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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던스케이프] 관광의 목적
    바야흐로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피서와 달리 여행에는 방문과 경험이라는 적극적인 행위가 따른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도전이 수반되는 여행, 벅차오르는 감동도 있지만 때로는 예기치 못한 고통스러움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다. 여행에 해당하는 travel의 어원은 travail(고통, 고난) 아니던가. 그에 반해 눈으로 보고 안다는 뜻으로 새겨진 관광(觀光)은 주체의 시선이 더 강조되는 단어다. 눈으로 확인하고 참관하며 견학하는 의미가 담긴 관광을 이야기할 때 17~18세기 영국에서 크게 유행한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빼놓을 수 없다. 외딴 섬 영국에서는 사회가 안정되자 상류층 자제들을 대륙으로 보내 세련된 취향과 외국어를 학습하게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견문을 넓히고 지식을 확장하는 목적을 가진 그랜드 투어는 근대적 의미의 관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영국인 토머스 쿡(Thomas Cook, 1808~1892)은 570명의 관광객을 모집하여 영국 레스터(Leicester)에서 러프버러(Loughborough)까지 이동하는 기차 여행을 시도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관광은 서서히 오늘날 통용되는 보편적 개념으로 자리 매김했고, 관광의 목적 또한 교양을 학습하는 것을 넘어 위락과 휴식, 기분 전환 등 즐거운 경험을 누리는 데까지 확장됐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선진 취향을 학습하고자 했던 그랜드 투어가 계몽주의적 측면에서 근대적이라면, 토머스 쿡의 기차 여행은 자본주의 시대에 급부상한 시민 계층을 여행객으로 흡수하고 산업혁명의 상징인 기차를 여행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근대적이다. 그런데 관광의 대중화에는 각종 매체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컸다. 쿡이 그 시절에 수백 명의 여행객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도 광고라는 방식을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급성장한 사진술과 인쇄술, 출판 기술 등 새로운 기술이 관광이라는 아이템과 엮이면서 엽서와 지도, 브로슈어 등 다양한 관광 안내물이 쏟아져 나왔고, 이러한 인쇄물은 다시금 관광의 대중화를 촉발하는 역할을 했다. 한반도에 근대 관광이 정착하게 된 양상은 표면적으로 서구와 닮았다. 개항 이후 왕족과 외교관 등의 관료들이 가장 먼저 해외 여행의 특권을 누렸고, 점차 선진 문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식인 계층을 중심으로 여행이 확산되었다. *환경과조경414호(2022년 10월호)수록본 일부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여행과 관광으로 본 근대』, 두산동아 한국문화사 시리즈 22, 2008. 김선정, “관광 안내도로 본 근대 도시 경성: 1920~30년대 도해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연구』 33, 2017, pp.33~62. 한경수, “한국의 근대 전환기 관광(1880~1940)”, 『관광학연구』 29(2), 2005, pp.443~464. 阪野祐介·김윤환, “식민지도시 부산을 그린 요시다 하츠사부로(吉田初三郞)의 조감도(鳥瞰圖)와 타소표상(他所表象)”, 『문화역사지리』 33(2), 2021, pp.49~68.
  • 자연 그대로의 자연, 네이처 갤러리 래미안 갤러리 리뉴얼
    지난 9월 16일, 삼성물산 건설부문은 ‘래미안 하우스파티’를 열어 새롭게 리뉴얼한 래미안의 외부 공간 ‘네이처 갤러리’를 공개했다. 서울 송파구에 마련한 모델정원을 배경으로 공연을 열고, 투어 프로그램을 진행해 예술·문화 활동과 공간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래미안 갤러리 리뉴얼 프로젝트는 2021년 시작됐다. 김아연(서울시립대학교 교수, 스튜디오 테라 대표)이 이끄는 시대조경 팀(서울시립대학교 조경설계연구실+MDL+스튜디오 테라)이 컨설팅, 실시설계, 현장 감리를 맡았다. 모델정원 시공은 삼성물산 건설부문 조경그룹, 주원조경, 연수당이 진행했다. 리뉴얼 프로젝트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경쟁 속에서 점점 관행적으로 변해가는 아파트 조경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좀 더 본질적인 차별화 전략을 찾기 위해 래미안 조경의 변화 과정과 현황, 국내외 트렌드, 소비자 성향을 분석해 래미안만의 조경 철학과 비전, 추진 전략을 제안하는 ‘조경 전문가 컨설팅’을 진행했다. 김아연은 주거와 일상의 근본적 가치를 다시 묻고 이론적 근거에 기반을 둔 전문적 해답을 찾고자 했다. 이를 위해 래미안 단지 20곳을 답사하고, 주거 문화의 지향점을 고민했다. 분석 결과, 네 가지 내부적 성찰점과 외부적 대응의 필요성을 도출할 수 있었다. 내부적 성찰점을 먼저 살펴보면, 첫째, 아파트 조경은 브랜드 간 경쟁 심화로 인해 시각적 효과의 특화에 치중하고 있다. 둘째, 살면서 더 좋아지는 경관의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유행에 민감한 조경은 쉽게 질리는 조경으로 이어지고 있다. 셋째, 근본적 주거 가치 구현의 노력보다 주거 상품 아이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넷째, 큰 맥락보다는 소규모 공간과 시설물 특화 전략에 치중하고 있다. 외부적 대응의 필요성을 살펴보면, 첫째, 기후변화, 팬데믹 등 지구환경적 이슈와 주거 공간의 관계성이 대두되고 있다. 둘째, 문화와 여가 방식의 변화, 기술 변화에 따른 조경 공간의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 셋째, 자연의 작동성과 진정성을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넷째,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전략 개발이 필요하다. 도출한 결과를 바탕으로 래미안 조경의 방향성을 자연의 고유한 생태적, 경관적, 기능적 특성에 기반을 둔 ‘자연 그대로의 자연’으로 설정했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아파트 단지에 도입함으로써 원서식처의 고유성과 래미안 자연의 독창성으로 자연 본연의 진정성(original nature)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전략으로, 원경관의 회복, 사람 중심의 공간과 경관, 불필요한 장식과 시각적 복잡성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간결한 디자인을 제시했다. 이로써 입주민들은 아파트 조경을 통해 자연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며 일상 속 자연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관성적이고 관행적인 아파트 조경 설계 방법론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 *환경과조경414호(2022년 10월호)수록본 일부
  • 지하철 환풍구를 활용한 도심 속 무더위 쉼터 제3회 공공디자인 국민아이디어 공모전 대상
