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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도성 정비의 ‘진정성’ 제5차 한양도성 학술회의,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의 유산가치
    지난 해 2월 한양도성의 역사적 가치를 이해하고 보존과 관리 방안을 모색하기위해 처음 시작된 한양도성 학술회의가 어느덧 5회째를 맞이했다. 9월 12일 다섯 번째 학술회의가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의 유산가치’를 주제로 서울특별시청 3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1부에서는 ‘남산과 한양도성의 역사’를, 2부에서는 ‘남산 회현자락 한양도성의 보호·관리’를 주제로 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 자리에서 600여 년의 세월 동안 근현대사의 부침을 겪었던 남산 회현자락의 역사와 정비방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서울의 중심, 남산의 상징성 1부에서 발표된 ‘남산과 한양도성의 역사’에 관한 연구에서는 서울의 중심에 위치한 남산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했다. 최기수 명예교수(서울시립대 조경학과)는 ‘남산의 경관 및 공원 변천’이라는 주제의 연구를 발표했다. 최 교수는 옛 문헌과 고지도, 산수화 등에서 남산의 경관적 의의를 찾아보고 공원으로의 변천사를 설명했다. 김대호 연구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20세기 남산회현자락의 변형, 시각적 지배와 기억의 전쟁’이라는 주제로 근현대사의 격동기에 남산 회현자락을 지배한 권력의 재편 과정에 대해 발표했다. 남산에 세워진 공원, 신사, 동상의 상징성을 당시 권력층과의 정치적 역학 관계로 상세하게 풀어냈다. 그는 남산 회현자락에 대해 “지난 100년간 시각적 지배와 기억을 둘러싼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일어났던 공간”이라고 평가하며 정비 사업을 통해 새롭게 나타난 기억의 단층들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지 질문을 던졌다. 배우성 교수(서울시립대 국사학과)의 ‘조선후기 한양도성과 남산 회현자락’을 주제로 한 발표는 영조대代 한양도성 정비 사업과 남산 회현자락에 살았던 거주민들의 역사에 현대적인 해석을 더해 이번 학술회의에서 가장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한양도성을 ‘군사 유산’이 아닌 ‘도시 유산’으로 봐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양도성이 군사적 방어체제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도시적 삶과 복지를 위한 도시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정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배우성 교수는 한양도성 안쪽 남산 회현자락에 터를 잡은 거주민들의 역사를 살폈다. 그는 “그동안 ‘뜨내기들의 보금자리’로 인식 돼오던 남산 회현자락이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이름있는’ 가문들의 오랜 터전이기도 했다”며 경주 이씨, 남양 홍씨, 안동 김씨 후손들의 흔적을 추적했다. 그의 연구를 통해 남산 회현자락이 오랜 세월동안 토박이와 뜨내기를 가리지 않고 도시 거주민들을 품어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진정성’에 대한 논의 학술회의 1부에서 남산 회현자락의 상징성과 그로 인한 역사적 상처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다면 2부에서는 보존 혹은 복원을 통해 역사적 기억을 건강하게 치유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먼저 최형수 서울역사박물관조사연구과장은 남산 회현자락 발굴조사의 결과와 의의에 대해 발표했다. 그는 그동안의 성과에 대해 태조 대에서 숙종대 이후까지 시기별 축성 양식이 다름을 확인했으며 한양도성 훼철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되었으나 사진과 일부 문헌에서만 볼 수 있었던 조선신궁 터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이어진 김왕직 교수(명지대학교 건축학부)와 안동만 교수(서울대학교 조경학과)의 발표에서는 남산 회현자락 정비 방향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역사유적 보존·정비 사례 연구’를 발표한 김왕직 교수는 국내 성곽 유적 복원 사례(서울성곽, 수원화성, 남한산성 등)와 해외 도시 유적 복원 사례(델피 유적, 미케네 유적, 하이델베르그 성 등)를 예로 들며 창건 당시나 특정 역사적 시점의 형태를 되살리는 ‘복원’이 과거의 정비 방향이었으나 최근의 정비 방향은 역사적 변천 과정이 남아 있는 현재 상태를 보존하는 ‘현상 보존’에 두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억지스러운 ‘복원’보다 시간적 흐름에 따른 변화의 흔적을 보존하는 ‘현상 보존’이 역사 진정성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김왕직 교수는 창건 당시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오히려 과거의 흔적과 복원된 부분의 부조화로 인해 더욱 어색한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안동만 교수는 도면이나 설계 지침 같은 원형에 대한 상당한 자료가 확보된다면 복원 조치를 고려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가능한 발굴한 원형대로 유적을 보존해 진정성을 확보하되 ‘현상 보존’이 기술적으로 어렵고 훼손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나 역사적 맥락에 맞지 않는 기념물은 이전 배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학술회의에는 200여 명에 가까운 전문가와 시민이 참석해 한양도성 정비 사업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남산과 한양도성의 역사에 대한 1부 발표 내용과 한양도성의 보호·관리 방안에 대한 2부의 내용은 주제의 흐름에 맞게 잘이어져 전문가가 아닌 일반 시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내용 면에 있어서 이날 발표된 대부분의 연구 주제는 그동안 진행되었던 연구의 연장선에 있거나 정리에 그쳐 이번 학술회의가 한양도성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위한 기초 자료 확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중요 평가 기준이 ‘진정성’이기 때문에 ‘진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한 참가자의 말 역시 씁쓸함을 남긴다. 한양도성의 보존 및 정비 사업의 진정한 목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앞서 잊히고 파괴된 역사의 기억을 복원하고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두어야 하지 않을까.
    • 조한결
  • Bounce Below 거대한 ‘지하 트램펄린
