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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 루이 비네쉬 루이 비네쉬 페이자지스트 대표
    조경 설계에 문외한이 아니더라도, 베르사유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파리 근교, 조그만 전원 마을인 베르사유에 도착하면 그 한가한 분위기에 걸맞지 않게 생경하게 서 있는 궁전과 정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입장 차례를 기다리는 과정은 인내심을 요하고, 마리앙투아네트의 궁정 생활에 대한 몽환적 상상은 까다로운 관람 규정으로 증발되어 버린다. 화려하지만 구석구석 슬픔이 배어있는 금빛 가득한 방들을 지나 드디어 만나게 되는 정원 또한 기대만큼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다. 항공사진으로만 보던 회화적인 자수 화단도 발치 가까이에 놓여있으니 그리 대단하지도 않고조금 유치하기까지 하다. 그저 커다랗기만 한 분수들은 영광스럽기보다는 낡아서 안쓰럽고 황량한 느낌이다. 이곳에서 절반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는 주인공은 회색빛 허공을 배회하는 프랑스의 햇빛이다. 휴먼 스케일을 넘어 극단적으로 인위적이고 장식적인 베르사유의 공간 구성은 자연을 인간의 통치 아래로 복속하려는 어리석고 실패한 시도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껏 부풀었던 기대와 달리 사뭇 실망스럽다. 화려하지만 애정 어린 손길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차가운 공간에서 살아야만 했던 프랑스 왕족들의 광기도 사뭇이해할 만하다. 북악과 인왕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우리 궁궐 정원의 자연스럽고 간결한 아름다움이 새삼 그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정원이 그렇듯, 위대한 정원이란 당대의 시대상을 아낌없이 구현하는 공간이다. 베르사유는 17세기 절대 왕정의 상황을 반영하는 거울로서 프랑스의 고전주의 양식을 대표한다. 그중에서도 정원은 그저건물의 배경이 아니라 공간 계획의 핵심이었다. ‘루이 14세’라는 인물을 고려하지 않고 형태적인 측면에서만 베르사유를 분석하고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상당한 착오를 낳는다. 베르사유는 단순히 당시에 축적된 잉여적 부를 과시하는 궁궐과 정원 프로젝트가 아니라, 명확한 목적과 근거를 두고 진행한 프랑스식 행정 복합 신도시였기 때문이다. 종종 오해받는 것처럼 베르사유는 프랑스 왕가의 별장이 아니다. 루이 14세는 왕정의 통치 체제뿐만 아니라 모든 귀족 사회와 관료 집단을 루브르에서 베르사유로 옮겨왔다. 베르사유에는 그가 꿈꾸던 ‘새로운 국가, 프랑스’에 대한 신념과 중앙집권적 표상, 무엇보다도 ‘프랑스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사상이 담겨 있다. 17세기 중반만 해도 유럽의 문화적 중심은 이탈리아였다. 프랑스는 유럽 최고의 부와 군사력을 보유한 강국으로 떠올랐지만, 예술과 문화에 있어서는 여전히 이탈리아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루이는 프랑스의 패션과 예술, 건축을 보호하고 장려해 독자적인 문화적 전통을 구축하려 했고 베르사유는 그 전적인 수단이었다. 건축사가 빈센트 스컬리Vincent Scully가 지적했듯, 경사와 비탈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이탈리아 정원과 달리 베르사유는 일드 프랑스Ile-de-France의 대평원에 건설된 프랑스식 정원이다. 또한 평생을 영토 확장과 전쟁으로 보낸 루이의 자랑스러운 군대와 프랑스 영토를 표현한 추상화이며,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순수한 르네상스적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앙드레 르노트르André Le Nôtre의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다. 절반을 차지하는 하늘 또한 르 노트르가 의도한 바였다. 망사르Jules Hardouin-M. Mansart의 ‘거울의 방’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루이 14세의 상징성을 표현한 것처럼 태양을 자처했던 루이 14세가 깃들 수 있는 끝없는 하늘과 무한히 뻗은 지평선의 정원은 더없이 어울리는 설계였다. 휴먼 스케일을 벗어나는 계획의 성격 또한 자신에 대한 초월적 기준을 세우고 왕으로서 초인적 면모를 구축하려 했던 루이의 의지가 정확히 반영된 결과였다. 루이는 매일 세 차례의 사냥, 세 차례의 관료회의, 세 차례의 성관계를 철칙으로 지키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베르사유 또한 그가 새롭게 이룩하려 한 프랑스적 격식과 이지적이고 복잡한 문화 예식의 3차원적 구현이었다. 다시 말해 베르사유는 프랑스의 국가적 기강과 문화적 기풍을 다시 세우는 사업이었다. 베르사유의 입구인 군사 광장Place d’rmes에는 세종대왕이나 링컨처럼 옥좌에 앉은 통치자가 아니라 말을 타고 돌격을 외치는 루이의 기마상이 서있다. 베르사유는 속전속결로 진행되는 현대적 개발 방식의 시초가 되었다고 할 만하다. 베르사유는 루이 14세의 꿈을 실현할 중앙 정치 무대가 되어야 했기에 늪지대가 아름다운 숲과 정원으로 바뀔 때까지 수십 년의 세월을 기다릴 수 없었다. 루이는 빠른 결과를 원했으며, 르 노트르는 프랑스 전 국토에서 장대한 수목을 구해 성목을 이식함으로써 깜짝 놀랄만한 경관의 변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그만큼 베르사유는 빠르게 건설되었고 또 빠르게 파괴되었다. 