    지난 6월 17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 ‘제3회 공공디자인 국민아이디어 공모전’을 개최했다. 이 공모전은 국민들이 직접 일상 속 불편 요소를 찾아 해결 방안을 모색함으로써 공공디자인의가치와 중요성을 경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올해는 좀 더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끌어내기 위해 ‘무한 상상, ○○디자인’이라는 슬로건을 세우고 공공캠페인 분야를 신설했다. 참가 자격도 일반부와 학생부로 확대했다. 일반부 대상에는 박성민·조재민의 ‘지하철 환풍구를 활용한 도심 속 무더위 쉼터’가 선정됐다. 지하철 환풍구의 불쾌한 공기를 시원한 바람으로 바꿔 도시의 온도를 낮추고, 환풍구 주변 공간을 시민 쉼터로 활용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공공시설을 공공디자인을 통해 개선하고, 도시 생활 환경 개선과 사용자 편의를 함께 꾀한 복합형 공공 시설물이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략)... *환경과조경414호(2022년 10월호)수록본 일부
  • 건축물 벽면녹화 네이처 제16회 경기도 공공디자인 공모전 대상
    지난 9월 21일 ‘2022 경기도 공공디자인 공모전’의 대상작이 발표됐다. 올해 16회를 맞이한 공모전은 일상 생활에서 접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공공디자인 관점으로 접근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올해의 주제는 ‘사람과 환경을 위한 업사이클링 공공디자인’이었다. 총 103점의 작품이 접수됐으며 온라인 심사로 20점을 입상작으로 선정했다. 이 중 상위 9점을 대상으로 본선 진출자와 디자인 전문가가 함께하는 워크숍을 실시했고, 최종 심사를 통해 이관영·김강현·유진(서울예술대학교)의 ‘건축물 벽면녹화 네이처(nature)’를 대상작으로 선정했다. *환경과조경414호(2022년 10월호)수록본 일부
  • [기웃거리는 편집자] 스포트라이트와 서포트
    학교를 다녀오면 야구 좋아하는 아빠 때문에 매일같이 TV에 삼성라이온즈 경기가 틀어져있었다. 자연스럽게 야구를 접하게 됐고 종종 부모님을 따라 야구장을 찾았다. 첫 야구 직관은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삼성라이온즈와 해태타이거즈 경기였다. 어느 팀이 이겼고 경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세세한 부분은 기억나지 않지만, 회색빛 출입 통로를 지나 만났던 광활한 풍경을 잊을 수 없다. 당시 느낀 감정을 책의 한 구절로 표현해본다. “3루 쪽 특별 내야로 가는 계단을 다 올라간 순간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질렀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확 트이면서 그 끝에 부드럽고 거뭇거뭇한 그라운드,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베이스, 똑바로 그어진 하얀 선, 정성스럽게 손질된 푸른 잔디가 펼쳐져 있었다. …… 그리고 그때 마침 우리의 도착을 기다렸다는 듯이 조명이 켜졌다. 칵테일 광선을 받은 구장은 하늘에서 내려온 우주선 같았다.”1 잊을 수 없는 풍경 때문인지 야구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환경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야구팬이 됐다. 시간이 된다면 직접 경기장에 가 야구를 관람하는 편이다.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보면 다양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가장 먼저 보이는 사람은 선수와 코치, 감독이다. 승패를 가르고 팬들의 일희일비를 결정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수많은 관중의 시선이 모이고 가장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반면 스포트라이트는커녕 이런 사람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림자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다. 많은 사람이 이벤트에 참여하고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는 운영자, 티켓 발권과 확인을 하는 매표소 직원, 관중들이 다치지 않게 지켜보고 보호해주는 사람 등, 하나의 경기에는 스포트라이트와 서포트가 공존한다. 이 두 가지 톱니바퀴가 잘 맞물려 돌아가야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경기가 만들어진다. 몇 년 전 방영한 TV 드라마 ‘스토브리그’(SBS)는 서포터들의 애환을 잘 담았다. 스토브리그는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을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으로 계약 갱신과 트레이드 등이 이루어지는 시기다. 이 드라마는 만년 리그 꼴등 팀 ‘드림즈’에 새로 부임한 단장과 구단 사람들이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이야기다. 보통의 스포츠 장르 드라마나 영화라면 꼴찌 팀이 대회에서 극적으로 승리를 하는 내용으로 흘러가겠지만, 스토브리그는 야구 선수들의 이야기보다는 구단을 운영하는 프런트들의 사연과 스토브리그에 펼쳐지는 사건을 다룬다. 뒤에 숨겨져 있어 잘 보이지 않던 그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느껴졌는데, 내가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지난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사흘간 광주에서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가 개최됐다. 나는 사전 행사인 학생샤레트 진행을 위해 대회 일정보다 일찍 광주로 향했다. 낯선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학생들의 숙소 체크인을 돕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내려갔는데도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자꾸 불시에 터져 몹시 당황했다. 게다가 언어의 장벽으로 소통까지 잘 되지 않으니 프로그램을 잘 마칠 수 있을지 무서워지기도 했다. 모든 슬픔에는 끝이 있다더니 시간은 흘렀고 마지막 일정인 최종 프레젠테이션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스토브리그는 한국 시리즈에 진출한 드림즈 선수들이 경기를 치르기 위해 그라운드로 향하고, 그 뒤편에 선 구단 사람들이 응원의 박수를 치며 선수들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끝난다. 사흘간 진행된 학생샤레트가 끝난 후 열린 시상식에서 그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상장 수여를 위해 무대 위로 수상자들을 인솔했다. 시상식이 끝나고 기념 촬영을 위해 무대에서 내려와 수상자들에게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그때 친 박수는 학생샤레트를 큰 탈 없이 끝낸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상이자 격려였다. [email protected] 각주 1. 주인공인 노수학자와 그의 가사도우미 나, 나의 아들 루트가 함께 일본 프로야구팀 한신타이거즈 경기를 보러간 야구장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한 구절이다. 오가와 요코, 김난주 역, 『박사가 사랑한 수식』, 현대문학, 2014, p.126.