    “우리 발 밑 어둠 속에는 누군가가 만든 지하 세계와 지하 경관이 엄연히 존재한다. 이 공간은 누구나 접근이 가능하며 탐구 가치 또한 충분하다.”1 지난 7월 개장한 ‘바운스 빌로우Bounce Below’가 바로 그 ‘지하 세계subterranean world’가 아닐까. 바운스 빌로우는 영국의 노스웨일즈North Wales, 블라이나우 페스티니오그Blaenau Ffestiniog의 레치웨드Llechwedd라는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름을 가진 동굴 안에 있다.바운스 빌로우는 간단히 말해 거대한 ‘지하 트램펄린underground trampoline’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하 세계를 만들어낸 지역 사업가 숀 테일러Sean Taylor는, “프랑스의 한 공원에서 그물을 이용해 만든 구조물을 보았다. 그 순간 노스웨일즈에도 이런 어드벤처 파크를 만들어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동굴의 규모는 최대 깊이 200피트(약 60m) 및 최대 폭 60피트(약 18m)로 영국의 세인트 폴 대성당St. Paul Cathedral 두 개가 충분히 들어갈 정도다. 동굴 속에 펼쳐진 트램펄린의 총 면적은 1,000m2가 넘어 한 번에 최대 100명까지 이용할 수 있다. 이용 인원이 적을 때에는 바닥으로부터 최대 80피트(24m)까지 뛸 수 있다. 곳곳의 트램펄린은 슬라이드와 그물망을 통해 연결된다. 슬라이드를 타고 내려가 만나게 되는 지하 세계는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나 ‘호빗Hobbit’과 같은 영화에 나오는 음침하고 스산한 느낌의 공간이 아니다. 이 지하 세계 내에 설치된 LED조명은 동굴 벽에 반사되어 북극의 오로라와 같은 빛깔을 만들어내며, 실내 온도 또한 연중 섭씨 7도 정도를 유지하여 쾌적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공간을 만들 수 있었을까? 과거 이 지역은 원래 탄광 산업으로 유명했다. 1900년대 초·중반 산업 쇠퇴, 제2차 세계대전 등을 겪으면서 마을 인구가 줄어들었고, 결국 1946년 탄광은 문을 닫게 되었다. 수십 년 후, 그때 버려진 공간을 거대한 ‘지하 놀이터’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바운스 빌로우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인력이 투입되었다. 탄광의 흔적 및 위험 요소 제거, 트램펄린과 슬라이드 설치 등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테일러는 이 새로운 지하 세계가 지역 사회의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탄광 산업의 침체로 많은 사람들이 실직의 고통을 겪고 있던 이 지역에 지하 트램펄린이 새로운 활력소로 작용하고 있다. 바운스 빌로우는 산업 시대 유산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재활용’한 사례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 양다빈
  • 제12회 농촌어메니티 마을설계공모전 농업·농촌 유산을 활용한 창조적 마을만들기
    지난 5월 26일부터 8월 22일까지 한국농촌계획학회(회장 이성우)가 주최한 제12회 농촌어메니티 마을설계공모전이 진행되었다. ‘농업·농촌 유산을 활용한 창조적 마을만들기’를 주제로 열린 이번 공모전은 농업·농촌유산의 가치를 보존하고 활용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마을 만들기의 모델을 제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열렸다. 지난 4월 청산도 구들장 논과 제주 밭담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농업·농촌 유산에 대한 가치를 제고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유산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알리는 기회로 삼고자 공모전이 진행되었다. 공모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농업·농촌 유산의 범위는 구들장 논, 다랭이논, 돌담 밭, 염전, 둠벙, 독살, 저수지 등과 같이 농어업인이 오랜 기간 동안 형성·진화시켜 온 농어업 활동·시스템에서부터 방앗간, 저수로, 농촌 취락, 마을 숲 등 농촌의 다양한 공간 및 경관 자원 등이 포함되었다. 당선작을 선정하는 기준은 “농촌에 남아 있는 유산을 찾아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농업·농촌 유산의 발굴과 보전을 통해 살고 싶고 찾고 싶은 농촌마을만들기의 가능성과 실천 방안을 제시”하는 안을 계획에 담는 것이었다. 지난 8월 29일 당선작이 발표되었으며, 대상에는 강수진, 이은지(경희대학교 환경조경디자인과)의 ‘삼봤다’가 선정되었다. 우수작으로는 강지아, 김지헌, 민경훈(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의 ‘지족, 잇다’와 이성규, 손은신, 심지수(서울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의 ‘도숙황만야춘래록편산’이 선정되었다. 특선 3작품과 입선 10작품을 포함해 총 16개의 작품이 선정되었으며, 지난 9월 25일부터 9월 29일까지 운남동 래미안갤러리에서 수상작들이 전시되었다. 대상(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 ‘삼봤다!’ 강수진, 이은지(경희대학교 환경조경디자인과) 예로부터 삼베하면 곡성의 돌실나이와 안동삼베 등을 제일로 꼽았다. 다른 마을은 정부와 지자체, 마을의 적극적인 관심과 계획 사업으로 삼베의 전통이 이어져오고 있는데, 정작 국내 으뜸이던 곡성의 돌실나이는 마을 주민들로부터 점점 잊히고 있다. 돌실나이가 마을의 농촌 유산으로서 중요한 존재라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으나 이에 대한 관심이 적고 계획 방안의 부재와 대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그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해있다. 이에 곡성군 석곡면 죽산리를 대상지로 하여 곡성 돌실나이를 재조명하는 데 계획의 초점을 맞췄다. 마을이 가진 어메니티를 활용해 ‘잊혀진 삼 되찾기’, ‘활기찬 삶 만들기’, ‘살기 좋은 삼베마을’이라는 3가지 방향으로 마을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전통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삼·三·삶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휴경지를 되살려 삼베의 재료인 대마를 경작하고, 사계절내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활용 방안을 계획했다. 그리고 돌실마당, 나이마당, 돌실나이 홍보관을 통해 잊힌 삼베 길쌈풍습과 다양한 공동체 문화, 볼거리 등을 제공하는 동시에 도농 교류 및 농촌 소득과 연계한 농촌관광 활성화 방안을 제시했다. 우수상(농촌진흥청장상) - ‘지족, 잇다’ 강지아, 김지헌, 민경훈(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빠르게, 그리고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풍족하지는 않지만 만족하고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남해군 심동면 지족리의 전통어업방식인 죽방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을 계단식 논으로 바꾸어 살아가는 진취적인 모습도 보인다. 물살이 빠른 지족해협에 죽방렴을 놓고 산골짜기에 계단식 논을 만들어 살아가는 지족리 사람들의 삶은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지족리는 강에서부터 시작된 단순한 구조의 어구에서 연안어업으로 발전한 500년이 넘은 유산 죽방렴을 품고, 수많은 천혜의 자원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관광마을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알려져 있지않다. 도태된 죽방렴을 알리고 천혜의 자원과 유기적인 시스템을 갖춘 프로그램을 통해 마을 지족의 활성화를 꾀했다. 또한 유산을 살리고 알리는 것을 넘어 마을 내부의 발전에 기여를 할 마을기업을 제안하고, 관광지로서 개발 가능성을 고려해 수려한 경관을 보존하기 위한 경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우수상(한국농어촌공사사장상)- ‘도숙황만야춘래록편산稻熟黃滿野春來綠遍山’ 이성규, 손은신, 심지수(서울대학교 대학원 조경학과) 김포시 통진읍 가현리는 토탄층에서 5천 년 전 탄화미가 발견되어 한반도 최초의 벼 재배지로 알려져 있으며, 예부터 주요 식량 생산지로 역할을 해왔다. 지금도 많은 쌀을 생산하며 농업에 유리한 평야와 비옥한 땅조건을 가지고 있음에도 가현리의 농촌은 몰락하고 있는 현실이다. ‘도숙황만야춘래록편산’은 ‘쌀’을 중심으로 잊히는 것들을 되살려 ‘농촌’으로서 마을의 경쟁력 회복을 꾀하는 데 계획의 초점을 맞추었다. 가현리의 토탄층 일대를 활용해 2011년부터 재배되지 않는 자광미를 부활시키고, 종자를 개량할 수 있는 자광미연구소를 만들어 경쟁력을 향상시킨다. 그리고 대형 종합미곡처리장 등으로 인해 사라진 정미소를 되살려 마을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키고 동시에 가현리 자체적으로 곡식을 처리해 다른 가공품으로 만들 수 있는 기본 인프라를 구축한다. 또한 사라진 농촌의 공동체를 되찾기 위해 두레놀이와 체험 논의 도입을 제안했다.
