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2011 올해의 조경인 [산업분야] 최신현
    Choi, Shin Hyun(주)씨토포스 대표서서울호수공원 ASLA 어워드 수상, 한국 조경 우수성 알려후학 양성 및 그릇된 심의 관행 개선, 분야 발전에 기여 지난 9월 28일, 우리나라 조경계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서서울호수공원이 미국조경가협회(ASLA)가 수여하는 Professional Awards에서 당당히 우수상(Honor Award)을 수상한 것이다. 더욱이 이번 수상 소식은 올 한해 조선일보의 왜곡 보도와 도시숲법 제정 움직임, 조경기본법 계류 등 조경 분야로선 유난히도 시름이 많았던 터라 더욱 반갑기 그지없었다. 곧바로 이 소식은 YTN과 조선일보 등 일반 대중매체에도 보도되어 대중들에게도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공원이 건축가의 작품으로 둔갑될 정도로 분야 간의 업역 다툼이 치열한 상황에서 조경가의 손으로 탄생한 공원이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음으로써 한국 조경 설계의 우수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다시금 조경가의 역할을 세상에 알리고 든든히 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이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인 (주)씨토포스의 최신현 대표가 제14회 올해의 조경인 산업분야 수상의 주인공이다. ASLA 수상, 한국 조경 설계 세계화의 한 걸음ASLA 어워드는 권위적이고 폐쇄적이기로 정평이 나있는 명실공히 조경 분야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이다. 매년 1천여 개의 작품이 접수되지만 그 중에서도 단지 10여 개의 작품만 수상의 영예를 안을 정도이다. 약 1%의 수상확률, 그 중에서도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작품이 수상을 한다는 것은 꽤 드문 경우이어서 이번 서서울호수공원의 수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값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금년 수상작의 경우 아시아권에서는 타이완과 우리나라 2개국이 전부이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수상작들이 수차례 도전 끝에 수상하는 반면 서서울호수공원은 단 한 차례의 도전으로 수상한 것이니 그 설계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도시 재생적 관점에서 버려진 부지의 요소를 잘 이용한 점이 돋보인다.’는 심사평에서 볼 수 있듯 최신현 대표가 설계한 서서울호수공원은 조경가의 창의적 산물인 공원이 도시의 낙후된 지역의 재생에 충분히 기여할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오랜 실무 노하우, 후학 양성 및 분야 발전의 밑거름 되고파지난 2006년부터 2009년까지 영남대학교 조경학과의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던 최신현 대표는 씨토포스로 돌아온 이후에도 영남대와 홍익대 건축학과 등 다수의 학교 출강을 이어가고 있다. 약 20여 년 전부터 강의를 시작했다는 그가 이렇듯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 이유는 조경을 단지 이론으로밖에 배울 수 없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실무에서 직접 익힌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제가 학교에 다닌 시기는 조경 실무에 관한 정보를 얻을 만한 선배나 기회가 없었어요. 졸업한 이후에도 거의 독학을 하듯이 실무를 익혔고, 그런 과정을 겪어보니 현장에서의 실제적 경험들이 매우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익힌 노하우를 오늘의 후학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던 게 제가 강의를 하는 첫 번째 목적입니다.” 실제로도 많은 조경인들이 그를 설계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조경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지식을 바탕으로 벌써 8년째 산림인력개발원에서 임업직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녹지설계를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공무원 교육에까지 적극 나서고 있는 이유는 조경 분야의 권익 신장 및 변화를 위해서는 제도권에 속한 공무원들의 마인드 변화가 우선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공무원들의 마인드가 변하게 되면 업체도 변하게 되고 결국 이런 움직임이 조경 분야 전체가 바뀌게 되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관행을 뒤엎는 실천, 조경 분야 권익 보호오랜 경력의 조경 설계가로서 그가 맡고 있는 또 하나의 업무는 설계 자문과 심의에 관한 것이다. 그동안 서울, 대구, 인천, 안산과 군포 등 전국 각지에서 그 역할을 맡아오면서 그가 역점을 두고 실행에 옮긴 것은 바로 부실한 조경 도면을 바로 잡는 것이었다. “도면이 정확해야 시공이 정확해질 텐데, 특히 건축 심의를 나가보면 조경 도면이 부실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건축가가 대충 그려온 경우도 많았고…”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는 조경 심의위원으로서 제대로 된 조경 도면작업을 요구했고, 이를 통해 그간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았다. “조경 도면이 엉망이어도 심의를 통과할 수 있다면 조경가에게 일을 맡기 이유가 있을까요? 