  •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정신을 모르던 시답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
    “머리 비우는 데 등산만 한 게 없어.” 친구의 말에 서울 외곽을 향했다. 사실 말만 거창했지, 가방든 건 이온 음료 한 병이 전부. 낮은 산등성이에서 가벼운 산책을 즐길 생각이었다. 중간에 나타난 황구의 농락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누런 강아지는 산 인근에서 절밥을 얻어먹고 자란 것 같았다. 꼬리를 흔들어대더니 나와 내 친구가 마음에 든 건지 졸랑졸랑 쫓아와 가이드 시늉을 했다. 길 안내하듯 앞장서 걷다가, 우리가 뒤처진다 싶으면 뒤에 와 종아리 뒤를 콧등으로 밀며 걸음을 독촉했다. 정신을 차리니 바위산 한복판이었다. 칼바위능선, 얼마나 끔찍했는지 그 이름이 아직도 기억난다. 앞도 뒤도 모두 가파른 바위 언덕이었다. 그제야 전문 장비로 중무장한 등산객들이 러닝화에 장갑 하나 없는 우리를 보며 혀를 차고 있다는 걸 알았다. 다행히 나와 친구를 불쌍히 여긴 젊은 부부가 돌산 타는 법을 알려주었고, 봉우리를 향하는 길옆에서 산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다. 여기까지 온 김에 꼭대기까지 가자는 말에 손사래를 치고 줄행랑을 쳤다. 지긋지긋한 바위산을 도망치듯 내려오며 자꾸 뒤를 돌아본 건, 우뚝 솟은 암반의 압도적인 수직 경관이 무서우면서도 신기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아야 아 름답다더니 거대한 암석 봉우리는 돌의 표면을 세세히 살피게 했다. 바람과 물이 남긴 흔적인지, 돌 위에 새겨진 잔주름을 발견하자 딱딱한 표면이 일렁이는 파도의 물결처럼 부드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광주에서는 길고 긴 수평선을 봤다.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의 마지막 일정인 포스트 투어, 나는 순천과 낙안읍성을 향하는 코스에 인솔자로 동행했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순천만국가정원을 한 번도 안 가본 사실이 내심 부끄러웠던 참이었다. 늘 사진을 통해 조감으로 본 찰스 젱스의 언덕을 실제로 마주하니 텔레토비 동산처럼 귀엽기보다는 대릉원의 고분처럼 웅장했다. 굽이치는 언덕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여러 나라의 정원을 구경하다가 스카이 큐브에 올라탔다. 걷지 않아서 좋다며 박수를 짝짝 대며 창밖 풍경을 찍다 보니 너른 땅이 나타났다. 그렇게 만난 순천만 습지는 너무 넓고 아름다워서 겁이 났다. 태풍이 북상하는 중이라 세찬 바람이 불었는데, 그때마다 수십만 개의 잎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파도처럼 온몸을 덮쳤다. 앞뒤에 걷던 일행과 멀어지고, 그 공백을 바람과 잎 소리가 채울 때면 영화 ‘그래비티’ 주인공처럼 우주에 버려진 기분에 휩싸였다. 영원히 이 갈대숲을 헤매야 할 것 같은 공포감 말이다. 흔히 조경의 특징으로 살아있는 소재(식물)를 쓴다는 점을 꼽지만, 나는 지형을 다룬다는 점을 좋아한다. 조경설계는 결국 땅에서 출발한다. 평평하거나 갑자기 치솟거나 가파르게 내리막을 그리거나 물결처럼 일렁거리거나, 지형은 그 자체로 다양한 심상을 만든다. 지형은 만드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더불어 땅에는 시간이 담기기 마련이다. ‘지형도’를 지도의 한 종류가 아닌 어떤 은유로 사용하듯, 지형은 땅의 생김새를 넘어 역사나 문화, 어떤 맥락을 담은 것으로 이해된다. 그 지형의 아름다움이 서울이 아닌 곳에만 있는 줄 알았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빈 땅이 많아지고, 지형은 더욱 다채로워질 테니까. 그래서 “서울의 지형은 정말 환상적”이라는 렌조 피아노의 말에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던 것이다.1 내로라하는 건 축가의 말에 혹한 것일까. 그의 말처럼 갑자기 서울이 구불구불하고, 푸른 산을 도심에서 볼 수 있고, 큰 강줄기를 끼고 있고, 바다가 가까운, 극도로 풍요로운 도시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웬만한 곳에 서도 산등성이의 곡선을 볼 수 있고, 마음을 찡하게 하는 거대한 수평과 수직의 풍경은 없어도 오르락내리락하는 땅을 고불고불가로지르는 골목길에서는 복잡다기한 도시사가 읽힌다. 좀 늦긴 했지만 발붙이고 있는 삶의 터가 아름답다는 걸 깨닫는 일은 꽤 즐거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표현은 너무 진부해서, 좋아하는 편지글의 일부를 빌려 왔다. “나는 정신을 2004년에 처음 만났다. 민선 언니 소개로 나간 자리였다. 난생 처음보는 한 작은 애가 시작부터 영롱한 무엇이었다. 완전히 달랐다. …… 어떤 해는 정신을 한 번도 못 보고 지나가도 정신을 모르던 시답잖은 날들에 비하면 아름답다.”2 [email protected] 각주 1. “세계적 건축가 KT 새 사옥, 12m ‘공중부양’”, 「중앙일보」 2021년 6월 16일. 각주 2. 홍진경, ‘정신 생일을 축하해’, 2019년 9월 14일.
  • [PRODUCT] 오픈형 기능성 휴게 시설 스트라다 셰이드 박스 구조에서 벗어난 선형 구조의 퍼걸러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전염에 대한 우려로 인해 사람들이 밀집하거나 밀폐된 도심의 공간을 꺼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예건의 스트라다 셰이드(Strada Shade)는 팬데믹 시대의 환경과 도심지의 긴 가로 공간을 고려한 휴게 시설이다. 일반적으로 벽이나 기둥으로 둘러싸인 박스 구조의 퍼걸러와 달리 벽과 기둥의 활용을 절제하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벤치 등을 배치해 선형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안에서 밖을 봤을 때 시선을 가리는 요소가 없어 공간에 개방감을 불어 넣는다. 이러한 열린 공간은 밀폐된 공간 속 전염의 우려를 줄이는 데 도움을 준다. 선형 구조는 도심지의 긴 가로 공간에 적합하기도 하다. 대상지의 여건에 따라 시설의 길이를 늘이거나, 기능을 추가할 수 있다. 하나로 연결된 주된 선형을 중심으로 벤치를 지그재그로 가로지르게 배치하면 퍼걸러 내부에 다양한 포켓 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 곳곳에 충전기, 의자 등받이 등을 설치해 편의를 꾀했다. TEL. 031-943-6114 WEB. yekun.com
  • [에디토리얼] 50×15,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
    2년 가까이 매달렸던 책 한 권의 편집을 마무리하고 조금 전 인쇄소로 최종본 파일을 넘겼다. 이번 달 잡지가 독자 여러분에게 도착할 때쯤 신간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도서출판 한숲, 2022)도 펼쳐볼 수 있다. 1972년 한국조경학회 창립을 기점으로 잡는다면, 한국 현대 조경은 이제 50년의 역사를 넘어서고 있다.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은 역동하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도시와 경관, 지역과 환경, 삶과 문화의 틀과 꼴을 직조해온 조경 50년사의 주요 담론과 작품을 ‘기록’하고 ‘해석’한다.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2020년 여름, 한국조경학회는 ‘한국조경50 편집위원회’를 구성해 책의 방향과 구성을 기획하기 시작했다.1 필자 섭외와 원고 집필, 편집 과정에 2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고, ‘리:퍼블릭 랜드스케이프(re:public landscape)’의 이름으로 ‘다시, 조경의 공공성’을 소환해 토론의 장을 펼치는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World Congress 2022)’ 개막에 맞춰 책을 출간하게 되었다. 『한국 조경 50년을 읽는 열다섯 가지 시선』 출간의 목적은 한국 조경의 ‘다음 50년’을 설계하는발판을 마련하는 데 있다. 미래를 전망하고 예비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성과와 한계를 다각도로 되짚고 다시 촘촘히 읽어내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 한국 조경 50년의 이야기와 성과를 ‘기록’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책의 의도가 자리한다. 열다섯 가지 서로 다른 시선으로 지난 50년을 탐사하는 이 책은 중성적 아카이브나 백서보다는 해석적 비평서에 가깝다. 책의 1부와 2부는 한국 조경 50년이 남긴 지형과 풍경에 대한 해석이자 비평이다. 이명준(이론과 미학), 최영준(설계공모), 임한솔(전통의 재현), 고정희(식재 디자인), 최정민(시대성과 정체성), 박희성(개발 시대)의 글 여섯 편으로 구성한 1부는 50년을 가로지르는 큰 흐름과 이슈를 조감의 형식으로 해석한다. 2부는 주요 단면에 대한 클로즈업이다. 김아연(생태 공원), 이유직(선형 공원), 서영애(이전적지 공원화), 김영민(아파트 조경), 김정은(사이와 경계), 김연금(맥락), 김한배(사회적 예술), 박승진(시민 사회), 남기준(텍스트)의 글 아홉 편을 엮은 2부는 한국 조경의 궤적 위에 펼쳐진 주요 주제를 포착하고 해석한다. 책의 3부는 한국 조경 50년이 낳은 주요 작품을 기록하는 데 방점을 둔 기획으로, 설문조사 결과를 통해 선정한 ‘한국 현대 조경 50’ 작품의 정보를 정리해 싣는다. 2021년 4월 19일부터 5월 21일까지 한국조경학회 회원,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 회원, 조경 설계 전문가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303명의 전문가가 참여했다.2 지난 50년의 작품 경향과 시대상이 담긴 대표작 50선에서 한국 조경의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고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다. 한국 조경 50년사의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과제는 해석적 비평에 무게중심을 둔 이번 책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동안 『현대한국조경작품집 1963-1992』(도서출판 조경, 1992), 『한국의 조경 1972-2002: 한국조경학회 창립 30주년 기념집』(한국조경학회 편, 2002), 『Park_Scape: 한국의 공원』(도서출판 조경, 2006), 『한국조경의 도입과 발전 그리고 비전: 한국조경백서 1972-2008』(환경조경발전재단 편, 2008), 『한국조경학회 창립 40주년 기념집』(한국조경학회 편, 2012), 『환경과조경』 통권 400호(2021년 8월호)를 비롯한 여러 기록물이 백서, 자료집, 작품집 등의 형식으로 출간되었지만, 종합과 체계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아쉬운 면이 적지 않다. 여기저기 흩어져 소실되고 있는 방대한 자료와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정리하는 범 조경계 차원의 기획 프로젝트가 절실한 시점이다[email protected] 각주 1.편집고문 조경진, 편집위원장 배정한, 편집위원 김아연·남기준·박희성, 편집간사 임한솔 각주 2.50개 선정작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정보는 『환경과조경』 통권 404호(2021년 12월호)에서 볼 수 있다.
