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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삼산지구 시냇물공원
· 위치 : 인천시 부평구 삼산동 294-10 일원· 면적 : 20,326㎡· 발주 및 설계 : 대한주택공사(부장 홍기문, 과장 이찬수, 감독 김영종)· 시공 : 한수종합조경(대표 한경구, 현장소장 김종원), 녹원건설(주)(대표 한창현)· 식재: 신세기조경개발(대표 정구양)·시설물: 이우산업건설(주)(대표 이창렬, 현장소장 송영대)삼산지구 근린공원1로 계획되었던 이곳은 시냇물, 즉 계류가 중심인 공원이다. 진입광장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바닥분수에서부터 시작된 계류는 공원 중심부를 지나 중앙광장의 한 면에 조성된 생태연못으로 흘러든다. 이곳에서 정화시스템에 의해 걸러진 물은 다시 바닥분수로 보내져 순환된다. 계류가에는 두 곳에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가까이에서 물을 접할 수 있고, 계류를 가로지르는 목교도 놓여있다. 한편, 대상지의 한 면을 따라 굴포천이 흐르고 있어, 물은 이래저래 이곳의 중심 요소이다.전체 대상지는 삼각형 형태로, 삼각형의 정점인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 전통정자가 세워져 있고, 그 정자를 중심으로 삼각형의 좌우 측면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전술한 대로, 한 면으로 굴포천이 흐르고 있고, 그 굴포천 너머에 박물관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 전통정자는 굴포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도, 인도교 너머의 박물관 공원에서도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앞에 소개한 분수공원이 각종 수경시설이 조성되어 있는 감상 위주의 공원이라면, 이곳은 중심 요소인 계류 이외에 맨손체조장, 피크닉장, 전통정자, 중앙광장, 체력단련장, 모험놀이시설,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어, 다양한 이용행태가 일어날 수 있는 이용 중심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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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조례호수공원 조성 기본계획 건설기술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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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화적 경관 보호에 관하여
지난해 일본에서는 경관법 제정을 비롯해 문화재 보호법이 개정되어, 경관에 관한 법률의 정비가 시행되었다. 특히 문화재보호법의 경우는 현재 세계적 흐름이라고 할 수 있는 UNESCO 세계유산의 ‘문화적 경관’이라는 개념을 농림수산업과 연관 지어 반영하여 개정하였다. 반면, 국토의 약 90%가 농산어촌에 해당하는 우리나라는, 그동안 개발위주의 정책으로 인해 농산어촌의 경관이 상당히 훼손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농산어촌의 경관에 대한 법률적 정비를 시도하였고, 농산어촌의 경관을 보전하고 이를 지역활성화와 연계시켜보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따라서, 본 글은 세계적 흐름으로 떠오른 ‘문화적 경관(cultural landscape)’과 일본에서의 문화적 경관의 도입에 대해 알아보고, 그 시사점을 언급해보고자 한다.문화적 경관의 개념‘경관’에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영어의 landscape도 풍경 및 풍치라 불리는 토지의 외관을 의미한다. 경관은 도시경관, 농촌경관 등 대상으로도 구분되지만, 여기에 인간의 행위와 자연과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소산이라는 독특한 특성이 반영된 문화적 경관(cultural landscape)으로 정리될 수 있다 Carl Sauer는 ‘문화경관’이라는 것을 ‘인간과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생겨난 물적 형태와 문화적 형태의 명백한 조합을 보유한 지역’이라고 정의하고 있다(황기원, 1995, p. 122). 한편, UNESCO의 세계문화유산협약 시행을 위한 운영지침 47조의 문화적 경관을 정의한 내용에서도 인간과 자연과의 결합에 의해 나타난 산물이라고 하고 있다. 즉, 문화적 경관은 양쪽 모두 외적이고 내적인 자연환경에 의한 물리적 제약과(혹은) 기회, 그리고 연속적인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인 힘에 의한 영향 하에서 인간사회와 정주(定住)가 여러 시간에 걸쳐 진화한 것을 실제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고 있다.(오 민 근 · 서울대학교 경관보전 및 개발연구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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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길도 곡수당 지역의 발굴유적에 대한 복원 계획