아무리 작은 규모의 일이라도 도면을 제대로 그려오게 하는 것이 조경의 업역을 지키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라는 그의 말에서 조경 분야를 향한 그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용자를 배려한, 자연의 질서를 고려한 조경 디자이너가 될 터북서울꿈의숲과 서서울호수공원 등 도시 내 오픈 스페이스를 디자인 하는데 있어서 그가 갖고 있는 디자인 철학은 마치 퍼즐에 있는 한 조각처럼 그 공간만이 가진 독창적인 디자인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수많은 그의 작품들에서 작가적 일관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이런 철학에 연유한다. 하지만 그런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이용자들이 즐거운, 이용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실제로 국제공모로 당선된 북서울꿈의숲에서는 도시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공원 안에서도 즐길 수 있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서서울호수공원은 정수장이라는 장소의 역사성과 항공기 소음이라는 제한요소를 이용해 낙후된 지역민들에게 회복과 치유, 그리고 즐거움을 주는데 주력했다. 이런 그가 현재는 또 하나의 역작을 준비 중이다. 바로 지명초청 설계경기에서 1등으로 당선된 동탄 2신도시의 워터프론트 프로젝트. 이 프로젝트에 임하는 그의 자세는 어느새 형태주의를 넘어 자연주의 조경가에 천착해 있었다. “과거에는 독창적인 디자인에 집착하다보니 다소 형태적 디자인에 치중했다면, 이제는 우리가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빛, 바람, 소리, 물, 색상 등을 이용해 조화롭게 아우를 수 있는 조경에 주력하고자 합니다. 곧 자연의 질서와 섭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이것이 바로 조경은 곧 삶이자 생활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가 만들고 있는 동탄 워터프론트의 완공이 기다려지는 이유이다. 또 하나의 수작이 탄생하길 고대하며 축하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 2011 올해의 조경인 [학술분야] 이종석
    Lee, Jong Suk서울여자대학교 원예생명조경학과 명예교수국내 자생 식물 연구 및 신품종 개량 등한국 원예 발전의 선두주자,원예와 조경의 접목으로실내 조경학의 확산에 기여“‘올해의 조경인’에 선정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더욱이 저는 원예 분야에서 활동한 사람인데, 이곳까지 눈을 돌려 공로를 인정해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비록 현직에서는 떠나 있지만 원예와 관련된 연구 활동의 연장선에서 아직 열정을 다하고 있는 이종석 교수는 이렇게 짧은 수상 소감을 전하였다. 이 교수는 대학원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40여 년 간 우리나라의 자생 식물을 연구하며, 자생 식물의 화훼화 및 조경식물화를 위한 신품종 개발에 힘써 왔다. 그의 식물에 대한 집념은 매우 유별났다고 하는데, 이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들이 있다. 그가 1975년 LH(당시 대한주택공사)에 입사했을 당시 국내에는 조경직종이 정립조차 되지 않은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처음으로 조경설계시방서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1977년 제주대학교 교수로 발령을 받고 제주도에 갔을 때는 제주도의 고유 조원 양식을 발굴하고 정립하였으며 제주도의 자생식물인 한란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까지 땄다. 낯선 제주도의 상록수목과 한라산의 식물들은 그에게 흥미로운 대상으로 다가왔고, 끊기 있는 연구를 통해 결국 제주도의 유망 화훼자원식물에 관한 한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전문가가 된 것이다. 어떤 상황에 놓여도 식물에 대한 집념을 놓지 않았고 항상 부단한 연구로 이어나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실내 조경학의 확산에 기여그의 빼놓을 수 없는 공로 중에 하나는 실내조경학의 강의개설과 교재의 출간이다. 교수 시절 조경학을 가르치면서 경험해 왔던 이론적 배경과 주택공사 조경과에 근무하던 시절의 조경설계 실무와 건축 및 원예학을 접목시켜 ‘실내 조경학’을 정립한 것이다. “생각치도 못했는데 그 책이 효자책이 되었습니다. 돈이 되어서가 아니라, 저자 입장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보고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한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두니 참으로 뿌듯합니다.” 