프랑스혁명의 혼란을 거치며 황폐화의 길을 걷던 정원은 근 200년간 복원의 대상이었다. 루이 14세와 르 노트르가 세웠던 비전을 해석하고 이상적 상태를 회복하는 일이 베르사유의 임무로 전승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이러한 관점에 변화가 시작됐다. 폭풍 피해로 훼손된 ‘물의 극장이 있는 숲Le Bosquet du Théâtre d’au’ 정원의 재조성 과정에서 원형중심의 역사적 복원이 아니라 베르사유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을 도입한 것이다. 이 역사적인 과업을 맡은 조경가가 프랑스의 정원사, 루이 비네쉬다. 역사와 전통의 층이 겹겹이 축적된 베르사유를 해석하고 새로운 예술적 영감을 정원에 담는 작업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다. 내년 봄에 선보일 비네쉬의 정원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지 무척 궁금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작품 또한 베르사유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해석하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엄격한 격식과 초월적 이상을 표현한 베르사유의 중앙 축과 대비되는 숲속 정원들은 파티와 공연의 무대가 된 그야말로 자유와 환상의 세계였다. 2011년 공모전에 당선된 비네쉬가 1674년 르 노트르가 설계한 물의 극장을 재조성하게 되었다. 루이 비네쉬는 법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묘목장의 견습생으로 다시 출발하며 정원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프랑스 곳곳의 대규모 저택 정원과 성채, 전통 경관을 디자인하며 르 노트르 이후 베르사유 최초의 독창적 정원을 선보일 능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특히 1990년대 미테랑 대통령의 그랑 루브르Grand Louvre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비네쉬는 서울의 메종 에르메스 도산파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 꼭지를 연재하고 있는 인터뷰어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 오피스를 이끌며 10여 차례의해외 공모전에서 우승했고, 주요 작업을 뉴욕시립미술관 및 소호, 센트럴파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지의 갤러리에전시해 왔다.
    • 최이규 / 그룹한 어소시에이트 뉴욕지소장
  • 미래 도시 디트로이트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미래 도시 디트로이트Detroit Future City 스토스Stoss는 일련의 도시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디트로이트 시 전역에 걸친 도시설계 작업인 디트로이트웍스 프로젝트Detroit Works Project에 참여했다. 본 프로젝트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는 사회적·경제적·생태적 시스템 사이의 긴밀한 연계성을 확립함으로써 생산적 효율성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통합된 해결책을 바탕으로 도시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도시 생활, 도시에서의 새로운 생산 방식, 그리고 생산적인 그린인프라를 제안하고자 한다. 스토스는 경관landscape을 단지 여가 공간으로만 간주했던 전통적 인식을 재정의하는 동시에 이를 다변화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경관이 도시의 건전성 및 거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단일한 기능만을 지닌 수동적 경관은 자원만 소비할 뿐이다. 반면 현대의 생산적 경관은 자원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으며 도시 거주민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환경 문제를 줄여줄 수 있다. 생산적인 경관을 만들어내는 것이 스토스의 작업의 기준이 되는 원칙이다. 생산적 경관과 그린인프라는 공기, 물, 그리고 토양을 정화시키며 보다 건강한 도심 생태계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혁신적 경관은 다양한 유형의 블루·그린인프라 조성에 초점을 맞춰 물과 공기의 정화를 추구하며, 식량 및 에너지 등의 생산 기반 시설, 지역 사회의 참여, 그리고 연구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이 계획은 새로운 도시 구조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촉매제로서 종합적 경관 기반 시설의 확립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스토스(Stoss)는 도시 및 사회적 공간 조성 과정에서 조경의 생산적인역할을 추구하는 설계사무소다. 스토스는 기본적으로 공공의 영역과 관련된 일을 한다. 공원이나 캠퍼스 및 오픈스페이스, 지역 및 도시 조성전략, 다양한 스케일의 경관 기반 시설, 개발 및 재개발 등의 공간 조성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다. 스토스는 창의적이면서 실용적인, 동시에아름다우면서 기능적인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기술적 접근과하이브리드적인 해결책을 제안한다.