전남문화재연구원이 2003년부터 2005년 3월 까지 보길도 곡수당 지역을 발굴조사 하였다.이지역의 발굴조사는 완도군이 보길도 윤선도 유적(사적 제368호)의 보존 정비와 활용을 위한 학술적 자료를 얻고자 함에 있었다.보길도의 곡수당지역과 낙서재 지역에 대한 문헌 기록은 윤선도의 5대손이 되는 윤위(尹偉)가 1748년 보길도를 답사하고 그의 선조 윤선도에 대한 유적을 자세히 기록한 보길도지(甫吉島識)가 있다.보길도지는 윤선도가 1637년 부용동에 들어와서 일곱차례나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13년간 머물다가 1671년 낙서재에서 85세로 세상을 떠난 해부터 77년이 지난 이후의 기록이 된다. 그러나 윤위는 선조의 유적에 대한 문헌자료와 윤선도 당대의 유적을 고찰하고 그 후에 변화된 사항에 대한 것까지 세세히 살펴서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윤선도가 떠난지 334년이 지난 지금 발굴조사를 통하여 들어난 유적을 문적을 참고하여 고찰해 본다.곡수당과 서재지역곡수당 지역과 서재 지역은 발굴조사된 평면도면을 중심으로 고찰해 본다. 상지(上池)의 북 서쪽에 연한 건물지가 곡수당(曲水堂)터로 볼 수 있다.보길도지에 보면 ‘한 칸 방에 사방에 퇴를 달았으며 남쪽 난간에는 취적(取適) 서쪽은 익청(益淸)이란 편액을 달았다. 이는 모두 학관의 글씨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 ‘정사는 세연정 보다는 약간 작지만 섬돌과 주초돌을 놓은 것은 정교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곡수당(曲水堂)도 세연정 처럼 한칸방 4칸퇴(一間四退)라 한 것은 가운데 방 한칸에 사방으로 마루를 설치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집이었던 것으로 보길도지에 곡수당의 정사(亭?)가 세연정보다 약간 적다고 표현한 것은 세연정과 비슷한 건물 구조로 약간 적다는 표현이다. 곡수당은 세연정(1637년)보다 뒤에 건립하였다.
‘초당 뒤에는 평대(平臺)를 만들고 대의 삼면에 담장을 둘러 좌우에 작은 문을 두었으며 그 중간에는 꽃과 과일나무를 심었다.’ 곡수당 뒤에 평평한 지역이 있고 동,북,서로 담장이 노출되어 있고 담 좌우에 협문터가 지금도 있다. 다만 평대에 심었던 꽃나무와 과일나무는 없어졌다. 곡수당의 남쪽 취적헌에 연하여 조성된 장방형(길이4.5m×너비2.4m)의 못이 발굴되어 있다. 이 못의 깊이는 1.8m가 넘는데 바닥은 판석의 자연 암반임으로 연(蓮)을 심을 수 없어 연지(蓮池)는 아니다. 보길도지(甫吉島識)에서도 연지라고 기록하지 않고 못(池)이라고 만 기록하고 있다. 이 못의 서쪽 지안(池岸)축대는 높이 약 2m쯤 수직으로 잡석으로 면이 고르게 쌓았는데 석축의 심은 강회를 채워서 콘크리트보다 단단하게 조성되어 있다. 이렇게 강회의 심을 넣은 못 축대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발달된 조영이다.이 못에 대한 보길도지의 기록은 ‘취적헌의 아래 유의교(有意橋)의 위에 못을 파놓았는데 넓이는 대와 비슷하고 깊이는 두어 칸이며 석축 한 것이 꽤 높았다. 후면에는 두어층의 작은 화계를 만들어 화초와 괴석을 열 지어 심었으며 동남쪽에 방대를 높이 축조하고 대(臺) 위에는 암석을 쌓아 가산(假山)을 만들었는데 높이가 한길 남짓하다.’‘허리부분에는 구멍 하나를 뚫어 그 가운데에 석통(石筒)을 끼워 넣고 뒤에는 은통(隱筒)으로 물을 끌어들여 구멍을 통하여 못 속으로 물이 쏟아지게 하고 이를 비래폭(飛來瀑)이라 불렀다.’‘이 연못에 물이 차면 수통을 가산 뒤로 옮겨 작은 언덕(短阜)에 대는데 그 언덕에는 단풍나무 산다(山茶:동백)나무 소나무들이 서있다. 초당의 서남쪽 모퉁이 계단 위에는 백산다 한그루가 있는데 높이는 처마를 웃돌고 눈빛의 꽃이 연못에 비치고 있다. 산다는 곧 속명으로 동백이다.’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발굴조사된 ‘상연지’ 유적을 살펴보면 이 못의 동쪽 지안(池岸) 위에는 지금도 괴석 두덩이가 발굴조사로 노출되어 있다. 이 괴석이 있는 지역이 화계이며 화계에는 괴석과 화훼(花卉)가 열식(列植)되어 있었던 곳이다.못의 동남쪽에는 방대를 조성하여 한길 남짓한 높이의 석가산이 조성되어 있었던 곳으로 지금 방대의 유적이 노출되어 있고 석가산은 허물어져 암석들이 흩어져 있다. 