그리고 이는 화훼원예학과 조경학에 대한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좀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 접목을 꾀하다 보니 이루어 낸 성과라며 타 분야 간의 융합이 이 시대의 필요요건임을 언급하였다. 이제 더 이상 한 분야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없음을 강조하고, 통섭과 융합을 당부하였다. 도시농업의 활성화이 교수는 조경이 지금까지 디자인이나 설계, 평가 등을 위주로 발전해 왔는데,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영역을 섭렵하고 포용하여 학문의 범위를 넓히는데 노력을 해야 한다며 어느 특정분야가 독주하는데 대하여 아쉬움을 나타냈다. 최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고 있는 도시농업(都市農業, Urban Agriculture)도 조경과 연계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제까지의 조경은 녹지공간의 확보와 그 공간의 이용 및 장식적 개념으로만 생각해 왔지만, 요즘 사람들은 실용적이고, 기능적이며, 직접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요구한다.”는 것을 느끼면서부터 도시농업의 도입과 융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도시농업을 통해 얻게 되는 지역간, 계층간의 소통을 위한 커뮤니티의 활성화와 소멸되어가는 농촌과 도시와의 연계는 설 자리를 잃어가는 전통적인 농촌 문화를 전승케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여행, 무한한 가능성과의 만남시대의 변화와 함께 사람들의 요구들도 다양해졌다. 이러한 다양성을 습득하기 위해 이 교수가 선택한 것은 바로 여행이었는데, 원래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단다. 그는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법이 없다고 한다. 길의 경로를 달리하며 호기심을 충족시키기도 했지만, 오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낯선 들풀들과 나무들을 다양하게 접하기 위해서이다. 각 나라의 식물 분포와 이용, 새로운 식물 탐사를 위해 떠났던 해외 여행은 단순히 여행이 아니라 우리의 실정에 맞도록 융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 내는 과정들이었다. 옥상 녹화를 처음 접했던 독일, 도시농업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찾았던 유럽과 일본, 러시아의 등이 그러한 사례로 남았다. 끊임없는 연구, 미래에 대한 준비이 교수는 그간 개발이 가능한 자생 식물을 찾아 전국의 산야를 수시로 돌아다녔으며, 수집한 식물의 번식과 재배 방법의 개발, 신품종으로 육성하는데 기여해왔다. 그런가하면 LED를 이용해 실내에서 식물을 기를 수 있도록 하여 실내 원예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한 공적이 크다. 예를 들어, 겨울이 길고 추운 러시아의 시베리아지역이나 북유럽국가들 혹은 무더운 사막에 위치한 아랍 국가들에게 새싹이나 잎채소를 생산할 수 있는 LED 장착 컨테이너를 개발하여 수출을 한다거나 미래의 공간인 우주공간이나 깊은 바다 속의 빛이 없는 공간에서 식물재배를 가정한 연구 등도 진행하였다. 또한 사막과 같은 척박하고 건조한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을 탐색하여 사막화에 대비하고자 하였으며, 염분이 있는 곳에서도 잘 견딜 수 있는 내염성식물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였다.한편, 관상기간이 짧은 꽃 대신에 잎이 아름다운 식물을 이용하므로써 유지관리비를 줄이는데도 일조를 할 수 있도록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실제로 우리나라의 자생 잎무늬 식물의 개발에 앞장서고 있으며, 지금까지 10여건의 신품종 출원과 특허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식물들은 앞으로 상업화 가능성이 높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조경 식재 재료로서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마치며이종석 교수는 이번 인터뷰를 통해 그가 지나온 시간들을 돌이켜 보고 식물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를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하였다. 그의 업적은 결국 식물에 대한 애정과 열정 그리고 집념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퇴임 후 근황을 묻자 “세계적인 자원전쟁에 대비하여 우리나라에는 식물원이 많이 설립되어야 합니다. 국내외 유전자원들을 많이 모으고 또 보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식물원은 국민의 쉼터이자 체험과 배움의 장場이기도 합니다.”라며 현재 국립수목원의 초빙연구원으로서 식물자원의 수집과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또한 고비사막에 갔을 때를 떠올리며, 놀랍게도 서역으로 가는 실크로드의 중간지점 오아시스에서 우리나라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식물을 그곳에서 접하고 ‘어떻게 이 식물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는데, 여건만 허락 된다면 동, 서의 문화가 서로 교차되고 전파되듯, 식물의 동, 서 이동 경로와 메카니즘에 관하여 연구해 보고 싶다는 앞으로의 포부도 밝혔다.