    • Stoss / Stoss
  • 창조적 파괴와 전략적 버리기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창조와 파괴만큼 도시·조경설계 분야에서 흥미로운 논란을 일으키는 행위도 드물다. 도시 자체가 크고 작은 창조와 발명의 결과다. 19세기 중반 바르셀로나에 도시 격자를 카펫처럼 덮은 일데폰스 세르다Ildefons Cerdà, 그리고 비슷한 시기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에서 프랭클린 파크Franklin Park에 이르기까지 7마일에 달하는 에메랄드 네클리스Emerald Necklace를 도시에 선사한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Frederick Law Olmsted. 이들은 아름다운 흔적을 도시에 남긴 창조자들이다. 이들은 종종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계획가이자 용감한 개척자로 대접받는다. 그에 비해 파괴는 도시의 일부를 없애거나 중요성을 격하시키는 작업이다. 도시를 파괴한 사람은 때로는 도시 문명의 적 혹은 몰지각한 불도저라는 불명예를 얻게 된다. 이렇게 전혀 반대되는 의미의 두 단어를 결합한 개념인 ‘창조적 파괴creativedestruction’가 최근 도시계획 분야에서 자주 논의되고 있다. 1940년대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Joseph Schumpeter에 의해 널리 쓰이게 된 이 말은 최근 뉴욕타임즈 지에 따르면 시애틀, LA, 디트로이트 등의 도시를 쇠퇴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다.1 창조적 파괴는 흔히 기존 환경을 의도적으로 파괴함으로써 바람직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식의 지나친 단순화를 통해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개념이 자주 인용되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도시 쇠퇴 과정이 성장과 발전의 정반대가 아니며 가능하면 피해야 할 절대악도 아니라고 보는 신선함 때문일 것이다. 이는 한 시기에만들어진 도시의 부분이 가까운 미래에 필요한 기능이나 사회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점차 교체되어야 하며, 현재 세계 도시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쇠퇴decline가 바로 그 파괴와 교체 과정의 생산적 준비단계라는 관점이다. 이러한 생각은 특히 최근의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잘 나타난다. 다음은 디트로이트의 다소 불명예스러운 통계 중 일부이다. •미국 역사상 파산한 도시 중 가장 큰 도시(2013년 7월 파산 신청) •도시 총 부채 약 18조5천억 원(인구 1인당 약 3천만 원의 부채) •1950년대 180만 인구에서 2014년 70만 인구로 감소•남은 인구의 약 82%가 고등학교 졸업 이하 학력 •최소 약 4만 채의 집이 즉시 철거 대상으로 지정됨: 총 건축물의 30%가 극도로 열악함 혹은 빈집 •시 전체 가로등 약 8만8천 개 중 3만5천 개만 작동 •단위 인구 당 살인 사건 발생률 뉴욕 시의 11배 1900년대 초 미국의 실리콘밸리,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는 미국 자동차 산업의 빅3, 즉 포드Ford, GMGeneral Motors, 크라이슬러Chrysler가 가져온 자동차 상업화 및 대중화의 진원지로 잘 알려졌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생산이 이루어지기 전 이미 운하와 철도가 지나가는 물류 거점이자 내륙 워터프런트를 활용한 선박 제조 기지로 자리매김하며 1890년 약 21만 명 규모의 도시로 성장했다.3 당시의 디트로이트는 모험가 정신을 바탕으로 세계적인 기술 혁신을 이끌고 있는 1900년대 판 실리콘밸리였다. 흔히 ‘포디즘Fordism 자본주의’나 영국 헉슬리Aldous Leonard Huxley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혹은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의 ‘모던 타임즈Modern Times’에서 직간접적으로 묘사된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Henry Ford가 이 시기 디트로이트에 등장한다. 1903년 포드사를 설립한 그는 1906년 ‘Model N’의 상업적 성공을 토대로 대량 생산 시스템을 적용해 가격을 획기적으로 낮춘 ‘Model T’로 자동차 대중화의 꿈을 이룬다. 하지만이 도시는 몇몇 성공한 기업가들의 독무대는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두뇌들, 열정적인 소자본 창업가, 그리고 이들의 혁신을 지원하는 수많은 창업 인큐베이터와 경쟁력 있는 컨설턴트들이 당시의 디트로이트를 담금질했다. 1901년 자체적으로 자동차 부품 워크숍을 설립하고 포드사에 자금을 조달한 닷지 브라더스Dodge Brothers를 포함해 1908년 GM, 1925년 크라이슬러 등이 혁신의 도시 디트로이트에 둥지를 틀었다. 지난 1850~1890년 10배 가까이 증가한 도시 인구는 다시 1890~1950년 8배 이상 늘어났다. 1950~2013년: 산업 쇠퇴, 악마의 밤, 그리고 파산 선고 그러나 1950년대 전후를 기점으로 이 혁신 도시는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다. 미국내외 자동차 산업 간의 과도한 경쟁, 1950년대 본격화된 백인 중산층의 대규모 교외 이주, 1960년대 불거진 사회 불안과 폭동, 1973~1974년 석유 파동 등의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비슷한 시기 디트로이트 빅3는 시설 투자의 방향을 급선회한다. 1947~1958년 신규 자동차 공장 25개를 전통적으로 혁신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 도심부가 아닌 교외 지역의 저렴하고 넓은 토지에 설립한다.4 게다가 자동차 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할 무렵 새로운 산업이나 서비스를 도입해 변신에 성공한 뉴욕이나 보스턴과는 달리 디트로이트의 도심부는 제2, 제3의 신산업 유치에 실패하고 만다. 이곳은 더 가난하고, 더 분노에 찬, 그리고 혁신의 감각을 망각한 흑인 커뮤니티로 가득 차게 된다.5 1980년대를 기점으로 젊은이들 사이에서 집단적 의식처럼 번진 ‘악마의 밤Devil’ Night’은 매년 수백 가구의 방화 피해와 살인 사건으로 이어졌다. 디트로이트는 계속된 산업 쇠퇴와 사회 불안, 정부 부채 누적으로 결국 2013년 7월 공식적으로 파산 선고를 하게 된다. 김세훈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하버드 GSD에서 도시계획학 석사와 박사 학위(DDes)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환경대학원과 협동과정 도시설계학전공에서 도시설계 이론과 스튜디오수업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신흥도시 개발 모델』, 『도시형태변화분석방법론노트』, 『도시와 물길(A City and Its Stream)』 등이 있으며, 한국·중국·동남아시아의 도시 연구와 설계를 함께 진행하고 있다.