괴석은 석회암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형태이다.대가 있는 지안의 허리부분에 석통(石筒)을 끼어 은통(땅에 묻은 홈통)으로 물을 끌여 들여서 못속으로 물이 쏟아지게 한 비래폭(飛來瀑)이란 폭포가 있었다. 지금 유적에서는 비래폭의 폭포시설은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은통(隱筒)으로 땅밑에 나무 홈대를 묻어 곡수당 동남쪽 산속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을 높은 곳에서 못까지 끌어왔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도 나무 홈대를 가설하여 곡수당 동남쪽 개울물을 끌어 올 수 있게 되어 있다.(정 재 훈 ·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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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희망대공원
· 위치 : 경기 성남시 수정구 신흥동 2182번지 희망대공원 유희시설 철거부지· 면적 : 10,000㎡(3,030평)· 발주 : 성남시청 녹지공원과· 조경설계 : (주)경화엔지니어링(대표 김흥식)· 시공사 : (주)건남토건(대표 배종환, 조경담당 박재건)· 조경시공 : 송정조경(대표 김정욱)· 수경시공 : 한강워터테크(대표 임중식)· 공사기간 : 2004. 7. 28. ~ 2005. 7. 27.· 공사비 : 26억· 사진 : 김태우 실장성남시의 “희망대”, 지금부터 약 30년 전 청계천으로부터 이주한 주민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자는 의미로 부쳐진 이름이란다.성남시는 희망대 근린공원 내 회전목마 등 기존의 노후화된 유희시설을 철거한 일부 부지에 광장, 체육시설 및 계류, 물놀이 시설 등을 도입하여 시민들이 휴식 및 운동 등을 할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을 조성하였다. 레벨차가 심한 지형적 조건을 적극 이용하여 정상으로부터 흘러내리는 계류와 벽천 등을 조성하고, 아래부터 위로 입구, 광장, 놀이터, 운동장 등을 조성해 놓은 것이 공간 구성의 특징이다.
입구 광장, 다목적 광장공원의 입구는 전통성을 느낄 수 있는 수종을 이용한 경관식재지와 팔각정자가 서로 어우러져 자연적인 미가 느껴지며, 시민들의 휴식과 사색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형의 차를 이용한 벽천을 통해 공간에 역동성을 부여하였으며, 벽천으로 흘러내린 물위에 놓여진 직사각의 정형적인 형태의 돌다리는 인공적인 조형 요소가 되고, 또한 걷기 놀이 공간으로 제공되고 있다.입구에서부터 정상으로 나있는 산책로를 타고 오르면 각 공간들을 만나게 된다. 벽천 바로 위쪽에 자리를 잡은 다목적 광장에는 측면에 무대를 설치하여 시민들의 대규모 공연이 가능하며, 일상적인 인라인스케이트장으로서 운동공간의 기능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근에 시민들의 규모있는 집회 및 공연 등을 할 수 있는 문화행사장이 부족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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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 ; 나는 청계고가가 서울이라는 도시가 만들어낸 하나의 시詩가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짙은 어둠의 그늘이 사라지고 시원하게 열린 서울의 하늘과 맑은 물이 흐르는 청계천, 그리고 어느 정도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한달음에 이루어진 사업의 추진력, 청계천 사업을 통해 주변 재개발계획의 당위성 확보와 이를 통한 부의 확대 재생산과 수직적 거대도시를 향한 욕망의 실현 따위가 우선 거칠게 보이는 청계천 개발의 가시적인 성과일 것이다. 거기다 정치적인 입지의 확보까지 얘기하지 하지 않더라도 관계된 모든 사람들과 서울시민들에게 행복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개인적으로 2002년 5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일년 조금 넘게 웹에서 청계천을 주제로 열린프로젝트를 진행했었다. 우리에게 청계천은 과연 무엇인지, 청계천을 개발한다고 했을 때 접근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궁극으로 청계천을 통해서 과연 우리는 무슨 꿈을 꿀 수 있는지를 놓고 온라인에서 진행했던 프로젝트였다. 그때 작업 중에 썼던 몇 편의 글 속에 청계천 개발에 대한 준거의 단초를 놓아 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에 대한 확신은 유보적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이제 그 준거에 대해 간단하게 얘기하려 한다.