  • 2011광주디자인비엔날레, 숲을 디자인하는 방법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하면 도가 아니다.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구절로“도道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노자老子가 한 줄로 집약해 놓은 답변과도 같다. 내용이 추상적이어서 정확히 뜻을 짚어내기가 어려우며 실제 학자들 사이에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도가 항상 불변의 도는 아닐 수 있다”,“ 생각될 수 있는 진리는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없고 말로써 표현할 수 있는 진리는 영원한 진리라고 할 수 없다”혹은“도(진리)는 말로써 한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등등. 지난 9월 2일부터 10월 23일까지 광주 시내 일대에서 펼쳐진 2011 광주디자인비엔날레(총감독 승효상, 아이웨이웨이)는“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며“도가도비상도(圖可圖非常圖디자인이 디자인이면 디자인이 아니다)”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道를 圖로 바꿔 도덕경의 첫 구절을 패러디한 주제로서 그 해석과 의미는 매우 다양할 것이다.이번 행사는“도가도비상도”의 개념을 작품으로 풀어내는 ‘주제전’, 지난 백년간 건축, 패션 등 기존의 영역에서 디자인을 이끌었던 100개의 이름을 선정하여 작품을 전시하는 ‘유명’과, 이와는 대조적으로 의료와 환경 등 우리의 주변 일상에서 기존의 유명 디자인 작품의 오브제(브랜드 등)를 넘어선 새로운 디자인의 영역을 탐색 확장하는‘무명’, 그리고‘커뮤니티’,‘ 광주폴리’,‘ 비엔날레시티’등 모두 여섯 개의 대주제로 구성되었으며, 44개국에서 133명 작가, 73개 기업이 참가하였다.
  • 올조회, 경인아라뱃길 가다
    본지가 매년 조경 분야의 발전에 공로한 조경인들에게 수여하고 있는 ‘올해의 조경인’상의 수상자 모임인 ‘올조회’에서는 지난 9월 26일(월) 경인아라뱃길 현장을 방문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지난 2009년 경인아라뱃길 사업의 친수경관 조성과 관련해 인천광역시와 경기도 김포시에 속하는 사업 지역 내 인천터미널, 김포터미널, 두물머리생태공원, 주운수로, 파크웨이를 대상으로 설계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그 결과 조경설계 서안㈜ R&D의 ‘청옥빛 소풍 Azure Journey’이라는 작품이 최종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경인아라뱃길은 현재 서해갑문이 있는 인천터미널과 한강갑문이 있는 김포터미널, 주운수로를 포함해 수향 8경, 파크웨이, 자전거도로, 포켓 공간, 선착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공정률이 90%로 오는 11월에 준공될 예정이다. 사진_최자호 부장
  • 조경의 길을 묻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지난 10월 4일 화요일, 조경전문포털사이트 라펜트(www.Lafent.com)에는 ‘2011년 제1회 조경의 길을 묻다 간담회(이하 조경의 길)’가 동영상으로 공개되었다. 라펜트는 사이트 동시 접속자가 늘어날 것을 대비하여 사전에 서버 교체와 점검을 완료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4일 하루 동안 사이트의 로딩 속도가 평소보다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되었다. 예상을 상회하는 사람들이 라펜트 ‘조경의 길’에 접속을 했던 것이다. ‘취업’과 ‘진로’ 문제가 조경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얼마나 절실한 당면 관심사인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최근 조경 분야가 주목하고 있는 키워드 중 하나가 ‘소통’이다. 특히 외부 공간 전반을 조성하는 분야의 특성상 분야 간 소통에 근거한 융합과 통섭이 많은 이들로부터 회자되면서 중심 이슈가 되었다. 이는 분야와 업역을 넘어선 외부 공간 전반을 조성하는 코디네이터로서의 역할이 조경가에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분야와 업역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세대 간 소통은 과연 어떠한가? 특히 대학 고학년에서 조경 실무를 준비하는 예비 조경인과 조경 전문가와의 핫라인을 만드는 시도는 필요하고 또한 가치 있는 과제가 아닌가? 이러한 문제 의식이 이번 간담회의 시작이었다.
