조성에서 나오는 아름다움, 공기와 에너지에서 비롯된 깨끗함”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품고 있다. “내게 디자인은 의자나 램프를 제작하는 일이 아니라 삶을 개선하는 일이다. 상품이든 도시든 경관이든 디자인을 할 때 스혼헤이트를 기준으로 삼아 아름답고 사용하기 좋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창조해야 한다.” 그로우, 어반 선, 시잉 스타, 스파크로 이어지는 연작 드림스케이프는 로세하르더의 작업에서 우리가 풍부한 상상력의 예술가, 머릿속 아이디어를 구조화하는 건축가, 디자인과 기술을 융합하는 엔지니어, 환경 문제를 고민하는 환경운동가의 면모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이유를 생생히 보여준다. 그의 작품을 종이 잡지에 온전히 옮기기란 힘겨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면에 첨부한 QR코드에 접속해 드림스케이프에 담긴 로세하르더의 상상과 실험을 마음껏 감상하시길 권한다. [email protected]
  • [풍경 감각] 님도 즐!
    2000년, 온라인 게임이 유행이었다. 집에서 ‘라이온 킹’이나 ‘고인돌’ 같은 걸하던 나와 친구들은 같은 게임, 같은 서버에서 캐릭터를 만들어 함께 모니터 속을 여행했다. 그런데 레벨이 높아질수록 초등학생이 아닌 척 해야 했다. 고급자용 사냥터에서는 ‘그룹사냥’이 필수였지만 어린이를 잘 끼워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딩’은 ‘노매너’라서 같이 사냥할 수 없다고 했다. 그곳에는 일종의 규칙이 있었다. 때론 불만족스러운 역할을 맡더라도 공격수는 공격하고 보조자는 보조하면서 던전 끝에 다다를 때까지 각자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파트너의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욕을 하면 안 된다. 욕심이 나도 다른 사람의 아이템에 손대지 않는다. 다른 던전을 찾아가기 귀찮더라도 다른 유저가 게임 중인 사냥터에 난입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룰을 어기면 다른 유저들은 게임 룰을 알려주는 대신 “님 초딩이셈? 즐!”을 외쳤다. 요새는 ‘노 키즈 존’ 팻말이 걸린 공간을 자주 마주친다. 대개 ‘죄송하지만 다른 손님들의 편의를 위하여…’로 시작하는 안내문은 곱게 윤색한 버전의 “님 초딩이셈? 즐!”로 보인다. 시간과 돈을 들여 방문한 곳에서 ‘즐겜’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우리가 어린이에게 줄 것은 “즐!”이 아니라, ‘그룹사냥’에 끼워주고 ‘룰’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아직 어리기에 철이 없고 규칙을 모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우리가 그랬고, 또 우리의 조카나 아들딸이 그렇듯이. 이 사실을 잊은 안내판을 보며 혼자 말해본다. “님도 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