  • 부산 도시재생의 경험과 비전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부산이라는 도시 - 01 모든 도시는 인간이 모여 머물며 어우러져 살기 위해 선택한 삶터다. 그중, 항구 도시는 해양과 육지의 자원을 기반으로 경제적 가치를 보다 많이 창출하기 위해 사람들 스스로 선택한 보금자리다. 또 해양과 관련한 각종 산업이 발달해 다양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부산의 항구는 이러한 경제적 목적 외에 또 다른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다. 1876년 개항, 1945년 광복, 1950년 한국전쟁 등 일련의 사건에서 부산이 담당했던 ‘국가 문제 해결지’로서의 기능이다. 부산은 개항 직후부터 전쟁 후인 1960년대까지 급속한 변화 속에 놓여 있었다. 개항 후 140여 년의 시간 속에서 부산은 대한민국의 근대사와 켜를 같이 했다. 일제강점기, 광복, 경제개발기의 인프라와 부산의 사회체제, 공간 조직, 건축물, 장소들은 맞닿거나 연이어 있다. 또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상황에서도 움직였던 민초들의 공동체적 활동과 한국전쟁 후유증의 극복 과정이 지난 60여 년 동안 부산에서 벌어졌던 갖가지 일상과 사건의 배경이 되었으며 근거를 제공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은 부산이 특별한 준비 기간을 거치지 못한 채 역사적 사건들의 과정과 결과를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게 했다. 이로 인해 부산은 제대로된 도시계획과 중·장기 도시발전 전략을 수립할 여유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결국 이러한 시간은 부산을 근대기에 출발한 도시임에도 근대사를 느낄 수 없는, 근대기에 발전된 도시임에도 근대 문화를 인지할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했다. ‘토목의 도시’, ‘기억 상실의 도시’라는 혹평을 들을 정도로 부산은 그동안 ‘부산만의 도시상都市像’ 구축에 소홀했다. 시각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입 도로 확폭이라는 미명아래 부산대교를 건설하며 시행된 부산세관 철거(1979년)가 무분별한 개발 시대의 본격적인 시작점이 아니었나 싶다. 88올림픽을 준비하며 서울과 유사하게 시작된 공동 주거 단지의 본격적인 건설과 연이은 재개발 붐은 부산 곳곳의 산록과 해안에 스며있던 자연과 역사의 기억을 급격하게 해체시켰다. 그즈음 1992년의 시청 이전(남포동에서 양정으로)과 직할시에서 광역시로의 개칭(1995년)은 원도심의 쇠퇴를 불러왔고 근대 부산의 위상 또한 격하시키는 원인을 제공했다. 부산이라는 도시 - 02 부산은 타 지역에 비해 해운대, 영가대, 태종대, 이기대, 신선대, 몰운대, 시랑대 등 ‘대臺’로 끝나는 장소들이 유난히 많다. 이유는 바다 쪽으로 향한 지형의 끝점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대와 대 사이는 완곡한 모래사장과 크고 작은 포구와 항구가 자리를 잡았고, 이를 중심으로 동네와 시가지가 형성됐다. 그래서 연안부에 자리 잡은 시가지들은 대부분 앞으로 바다가 펼쳐진 배산임해背山臨海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부산의 연안부는 본토부와 연결된 여러 지점에서 들락날락하는 목을 이루고 있어, 여러 개의 작은 만과 반도들이 선으로 연결된 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안가에서 짧게는 50m, 길게는 1,000m 정도 내륙으로 이격된 배면부에 산들이 꼬리를 물고 연결되어 있다. 연안을 배경으로 병풍처럼 서 있는 승학산, 엄광산, 봉래산, 보수산, 구봉산, 수정산, 황령산, 금련산, 장산 등의 산봉우리들과 그 사이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던 보수천, 영주천, 초량천, 부산천, 동천(호계천, 가야천, 부전천, 전포천), 남천, 수영강, 춘천 등이 부산 연안 경관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부산의 도심 연안은 부산진성과 자성대 근처를 중심으로 하는 ‘점點’ 형태에서 출발했다. 구한말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연안부는 군사·경제적목적에 의한 침탈의 대상으로 악용되면서 절토와 매축에 의해 기다랗게 연결된 ‘선線’의 형태로 돌변했다. 전쟁 후, 1960~70년대를 거치며 부산 연안은 지형지세에 따라 지구地區 별로 가지각색의 목적을 가진 ‘면面’형태로 확장되었다. 강동진은 성균관대학교에서 건축학을 공부했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설계와 역사 경관에 대한 꿈을 키웠다. 현재 경성대학교 도시공학과에서 자연, 문화, 역사, 경관 등을 키워드로 하는 ‘도시재생’ 작업을 통해, 학생들이 도시재창조에 대한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함께고민하고 지도하고 있다. 