  • ASLA Awards 수상, 최신현 (주)씨토포스 대표
    지난 9월 28일 미국조경가협회(ASLA)는 2011년 ASLA Professional Awards 수상작을 발표했다. 해마다 약 1천여 개의 조경 작품 및 연구 프로젝트가 출품되지만 단지 10여 개의 작품만이 수상의 영예를 얻을 만큼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이 상에 올해는 (주)씨토포스가 설계한 서서울호수공원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바로 General Design 부문 Honor A ward를 수상한 것. 우리나라로서는 조경설계 서안(주)이 설계한 선유도공원(2004년)과 청계천 (2009년)에 이은 세 번째 수상이다. 앞선 두 작품이 몇 차례의 실패와 도전 끝에 이룬 수상인데 반해 서서울호수공원은 단 한 차례의 도전으로 수상을 이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에 대표 설계자(Lead Designer)인 (주)씨토포스 최신현 대표를 만나 수상 소감 및 설계 과정, 디자인 철학 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먼저 결코 쉽지 않은 상을 단 한 번에 수상했다. 소감은?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받게 된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거듭되는 인터뷰를 하다 보니) 약간의 부담이 된다. 다른 분들도 다만 출품하지 않았을 뿐이지 좋은 작품도 많은데…….그래서인지 인터뷰 하는 것도 사실 조심스럽다.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것이 대학에서 조경학과를 선택하게 된 한 계기가 되었고 그 후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언제쯤 그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 수상이 그 첫 시작의 단추를 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디자인 능력과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린다. 서서울호수공원을 설계하면서부터 ASLA 출품을 염두에 둔 것인가? 특별히 도전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처음부터 ASLA 출품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다만 디자인 할 때 처음부터 도면에서 보이는 것보다는 실제 공간이 만들어졌을 때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디자인을 했고, 시공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공간을 만들다보니 좋은 작품이 나온 것 같다. 사실 보수도 받지 않고 감리를 하게 된 것도 설계를 아무리 열심히 했다 하더라도 시공과 연결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공간이 되지 않기 때문에 내 설계에 대해선 시간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공사까지 책임져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보통 설계가들은 시공을 잘 하지 않는데 나의 경우 설계와 시공을 직접 많이 해봤기 때문에 시공에 대한 경험과 현장에서의 디테일에 대한 고민들이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된 원천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그런 과정에서 ASLA 어워드에 대한 공지가 나왔고 나의 여러 작품 중에서 디테일적으로 비교적 완성도가 높은 서서울호수공원을 출품하게 된 것이다.
  • 북미한인조경가회 AKLA
    ‘북미한인조경가회’의 시작북미한인조경가회의 시작은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북미의 각 지역에서 활동/공부하고 있던 선배들의 의지로 ‘북미한인조경가회’의 연락망이 조직됩니다. 캐나다에 계신 전재현 선배를 포함해서 14명가량이 뉴저지의 모히간 산장에서 모인 자리가 지금의 ‘북미한인조경가회’의 시작이 되었으며, 2001년 2월 9일 김준연, 차태욱, 박윤진, 김정윤, 성정환 선배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지금은 전설과도 같은 ‘뉴잉글랜드 선언’이라 일컬어지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같은 날 필라델피아에서는 조윤철, 정욱주, 김아연, 이재영, 손방, 송준재 선배들이 ‘뉴잉글랜드 선언’과 함께 역시 전설로 남아 있는 ‘필라선언’을 작성하게 됩니다. 이때에‘북미한인조경가회’의 기본적인 목적으로 북미주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조경가들간의 긴밀한 연결, 진보적인 사고의 교환과 공유, 그리고 이를 통한 한국 및 세계 조경계에 대한 기여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2011년 현재, 10년이란 세월이 흐르고 그 때의 선배들은 세계 곳곳에 계시지만 그 당시의 선배들의 마음과 열정이 ‘북미한인조경가회’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임은 분명합니다. ‘북미한인조경가회’에서 벌어지는 일, 벌어질 일‘북미한인조경가회’는 워낙 땅이 넓은 북미 지역의 특성상 온라인에서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도 비공식적인 지역 모임, 그리고 공식적인 MT를 통해 모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조경이라는 공통점을 매개로 다양한 관심과 다양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모여 교류하는 공간이지요. 