  • [풍경 감각] 때론 잊는 일도 도움이 된다
    2022년 5월 24일, 미국의 롭 초등학교에서 학생 19명과 교사 2명이 사망한 총기 참사가 일어났다. 참사 이후 미국 정부는 사건이 일어난 학교 건물을 부수기로 결정했다. 건물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비단 롭 초등학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미국에서는 총격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학교를 부수거나, 이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개조하는 것이 보통이다.911 메모리얼 파크,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떠올렸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부수고 지우는 게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추모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고, 마치 이미 결론이 난 것처럼 생각을 하다가 조금 놀랐다. 이런 딱딱한 생각이 돌보지 못하는 귀퉁이들이 떠올라서. 총성이 울리던 교실과 괴한을 피해 달아나던 복도에서, 그리고 빈 책상과 총탄 자국이 남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예전과 같은 날들을 보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론 부수고, 지워버리고, 그래서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조현진은 조경학을 전공한 일러스트레이터다. 2017년과 2018년 서울정원박람회, 국립수목원 연구 간행물 『고택과 어우러진 삶이 담긴 정원』, 정동극장 공연 ‘궁:장녹수전’ 등의 일러스트를 작업했고, 식물학 그림책 『식물 문답』을 출판했다. 홍릉 근처 작은 방에서 식물을 키우고 그림을 그린다.
  • 포스코 파크1538 POSCO Park1538
    포항의 시간 가을과 겨울 사이 어느 날, 포항을 방문했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모든 것이 채도가 떨어진 채로 눈에 들어왔다. 가동 중인 제철소 시설이 내뿜는 압도적인 심상들도 한몫 했다. 곳곳에 산개된 수많은 기념식수들은 이곳에 축적된 깊은 시간을 암시했다. 버려졌다 싶을 정도로 방치된 연못과 숲의 우거짐은 심리적 감상을 더 가라앉혔다. 프로젝트를 대하는 마음에 무게감이 더해지는 하루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설계의 단계들은 복잡했으며 시공의 과정 역시 녹록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완성이 됐다. 스치는 공기에 차가움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깨끗한 하늘 아래 벚꽃은 이미 만개해 있었다. 초봄이라는 계절과 공사 직후의 현장 특성상 아직 성긴 구석이 있었지만 신생 공원이 움틀 준비는 되어 있었다. 주변의 거친 산업 단지 경관과 묘하게 중첩되어 보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끝났다’는 안도감이 크지 않았을까.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 시점에서 파크Park1538과 그곳을 있게 한 네 가지의 방향성을 다시보자. 선형의 공원,시퀀스 파크1538은 총 연장 600m가량의 선형 공원이다. 즉 사람들의 행위와 동선을 강제할 수 없는 유형이다. 마련한 모든 공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설계적 장치가 관건이었다. 방문자들의 경험이 하나의 장면에서 종결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으며, 유유히 다음 공간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다행히 각 구간이 놓인 상황과 맥락이 각기 달랐다. 방치된 수준이긴 했으나 연못 주변에는 물이라는 소재가 발하는 특유의 감상이 잔존하고 있었고, 그 너머로는 낮은 경사지와 깊은 숲이 이어졌다. 새로운 홍보관이 들어설 언덕 정상부에서는 오랜 시간 기업을 알려온 기존의 건축물 위로 트인 하늘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다시 발길을 돌리면 또 한 번 두터운 숲이 우리를 맞이했고, 아래쪽으로 내려오면 웅장한 조형물과 임직원을 위한 휴게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지형과 식생의 양상, 지배적 분위기 모두 열림과 닫힘이 교차로 반복되는 흐름이었다. 주어진 리듬에 기대고 이를 더욱 더 강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열린 곳을 더 트고 닫힘을 더욱 깊게 하며 그들 사이의 전이감을 통해 공원 전체로의 걸음을 이끌고자 했다. 매개체는 식재 설계다. 운영 계획의 동선상 첫 번째 공간에 해당되는 수변공원에는 수생 식물과 초화류, 그래스류 위주의 수종으로 방문객을 환영하는 개방적 제스처를 연출했다. 또한 물이 가진 물성과 매력을 부각시킬 수 있도록 능수버들을 식재해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도록 했다. 길을 건넌 후 신축 홍보관을 바라보며 오르는 사면 진입부의 경우, 곧게 서 있던 장송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다음 공간으로의 시야와 이어질 방향에 대한 지시성을 확보했다. 테라스형 잔디구간을 정비해 단정하면서도 우아한 입구를 연출하고차오름길로 이어지는 전이감을 부여했다.차오름길은 기존의 숲 사이에 마련된 언덕길이다. 다시닫히는 전이감을 위해 기존 숲의 훼손을 최소화하고,길과 맞닿은 곳에는 다간형의 소교목을 도입해 아늑한위요감을 지닌 산책길을 조성했다. 다시 열 차례다. 홍보관의 옥상정원에서는 하늘로 트여 있는 공간 자체의물리적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싶었다. 다채로운 수종을 조합한 혼합 식재를 적용해 공원 전체 경험중 하이라이트가 되는 순간을 제공하고자 했다. 홍보관 옥상정원의 중정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 작품의 배경이 될 수 있도록 구성했다. 홍보관을 빠져나와구름다리로 진입하면 또 다시 깊은 숲을 마주하게 된다. 기존 소나무 숲을 존치해 오랜 시간을 머금은 자연의 풍성함을 유지하되 대왕참나무로 보강하여 이후에도 수직적인 숲에 대한 새로운 시점의 매력이 도드라질 수 있도록 계획했다. 공원의 마지막은 명예의 전당이다. 구름다리 종단부와 일체화된 구조물에 포스코의상징적 인물들을 기억하는 전시적 장치가 구성되어 있다.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이 담긴 중정처럼, 설계 요소를 최대한 자제해 전시 내용물에 대한 집중도를 높였다. 또한 현장에 있던 팽나무를 남겨 명예의 전당이라는 공간에 부합하는 웅장함과 무게감을 싣고, 수종을간소화해 차분한 감정 속에서 공원의 여정을 마무리하도록 했다. 기업의 공간,브랜딩 공원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지시하듯 파크1538은 포스코라는 기업이 내어 준 공공의 가치다. 더군다나 법적으로 강요된 기부 채납이나 공개 공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공공성을 창출하겠다는 기업 스스로의 자발적 판단으로 발로한 공간이다. 기업 홍보관을 신축하는 프로젝트로 시작했으나 홍보관을 중심으로 한 복합 문화 공간 조성으로 사업이 확대됐다. 일반인의 입장에서나 조경을 하는 설계가의 입장에서나 매우 감사한 땅인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담보된 공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실재의 공간으로 구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이 공원의 가치를 어떻게 다시 기업에게 돌려줄 것인가. 항상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의 공간은 그 기업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특정 기업 특유의 정체성이 조경과 자연이라는 선한 가치와 맞물렸을 때, 그 순간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방식을 고민한다. 