특히 버려지거나 황폐해 가는 도시 유산(산업유산, 근대화 유산, 역사 마을 등)을 지키고 힘을 싣기 위한 방안 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더불어 캠프 하야리아 부지의 시민공원화를 위한 전문가 그룹인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주민이 주도한 전주의 노후 주거지 재생 경험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2007년 국토해양부는 도시재생사업단을 출범해 노후 주거지에 대한 지역자력형 재생 방안을 연구했다. 그동안 연구한 성과의 실용성 검증을 위해 2011년에 전주와 창원을 대상으로 테스트베드TB를 운영했고, 전주의 주거지 재생 TB 대상으로는 노송마을이 선정되었다. 전주의 테스트베드, 노송마을 1970년대 전주역은 지금의 전주시청 자리에 입지하고 있었다. 열차의 완행과 야간통금 때문에 역 주변에서는 필수 시설이었던 저렴한 여인숙촌이 역사 건너편에 자리하여 홍등가 기능을 하고 있었다. 이 홍등가와 면한 주거지가 노송마을이다. 철도 뒤로 구릉지를 형성하고 있는 입지적 특성으로 이곳은 1950년대 피난민촌이 형성되었다. 때문에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면한 불규칙하고 작은 필지 위에 다닥다닥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도시 성장을 억제하는 철도로 인해 전주의 동부가 개발되지 못하자 1980년대 초에 역을 동측으로 2~3km 이동시키면서 홍등가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기존 전주역사 자리에는 전주시청이 이전해 왔고, 철도 부지가 도시 간선 가로로 대체되면서 이 대로변에는 고층의 업무 시설이 집적되었다. 그러나 업무시설의 이면에 낡고 어두운 홍등가가 계속 운영되면서 노송마을은 전주시에서 거주환경이 가장 열악한 마을 중 하나가 되었다. 이에 전주시는 주거지 재생을 위한 TB로 노송마을을 가장 적합한 곳이라 판단한 듯했다. TB 운영을 위해 연구진이 노송마을에 들어갔을 때 마을의 현황은 매우 암담했다. 면적 약 14만5천m2에 950세대 1,90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노송마을은 10여 년 전 주거환경 개선사업을 시행한 곳이다. 이때 개설된 격자형의 소방도로에 의해 불규칙한 필지들은 더욱 작아져 다수의 과소 필지가 형성되었으며, 격자형 가로망이 개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동차가 통행 가능한 도로에 면한 필지는 35% 미만이었다. 산재한 공·폐가와 재활용을 이유로 너부러진 폐기물, 자투리땅에 방치된 쓰레기 더미 등이 마을의 경관적·위생적·방범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었다. 도심 한가운데서 시청과 인접해 있으면서도 도시가스도 하수도도 미정비 상태였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저소득 고령자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었으며, 가구주의 소득 수준이 월85만원 미만인 세대가 47.5%에 달했다. 주민 설득에서 참여까지 도시재생 TB에 대한 이해가 없던 주민들은 사업비 하나 없이 주민 주도에 의한 선 계획 후 타당성 있는 사업의 실행을 약속하는 연구진에게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마을을 직접 돌아보고 문제를 진단하기 위한 최초의 주민 워크숍 ‘동네 한바퀴’에 100여 명이 참가하여 연구진도, 행정도, 주민들 스스로도 놀라워했다. 부녀회장, 방범대장, 통장, 청년회장 등 마을의 다양한 조직의 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전 주민 대표 그룹과 집집마다 방문해 사업의 의미를 설명한 도시재생센터 연구진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주민들은 10여 명이 한 조가 되어 마을을 돌아보고 일상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진단했으며 조별 발표를 통해 이를공유했다. MP팀은 도출된 문제의 범주를 주택 중심의 사유 공간, 주차장화 된 경사 가로와 소공원 중심의 공공 공간, 일자리 창출을 위한 경제 환경, 마을 쓰레기 및 방범 문제 중심의 마을 관리 및 복지로 구분했다. 이렇게 구분된 범주별 문제에 대해 워크숍에 참여한 주민들로 하여금 개인적 관심 분야를 선택하도록 했으며, 각 문제에 대해 주민 스스로 대안을 모색하도록 유도했다.각 범주별로 주민들이 파악한 대표적인 문제와 대안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먼저 사유 공간에 대해서는 방치된 폐가에 의한 위생적·방범적 문제, 과소 필지로 인한 주택 신축 및 확장의 어려움, 노후 주택 수리의 필요성 등이 파악되었다. 그리고 행정의 협조를 통한 폐가 철거 및 텃밭 활용, 자투리땅의 저렴한 매입 중계에 의한 재건축 촉진, 담장 정비 등을 제안했다. 공공 공간에 대해서는 가파른 경사지 및 불법 주차로 인한 통행의 어려움, 골목길의 노후화, 야간의 범죄 우려, 소공원 관리 문제 등을 파악하고 가로의 재구성 및 정비, 주차 단속, 방범 장치 강화 등을 제안했다. 일자리 부족 문제에 대해서는 남성을 중심으로 폐가 철거 및 집수리 사업이, 여성을 중심으로는 동네 식당 및 텃밭 가꾸기 등을 제안했다. 마을 관리와 복지 측면에서는 쓰레기 무단 배출, 도시가스 미공급, 어린이 및 노인들을 위한 시설 부족, 점집 및 정신장애인복지시설의 확장 등이 지적되었으며, 주민 주도의 청소 및 화단 가꾸기, 학생을 위한 공부방 및 노인을 위한 사랑방 조성 등의 방안이 제시되었다. MP팀은 사유 공간과 공공 공간의 정비를 물리적 재생으로, 일자리 창출은 경제적 재생으로, 마을 관리와 복지는 사회적 재생으로 구분했다. 