지금 청계천사업 전반을 평가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동안 끊임없이 제기 되었던 상충된 의견들이 있었지만 의견은 수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철저하게 일방적인 절차로 진행되었다. 시민참여를 위한 행사나 공청회가 요식행위였음은 결과가 말해주지 않나. 여기서 과정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청계천 개발이 내포하고 있는 다양성과 잠재된 가능성, 그리고 삶의 터전으로 청계천변이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을 위해서 충분한 시간과 합의는 이 프로젝트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한 새로운 전범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러한 기회를 스스로 박탈한 꼴이 되었다. 기본적으로 소외받은 계층에 대한 배려와 땅에 대한 신중함,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요구되는 사업이며, 그래서 무엇보다도 원형에 대한 합의, 개발에 따른 명확한 준거들이 먼저 정립되어야 했다. 여기서 문제는 대략 세 가지로 드러나고 이것이 청계천개발사업을 바라보는 하나의 준거로서 역할을 할 수 있겠다. 적어도 스스로의 관점에서는 그러하다.
세 개의 준거準據시간 - 역사적 층위가 공존하다서울의 사대문 안이 그러하지만 특히 청계천은 다층의 시간이 공존하는 독특한 장소다. 그 시간은 단지 고고학적 시간이 아니라 과거의 시간이 현재 시간의 한 유형으로 공존하며, 새로운 시간을 꿈꾸는 서로 다른 시간의 주기가 얽혀 있는 곳이다. 무형의 사람이 만들어 내는 시간이 그렇고, 존재하는 도시 기반시설의 물리적 구성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청계천 개발에서 무엇보다 고려되어야 할 것은 획일적인 어느 시간의 적용이 아니라 다층의 시간 구조를 존중하면서 그리고 또 그 각각의 시간이 가진 서로 다른 시간 주기의 섞임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계획되어야 했다.
삶 - 그들이 아니라 이들이 문제다청계천 복개와 함께 오늘날의 상권으로 자리를 잡는데 꼬박 삼십 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 이전에 무허가 난민촌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지만 청계천을 따라 일정한 수요와 공급 그리고 판매가 순차로 일어나는 유기적인 체계를 갖추기까지 청계천의 사람들은 개발론자들이 공란으로 남겨두었던 내용을 채워나가면서 스스로 삶의 모형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삶이 각각의 공간에서 톱니처럼 이루어져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한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무슨 근거에선지 여전히 낡고 불합리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고 있다. 삶의 모형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이들 계획가와 설계가, 개발론자들에게 있었다. 청계천의 삶을 흐트러트릴 권리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상 - 꿈 또는 전망을 놓다지상에서 가장 긴 공중가로정원을 생각했었다. 느릿느릿 흐르다보면 사대문 안 동쪽 끝과 서쪽 끝을 나지막한 건물과 산이 둘러싸고 그 길 아래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려보는 꿈을 꿨다. 거대 도시 안에 지구 상에서 가장 활동적인 공간을 관조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다가 계단을 내려가면 나도 거기 한 사람임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억지로 역류해서 다시 흐르는 물이 아니라 끊어졌던 주변의 천을 하나, 둘, 다시 살려내서 그 이름을 돌려주고 싶었다. 백운동천, 삼청동천, 계생동천, 북영천 ... 하면서. 어항 속의 수초가 아니라 살아있는 개천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도시 전체가 다시 물길을 만들어 순환하는 자연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청계천은 기존의 서울을 증폭시키는 거대한 꿈의 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특정인의 팍팍한 꿈이 아니라 만인의 넉넉한 미래가 가능하리라고 생각했다. 더디고 더디지만 그것이 가능하리라 봤다. 이 시대에서 조경을 하는게 부끄럽다.