당장의 경제적 보상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을 두고서라도 기업 자체의 가치를 상승시키는 방법에 역량을 투여한다. 브랜딩 전략으로서의 조경에 대한 설득 과정을 필히 수반하는 편이다. 그럼 철을 다루는 기업이니 철 소재를 써보자. 일차원적 판단이었다기보다는 직설적인 방식을 통해 명료함을 구축하자는 판단이었고 과정 속 발주처의 창의적 의지도 큰 역할을 했다. 물론 ‘포스코니까 스틸이야’라는 단선의 논리가 지나치게 지배적이거나 과하게 소비되지 않도록 많은 토의가 있었다. 외부 공간의 시설물 설계를 이끈 씨에이플랜CA plan과 함께 공원 전반의 배치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그들이 가진 삼차원적 조형의 힘이 발휘될 수 있도록 조율했다. 진행 과정 중 내후성 강판(코르텐 스틸)에 대한 제안이 있었고 여러 논의 끝에 주요 시설물의 최종 소재로 결정됐다. 자연적 소재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색채를 지니고 있어 방문객이 인상적인 순간을 경험케 할 수 있고, 누가 보아도 철 소재이기에 단숨에 포스코라는 기업을 인식시킨다. 식재나 자연 소재와의 대비에 의한 조화가 연출될 수 있도록 구성했으며, 식재와 더불어 시간을 타면서 더욱 더 성숙해 가는 공원을 만들어 가길 의도했다. 시민의 경험,퍼블릭 결국 파크1538은 공원이다. 홍보관 내부의 일부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예약 절차를 밟지 않고서도 누구든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는 오픈스페이스다. 모든 공원 설계자가 꿈꾸는 바겠지만, 이 공원 역시 사람들의 일상 속에 녹아들고 그들 삶의 아름다운 순간이 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공원 문화’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 왔으며, 공원이라는 유형이 태생적으로 서양의 것이기에 우리의 체질에 녹아드는 시간이 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조경의 양적, 질적 성장에 의해 이 같은 문화적 양상은 많이 자리 잡았다. 음식을 포장해 공원으로 가서 먹는 피크닉 문화가 소위 ‘힙’한 활동 중 하나가 되었다. 유명 맛집은 돗자리까지 포함한 피크닉 세트를 판매할 정도다. 하고자 하는 말은, 오픈스페이스의 지역적 불균형 측면에서 이 프로젝트의 가치를 짚고 싶다는 것이다.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설계 요소나 방법론을 논하기보다 그 존재 자체의 의미에 대한 언급이다. 조경가의 입장에서 양질의 공간을 제공해야 하는 책무와 동시에, 개별 시민들의 입장에서 공원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아는 문화적 자세를 겸비함은 거의 등가의 중요도로 필수적이다. 그리고 공원에 대한 자연스러운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비슷한 유형의 공간에 대한 반복적인 경험과 지속적인 노출이 효과적이다. 이 사업을 통해 탄생한 포항의 새로운 공원이 해야 할 문화적 그릇으로서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공원은 2021년 3월 개장 후 2주간의 시범 운영을 거친 뒤 일반 시민들에게 개장되었다. ‘철과 자연이 어우러진 친환경 힐링 공간을 포항 시민들에게 제공하고자 한다’는 발주처의 굳은 취지가 실현된 날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한 상황에서도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했다. 하늘거리는 수변공원의 풍경과 차오름길이라는 여유로운 걸음의 언덕 산책로, 하늘과 맞닿은 옥상정원의 다채로운 계절감, 숲을 감상하는 새로운 시선의 구름다리와 단정한 감상의 명예의 전당. 제철소의 산업 단지 경관이 지배적인 포항이라는 도시 한편에 기다란 녹색의 선이 생겼다.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을 엮어내는 선이 되길 바란다. 다자간 작업,컬래버레이션 대부분의 대규모 프로젝트가 그러하듯 파크1538도 다양한 주체의 힘이 모인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유독 이 프로젝트에서의 협업을 유효하게 한 첫째 요소는 발주처와의 관계다. 안목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고, 설계사의 의도를 최대한 이해해주고자 하는 지지를 얻어 진행 과정이 매끄러웠다. 무엇보다도 주요 설계 요소인 소재에 대한 발주처의 이해도가 높았기에 실시설계와 시공 단계에서 의지가 됐다. 철이라는 소재를 가장 오래 다뤄왔던 그들의 노하우는 공사의 효율성과 공간의 완성도를 높인 결정적 요인 중 하나다. 또 다른 관계는 하나의 외부 공간 설계를 함께 진행한 두 개의 설계사다. 얼라이브어스와 씨에이플랜은 전체 공원의 배치와 구성을 다듬는 마스터플랜 작업이 마무리된 시점부터 각자의 특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로 분업했다. 조경 설계의 큰 세 덩어리인 식재, 포장, 시설물 설계 사이에서 서로의 전문성을 신뢰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설물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식재 방식을 결정하기도 하고, 좀 더 안정적이고 다채로운 식재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시설물의 위치나 방향성을 조정하기도 했다. 조건과 상황마다 주도권을 가져오기도 내어주기도 하는 영리함이 필요했다. 시공사와의 협업 역시 이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지점이었다. 사실, 공사 기간과 공사 시점 측면에서 꽤나 불리한 조건이었다. 시공할 수 있는 개월 수가 한정적이었고 개장 시점이 3월로 확정되어 있어 겨울 공사가 불가피했다. 유독 혹독한 겨울이었다. 특히 차오름길은 시공 중간에 전면 재검토가 이루어지면서 모두에게 비상 사태가 도래했었다. 해당 구간의 공사는 한동안 멈춰 섰고 사면을 오르는 산책로의 선형과 골격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우리 역시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새로운 대안들을 마련했지만 현장의 시간은 더욱 더 촉박했기에 애가 타는 며칠이 지나갔다. 최종안에 대한 발주처와의 협의가 끝났지만 앞서 말한 공사의 기간과 기상 조건으로 다시 어려움을 겪었다.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시공사와 강구했고 설계와 시공이 동시에 움직여 마무리했다. 현장의 도움을 받아가며 급박한 과정 속에서 긴 설계의 여정이 끝났다. 그렇게 훈훈한 봄을 맞이했다. 강한솔·김태경 인터뷰 작은 스케일의 완성도와 큰 스케일의 계획성을 가로지르다 글 김모아 기자 사진 유청오 공간의 이름 ‘파크park1538’에서 이곳이 공원이라는 점이 엿보인다. 초기 단계부터 홍보관을 둘러싼 외부 공간이 공원으로 기획되었나. 강한솔(이하 솔) 사실 사업의 초반부터 참여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홍보관과 건물 주변으로 전시 콘텐츠를 지원하는 간략한 조경 설계 정도가 되어 있었다고들었다. 그런데 포스코의 최종 결정권자가 막상 마스터플랜을 보니 대상지가 지닌 자원이 아까웠던 모양이다. 홍보관 주변으로 낙후됐지만 잠재력이 큰 수변공원이있었고, 울창한 소나무 숲도 있었다. 이참에 전체를 리노베이션해 시민에게 공원으로서 이곳을 열어주자는판단을 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공원 마스터플랜 수립이 시작됐고,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연락이 닿았다. 작업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공원의 선형적 느낌만이 표현된, 개념적인 그림만이 있는 상태였다. 