김현숙은 1983년 전북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 대학교에서 도시설계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5년 도시계획기술사 자격을 취득하여 21C도시건축연구소장으로서 도시계획 및 설계실무에 종사했으며, 1998년부터 전북대학교 도시공학과 교수로 도시설계 연구실을 관장하고 있다. 중앙건설기술심의위원, 국가건축정책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국토정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도시설계,도시 경관, 도시재생에 관한 연구와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 ‘도시재생특별법’ 제정과 정책 추진 방향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2013년 6월, 다양한 도시 문제를 해결하고 도시의 종합적인 기능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도시재생특별법’)이 제정되었다. ‘도시재생특별법’은 쇠퇴하는 도시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경제 기반을 확충하고 근린 생활권 단위의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활동 등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이 법은 앞으로 도시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중요한 기반으로 작동할 것이다. 정책 기반으로서의 도시재생특별법 ‘도시재생특별법’은 제1조에 “도시의 경제·사회·문화적 활력 회복을 위해 공공의 역할과 지원을 강화함으로써 도시의 자생적 성장 기반을 확충하고 도시의 경쟁력을 제고하며 지역 공동체를 회복하는 등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된 바와 같이, 지원법 성격이 강하다. 즉, 지자체가 직접 계획하고 실행하며 국가는 이를 지원하는 체계와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시재생’이란 법 제2조에서 정의된 것처럼 “인구의 감소, 산업구조의 변화, 도시의 무분별한 확장, 주거환경의 노후화등으로 쇠퇴하는 도시를 지역역량의 강화, 새로운 기능의 도입·창출 및 지역자원의 활용을 통하여 경제적·사회적·물리적·환경적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도시재생특별법’의 주요 내용은 크게 주민과 지자체중심의 계획 수립, 도시재생 추진을 위한 중앙과 지방의 조직 구성, 도시재생 사업 지원, ‘도시재생선도지역’지정 등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계획 체계 ‘도시재생특별법’에서는 먼저 국가가 ‘국가도시재생기본방침’을 수립하여 도시재생 시책, ‘도시재생전략계획’ 및 ‘도시재생활성화계획’ 작성에 관한 원칙, 선도지역 지정 기준, 도시 쇠퇴 기준 및 진단 기준, 기초 생활 인프라 기준 등을 제시하도록 했다. 도시재생 추진을 위한 계획 체계는 ‘도시재생전략계획’과 ‘도시재생활성화계획’(실행 계획)의 2단계로 구분되었다. 먼저 ‘도시재생전략계획’은 ‘전략계획수립권자’1가 ‘국가도시재생기본방침’을 고려하여 도시 전체 또는 일부 지역, 필요한 경우 둘 이상의 도시에 대하여 도시재생과 관련한 각종 계획, 사업, 프로그램, 유·무형의 지역 자산 등을 조사·발굴하고, 도시재생 활성화 지역을 지정하는 등 도시재생을 위한 추진 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했다. 한편 ‘도시재생활성화계획’은 ‘도시재생전략계획’에 부합하도록 활성화 지역 내 도시재생 사업들을 연계하고 시행하기 위한 실행 계획으로, ‘도시경제기반형’과 ‘근린재생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도시경제기반형’ 활성화 계획이 산업 단지, 항만, 공항, 철도, 일반 국도, 하천 등 국가의 핵심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도시계획 시설을 정비하고 개발과 연계해 도시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고 고용 기반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라면, ‘근린재생형’ 활성화 계획은 생활권 단위의 생활환경 개선, 기초 생활 인프라 확충, 공동체 활성화, 골목 경제 살리기 등을 위한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을 의미한다. 이상민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와 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7년부터 국토연구원 부설 건축도시공간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로는 「도시 공공공간개선방향 설정을 위한 개념 정립 및 현황 조사연구」, 「도시 공공공간의통합적 계획을 위한 제도 개선방안 연구」, 「도시 생활밀착형 공공공간조성 방안 및 매뉴얼 개발 연구」, 「도시 공공공간 확보 및 질적 향상을위한 공개공지 제도 개선방안 연구」, 「도시공원 정책 수립을 위한 공원평가 모델 개발 연구」 등이 있다.