이 수 학 Yi, Soo Hag 아뜰리에나무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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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 ; 청계천 속으로_1공구
태평로 입구 청계천 복원 시점부 청계마당에서 모전교, 광통교, 광교, 장통교, 삼일교, 수표교, 관수교, 세운교, 배오개다리가 있는 예지동까지의 2.0km 구간으로 도시형 하천, 역사와 문화가 있는 하천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체 1.5km의 복개구조물과 2.2km의 고가구조물을 철거하였다.총 9개의 교량(차도교 6, 보도교 3)과 7개의 진입계단과 2개의 진입경사로가 설치되었고, 1개의 세월교와 9개소의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주요시설청계광장 : 청계천 시점부인 태평로 입구에서 첫 교량인 모전교 부근까지 길이 160m, 너비 50m, 2,100여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700여평 규모의 청계마당은 검은색, 붉은색의 화강석을 이용해 한국 전통보자기 형태로 조성하고 한 켠에는 실제 물이 흐르는 청계미니어처를 제작했다. 시작점에는 2단 프로그램분수를 설치하였고, 분수의 수반에서 4m 아래의 청계천으로 떨어지게 된다. 폭포 앞부분부터 모전교까지 이어지는 물가에는 만남과 화합,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를 담은 전국 8도의 돌이 깔렸다. 경기도를 상징하는 일돌선, 충청도의 천안석, 전라도의 고흥석, 제주의 제주석과 독도석 등이 반입 설치되었으며, 각 석재들은 호안 좌우측에 국토의 서측과 동측을 형상화하며 장식되었다.(본 원고는 요약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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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네시를 이용한 2.5차원 이미지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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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 ; 청계천 복원 후 교통문제, 우려할 바 아니다
불행하게도 아름다웠던 청계천은 이미 천이 아니었다. 도대체 사람의 천은 찾을 수 없었다. 청계천이 6.25이후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의 무허가 판자촌이 들어서고, 쓰레기와 오물이 마구 버려지는 오염된 천으로 변하게 되었다. 도시의 얼굴인 도심하천과 그 주변 환경이 불량해지자 서울시에서는 빈민촌도 정비하고 도시의 교통문제도 해결한다는 의도에서 청계천 복개공사를 계획하였다. 청계천복개공사는 1958년부터 1961년까지 4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 공사로 청계천은 하천에서 하수로로 변하게 된 것이다. 근사했던 천변이 가장 흉한 길로 변했다. 이 천은 콘크리트 구조물에 가려진 채 오랫동안 썩은 물만 내려가고 있었다.청계천을 복개하고 그 위에 도로를 건설했지만, 늘어나는 교통량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여러 안이 검토된 후에 청계천 위에 고가도로를 건설하는 안이 채택되었다. 이 고가도로 공사는 1967년에 시작이 되어 무려 13년이 지난 1979년이 되어서야 끝났다. 고가도로건설로 인해 도심의 교통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지상도로와 고가도로가 지나가고 주상복합건물, 종합상가, 공구상 등이 들어서면서 인근 지역은 빈민촌에서 거대상권으로 변했다. 그러다가 청계천복원으로 이제 서울의 600년 역사성이 회복되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문화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지난 40년 동안 강북의 경제를 이끌어 왔던 청계천지역이기에 교통량도 하루 17만대 이상의 차량이 들락날락하던 곳이었다. 이는 시간당으로 따질 때 약 1만5천대의 차량으로 엄청난 교통량이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복원공사 중 이 많은 차량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서울시와 시민들의 관심과 걱정거리였었다. 서울시는 수시로 청계천복원공사 중에 시민들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고 홍보해 왔다.