  • 시민들이 제안하는 토론토의 미래 ‘NXT 시티 프라이즈’ 아이디어 공모전
    시민들이 제안하는 토론토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지난 8월 14일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제1회 ‘NXT 시티 프라이즈NXT City Prize’의 우승작이 발표되었다. ‘NXT 시티 프라이즈’는 토론토의 공공 공간을 미래지향적으로 개선하는 아이디어를 모으는 공모전이다. 온타리오 주에 거주하는 30세 이하의 젊은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우승팀은 5,000달러의 상금과 전문가와 함께 아이디어를 정식으로 실현할 수 있도록 10,000달러를 추가로 받게 된다. 10,000달러의 추가 상금은 아이디어의 실현을 위한 사회적 투자 기금으로 사용되며, 토론토 시의 수석 도시계획가 제니퍼 키스맷JennferKeesmaat을 포함한 부동산 전문가, 미디어 홍보 전문가, 컨설턴트 전문가 등과 함께 팀을 이뤄 작업하게 된다. 이 공모전은 도시계획을 전문으로 하는 스튜디오Distl.에 의해 제안되었으며 토론토 시, 디자인 회사 루프Loop: Design for Social Good, 컨설턴트 회사 Gen Y와 파트너십을 맺고 지난 4월 30일 출범했다. 온타리오 전역에서 120여 개의 아이디어가 공모전에 제출되었고 이 중 리차드 발렌조나Richard Valenzona의 작품 ‘영리덕스YONGE REDUX’가 우승작으로 선정되었다. 영 리덕스 리차드 발렌조나의 우승작 ‘영 리덕스’는 토론토의 주요 도로인 영 스트리트를 보행자 중심의 거리로 변화시키는 아이디어다. 영 스트리트는 토론토의 쇼핑과 유흥, 관광 중심지를 관통해 항상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다. 리차드 발렌조나는 영 스트리트를 이용하는 행인의 통행량에 비해 보도의 폭이 너무 좁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4차선 차도를 2차선으로 변경하고 인도의 너비를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영 스트리트가 캐나다에서 가장 유명한 명물 거리임에도 디자인 면에서 특색이 없다는 점도 ‘영 리덕스’ 디자인의 출발점이 되었다. 발렌조나는 영 스트리트의 구역 별로 디자인 요소를 가미해 개성을 부여했다. 우선 영 스트리트 전 구역의 도로에는 사선 형태의 무늬가 그려져 자동차 통행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영 스트리트가 칼리지 스트리트College Street와 만나는 구역은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나무를 식재하고 벤치를 많이 배치해 휴식과 모임을 위한 공간으로 디자인했다. 던다스 스퀘어Dundas square가 위치한 구역에는 야외 공연과 행사가 많이 열리는 구역의 기능에 맞게 도로 바닥에 LED 조명을 설치해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영 리덕스’는 공공 거리 개선에 대한 발렌조나의 대학원 연구를 발전시켜 디자인에 적용한 작품이다. 발렌조나는 “영 리덕스가 토론토의 거리를 새롭게 보는 방법에 대한 선례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도시의 거리를 차량 통행을 위한 도로로 보기 보다는 모든 시민을 위한 공공장소로 인식해야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앞으로 도시계획 전문가들과 함께 팀을 이뤄 아이디어를 실현 할 수 있도록 작업하게 된다. 국적과 나이를 불문한 수상자 ‘NXT 시티 프라이즈’는 ‘온타리오 주에 거주하는 30세 이하의 젊은이’라는 조건 외에 참가에 제한을 두지 않았고 심사위원단은 토론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반영된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처음으로 시행되는 공모전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참가 자격과 심사기준 덕분에 120여 팀이 공모전에 참가했고 최종 수상작에는 외국인과 18세 이하의 어린 학생들의 작품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2,500달러의 상금을 받는 ‘최우수 선구적 아이디어 Most Visionary Idea’상은 중국인 세븐 시루 첸Seven Xiru Chen에게 돌아갔다. 그가 제출한 ‘인터체인지 파크INTERCHANGE PARK’는 앨런 가Allen Street와 401번 국도를 둘러싼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공원화하는 아이디어다. 도시에서 큰 부지를 차지하는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 구역을 공원으로 프로그램해 시민들의 접근이 용이한 생태적인 공간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18세 이하 어린 학생들의 작품도 2,500달러의 상금을 수상하게 되었다. ‘18세 이하 부문 최우수작Best Submission, Under 18’을 받은 글로리아 주Gloria Zhou, 아난나 라파Ananna Rafa, 에자나 마이클Ezana Michael, 마리아 카시프Maria Kashif의 ‘오래된 골목의 새로운 미래New Visions For Old Paths’는 상습 우범지대였던 플레밍던 파크Flemingdon Park의 밴덤 구역Vendom Place을 안전하고 생동감 있는 구역으로 변화시키는 아이디어다. 그라운드 모자이크ground mosaic를 이용해 구역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모자이크 조각의 다채로운 색깔과 디자인으로 어두침침했던 분위기를 개선한다. ‘NXT 시티 프라이즈’ 공모전의 수상작들이 제안한 아이디어는 거창하지 않다. 시민들이 일상에서 겪던 작고 사소한 불편함을 개선할 소박하고 현실적인 아이디어가 당선되었다. 아이디어가 실현화되는 과정 또한 온전히 시민들에게 달렸다. 시민들 스스로 자신이 이용하는 공간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고 공간을 개선할 투자 기금을 모은다. 전문가들은 시민들의 협력자일 뿐이지 프로젝트를 직접 주도하지 않는다. 이 공모전을 공동으로 주최한 Distl.의 저스틴 레클레어Justin Leclair는 “NXT 시티 프라이즈는 토론토가 세계적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하기를 열망하는 새로운 세대의 도시계획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고 말했다. 토론토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소박한 아이디어가 바꿀 토론토의 미래가 기대된다.
    • 조한결
  • 총천연색으로 핀 문화역 서울284 ‘최정화 -총천연색’, 문화역 서울284에서 10월 19일까지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이 오지 않았나 보다.” 미당 서정주 시인은 꽃 한 송이 피우는 일은 온 우주를 이해하는 일이라고 했다. 꽃 한 송이에도 온 우주가 담겨있다는데 미술가 최정화는 구 서울역 건물 전체를 꽃 피웠다. 고층빌딩과 고가도로, 기차선로 등이 뒤엉켜 복잡한 도심에서 무심한 듯 자리하던 고풍스러운 건물이 총천연색으로 물들었다. 문화역 서울284(구 서울역)는 9월 4일부터 10월 19일까지 ‘최정화-총천연색總天然色’ 전을 선보인다. 최정화의 ‘총천연색’은 꽃을 주제로 세상의 삼라만상을 담아낸전시다. 미술, 디자인, 공예, 설치, 수집, 미디어, 퍼포먼스 등 복합 예술·문화 행사로 구성되어 꽃의 향연을 펼친다. 성과 속, 꽃의 이중성 ‘꽃’을 주제로 한 전시라 자연스레 ‘자연미’나 ‘순결한 아름다움’을 기대한 관람객이라면 최정화의 전시는 ‘충격과 공포’가 될 것이다. 총천연색으로 물든 최정화의 꽃은 묘하게 야하다. 홍등가의 불빛처럼 알록달록한 ‘꽃궁’을 거닐다보면 평범한 빨간 소쿠리도 야해 보일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런가 하면 촌스러운 구닥다리 잡동사니가 거대한 풍경이 되기도 한다. 1층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거대한 탑 ‘꽃의 여가’는 흔히 볼 수 있는 비닐 가방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매단 것이다. 최정화는 천박함과 성스러움, 깨끗함과 더러움, 진짜와 가짜의 경계와 고정관념을 허문다. 황금색 비닐 풍선으로 만든 왕관(‘꽃의 뜻’)은 한껏 팽창하다가 우리를 조롱하듯 갑자기 허물어진다. 오색의 청소도구들이 아무렇게나 꽂힌 휴지통에는 ‘청소꽃’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었다. 방 전체에 건설 폐자재를 쌓아 놓은 폐허같은 방 ‘꽃의 속도-폐허’의 천장에는 샹들리에가 금방이라도 내려앉을 듯 위태롭게 흔들린다. 최정화는 천박함을 부정하지도, 성스러움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모든 것들을 한데 모아 놓았을 뿐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사물과 색의 조화는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야’라고 장난스럽게 말하는 것 같다. 최정화식 유머 마치 우리를 시험하듯 ‘진짜’와 ‘가짜’를 묻는 최정화의 작품은 도발적이기보다는 어딘가 어설퍼 웃음 짓게 한다. 그는 이 엉성함을 ‘치밀하게’ 완성했다고 말한다. 최정화는 1986년과 1987년 미술인에게 ‘엘리트 코스’라 불리는 중앙미술대전에서 장려상과 대상을 타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하지만 그는 곧 회화를 그만두고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다. ‘그림으로 사람들을 속이기가 너무 쉬웠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제 그는 회화, 공예, 설치, 수집, 미디어, 퍼포먼스 등 더욱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치밀한 엉성함’을 선보인다. 그는 자신의 예술에 대해 “날조에 날림을 더하면 완성”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날조에 날림인데다가 엉성한 듯 보이는 그의 작품에는 매력이 있다. 그의 작품은 현대 미술의 경계와 정의에 대해 관객을 가르치려 들거나 시험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나 알 수 있는 익숙하지만 화려한 풍경으로 하여금 관객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해 시각을 매혹시키고 입을 ‘활짝’ 벌려 웃음 짓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최정화식 유머는 대중에 대한 냉소나 예술에 대한 비웃음이 아니라 따뜻한 농담이고 긍정의 웃음이다. 최정화식 유머는 전시 곳곳에서 나타난다. 전시 건물의 2층에서 가장 큰 전시실을 차지하는 작품인 ‘꽃의 만다라’는 관객이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총천연색’ 전의 관람료는 플라스틱 병뚜껑이다. 그는 관객들에게 받은 각양각색의 플라스틱 병뚜껑을 모아 만다라를 만들었다. 전시장의 한 쪽 벽면은 거울로 되어 있어 플라스틱 병뚜껑들이 공간을 꽉 채운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쓰레기로 버려지는 병뚜껑도 모아 놓으니 아름다운 꽃이 되었다. 2층 전시관 창문에서 내다볼 수 있는 구 서울역 지붕 위에는 공기 풍선으로 만든 로보트 태권브이가 누워 있다. 고가 도로와 철로, 고층빌딩, 혼잡한 대중교통 등으로 어지러운 도심 풍경 속에서 죽은듯이 누워있던 태권브이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 요염한 포즈를 취한다. 태권브이 아래에는 “당신도 꽃입니다” 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화려한 꽃무늬의 문구는 몸빼 바지 천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유쾌한 응원이다. 손때 묻은 자개장, 누렇게 바랜 플라스틱 보온병, 촌스러운 액자 등 최정화가 모은 잡동사니에는 어머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작가는 개막 행사에서 자신의 모든 작업의 원천은 어머니라고 소개하며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렸다. 아들의 절을 받으신 어머니는 꽃처럼 수줍으셨다. 우리는 모두 꽃이다. 꽃의 아들딸이다.