이를 공간화하고 다듬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씨에이플랜CA plan이 외부 공간 설계를 진행하고 있던 상황에서 참여하게 된프로젝트라 그만큼 설계사 사이의 구도가 굉장히 복잡하다. 일반 시민이 찾아오기에는 도심에서 꽤 거리가 있는곳에 공원이 있다. 실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누가될 것이라 예상했나. 그들에게 이곳이 어떤 공간으로다가가기를 바랐나. 솔 파크1538은 포항 시내에서 떨어진 포스코 포항제철소 단지 옆에 있다. 접근성이 좋지 않다는 점은 발주처와 설계사 모두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주요 이용자는 일반인과 학생이 될 것이다. 웰컴 센터에서 공원에대한 설명을 듣고 셔틀버스를 타고 홍보관으로 이동하는 프로그램도 다수 계획되어 있다. 이러한 학생들이홍보관의 주 타깃이겠지만, 공원 자체는 일반 시민에게모두 열린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발주처도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공원을 원했다. 발주처가 강조했던 가치 중 하나가 포스코의 이념인 위드코스코with POSCO였다. 더불어 함께 발전하는 기업 시민을 뜻하는 말인데, 이처럼 시민과 함께 하는 공간을목표로 설계를 진행했다. 포스코를 홍보하는 공간인 만큼 기업 정체성을 드러내달라는 요구는 없었나. 사람들에게 쾌적한 쉼과 아름다운 경관을 선사하는 동시에 포스코의 특성을 보여주는 전략이 궁금하다. 솔 포스코가 철을 만들어내는 기업이니 소재를 통해그 정체성을 표현한 부분이 있다. 내후성 강판이 그 예인데, 직설적인 소재라 너무 돋보이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데 공을 들였다. 식재를 통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할 것인지, 강렬한 느낌의 소재를 들였으니 차라리 자연과 인공의 대비를 통해 조화를 이루게 할지 등을 고민했다. 김태경(이하 태) 포스코는 생산한 상품을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기업이 아니다 보니 브랜딩 방식이 일반기업과 다를 수밖에 없다. 발주처는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홍보를 통해 포스코 철의 인지도나 가치를 보여주고자 하지 않았다. 그보다 포스코가 한국의 중요한 기업이자 자산으로 자리 잡기까지 오랜 역사를 함께 해온 만큼 시민들에게 좋은 공간을 내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강했다. 기업 홍보 공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스타그래머블 포토존도 요구하지 않았다. 시민들이 편안하게 들러 물을 감상하고 식물을 보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 게 전부였다. 철이라는 소재의 사용에 있어서도, 방문객이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있다면 사용하지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우리도 사람들이 공간 안에서하게 될 경험이 단계적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하는데 더 집중했다. 콘셉트가 강한 공간이 아니다 보니 내러티브가 적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오랜 시간이 흐르면 공공성이 파크1538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공간이지만, 여유가 있을 때 편안하게 들러 도시공원처럼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마스터플랜을 보니 공간이 열리고 닫히는 모습이 또렷하게 보인다. 일종의 시퀀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구름다리가 통과하는 구간은 본래 숲이었는데 길고큰 구조물을 설치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솔 처음에 현장에 방문했을 때 숲은 관리가 되지 않아잡목만 자라고 있는 산이었다. 수변공원도 오래 방치되어 자연적으로 발생한 수생 식물이 자라고 있었고, 수질 관리도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공원 전체를 리노베이션 하기로 결정된 만큼 발주처는 과감하게숲을 들어내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기를 요청했지만, 우리는 오히려 수변공원이나 언덕, 숲을 살리며 변신을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본래의 경관이 나쁘지 않기도 했다. 태 구름다리 아래에 본래 길고 가파른 계단이 있었다.대상지 내의 급한 경사를 극복하는 동선인데, 홍보관에서 빠져나와 명예의 전당으로 향하는 방문객에게 좋은 경험을 주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씨에이플랜이이 계단의 대안으로 구름다리를 제안했고, 우리는 구름다리를 걸으며 보게 될 숲의 경관을 만드는 작업을했다. 나무 사이를 떠다니며 통과한 구름다리는 명예의전당을 감고 내려오며 포스코의 상징적 인물을 전시해놓은 구조물 자체가 된다. 사실 숲뿐만 아니라 수변공원에서 홍보관으로 향하는 길을 비롯해 대상지 내에레벨 차이가 큰 곳이 많다. 이러한 경사를 해결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과제 중 하나였고, 구름다리는 문제를해결하는 방식 중 하나다. 솔 구름다리를 걷는 경험이 마냥 허공을 떠도는 데서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숲이라는 공간을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는 경험을 제대로 만들어주기 위해 어떤 수목을 존치하고 제거할지 결정하고, 계단을 철거한 자리에 수직적으로 잘 자라는 나무를 심었다. 물론 단기간에 나무들이 자라 구름다리 위로 잎과 나뭇가지를드리우지는 못할 테지만,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다시숲의 경관이 만들어질 것이다. 공원은 언뜻 보면 면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입구부터 명예의 전당까지 하나의 긴 동선으로 연결된 선형 공원이다. 동선이 하나라는 점에서 자칫 오고 가는 이들이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는데 어떻게 극복했나. 솔 투어 코스 자체는 길을 따라갔다가 돌아오도록 짜여있지만, 원한다면 명예의 전당에서 공원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하나의 동선이 주는 경험에 대해서 김태경 소장과 프로젝트 중간 단계에서 심도 있는 대화를나눴는데, 경험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도록 시퀀스를 잘조직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었다. 수변공원에서 출발해구릉지를 올라 정상에 머물렀다가 내려와야 하는 주어진 조건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최대한 극대화하는게 중요했다. 더불어 길을 걷는 이들이 흥미를 잃지 않으려면 다른 공간이 계속해서 나타나야 한다. 씨에이플랜은 그 전략으로 구조물을 택했고, 우리는 식재 설계를 통해 공간마다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공간이열리는 곳에는 화사한 식재를 통해 사람들을 환영하는분위기를, 조금 닫아주는 경관에서는 차분한 느낌의식재로 고요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차오름길을 지나 홍보관의 옥상에 다다르면 다채로운 관목과 초화로 분위기가 정점에 치닫게 하고, 다시 구름다리를 단일 수종으로 잔잔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마지막 공간인 명예의 전당에는 조금은 무겁고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하는식재 설계를 했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보이면 흥미를 갖게 되기 마련이다.