서울시가 내 놓았던 청계천 복원공사 중 교통종합대책은 크게 4가지였었다. 그 내용은 첫째, 도심 및 진입도로의 소통능력향상, 둘째, 도심유입 교통량의 분산, 셋째, 대중교통 이용편의 개선을 통한 승용차 통행수요 전환, 넷째, 승용차 이용 수요관리 및 시민참여이었다. 도심 및 진입도로의 소통능력향상대책에는 하청로에 중앙버스차로를 도입하고, 마장로에 가변차선제를 운영하고, 청계천로 시점부, 종점부와 대학로, 창경궁로, 사근동길 일부구간에 일방통행제를 도입하는 안이 포함되었었다. 그러나 가변차로제와 일부구간의 일방통행제는 시간제약으로 인해 사전준비가 미흡으로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청계천 복원공사 시작 후 초기에 청계천 일대에는 하루 종일 교통 혼잡이 발생했었다.두 번째 대책인 도심유입 교통량의 분산, 우회처리 대책은 일부 실효성이 있었다. 이 대책의 핵심은 동북부지역과 동남부지역의 주요 간선도로들에 대한 우회노선을 만들어 주는 일이다. 예로서 두무개길 및 성동교 남단 우회도로 개설은 부분적으로 도심 진입차량을 우회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도심 진입 전 주요 분기점에서 도로전광표지를 이용하여 우회안내 정보를 실시간으로 운전자에게 제공하는 정책도 차량우회에 기여하였다.세 번째 대책인 대중교통 이용편의 개선을 통한 승용차 통행수요전환은 버스노선체계를 개편하고, 청계천주변 운행버스노선을 임시 조정하는 일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버스정책은 서울시가 ‘버스혁명’이라는 기치 속에서 버스노선개편과 서비스개선을 획기적으로 추진했기 때문에 도심체증완화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였다. 아울러 도심 진입 지하철의 러시아워 혼잡을 완화시키기 위해 전동차를 추가 편성하고, 심야 지하철 운행시간을 연장하는 등의 정책 역시 큰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정책패키지의 결과로 종전에 승용차를 이용하던 일부 통행자들이 버스와 지하철로 바꿔 타고 도심으로 들어오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네 번째의 승용차 이용 수요 관리 및 시민참여는 도심주차관리와 교통대책 홍보가 주요한 내용이었다. 이 대책 중에 도심주차관리의 효과는 미비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도심 진입 시 승용차이용을 억제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달라는 시민운동전개는 실효성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청계천 복원공사 중에 교통대란이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도심에 자동차를 몰고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계고가 6차로 청계천로 8차로 등 모두 14개차로가 없어진 청계천주변에 차를 몰고 도심에 들어가면 극심한 교통체증을 감수해야 한다는 우려에서 승용차를 포기한 시민들이 예상외로 많았다는 점이다. 시민의 자발적인 승용차 이용억제와 대중교통으로의 전환이 도심교통정체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시민정신이 청계천복원 공사 중의 도심혼잡을 사전에 방지하는 초석이 된 것이다. 이 같은 경험으로 볼 때 청계천 복원 후에도 도심에서 극심한 교통 혼잡이나 정체가 일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이를 통해서 볼 때 청계천 복원 자체가 시민들이 새로운 삶과 패러다임 변화에 적응하는 배움과 실천의 무대가 된 것이다. 이런 일들은 우리 모두가 삶과 문화가 살아 숨쉬는 생명의 공간을 절실히 바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원 제 무 Won, Jaimu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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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 ; 청계천 복원사업에는 문화유산 복원사업이 없었다
청계천 복원사업의 사업명을 보면 개천을 복원하여 고도(古都)의 문화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사업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모전교(毛廛橋), 광통교(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水標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敬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영도교(永渡橋)의 다리유적이나 개천의 호안석축을 모두 파괴하고 홍수에 대비한 통수로 설치 사업 같은 것이었다.청계천은 태종 11년(1411) 구거(溝渠)를 개착하기 위해 개거도감(開渠都監)이란 관청을 만들어 경상, 전라, 충청 3도의 역부 52,800명을 동원하여 한 달 동안 개울 정비 사업을 하였다. 