    • 조한결
  • [시네마 스케이프]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정원, 인간의 조건에 대하여
    이제는 빛바랜 추억이 된 어린 시절, 어머니는 공들여 정원을 가꾸셨고 아버지와 동생은 집안을 휘젓고 다니던 강아지에게 애정을 듬뿍 쏟았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정원에 제대로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강아지를 안아준 기억도 없다. 아파트로 이사한 후, 어머니는 베란다에서 못다 한 정원의 꿈을 펼치셨지만 나는 여전히 물 줄 생각도 않는 무심한 딸이었다. 조경학과를 꽃을 가꾸는 과로 아시던 어머니는 대학 때 꽃꽂이를 배우게 하셨다. 지나친 자녀 걱정이 취미였던 그녀는 정원에 관심 없던 딸이 학업에 뒤처질까 봐 일종의 과외 공부를 시키셨던 것이다. 하지만 화병에 꽃을 보기 좋게 담아내는 것과 생명이 있는 식물이 잘 자라도록 심고 돌보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그 후로도 나는 오랫동안 화분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서 “저런 애가 어떻게 조경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네”라는 어머니의 염려를 달고 사는 딸이었다. “기억은 일종의 약국이나 실험실과 유사하다. 아무렇게나 내민 손에 어떤 때는 진정 제가 때론 독약이 잡히기도 한다”라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글을 인용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요 모티브를 가져와 한 남자가 기억을 소환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두 살 때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폴은 그 충격으로 말을 하지 못하고 기계적으로 피아노를 치며 두 이모와 살아간다. 우연히 같은 아파트 4층 언저리(4층 약간 안 되는 계단 중간에 출입문이 있음)에 사는 프루스트 부인을 알게 되고, 그녀가 주는 차를 마시면서 과거의 기억을 하나씩 찾아가게 된다. 삶이 매번 아름답지 않은 것처럼 기억은 독약이 되기도 하고 진정제가 되기도 한다. 영화의 원제는 ‘Attila Marcel’로 폴의 아버지 이름이다. 해외 포스터는 아버지의 이름이 크게 적힌 광고를 쳐다보는 장면을 담고 있다. 기억의 퍼즐이 맞춰지면서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던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풀게 되고, 첫 장면에서 아버지가 하던 대사를 마지막 장면에서 폴이 반복하며 영화가 끝난다. 아버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의 민낯을 들여다보고 인정하는 것이다. 영화는 무의식과 현실을 넘나드는 다소 철학적인 메시지를 무겁게 다루기보다는 환상적인 색감과 아름다운 피아노 연주, 문학적인 대사와 함께 한편의 동화처럼 따뜻하게 그린다. 서영애는 ‘영화 속 경관’을 주제로 석사 논문을 썼고, 한겨레 영화평론전문 과정을 수료했다. 조경을 전공으로 삼아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지만, 극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영화는 경관과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 맺는지 보여주며, 그것이 주는 감동과 함께 인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중요한 텍스트라 믿고 있다.
  • [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풍경의 귀환
    #27 산업 자연의 낭만 - 엠셔 지방의 풍경 ‘반지의 제왕’ 삼부작을 만든 피터 잭슨 감독이 후속편으로 연작 ‘호빗’을 만들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호빗족의 빌보배긴스는 키 작은 종족 드베르그들과 함께 모험을 떠난다. 무시무시한 용 스마우그에게 빼앗긴 보물을 찾기 위해 지하 왕국에 잠입한다는 이야기다. 드베르그족이 건설한 지하 왕국의 엄청난 부는 그들이 캐내는 지하자원에서 유래한다. 바그너의 오페라 연작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반지와 라인 강의 보물을 만든 장인 알베리히 역시 몸집은 작지만 힘세며 재주가 뛰어난 종족, ‘니벨룽겐’에 속한다. 백설공주 동화에 등장하는 난쟁이들 역시 광산에서 일했다. 이렇듯 유럽 신화에서 키 작은 종족 혹은 난쟁이들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이들은 인류의 광산자원 이용의 역사를 미화한 것에서 유래한다. 땅을 파고 들어가 어두운 곳에서 살며 금과 은, 구리, 철, 석탄을 캐내어 인류 문명을 번성케 한 무리들. 힘들게 캐낸 시커먼 흙더미와 돌덩어리에서 빛나는 금관을 만들어 왕의 머리를 장식하고, 철을 연마해 무기를 만들어 무사의 손에 쥐여준 장본인들. 이들은 국가 체제를 확립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다만 오랜 지하의 삶으로 어느새 모습이 바뀌고 허리가 굽어 난쟁이가 되었고, 그로 인해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라인 강과도 관련이 깊다. 전설 속에서는 라인 강바닥에 깊이 묻혀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보물을 만들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소위 ‘라인 강의 기적’을 일으킨 주역으로서 루르 지방의 도시들을 부유하게 만들었다. 라인강이 모든 공적을 혼자 차지하긴 했지만 사실 라인 강과 라인 강의 지류인 엠셔Emscher 강 사이에 있는 철광과 탄광지대가 독일 경제 부흥의 기반이 되어 주었다. 이 지역이 바로 루르Ruhr 지방이다. 엠셔 강가에서 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어 연명하던 작은 마을들이 산업혁명 이후 시작된 철강 산업과 철도 사업의 붐을 타고 수십 년 사이에 산업 도시로 급성장했다. 뒤스부르크, 에센, 보쿰, 도르트문트 등 널리 알려진 산업 도시들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성장이 빨랐던 만큼 하강세도 빨랐다. 1950년대 말에 시작된 석탄 위기로 탄광들이 하나 둘 폐쇄되기 시작했다. 철강 산업은 1980년대까지 유지되었으나 그 역시 산업 구조의 변화로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철광과 탄광은 1980년대에 거의 폐쇄되었고 철강 산업 역시 해외로 옮겨가면서 수십 개의 산업체가 문을 닫고 환경 잔해로 남게 되었다. 약 백 년간에 걸친 집중적인 산업 이용으로 루르 지방의 자연 경관은 문자 그대로 안팎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대지진이 지나간 자리처럼 모든 것이 달라져 버린 것이다. 한때 농경문화 경관이 지배하던 곳에 하늘을 찌르는 높은 굴뚝의 스카이라인이 들어섰고, 수십 미터 높이의 산업 건축물과 함께 수백 개의 구덩이와 산이 새로 생겼다. 하천은 더 이상 경관을 적시는 생명줄이 아니었다. 오히려 썩은 물을 흘려보내 자연을 병들게 했다. 루르 지방은 이제 총800km2의 면적, 즉 서울, 수원, 안양을 합친 것보다 조금 더 큰 면적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의 죽어가는 경관을 재생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루르 지방에 존재하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모이고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의 후원을 받아 1989년 4월 1일 엠셔 지방 재생 사업이 발족되었다. 엠셔 지방 재생 사업은 다른 이름으로 ‘세계 건설 박람회 엠셔 파크IBA Emscher Park’라고 불린다. 엠셔 지방 전체가 곧 박람회장이다. 17개의 크고 작은 도시가 참여해 총 120개의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이와 병행하여 기형이 되어 버린 엠셔의 풍경을 서로 연결해 거대한 엠셔 랜드스케이프 파크Emscher Landschaftspark를 조성했다. 엠셔 랜드스케이프 파크는 하나의 공원이 아니라 이십여 개의 지역 공원과 정원을 서로 연결한 공원 네트워크다. 