때문에 온라인상에서는 도시·조경·디자인에 대한 광범위한 토론과 의사소통이 종종 이루어집니다. 또한 비공식/비정기적으로 각 지역의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많은 회원들이 함께 하는 MT와 같은 공식 모임에서는 회원들이 자신이 참여한 프로젝트를 자유롭게 발표하고 서로 비평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합니다. 물론 맛있는 음식과 술이 늘 곁들여진답니다. 쉽게 듣기 힘든 조경과 관련 분야에 대한 정보와 뒷이야기들이 오고가며, 타지에서의 학업, 졸업과 취업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는 곳이기도 하고요. 또한 해외에서 활동하는 조경인들의 생활의 단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현재에 충실하며 희망을 품고 미래를 준비하는 곳이 또한 ‘북미한인조경가회’입니다. 10주년을 맞이하여 ‘북미한인조경가회’는 차태욱 선배가 말씀하신 것처럼 앞으로 보다 적극적으로 한인 조경가들의 뛰어난 능력과 자질을 인지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가 몸담고 있던 북미조경계를, 그리고 나아가서 세계 조경계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기여하고자 합니다.앞으로 ‘북미한인조경가회’의 멋진 활약,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부속 모리스 수목원Morris Arboretum
    세계적인 수목 컬렉션과 역사적인 정원의 만남식물원을 찾아가는 길은 마치 새로운 영화를 보거나 책을 펼쳐 드는 일처럼 색다른 설레임을 준다. 같은 나무와 꽃을 가지고도 그것을 어떤 공간에 어떻게 보여주는가에 따라 정원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주는 오브제가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가장 역사적인 도시 중 하나인 필라델피아의 북쪽 체스트넛 힐(Chestnut Hill)에 위치한 모리스 수목원은 120년이 넘는 역사가 살아 숨쉬는 장편 드라마와도 같은 공간이다. 마치 드넓은 초원에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듯 각각의 독특한 주제와 디자인으로 짜여진 정원을 감상하는 일은, 사실 단순한 꽃놀이나 마음의 휴식을 주는 시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후세대를 위한 모리스 남매의 선물모리스 수목원은 처음 콤프턴(Compton)이라는 이름으로, 1887년 존 모리스(John Morris, 1847 ~ 1915)와 리디아 모리스(Lydia Morris, 1849 ~ 1932) 두 남매의 여름 휴양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모리스 남매의 부친 아이작 모리스(Isaac Pascall Morris)는 철강 제조 회사 아이피 모리스(I.P. Morris) 사의 설립자로, 이 회사는 남북전쟁 후 전기 보급과 자동차 발명 등 급부상하기 시작한 산업화에 힘입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존 모리스는 하버드대학교 엔지니어링학과를 졸업한 후 부친과 함께 회사를 경영해 나갔고, 은퇴 후에는 여동생인 리디아와 함께 수목원 조성에 전념했다. 모리스 남매는 1881년부터 1906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아시아, 유럽 등 전 세계를 함께 여행하며 정원 조성에 대한 아이디어, 예술 작품, 조각품, 식물들을 수집하여 하나하나 수목원을 일궈 나갔다. 특히 1889년에 시작한 세계 여행은 11개월에 이르는 대장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존 모리스는 하버드대학교 부속 아놀드 수목원의 첫 디렉터였던 찰스 사전트(Charles S. Sargent)와, 식물학자이자 식물 탐험가였던 데이비드 페어차일드(David Fairchild), 명망 높은 식물 수집가 E.H. 윌슨(Ernest. Henry Wilson) 등 당대 내로라하는 식물 전문가들과 교류를 통해 전 세계로부터 갖가지 진기한 식물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많은 정원사와 원예가를 고용하여 체계적이면서도 독특한 스타일의 정원을 조성하고 관리해 나갔다. 모리스 남매는 또한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장되는 도시화에 따른 난개발을 우려하여 자연환경과 토지의 보전 관리에도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는 후에 콤프턴이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부속 모리스 수목원으로 변모하는 데 중요한 주춧돌이 되었다. 남매는 또한 교육의 힘을 믿었고, 언젠가 그들이 일군 땅이 대중을 위한 정원이 되어 원예와 식물학을 위한 교육 기관의 역할을 하게 되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결국 1932년 리디아 모리스의 죽음 이후 콤프턴은 정식으로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부속 모리스 수목원이 되었다.