수변공원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홍보관을 볼 수 있도록건물을 가리고 있던 언덕 위의 오래된 나무를 제거했다. 홍보관에 오르면 빛나는 소재로 만든 구름다리가 햇빛에 반짝이며 시선을 끌어 사람들이 다음 행선지로이동하도록 유도한다. 태 얼라이브어스의 장점 중 하나는 개인 주택부터 큰공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여러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을 통해 디자인을 발전시킨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마스터플랜이라 불리는 최종 결과물을 만드는데, 이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의 계획안은 실제로 사람이 마주하는 경험을 담아내지 못하기도 한다. 마스터플랜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하나의수종만을 사용해 형태적인 식재 설계를 한 곳이 있고,혼합 식재를 한 부분이 있다. 모든 공간의 분위기가 다다를 필요는 없지만, 파크1538의 경우 경험이 선적으로 이어지다보니 자칫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어 각 공간마다 식재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했다. 공간을 크게 사용하는 조경(수변공원, 잔디테라스, 차오름길)과 바라보는 조경(홍보관 옥상정원, 명예의 전당)으로 나눌수 있다. 조경 공간의 성격에 따라 식재 설계 전략이바뀌기도 하나. 솔 공간의 특성을 잘 설정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작업이다. 상업 시설, 기업의 사옥, 리조트 등은 성격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어 공간의 성격을 설정하기에도 좋다. 하지만 파크1538은 공원이고, 공원은 불특정 다수가 방문하는 곳이다. 누가 이용할지 특정할 수 없기에유연하게 열린 공간을 만드는 것이 안정한 방식이다. 잔디테라스는 이용하는 공간보다는 바라보는 경관에가깝다. 물론 누군가 앉아 휴식하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더욱 좋겠지만, 공간의 맥락상 이용성이 큰 공간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잔디테라스는 사람들의 시선을열어주는 조형적 공간으로 계획한 곳이다. 잔디테라스아래에 서면 포스코역사관이 보이고, 잔디테라스에 앉으면 자연스럽게 눈길이 홍보관을 향하게 된다. 태 콘셉트에 따라 바라만 보도록 계획된 공간이 있긴하지만, 사용하는 조경과 바라보는 조경을 분명히 나눠 계획하진 않았다. 예를 들어 수변공원의 경우 사용자 입장에서는 사용하는 공간이지만, 멀리서 바라봤을때는 바라보는 경관이 된다. 멀찍이서 바라볼 때는 큰공간을 눈으로 인지하지만, 수변공원으로 들어서면 감각할 수 있는 공간 스케일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이곳에 심기에 8m 높이의 소나무가 큰지 작은지 따질 때,나무 아래에서의 경험이 기준인지 전체적으로 바라봤을 때의 경험이 기준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둘중 하나만을 추구할 수는 없으니, 전체적인 경관과의조화와 그 안에서의 경험 모두를 고려해 식재 설계를했다. 대교목의 수종과 높이는 수변공원 전체의 스케일을 고려해 결정했다. 물을 따라 걷는 사람들을 위해길 주변에는 관목과 지피 식물을 심었다.파크1538에서 가장 화사한 공간이 이곳이다. 공간 경험에 따라 식재 설계 패턴의 크기도 달라진다. 이곳을 바로 앞에서바라볼지 10m 뒤에서 바라볼지에 따라 크기를 조절해야 한다. 명예의 전당과 홍보관 옥상정원에서 조경 공간이 기념비적 조형물의 배경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장식적녹지와 잔디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기후위기 문제로 인해 잔디 사용을 지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는데, 잔디를 대체할 수 있는 조경 공간에는 무엇이있을까. 태 미국 서부에서 일할 때 대가뭄으로 인해 서부의 상징과 같은 정원과 잔디밭을 사용하는 프로젝트가 직격탄을 맞은 적이 있다. 이때 많은 정책적 변화가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식재 설계 인허가에서 상록 비율, 종의 개수, 면적 당 몇 주의 식물을 심느냐 등을 따진다.서부에는 그런 기준이 없다. 대신 서부에 심을 수 있는모든 수종이 생육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을 기준으로상, 중, 하로 나뉘어 구분되어 있다. 이 자료는 관이 주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조경가의 집단 지성 체제를통해 구축된 데이터베이스가 쌓이는 형식이다. 이 데이터를 기반으로 설계된 공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이 과하다고 판단되면, 일부 식물을 물을 덜 필요로 하는 수종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현재 미국 각 주는앞마당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벌금을 물게 했던과거와 달리 물을 많이 먹는 잔디를 수자원 낭비의 주범으로 지목하며 잔디 퇴출 정책을 공격적으로 펼치고있다. 개인적으로 그라스가 잔디와는 다른 미학을 갖고 있고, 잔디를 충분히 대체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소재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 특히 공공 기관은 아직 잔디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골프장의 잘 정돈된 잔디밭이 지닌 상징성이 여전하고, 이를 잘 관리된 조경 공간의 기본으로 여기는 분위기다.거칠게 자란 식물, 야생적 아름다움이 돋보여 관리를덜 해도 되는 정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대는 아직오지 않은 것 같다. 제도적 뒷받침 없이 조경가만의 노력으로 개선하기 힘든 부분이다. 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메모리얼 설계 패러다임이 상징적 오브제를 바라보는 장소에서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치유하는 장소로 한 번 변화했다. 이처럼 기념공간도 전시 공간에서 경험하는 공간으로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입구 공간의 자연석과 군데군데 군락으로 심은 그라스, 키가 작은 수목은 조금 이질적이고 거친 느낌을자아낸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잔디스탠드와 분위기가사뭇 다른데 의도한 것인가. 솔 입구 공간은 가장 큰 난점을 겪으며 완성한 곳이다.공사 중 갑작스럽게 설계안을 변경해야 하는 상황이발생했다. 발주처에게 새로운 설계안의 최종 확정은 받았으나, 공사 현장에서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게문제가 됐다. 본래 설계는 조형적 옹벽으로 최대한 깔끔한 경관을 만들고, 그 벽체가 보이지 않도록 그라스를 심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계 변경에 시간이 소요되는 바람에 옹벽을 양생하고 마감재를 붙일 공기가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현장에서는 마감 기한을 맞추기위해 큰 자연석을 배치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택했다. 반대했지만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자연석이 쌓이고 있었다. 아마 시공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밑바탕이 되는 공간이 달라졌는데 식재는 그대로라서 조금 어긋나는 부분이 생겼다. 태 재미 요소를 주고 분위기를 반전시켜주면 사람들이좀 더 경험을 길게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각 공간의 식재 전략을 다르게 세웠다. 