엠셔 재생 사업은 1999년까지 십 년에 걸쳐 재생 사업의 과정과 절차를 세상에 공개하고 많은 토론을 유도해 내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중 가장 먼저 완성되었고 널리 알려진 공원이 ‘뒤스부르크-노르트Duisburg-Nord’다. 뒤스부르크-노르트는 피터 라츠Peter Latz라는 조경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이 있듯 루르 지방의 시급한 과제는 피터 라츠라는 훌륭한 조경가를 낳았다. 그는 지나간 흔적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시간을 두고 상처가 아물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인간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라츠는 마스터플랜을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해 화제가 되었다. 그는 “마스터플랜은 자연이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1 라츠가 한 일은 우선 폐허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이 듣도 보도 못한 괴물의 경관적 잠재력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마치 고고학자가 켜켜이 쌓인 유적을 하나씩 들어내듯 그는 산업 폐허의 성격을 분류해냈고 이름을 붙였다.2 썩은 물이 흐르는 배수로와 하수 처리 시설을 합하니 미래의 수 경관이 보였다. 사내 철도 시설이 레일 공원이 되었으며 각종 산업 도로망과 교량을 연결하니 하염없이 긴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되었다. 건물을 그대로 두고 이를 전시장, 공연장으로 명명했다. 이 과정에서 ‘산업 자연’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산업 자연은 단순히 산업 시설의 잔재나 지형 변화로 만들어진 환경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산업 이용으로 인해 더 심각한 프로세스가 진행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지표면의 화학적 성질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 결과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자연’이 형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실제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동식물이 서식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앞으로도 인류는 자연을 화학적으로 변형시켜 더 많은 산업 자연을 만들어 놓을 것이다. 2009년 뮌헨 공과대학 조경학과에 ‘산업 경관과 조경’이라는 학과가 신설되었다.3 엠셔의 풍경처럼 시간이 만들어 놓은 마스터플랜으로 되돌아올 산업 자연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일까.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 유치해지기
    유치한 녀석 오늘 작업을 함께 하는 녀석과 크게 싸웠다. 처음 녀석과 같은 조가 되었을 때는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좀 거만한 편이기는 했지만 세련된 감각과 손재주로 설계 시간만큼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던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그 녀석이 내가 열심히 고민한 설계안을 다 듣고 나서 한마디를 던졌다. “유치한 녀석.” 내 설계에 직설적인 디자인 모티브가 많은 것은 인정한다. 고래 분수, 코끼리 놀이터, 꽃무늬 포장.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복잡한 설계 이론은 잘 모른다. 최신 외국 사례를 열심히 들여다본 적도 없다. 하지만 좋은 디자인이라고 해서 꼭 유럽에서 건너온 듯 세련되어야 하고 어려운 개념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하는 걸까? 나는 좋은 설계란 여든이 넘으신 우리 할머니도 쉽게 이해하고 즐겁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 틀린 것일까? 아니면 그 녀석의 비아냥거림처럼 그냥 내 설계 능력이 유치한 수준인 걸까 라스베이거스의 교훈 1968년 가을, 벤츄리Robert Venturi는 학교 스튜디오의 일환으로 학생들과 라스베이거스Las Vegas로 향한다. 이후 수업의 결과는 책으로 출판되어 건축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다. 당시 라스베이거스는 건축적으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도시였다. 학계는 물론이고 건축가들도 모두 라스베이거스를 상업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유치함과 천박함의 표상으로 여겼다. 벤츄리는 가난한 욕망을 위한 잡동사니의 총체인 라스베이거스에서 어떠한 교훈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다음은 벤츄리의 말이다. “하나는 비너스 동상 옆의 에이비스Avis1 상표,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 신전 모양 지붕 아래 있는 쉘Shell 주유소 간판과 잭 베니Jack Benny2 사진, 혹은 수백억짜리 카지노 옆의 주유소. 이들은 내포의 건축Architecture of Inclusion이 선사한 생기를 보여주며, 우아함과 총체적인 디자인에 과도하게 사로잡힌 무기력함과 대비된다(그림1).”3 벤츄리는 라스베이거스를 통해서 당시 건축계를 지배하고 있던 모더니즘 건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모더니즘 건축의 업적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모더니즘은 19세기 말 대량 생산을 바탕으로 한 기성 자본주의 문화에 기반을 두고 형성되었다. 20세기 중반, 바야흐로 대량 생산의 시대는 가고 대량 소비를 지향하는 후기자본주의가 도래했다. 그런데 여전히 모더니즘은 시대적 흐름과 괴리된 채 50년 전의 주장만을 되풀이한다. 현대 예술의 현주소를 살펴보자. 몬드리안, 칸딘스키로 대표되는 추상과 아방가르드의 시대는 오래전에 막을 내리고 앤디 워홀Andy Warhol, 로이 리헨슈타인Roy Lichtenstein과 같은 작가가 새로운 양식의 예술을 주도하고 있다. 현대 건축의 방향을 제대로 지시하고 있는 대상은 모더니즘의 후예들이 이끌고 있는 엘리트 건축이 아니라 라스베이거스의 잡동사니인 것이다. 그렇다고 벤츄리가 현대 건축이 라스베이거스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교훈은 지침이 될 만한 가르침일 뿐 정답은 아니다. 벤츄리는 ‘추하고 평범한 건축Ugly and Ordinary Architecture’이라는 비평문에서 당대 최고의 모더니스트였던 루돌프Paul Rudolph의 ‘크로포드 매너Crawford Manor’와 자신이 설계한 ‘길드 하우스Guild House’를비교한다.4 그는 크로포드 매너를 영웅적이고 독창적Heroic and Original이라고 추켜세움과 동시에 길드 하우스를 추하고 평범하다고 깎아내린다.5 얼핏 들으면 선배에 대한 살신성인의 각오를 동반한 아부처럼 들리지만 이 칭찬과 비판은 곧 역전된다. 모더니즘 건축은 ‘Less is more’라는 유명한 모토처럼 모든 장식을 건축에서 배제한 기능적인 미학을 추구했다. 20세기 초 모더니스트들은 자신들이 과거의 모든 건축 양식을 파기했고 새로운 건축을 추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벤츄리는 이것이 대단한 착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상 그들도 당시 교량이나 구조물에서 나타난 산업시대의 양식을 모방했으며 그들이 모델로 삼은 기능적 구조물에서조차 장식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벤츄리는 구차한 장식 없이 구조적인 완결성을 구현한 듯 보이는 크로포드 매너의 외관이 가식임을 밝힌다. 영웅적인 독창성은 이미지에 불과할 뿐 실제 크로포드 매너에서 사용된 공법과 구조는 고전적이고 평범하다. 