  • 창덕궁
    Changdeok Palace 造營_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로 하고 경복궁을 창건하였으나, 정종 때 다시 개성으로 환도하였고 태종 때에야 수도를 옮길 준비를 하면서 경복궁 동쪽 향교동 일대에 궁궐을 조성하게 된다. 태종 5년(1405) 2월 한양에 한 달 간 머물면서 친히 공사의 진행을 둘러보고, 1년에 걸친 공사 끝에 창덕궁昌德宮이라 명명하였다. 이어 1411년 진선문進善門과 석교石橋를 건립하고, 다음해 돈화문敦化門을 준공하는 등 왕궁의 보완 공사를 진행하고, 1418년 7월 박자청朴子靑에게 명하여 인정전仁政殿을 개축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인정전의 개축 공사가 끝나기 직전 승하하고, 뒤를 이은 세종이 즉위한 1419년 9월 준공하게 되었다. 그 후 인정전은 1453년 단종의 즉위와 동시에 두 번째 개축을 하게 되고, 모든 공사는 세조 6년(1460년)에 이르러 마무리되었다.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불타버리게 되어, 광해군 원년(1609) 재건 공사가 시작되어, 1614년 원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623년 광해군에 반대한 세력에 의해 창덕궁의 많은 전각이 소실되었으나 1636년 인조는 후원1인 옥류천 주위에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을 지었으며, 1644년에는 존덕정을, 1645년에는 취향정을 건립하였다. 또한 1692년에는 애련지와 애련정이 조성되고, 인조 25년(1647) 창덕궁의 전반적인 복구가 다시 이루어지게 된다. 이후 1704년 대보단이 조성되었으며, 1776년 영조는 규장각을 짓고, 정조는 부용정을 개축하였다. 1828년 순조는 사대부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 민가 양식의 연경당을 건립하였다. 이후 1908년 일본에 의해 궁궐 일부에 개축이 행해지고, 인정전에는 서양풍 가구와 실내 장식이 도입되게 되었다. 1917년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 일곽이 소실되었는데이때 정궁인 경복궁의 침전 공간에 있던 교태전·강녕전, 동서행각, 연길당·함원전 등의 건물을 헐어 사용하였다. 그 후 1990년대에 들어와 3단계에 걸친복원 공사가 이루어져 1995년 인정전 주변의 내행각 11동이 복원되었고, 1999년 외행각 주변 15동이 복원되었으며, 2002년 규장각 권역에 대한 복원공사가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고정희의 식물이야기(16)
    1셰익스피어(1564~1616) 원작 논란머지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11월 3일 인디펜던스데이로 유명해진 롤란드 엠머리히 감독의 최신 영화 한 편이개봉될 예정이다. 제목은‘익명anonymous’이다. 한국에서도 개봉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 영화는 세상을 좀 시끄럽게 할 것 같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을 정말로 직접 썼는가?”에 대한 논란을 소재로 하기 때문이다.누가 셰익스피어를 모르겠는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셰익스피어. 그의 작품을 직접 읽거나 연극으로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햄릿이며 로미오와 줄리엣, 맥베스와 오셀로 등의 내용 정도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희곡 서른일곱 편 중에서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은 단 하나밖에 없다.2 햄릿은 무려 일흔다섯 번, 로미오와 줄리엣은 총 쉰 번이나 영화로만들어졌다. 16세기 중·후반에서 17세기 초에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희곡은 지금도 연극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있으며 그의 명성은 조금도 시들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은 다른 어느 작가도 이루지 못한, 수백 년의 시대를 초월한 셰익스피어의 천재성과 그의 작품의 보편성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오셀로, 맥베스, 그리고 팔스타프 등의 작품은 베르디가 오페라로 작곡하여 더욱 널리 알려지는데 일조하기도 했다.이런 전무후무한 희대의 작가가‘본인의 작품을 직접 쓰지 않았을 수 있다’는 논란이 18세기에 시작되었고 이 논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원작 여부에 대한 의문이 더욱 짙어져가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 근거가 되는 몇 가지 핵심적인 논지를 들자면, 첫째로 보통 작가들은 평생 서너 편의 희곡도 쓰기 어려운데 서른일곱 편의 희곡을, 그것도 두고두고 명작으로 남을 그 많은 희곡들을 과연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단순한 인간이 쓸 수 있었는가라는 점이다. 평균 일 년에 한 편 이상을 쓴 셈이다. 특히 작품 속에서 보이는 엄청난 철학적 깊이와 고대 문학과 예술에 대한 방대한 지식, 그리고 법률이며 정치 상황에 대한 전문적 지식, 궁중 생활과 테니스며 매사냥 등 귀족들의 생활에 대한 상세한 묘사들로 미루어 볼 때 셰익스피어의 출신 성분과 교육 수준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셰익스피어의 언어인데, 그는 역대 작가 중 가장 많은 단어를 구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총 17,750개의 단어를 썼으며 가장 서민적인 표현으로부터 최고급 수준의 언어까지 다양하게 구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필요하면 새로운 단어도 만들어 냈다. 