  • ‘도시재생’에 대해 생각해 볼 몇 가지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지난 달 서울에서 교수 생활을 한 지 (벌써) 10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학생들과 함께 연구실에 쌓아 놓은 자료들을 다시 살펴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작게는 한 연구실의 10년 살림살이 기록이지만, 크게는 우리나라 도시ㆍ건축ㆍ조경 분야의 연구와 사업 생태계에 ‘적응’하며 쌓게 된 생존 노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도시ㆍ건축ㆍ조경 분야의 연구나 사업의 진행 방식을 접하면서 귀국 초기에 내가 가졌던 가장 강한 느낌은, 내용 그 자체에 대한 어려움보다 이것이 생성되고 실행되는 구조에 대한 어리둥절함이었다. 도시ㆍ건축ㆍ조경 분야에 관련된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 R&D를 대하는 태도와 참여 방식에 대해 나는 솔직히 경이로움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연구와 사업의 생태계 초고층 건물 연구 사업, 경관법 관련 논의, U-city 연구개발, 그리고 오늘의 주제인 도시재생 사업 등 굵직굵직한 과제들이 끊이지 않고 있었는데, 주제가 그 무엇이든지 진행 구조와 프로세스는 유사했다. 해외의 트렌드를 빠르게 전도하는 것을 전문성으로 내세우는 교수나 연구원들이 뭔가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려는 담당 공무원이 원하는 과업 내용을 아주 빠르고 유용하게 가공·정리해 제공하면, 이를 바탕으로 정부 주도의 시범 사업을 속히 실행해보고, 새로이 지원법도 만들면서 지속적 추진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성과도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공무원은 승진도 하고, 교수는 요약 보고서형 논문 편수도 늘린다. 그러면 이제 신속하게 새로운 과제로 넘어갈 차비를 하게 된다. 그 빠른 추진력과 속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시범 사업 이후 연구가 얼마나 지속·심화되고 있는지, 그래서 우리 도시ㆍ건축ㆍ조경 현실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더 나아졌는지 얕게라도 추적해 보며 나는 불안감을 반복적으로 쌓아 왔다. 나의 불안감, 더 나아가 절망감의 근저가 되는 요인 중하나로, 현재 우리나라 도시ㆍ건축ㆍ조경 현실에서 우리가 무엇을 왜 절실하게 문제로 삼고 있는지, 그 문제에 대한 냉정한 진단을 회피한 채 성급하게 답을 찾아 적용해보려는 우리 전문가들의 부실한 ‘생각의 구조’를 먼저 지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스스로 우리 도시와 지역 현장의 본질적 특성이나 절박한 문제의 핵심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뽑아내지 않았는데(못했는데), 일본의 지구계획이나 경관법, 도시재생촉진특별법과 도시재생본부 구성 등 타지의 해법을 빠르게 수입해서, 공무원들이 진행하고자 하는 국가 사업의 구도에 맞게끔 우선 정리해주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불안하다. 도시재생은 뭐가 좀 다를까? 뭐라도 빠르게 가공해내는 분들보다, 이리 삐딱하게 초를 치는 내가 더 게으른 것은 아닐까 반성도 하게 된다. 도시재생 사업에서 보이는 희망 생성 구조가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도시재생에 대해서는 그래도 조금 다른 희망을 갖고 있다. 기존의 정부 주도 시범 사업처럼 일단 한번 해보는 정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들지만, 도시재생 사업은 이전의 재개발·재건축 사업, 그리고 그 이후의 재정비촉진 사업과는 분명 차별되는 구체적인 목표와 방법을 기반으로 한다. 물리적 환경의 측면은 물론, 주민 생활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적 측면, 그리고 지역 문화와 산업에 기반을 두는 경제적 측면을 모두 균형 있게 고려하려는 목표와 전략을 새롭게 마련했다. 도시재생의 대표적 지향 중 하나인 소위 ‘자력수복형’ 도시재생, 즉 ‘시민 참여를 통해 지역 사회의 문제를 부분적·점진적으로 해결 한다’는 점에 특히 주목한다.1 ‘자력’과 ‘수복’이 각기 표방하는 내용에 희망을 갖기 때문이다. 레토릭으로 끝날지라도, 참여자들 간의 자발적인 협치에의해 갈등을 조정하며 지역활성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모색한다는 점에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 사회 도처에서, 지역 주민은 전문가보다 훨씬 먼저, 이전 시대와는 사뭇 다른 도시 생활의 가치를 추구하며 현실적인 지역 공동체 운동을 전개해 왔다. 지역 주민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주민자치 공동체 운동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이미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도시재생에 대한 문화적 공감대가 비교적 넓게 형성되어 있다. 주민 공동체 운동이 참여형 도시재생 계획의 지속적 주체로 보편화되기까지는 많은 난관이 있겠으나, 우리 사회는 시기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주민 주도, 주민참여형 계획과 사업을 일상적으로 진행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 점이 희망을 준다.