결국 크로포드 매너는 스스로 아방가르드 건축처럼 보이기 위한 장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그림2). 반면 길드 하우스는 의도적으로 건축에 장식을 다시 도입한다. 길드 하우스에서는 일상적으로 늘 마주치는 건축적 요소들을 볼 수 있다. 동네 대부분의 건물들처럼 벽돌로 만들어진 길드 하우스는 얼핏 보기에 별다른 특징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이 건물은 그리 평범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건축적 요소들이 모두 의도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길드 하우스의 이름이 새겨진 간판은 과도하게 거대하다. 정면의 황금색 안테나는 조각품과 흡사하게 디자인되었다. 창틀 역시 기성 제품처럼 보이지만 보통의 창틀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일반적인 면적 구성의 비율은 파괴된다. 그리고 길드 하우스의 전면부는 르네상스 시기의 고전적 파사드를 그대로 모방한다. 모더니즘에서 금기시 되어오던 과거 양식의 부활인 것이다(그림3). 벤츄리는 크로포드 매너의 겉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더욱 강력한 결정타를 날린다. 모더니즘 건축은 시대착오적이며 더 나아가 공허하고 지루하다. 유치함을 거부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양식은 20세기 중반 이후 너무나 과도하게 소비되어 스스로 유치한 상징이자 장식이 되어버렸다. 마치 우스꽝스러운 오리 모양의 집처럼 말이다. 이제는 유치함을 거부하기보다 오히려 제대로 유치해져야 역설적으로 세련되어 보일수 있다. 우리는 상업자본과 대중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쉬운 설계 “지루한 건축이 재미있는가Is boring architecture interesting?” 벤츄리가 던진 이 질문은 대중성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제시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양식을 탄생시킨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반드시 모더니즘 건축의 폐기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굳이 장식을 디자인에 복귀시키지 않아도, 과거의 양식을 재해석 하지 않아도 재미있는 건축은 가능하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쉬운 설계다. 렘 콜하스Rem Koolhaas는 가장 탄탄한 이론적 기반을 바탕으로 설계를 하는 건축가 중 한 명이지만 가장 대중적인 설계를 하는 건축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은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자들만이 현대 건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이 편견임을 증명한다.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계는 이론적기반이 약하다는 건축가들의 선입견도 철저하게 파괴한다. 다음은 OMA에서 진행한 시애틀 중앙도서관의 설계다(그림4). 지식의 양적 증대와 함께 도시의 인구도 늘어나면서 시애틀 중앙도서관은 이미 여러 차례 증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은 여전히 이용자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1998년 시애틀 시는 과거의 도서관을 아예 철거하고 미래의 변화를 유동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도서관을 설계하고자 했다. 콜하스는 이 도서관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일반적으로 도서관은 서고와 관리실처럼 고정된 공간과 열람실처럼 고정되지 않은 공간으로 구분된다. 모든 도서관의 문제는 책이 늘어나면서 고정된 공간이 고정되지 않은 공간을 잠식하면서 발생한다. 고정되지 않은 공간도 서고처럼 기능에 따라 구분한다면 서로의 영역을 잠식하지 않고 변화에 대응할 수 있다.‘재단된 유동성Tailored Flexibility’6 이것이 콜하스가 제시한 해결책이었다(그림5). 당시 시애틀 도서관의 공간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책을 위한 공간이 32%, 나머지 기능을 위한 공간이 68%의 공간을 차지한다(그림6). 콜하스는 ‘나머지 기능’들이 무엇인지 살펴본 뒤 책과 ‘나머지 기능’의 영역들을 성격에 맞게 결합시킨다. 이렇게 다섯 개의 고정된 공간과 네 개의 고정되지 않은 공간으로 도서관을 재구성할 수 있다.7 그럼 건축적인형태는? 두 가지 공간을 성격이 중복되지 않게 번갈아 배치한다. 그대로 쌓아 올리면 재미가 없으니 프로그램의 블 록들을 밀고 당겨보자. 그러면 어떤 공간은 햇빛도 더 들어오고 어떤 공간에서는 거리 풍경도 잘 보인다. 이제 블록다이어그램에 외피를 씌우면 건축적 형태는 완성된다. 벽돌 쌓기만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설계다(그림7). 콜하스가 이론과 실무를 넘나드는 건축가라면 조경에는 제임스 코너James Corner가 있다. 이론가가 아닌 건축가로서 시작한 콜하스와는 달리 코너의 출발점은 학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이론과 초기의 설계는 깊이 있고 난해하기로 유명했다. 그런데 최근의 설계 작품을 보면 까다로운 코너 씨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그림8). 유선형의 지형이 만들어내는 조형적 경관을 보면 산타모니카에 위치한 통바 파크Tongva Park의 설계 개념이 무척 궁금해진다.8 코너는 캘리포니아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계곡 지형인 아로요Arroyo에 주목하여 세 가지 설계 개념을 제시한다.9 첫째는 아로요 흐름Arroyo Wash이다. 말 그대로 폭우가 만들어낸 물줄기가 건조한 사막 지대를 지나가면서형성한 유선형의 형태다. 둘째는 아로요 협곡Arroyo Ravine. 물줄기가 집중되면 양쪽에 절벽을 만들면서 흐르는데, 두 번째 안은 절벽의 형태를 디자인에 그대로 도입하였다. 셋째는 아로요 둔덕Arroyo Dune. 물이 흐르며 계곡을 형성하면 자연히 계곡 옆에는 유동적인 모래 언덕이 형성된다. 세 번째 안은 이러한 사구의 형태를 형상화하였다. 세 가지의 개념 중에서 최종적으로 첫 번째 개념인 아로요 흐름이 공원의 설계 개념으로 선택되었다(그림9). 이렇게 듣고 나니 황당할 정도로 간단하다. 거의 유치원 꼬마들을 데리고 미술 시간에 “물줄기 모양을 그려볼까요? 아니면 언덕처럼 그려볼까요”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이러한 접근이 성의 없다고 생각한다면 반문을 해보자. 무엇이 더 필요한가? 이 공원은 주민들이 편안한 반바지 차림에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관광객과 어우러져 산책을 하는장소다. 굳이 다양한 사회적 층위의 중첩과 교차, 공간과 시간의 충돌과 혼성이 매개된 까다로운 설계가 필요할까? 누군가 여전히 통바 파크의 설계 방식이 너무 쉽다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이 공원의 디자인이 훌륭하지 않다고 함부로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계 개념, 그리고 설계 방식의 새로움은 그 공간이 좋고 나쁨과는 의외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김영민은 1978년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조경과 건축을 함께 공부하였고 이후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SWAGroup에서 6년간 다양한 조경 설계와 계획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USC 건축대학원의 교수진으로 강의를 하였다. 동시대 조경과 인접 분야의 흐름을 인문학적인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이 있으며, 설계와 이론을 넘나드는 다양한 활동을 펴나가고 있다. 역서로 『랜드스케이프어바니즘』이 있으며, 『용산공원』 외에 다수의 공저가 다.