영어 사전에 가장 많이 인용된 것도 그의 언어이다. 물론 교육 수준의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독학으로 지식과 언어 구사력을 넓히고 명작을 쓰는 것이 가능한 일이니 이 논란은 크게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둘째는 외국어 실력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쓴 사람은 그리스어와 라틴어 외에도 상당한 수준의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했음에 틀림이 없는데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어느 사이에 외국어까지 배웠겠는가라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장갑을 만드는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나 기본 교육만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스물한 살 정도 되었을 때 런던으로 가서 배우가 되었다. 그리고 희곡을 써서 바로 무대에 올렸는데 쓰는 족족 엄청난 반향을 얻었고 유명해졌다. 그런데 어디에서고 그가 고등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국어 습득 역시 천재라면 가능한 일에 속한다. 세 번째는 그의 외국 지리와 문물에 대한 지식이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상당 부분이 영국 이외의 곳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탈리아의 베로나를 무대로 하고 있다. 오셀로와 베니스의 상인은 물론 베니스가 무대이고, 햄릿은 덴마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그 외에 보헤미아, 시칠리아, 프랑스, 그리스, 이집트 등 거의 온 세상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 그 나라에 가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장면 묘사들이 작품에 실려 있다. 그런데 셰익스피어 자신은 영국을 떠나 본 적이 없다. 물론 이 역시 여행 서적들을 읽어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이지만 보통 여행 서적에서 다루지 않는 세세한 문물들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천재성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다. 네 번째로 의심이 가는 점은 인쇄된 판본 외에 셰익스피어가 직접 쓴 편지, 일기, 메모 등이 한 줄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유품 중에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는 점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서 보았을 거라는 해석도 있는데, 아무리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하더라도 작가의 서재에서 책이 한 권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한 줄의 메모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다. 인쇄로 넘기기 전에 손으로 쓴 원고가 한 편이라도 혹은 부분적으로라도 어딘가는 남아 있는 것이 정상이다. 글 쓰는 사람들이 대개 작품 외에도 편지나 메모, 일기 등을 남기기 마련이다. 특히 그가 남긴 유언장을 보면 누가 어떤 가재 도구를 물려받는가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정하고 있음에도 그의 작품의 판권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는 대목에 도달하면 누구나 마음속으로 물음표를 찍게 된다. 이미 1780년 경 셰익스피어 고향 출신의 전기작가 제임스 윌멋이 스트팻퍼드 일대의 반경 오십 마일의 범위에 있는 모든 도서관과 사택들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단 한 줄의 편지도 나타나지 않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이메일처럼 당시의 일상적 커뮤니케이션 도구가 편지였음을 감안할 때 특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셰익스피어가 사업에 능란했다는 점이다. 그는 런던의 글로브 극장의 주주였고 재산을 많이 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자녀들 교육을 등한시해서 그의 딸들이 문맹이었다는 점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 딸이 둘이었는데 한명은 아예 문맹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자기 서명이나 겨우 그리는 정도였다고 한다.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보이는 엄청난 교육적, 문화적 수준에 비추어 볼 때 정말 상상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