단 여러 가지 전략을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공통적인 느낌이 있어야 했고,의도적으로 굉장히 다듬어진 식재 형태와 굉장히 와일드한 식재 형태를 섞어 사용했다. 입구 공간은 이 두가지 식재 형태가 함께 사용된 곳이다. 파크1538과 한동리 주택 정원(『환경과조경』 2018년 8월호)을 비교하니, 식재 전략이 사뭇 다르다는 게 느껴진다. 대상지 스케일에 따라 식재 계획의 순서 등에 차이를 두는지 궁금하다. 솔 스케일도 영향을 미치지만 설계 공간의 유형에 따라 접근법이 달라진다. 식재 설계에 국한된 이야기는아니다. 주택 정원의 경우 상업 공간이나 리조트, 공원과 달리 소유인이 매일 보는 공간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개인의 취향이 반영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를 고려해 훨씬 세심한 배려를 녹인 설계를 해야 한다. 상업 공간의 경우, 콘텐츠를 드러내는 것은 물론 즉각적이지는 않더라도 방문자 수의 증가 등 장기적인 측면에서 수익을 발생시킬 수 있는 요소, 기업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조형 요소 등을 고려해야 한다. 파크1538의 경우, 기업 소유의 공간이지만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는공간이기에 범용성에 주목했고, 그에 맞춰 공간 설계와 식재 설계 계획을 세웠다. 태 강한솔 소장의 말처럼 공간 유형의 차이, 스케일의차이, 사용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다름이 있다. 주택정원의 경우 365일 내내 보는 경관이기에 질릴 가능성이 높아서 튀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매일매일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게 할지에 대해 고민한다. 주택 정원 식재 설계를 할 때도 공원 식재 설계를 할때만큼이나 나무의 종류가 왜 그것이어야 하는지, 한주 한 주 위치가 왜 그곳이어야만 하는지, 공간 구조는왜 그래야 하는지 모두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공원식재 설계를 할 때도 전체적인 구성도 중요하지만 실제 사람이 경험하는 스케일에서 어떤 좋은 경험을 주거나 공간을 연출할 수 있을지 고려해야 한다. 공간 유형에 따라 하나의 방향성만을 취하기보다 작은 스케일에서의 완성도와 큰 스케일에서의 계획성 모두를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형성된 공감대가강 소장과 내가 함께 일을 해올 수 있었던 근간이기도하다. 한국에서는 정원과 공원의 식재 설계를 조금 다르게다루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작은 정원에도 설계와 도면이 필요하다. 물론 적당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에맞는 식물을 구매해 현장에서의 감각에 따라 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이 눈에 담을수 있는 시야와 손이 닿을 수 있는 공간에는 한계가 있다. 계획 없이 정원을 만들면 내 눈과 두 팔 안에 담기는 공간 안에서 완성도를 높이게 되기 쉽다. 정원이 아니라 화단 같은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어떤 경험을 주고 싶은지, 어떤 행동이 일어났으면 하는지 고민해 공간 구조를 계획하면, 식물을 심을 때는 느껴지지 않더라도 다 심고 공간을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때 머릿속에 그렸던 공간이 완성된 걸 확인할 수 있다. 개인 주택 정원과 큰 공원은 맥락이 매우 다른 공간이지만 동선 체계, 공간 구조 등의 가치를같은 무게로 다루며 완성해야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상호 보완 가능한 탤런트의 조합이 새로운 스타 건축가를 만들어 내는 것보다 지금 시대에 더 어울리는 대응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따로 또 같이’ 특집(『환경과조경』 2018년 5월호)에서 얼라이브어스가 지금의 구성원들과 함께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내어놓은 답이다. 그로부터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그간 변화한 점은 없는가. 태 특별히 달라진 점은 없다. 건축 팀과 조경 팀이 함께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물론 처음에 생각했던 건 더다양한 팀이 함께하는 공동체였지만, 일감이 풍족하지않다 보니 현실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1년에 서너 건 정도는 조경과 건축이 함께 계약을 해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최근에는 발주처에서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먼저 공간 브랜딩을 제안해스스로 일거리를 만들고 있다. 공간을 다루는 사무소의 브랜딩 전략이 일반적인 브랜딩 회사의 방식과 달라클라이언트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팀과 조경 팀이 같은 회사에 있어 서로에게 배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캐노피를 설계할 때 도면을 그리는 방법과 사용하는 용어가 전혀 다르다. 조경이 캐노피를 시설물로 다룬다면 건축은 캐노피를 구조로 다룬다. 아직 새로운 변화를 꾀하기 보다는 조용히 작품 하나하나를 쌓아가며 기다리는 상황이다. 솔 처음에는 일거리가 많지 않아 작은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전 직원이 모두 뛰어들어 건축과 조경의 경계없이 일을 했었다. 이제는 규모도 좀 커졌고 일도 늘어난 편이라 건축과 조경이 독립적으로 일하는 프로젝트도 많아지고 있다. 다만 얼라이브어스 본연의 색을 잃지 않고 새로운 직원도 이를 경험할 수 있도록 1년에일정 개수의 프로젝트는 건축과 조경이 팀을 이뤄 함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려고 배려하고 있다. ‘상호보완 가능한 탤런트의 조합’은 우리의 가장 큰 정체성이다. 독립적으로 모든 개인이 내부적인 양적, 질적인성장기를 가진 뒤 안정화가 되면 본격적으로 새로운것들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 시기가언제 올지가 문제다(웃음). 조경 설계 얼라이브어스, 씨에이플랜 건축 설계 종합건축사사무소경암 발주 포스코 시공 포스코건설 위치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동해안로 6213번길 14 면적 20,026.8m2 완공 2021. 3. 얼라이브어스(ALIVEUS)는 현대 도시를 만들어가는 건축, 조경,도시재생, 문화 기획에 기반을 둔 디자이너 그룹이다. 평등한 커뮤니케이션과 유연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상적인 학제간 디자인을 추구하며, 이러한 방식이 도시의 다양한 문맥에 더 좋은 디자인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강한솔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에서 조경을 공부했다. 미국과 한국에서 실무를 수행한 후 2017년 얼라이브어스(ALIVEUS)를 설립했다. 도시 내 공적인 공간에 초점을 두며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설계를 추구한다. 김태경은 고려대학교에서 생태공학을, 하버드에서 조경학을 전공했다. 미국과 한국에서의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2017년부터 얼라이브어스를 운영하고 있다. 디테일과 식재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섬세하게 다듬어진 공간의 미감에 주목한다.
    • 강한솔 / 얼라이브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