  • [조경가의 서재] 책과 헤어지지 않기 1 시집 활용법
    돌이켜보건대 내 독서 생활은 어디까지나 그저 책에서 손을 완전히 떼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투쟁의 연속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모양 좋은 책들을 여럿 사서여기저기 꽂아두고 쌓아두었지만, 간혹 생각난다 싶을 때에만 깨작깨작 들춰보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설계 일을 시작하면서는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당당하게 일정 기간 아예 책을 멀리한 적도 많았고, 설령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리 심오하지도 않은 책을 띄엄띄엄 조금씩 아껴가며 훑었을 뿐이다. 그나마도 읽고 난 뒤 메모나 서평을 따로 써둔 적도 없는 터라 세상의 책들과 그리 끈끈한 사이가 아니다. 그런 나에게 ‘조경가의 서재’라는 타이틀은 부담스럽고도 민망하기 짝이 없다. 물론 집에 서재라고 따로 정한방도 없거니와. 그리하여 여러 밤낮을 찌푸린 낯으로 끙끙댔다. 고민끝에 ‘교양인으로서의 삶’을 근근이 이어가기 위해서 읽기 편한 책을 가려내던 나름의 수법과 알량한 독서수준에도 불구하고 이를 야무지게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쓰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보잘것 없이 아주 조금만 읽었지만 줄기차게 많이도 써먹었던 방법, 과문寡聞함을 거뭇한 먹구름으로 가리고 그 사이로 언뜻 드러나는 빛줄기처럼 남다른 감성을 은근히 과시하는 방법이랄까. 설계하는 사람은 책을 언제 어떻게 읽을까? 출퇴근 시간 잠깐 올라 탄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야근 끝에 돌아간 늦은 밤 방구석에서나 짧게 틈을 내어 책장을 펼칠 것이다. 심신이 피곤하면 그마저도 힘들다. 비단 설계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아예 공부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꾸준히 매일 한두 시간씩 시간을 정해놓고 책을 읽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코 뜰새 없이 바쁘기로는 세상에서 둘째라면 서러워 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어른들이니 말이다(그런데도 가공할 만한 독서량으로 이름 난 ‘로쟈’ 이현우는 서평집 『그래도 책읽기는 계속된다』에서 사람들이 날마다 무려 60~70쪽, 그러니까 한 주 한 권의 책을 꾸준히 독파하는 ‘독서력을 갖춘 사회’를 만들어보자고 이야기한다). 정말 이토록 가련한 형편이라면, 그래서 지속적인 읽기가 수월치 않아서 좀처럼 책 펴기가 힘들다면, 숨을 끊어가면서 읽을 수 있는 시집들을 우선 권해본다. 뭔 소린지 통 모르겠다며 서점의 시집 코너 앞에서 난감한 표정으로 주저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경우는 이렇다. ‘교양 있는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차피 제대로 된 시詩가 아니지’라는 당돌한 자세로 자신감을 상승시키며 눈에 들어오는 시집을 여러 권 집어 든다. 그러고는 방 책상에 올려두거나 가방에 넣어 두고 틈나는 대로 이리저리 훑어본다(화장실 또한 시집 보기에 꽤나 좋은 장소일 터). 앞에서부터 봐도 상관없고 마음에 드는 제목만 골라서 봐도 상관없다. 다만 한 가지! 한 장 한장 넘기다가 마음에 들거나 눈에 쏙 들어오는 부분은 책장 끝부분을 세모꼴로 접어둔다. 나아가 마구 떠오르는 잡생각을 널따란 주변 여백에 재빠르게 끼적거려도 좋겠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면 시집 맨 뒤에 나오는 시평詩評을 본 내용에 앞서 읽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평론가나 동료 시인들이 해설해 놓은 내용이 전반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뿐더러 여기서 인용한 시나 시구만 먼저 찾아보는 것도 알뜰한 독법讀法이다. 우리나라에서 시집을 시리즈로 내는 출판사로는 문학과지성사, 창작과비평사, 세계사, 실천문학사 등이 있다. 내 경우에는 그중에서도 유독 ‘문학과지성사’에서 출판된 시집을 많이 사두었다. 익숙한 시인을 즐겨 찾게 마련이고 내용 또한 비슷한 맥락을 이어가며 구입한 탓이겠지만, 여기에는 시인 겸 소설가 겸 화가인 이제하가 그린 시인 캐리커처가 담긴 담백한 표지 디자인이 한몫 단단히 했을 듯싶다.사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내 돈 주고 시집을 산 이후로 맘에 들어서 기억할 만하거나 능히 써먹을 만한 대목이 있으면 꼭 책장 모서리를 접어두곤 했다. 가깝게는 몇 달 뒤나 멀리는 몇 년 후쯤 그걸 찾아서 읽어 보시라.접어 둔 페이지나 밑줄 그은 시구나 휘갈겨 쓴 메모를 보면서 당시 그렇게 한 이유를 혼자서 추리해보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받았다. 졸업 후 1999년부터 16년째 조경설계사무소를 다니고 있다. 4년 전부터는 개인 주택 정원, 어린이집과 학교의 외부 공간, 농장 조경계획, 공장 외부환경 개선사업, 아파트 조경 가이드라인 등 하나하나성격이 다른 다양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공간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행복해야 나중에 그 공간에서 머무는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다는생각으로, 즐겁게 일하는 조경설계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현재 스튜디오 테라(STUDIOS terra) 소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공저로 『철새협동鳥합』이 있고, 제프 마노가 쓴 『빌딩 블로그』를 번역한 바 있다.
  • [그들이 설계하는 법] 비정통적 기회주의자
    얼마 전 중국 베이징 대학교에서 수퍼매스 스튜디오(Supermass Studio)의 작업에 대해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발표 제목을 달라고 해서 사무실을 시작할 때 내세운 세 가지의 방법론 중 두 가지를 뽑아 ‘Unorthodox & Opportunistic’이라고 보내주었다. 헌데 발표장에 가서 공고 포스터를 보니 제목이 ‘비정통적 기회주의자’로 번역되어 있어 당황한 적이 있다. 비정통적인 기회주의자라니! 얼핏 들으면 아주 하류의 질 나쁜 시정잡배처럼 보일 수가 있으니 (이에 대한 설명으로) 내가 설계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비정통적 창의성(Unorthodox Creativity)’, ‘기회주의적 다양성(Opportunistic Diversity)’, ‘사회적·환경적 책임감(Social Environmental Responsibility)’은 수퍼매스 스튜디오를 시작하면서 작업 방법의 근간으로 내세운 세 가지 가치다. 생소한 개념인 것 같지만 이 세 가지 가치에 그동안 내가 학업과 실무를 통해 경험하고 쌓아온 조경에 대한 모든 생각이 담겨 있다. 비정통적 창의성 설계가라면 누구나 창의적인 설계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설계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창의적인 행위니 모든 설계가들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창의적인 작업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설계가에게 창의적인 접근이 당연한 것이라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만 ‘남과 다른’ 창의적 접근을 할 수 있을까? 비정통적 창의성은 이러한 주류 창의성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하였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것에 대한 남다른 추구는 1990년대 초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황기원 교수가 가르치던 ‘경관의 해석’ 수업시간에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한 에세이를 쓰는 과제가 있었다. 나는 옴스테드가 설계한 센트럴파크의 성공이후 자연풍경식으로 일관되어온 20세기 현대 조경에 대해 일침을 가했고 “이제는 전혀 다른 가치와 미학을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형태의 현대 조경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라는 나름 거창한 선언을 했다. 더불어 내가 기억하는 1990년대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새로운것에 대한 강한 갈망이 있었다. 조경에서는 피터 워커(Peter Walker)를 비롯한 조지 하그리브스(George Hargreaves), 마사 슈왈츠(Martha Schwartz), 마이클 반 발켄버그(Michael Van Valkenburgh) 등의 미국을 위주로 한 일단의 조경가들이 기존의 조경 미학에 반하는 파격적인 개념과 형태를 내세워 조경 설계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 전반에 걸쳐 실체 자체도 모호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개념을 통해 근대화를 거치며 적체되어 온 현대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을 이해하려 했다. 1997년에 나온 애플 컴퓨터의 가장 성공적인 광고 캠페인 ‘다르게 생각하자(Think Different)’는 이러한 변화와 혁신에 대한 갈망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는데 특히 규범과 질서를 따르는 모범생과 착한 학생이 아닌 말썽꾼, 왕따, 반항아, 그러나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보고자 하였던 선구자들을 기리는 ‘정상이 아닌 이들을 위하여!(Here’s to the Crazy Ones)’ TV 광고는 아직까지도 나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2000년대 중반 제임스 코너와 함께 필드 오퍼레이션스(Field Operations)에서 일하면서 이러한 ‘비정통적’ 또는 ‘비정형적’ 창의성의 추구에 대한 생각이 점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당시의 필드 오퍼레이션스는 일찍이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공공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으며, 이제까지 아무도 사용해 보지 않았던 방법을 도입하고 싶어 했다. 이전에 이미 만들어진 것, 했던 것들은 무조건 열외로 밀어냈고 엉뚱한 것, 말이 안 되는 것을 찾아 말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다. 