그 뒤 영조36년(1760)에는 준천소를 설치하고 한성부와 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의 인력을 동원, 관원 157명, 역군 215,380명(준천소좌목)이 57일간 개천 정비 사업을 하였다. 영조 49년(1773)에는 개천 양안을 석축으로 보수하였는데 금위영, 어영청, 훈련원의 군사들이 2개월간 작업하였다.영조는 친히 왕세손(후에 정조)을 데리고 광통교에 나와서 석축완성을 살피고 이 일을 주관한 당상관과 금위영, 어영청의 대장에게 가자(加資)하고 나머지 책임자에게 말을 하사 하였다. 영조가 친히 준천현장에 나온 사실을 그림으로 그린 준천친림관역도(濬川親臨觀役圖)도 있다.채제공(蔡濟恭, 1720 - 1799)은 준천가(濬川歌)를 짓기도 했다. 준천가 구절 속에 “땅에 있는 맑은 위수(渭水) 장안을 관통하여 쉬지 않고 흐르네, 열두 무지개다리 맑은 하늘에 솟아있고 삼영(三營)에서 쌓은 석축 흐트러짐이 없네, 맑은 물결 찰랑거리고 수양버들 그늘지네.” 이 준천가는 영조시대 청계천의 경관을 말해준다. '동국여지승람'이나 '준천사실', '한경지략', '동국여지비고'의 기록에는 모두 개천(開天)으로 표기되어 있다. 청계천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16년(매일신문)부터 보인다. 청계천은 이와 같이 서울의 상징적 도시 유적인데 복원사업은 하천법의 기준으로 설계되었다. 수표석이 보물 제838호이고 수표교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8호이므로 수표석의 기단과 수표교의 기초석이 청계천 속에 그대로 남아있어 문화재보호법의 규제를 받아야 했다. 청계천 복원설계는 발굴조사를 선행하여 그 결과에 따라 복원설계를 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했다.청계천은 조선왕도의 도시하천이면서 유물이 많이 매장 되어있을 습지이므로 조선시대 동전이나 자기편, 목기편 등 생활용기가 묻혀있는 곳이었다. 조선의 도시계획의 토목기술사를 조사 연구하여야 할 중요한 유적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모두 포기하고 통수로 공사를 먼저 발주하여 진행시켰다.청계천복원공사의 과정을 보자. 2003년 7월 1일 청계고가 철거시작, 2003년 9월 30일부터 12월 10일 까지 유적의 시굴조사, 2003년 12월 11일부터 2004년 7월 1일 까지 180일간 발굴조사, 발굴조사는 광통교지, 수표교지, 하랑교지, 효경교지, 오간수문지, 호안석축을 대상으로 하였다. 발굴조사는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담당하여 퇴적층조사와 지정말목의 수종조사까지 성실히 수행하였다. 광통교는 해체공사에 입회하여 조사한 것이었다. 발굴결과 통수로 설계는 발굴된 유적을 완전히 무시한 설계이므로 유적을 보호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시민단체는 2004년 3월 5일 유적보존을 위해 시장을 검찰에 고발하기도 하였다. 3월 6일 문화재청은 발굴조사 지역 10m 이내는 통수로 공사를 중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4월 9일 문화재청은 광통교와 광통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를 중요문화재로 가지정하였다.1월 12일 문화재 사적분과위원회는 광통교 및 교지와 수표교지, 오간수문지의 문화재 현상변경에 대하여 상세한 설계도를 작성하여 심의를 받아 시행하게 하였다. 2004년 4월 16일 문화재사적분과위원회는 수표교와 오간수문은 원위치에 복원하고 광통교는 상류로 이전하여 복원하게 의결하였다. 2005년 1월 21일 시적분과위원회는 광통교와 교지, 수표교지, 오간수문을 사적으로 지정키로 의결 하였다. 호안석축 1단을 저수로 바닥 원위치에 복원하게 하였다. 저수로 변의 조잡한 파석의 산석 쌓기는 전통양식이 아니므로 발굴된 호안 유적의 양식대로 안전감과 접근성이 좋은 평축 축대로 쌓도록 요청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004년 3월 18일 서울 시장님과 저녁을 하는 자리에서 필자가 왜식조경을 고치도록 건의하기도 했다. 필자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조선왕도의 역사적 다리들과 하천의 경관을 옛 대로 보존하면서 홍수대비 설계를 왜 할 수 없을까? 저수로는 회돌이 치는 소(沼)와 담(潭)도 있고 달빛 부서지는 월하탄도 있는 생태하천으로 여름밤에 반딧불이가 펄펄 날아다니는 개울이 보고 싶다.파리나 런던, 경도(京都)에 가면 역사가 축적된 도시유적이 존경스럽다. 서울은 역사 없애기 경쟁을 하는 천박한 일회용 도시 같다. 고궁(古宮)이 없었으면 삭막할 뻔 했다. 이것은 가치관의 문제이다. 전통문화의 역사적 파괴가 새로운 발전인양 정당화 하는 의식이 문제이다. 문화는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나를 부정한 곳에 민족문화의 창조는 없다. 일제가 조선 문화는 후진적인 것이기에 버리라고 교육한 기능주의가 문화유산의 보존과 활용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수표교와 오간수문이 제자리에 복원 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정 재 훈 Jeong, Jae Hoon 한국전통문화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