  • 도시재생의 새로운 국면 NEW ASPECTS OF URBAN REGENERATION
    ‘도시재생’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개발 시대를 거쳐 쇠퇴를 경험하고 있는 우리 도시의 현실은 어느덧 ‘재생’을 초대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 신도시, 산업 단지, 뉴타운 개발 등 팽창 위주의 대규모 재개발 사업이 도시를 양적으로 정비했다면 오늘날에는 대규모 개발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중소 규모의 ‘주민참여형 도시재생’위주로 도시를 질적으로 정비하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이제 ‘도시재생’은 그간 일부 전문가의 개별적 노력이나 시민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법과 제도의 지원을 받는 단계로 전환되고 있다. 특히 지난 2013년 6월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좀더 체계적인 지원과 경험의 공유를 기대하게 한다. 하지만 ‘도시재생’은 우리의 도시가 앓고 있는 여러 고질병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지역성에 대한 고려, 지역 주민과의 소통, 지속적 관심과 투자를 통한 자립성 구축 등의 노력 없이 성공 사례 베끼기에 급급한 ‘도시재생’은 또 다른 도시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도시재생’의 전략을 모색할 때다. ‘도시재생’의 개념과 그에 따른 실천이 또 하나의 유행이나 열병처럼 우리 도시를 휩쓸고 지나가지 않게 하려면, 보다 심층적인 이론적 연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번 기획이 보다 실천적이고 전략적인 접근과 그 성과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노력의 하나가 되기를 기대한다. 1. ‘도시재생’에 대해 생각해 볼 몇 가지 _ 박소현 2. ‘도시재생특별법’ 제정과 정책 추진 방향 _ 이상민 3. 주민이 주도한 전주의 노후 주거지 재생 경험 _ 김현숙 4. 부산 도시재생의 경험과 비전 _ 강동진 5. 창조적 파괴와 전략적 버리기 _ 김세훈 6. 미래 도시 디트로이트 _ Stoss
    • 편집부
  • [공간 공감] 백남준아트센터
    대상지를 방문하기 전에 들었던 첫 번째 궁금증은 ‘왜 용인이었을까’하는 점이다. 백남준은 서울 태생이며 일본, 독일을 거쳐 미국에서 활동한 아티스트였기 때문이다. 백남준 미술관 설립은 일종의 유치전 성격을 띤 사업이었는데 경기도가 가장 발 빠르게 대처해 선점한 것으로 보인다. 백남준은 가장 먼저 적극성을 보인 경기도에 ‘전 세계 미술관 중에서 백남준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미술관’이라는 권리를 부여했다고 한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한 글로벌한 예술가가 고국으로 선물을 보내면서 특정 장소와의 결부는 고려하지 않았던 것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백남준아트센터의 본명은 ‘백남준이 오래 사는 집’이었다. 백남준이 생전에 미술관 부지를 확정하고 직접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름이 좀 길어서인지 혹은 외국인에게 기억되기 힘들어서인지 고인의 작명은 사라지고 백남준 미술관으로 한동안 불리다 지금은 백남준아트센터가 되었다. 평생을 파격으로 점철한 예술가의 기념 미술관인데 이름이 좀 파격적이어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초기의 아이디어 중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이름 뿐만은 아니다. 정욱주는 이 연재를 위해 작은 모임을 구성했다. 글쓴이 외에 factory L의 이홍선 소장, KnL 환경디자인 스튜디오의 김용택 소장, 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박승진 소장 그리고 서울시립대학교의 김아연 교수 등 다섯 명의 조경가가 의기투합하였고, 새로운 대상지 선정을 위해 무심코지나치던 작은 공간들을 세밀한 렌즈로 다시 들여다보고 있는 중이다.
  • 3등작: Culture Casting Tank 마포석유비축기지
    본연의 구축과 활용 역사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고, 그 연속성은 공간에 남는다. 그렇다면 새로운 변화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그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가. 1970년대 두 차례 석유 파동을 거치며 정부는 비상용기름을 보관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해 석유비축기지를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석유를 비축하던 오일 탱크는 그 기능을 잃어갔고, 그 주변에는 월드컵경기장, 하늘공원 같은 문화 공간들이 생겨났다. 오일 탱크가 자리한 이곳도 이제 문화 공간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계획을 하기 전에 공간이 갖고 있는 기억을 충분히 사유하고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위에 적정한 방식으로 계획이 이루어질 때, 도시는 비로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마포석유비축기지, 이 공간은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고 어떤 방식을 통해 새롭게 탄생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녹슬어버린 재료나 탱크의 형태가 갖는 조형적인 상징성이 중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원래 공간이 무거운 액체를 담기 위해 계획되고 사용되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그 본연의 구축과 활용의 연장선상에서 공간을 만들고자한다. 오일 탱크와 새로운 공간 사이의 관계 가능성possibility: 원형의 오일 탱크 안에 새로운 구조와 슬래브, 벽을 만들기보단 기존의 액체를 담던 탱크라는 특성을 활용했다. 콘크리트는 액체가 굳어 강성을 가지는 재료다. 또 그 형태와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다. 필요한 공간을 남겨둔 채, 액체 상태의 콘크리트를 부어 구조와 일체화시킨다. 전환transition: 계획되는 프로그램에 걸맞는 이상적인 규모와 형태로 거푸집 틀을 제작하고, 액체를 붓는다. 실린더 안의 액체는 고체가 되고 새로운 공간이 탄생한다. 유체 고정fluid fixation: 유체의 움직임을 정지시킴으로써 내재되어 있던 가능성이 드러난다. 부유하고 있던 공간들은 유체를 고체로 치환함으로써 남겨진다. 이런 간단한 구축 방식을 통해 쉽고 경제적인 공간이 창조된다. 정지된 움직임stiffened movement: 출렁이던 콘크리트 주물의 움직임이 멈추게 되면 가능성으로만 존재했던 공간의 형상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축된 이 공간들은 실질적인 건축 공간으로 전이되고, 사람들의 동선을 담아낸다. 비움과 채움이 동시에 존재한다.
    • 시스템랩 그룹 건축사사무소 / 시스템랩 그룹 건축사사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