개념과 프로그램에서 시작해 물리적 공간 형성으로 완성되던 기존의 방법론을 뒤엎고, 공간의 물리적인 틀을 먼저 구성한 뒤 여기에 프로그램을 채워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개념을 도출시키는 방법론이 시도 되었다. 전혀 상관이 없는 여러 가지 패턴들을 대상지 위에 이리 저리 엎어보면서 공간의 구성과 프로그램간의 연계성을 찾으려는 작업들이 이때 시도되었다. 당시 설계공모 당선안과 계획안들을 통해 이름을 얻고 있던 제임스 코너는 실제 실무의 경험이 거의 없었는데 ‘장님 무서운 것 없다’는 말처럼 이러한 무경험이 오히려 당시의 필드 오퍼레이션스의 작업을 더욱 모험적으로 만들었고 기존의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분야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시기에 진행했던 춘천 G5 설계공모 당선안은 이러한 패턴의 적용, 물리적 틀의 형성을 통한 프로그램의 도출 등과 같은 새로운 방법론이 대표적으로 사용되었던 사례다. 2000년대 후반 다국적 건축·엔지니어링 업체인 EDAW/AECOM(지금은 AECOM으로 통합)의 설계 총괄 담당(Design Director)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비정통적 창의성에 대한 개념이 점점 확고해졌다. 조경계의 거대 기업이었던 EDAW는 창의성을 강조하였지만 이는 매우 제도화되고 규범화된 이른바 ‘정통적’인 의미의 창의성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조경설계사무소이기도 한 EDAW는 몇십여 년간 자신들이 해 오던 방식이 있었다. 이와 같이 틀에 박힌 진부한 설계에서 벗어나 새롭고 창의적인 방법론을 도입하는 것이 설계 총괄로서 내가 맡은 역할이었다. 전 세계에 업무 네트워크가 있고 막대한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EDAW에는, 매년 세계 각국의 사무실에서 가장 뛰어난 설계 인력들을 한자리에 모아 서로의 방법론을 공유하고 창의적 업무 방향을 논의하는 설계정상회의(Design Summit)라는 행사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하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EDAW 내에서 비주류에 속하는 이른바 진보파 설계가들이었다. 어느 해인가 논의의 주제가 ‘변방에 서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커팅 에지(cutting edge)가 될 것’인가 아니면 ‘중심에서 주류 사회를 이끌어 가는 리딩 에지(leading edge)가 될 것’인가에 모아진 적이 있다. 이때 결론이 매우 흥미로웠는데 바다에서 먹이를 찾아 헤엄치는 물고기 떼를 비유해서 ‘끊임없이 변방에서 헤엄치지만 언제나 중심을 향해 움직인다(swarming toward the center but swimming on the edge)'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결론이었는데 궁극적으로 주류를 염두에 두지 않은 비주류의 추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적 다양성 1996년 하버드 GSD에서 공부할 때 렘 콜하스와 함께 ‘하버드 도시 연구(Harvard Project on the City)’라는 연구 프로젝트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십여 명의 건축, 도시설계, 조경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모여 1년 동안 특정한 도시 현상을 다각적인 방향에서 연구하는 것이었는데 우리의 연구 주제는 쇼핑이었다. 지금은 유명 건축가들이 너도나도 프라다니 샤넬이니 고급 상업 부티크(boutique)를 설계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저명한 건축가들은 상업 시설을 설계하지 않았다. 미술관, 학교, 공공 건물과 같은 고상한 건물들을 설계하면 이른바 건축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상가나 백화점을 설계하는 건축가는 쇼핑 건축가라고 하여 저급하게 취급받는 때였다. 그러나 우리는 쇼핑이 이미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침투해 있는가에 주목했고 상업 시설의 건축, 조경, 생태, 마케팅, 테크놀로지, 브랜딩 등 쇼핑과 관련지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연구했다. 그 결과는 쇼핑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도시의 중요한 물리적 환경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콜하스는 상업 건축의 중요한 이정표가 된 뉴욕 소호의 프라다 매장을 처음으로 설계하게 된다. 콜하스와의 쇼핑 연구는 나의 설계관 및 방법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이 오늘 이야기하는 기회주의적 다양성이라는 개념의 밑바탕이 되었다. 내가 쇼핑 연구를 하던 1990년대 중반까지도 건축(조경을 포함해서)에는 옳은 건축과 그렇지 않은 건축에 대한 구분이 있었다. 이는 당시의 건축이 기본적으로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대의를 중요시하지만 생각을 경직시키고 사물을 흑백 논리로 끌고 갈 수 있다.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게 되면 ‘해야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이 분명해지는데, 이를테면 상업 논리에 바탕을 둔 쇼핑이 하지 말아야 할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다변화·다가치가 점점 중요해지는 사회에서 과거의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접근법은 명확히 선을 긋기 어려운 애매한 경우가 종종 있다. 기회주의적 접근은 이러한 경우를 마주칠 때 재빨리 기회를 포착하고 그 속에서 공허한 대의 대신 실리를 선택한다. ‘모 아니면 도’라는 강경함 대신 위기와 제약을 기회로 바꾸는 보다 유연한 자세를 취한다. 이를 통해 할 수 있는 것을 하나씩 찾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나에게 기회주의적이란 것은 모든 프로젝트가 그 나름의 기회와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기회와 가능성이 설계를 통해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전적으로 설계가에게 달려있다. 많은 설계가들이 ‘왜 자신이 하는 프로젝트는 이리도 재미가 없고 진부하고 천편일률적인지’에 대해 회의하는데, 내가 볼 때에 설계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도 설계가이고 이를 진부하게 만드는 것도 설계가다. 수퍼매스 스튜디오에서 진행했고 2012년 미국조경가협회 뉴욕 지부에서 계획 분야의 상을 받기도 했던 브라질 농업생태신도시 계획안은 이러한 제약 요건을 재빨리 기회로 전환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브라질의 주요 농업 개발 지역인 북동부 사바나 지역에 유기농업을 위한 대규모 생태 신도시를 계획하는 작업이었는데 쓸모없는 황무지인줄 알고 시작한 사업 대상지가 최근 십여 년 사이에 아마존 열대우림에 버금가는 종 다양성을 갖는 생태계의 보고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프로젝트는 개발 프로젝트에서 개발을 가장한 생태 보존 프로젝트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대상지 내에 생태적으로 가장 민감한 자연 배수로 지역과 인접한 습지를 먼저 보존 네트워크로 연결하여 보존 지구로 지정한 후 나머지 지역을 농업 지구로 개발함으로써 개발 사업으로는 흔치 않은 선 보존·후 개발이라는 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회주의적 접근은 다양한 유형의 프로젝트를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하는데, 이는 곧 작업의 다양성과 연결된다. 나는 사무실을 운영하는 데 있어 가능하면 다양한 유형의 프로젝트를 하도록 노력한다. 수퍼매스 스튜디오에서 다루는 프로젝트 유형을 보면 대단위 마스터플랜부터 주거단지 계획, 업무 시설, 전시 시설, 캠퍼스, 공원 계획, 광장, 호텔, 주택 정원, 공동주택, 수변 개발, 설치 예술에 이르기까지 공공, 민간, 상업, 문화, 업무, 주거, 예술 시설 등을 망라한다. 여기에 이전 회사에서 다루었던 프로젝트까지 더하면 식물원, 동물원, 놀이공원, 카지노, 리조트 등 실로 다양한 분야와 성격의 프로젝트를 포함한다. 이렇게 작업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데는 창의적인 욕구에 대한 만족 그 이상의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회사의 규모가 커지고 보다 조직화 되면 업무 분야를 분화 및 특화시키려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내가 이전에 일했던 AECOM도 마찬가지여서 처음 시작할 때 회사에서는 나에게 전문 업무 분야(practice line)를 선택하여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기를 원했다. 당시 AECOM은 공공 공간(public realm), 커뮤니티 단지 설계(community design), 호텔 및 리조트(resort hospitality), 캠퍼스 설계(campus design & planning), 생태 설계(ecological design) 등과 같이 업무 분야를 특화하여 이 중 자기가 관심 있고 잘 할 수 있는 한 분야를 선택해 발주처 관리부터 마케팅, 프로젝트 운영, 설계에 이르기까지 선택 분야에 집중하도록 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경기가 좋을 때는 효율성을 발휘하지만 경기가 나빠지면 경기를 타는 특정 분야가 직접적 인 타격을 입게 된다. 실제로 2000년대 후반 미국 경기가 급격한 불황으로 빠져들게 되자 민간 중심의 주거 커뮤니티 개발과 호텔·리조트 개발 사업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었고 이 분야로 특화되어 있던 담당 소장들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특정한 업무 분야로 빠지는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설계 총괄 소장으로 회사 내의 다양한 분야의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던 나는 불황이 시작되자 경기를 심하게 타는 민간 개발 팀을 떠나 공공 개발 팀으로 용이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뭐든지 다 할 줄 아는 사람은 제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내세울 수 있는 특화 분야가 있는 것이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 프로젝트를 따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대부분의 클라이언트는 본인들이 필요로 하는 요구 사항이 명확하기 때문에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원하지 다른 것을 이것저것 다 한다고 특별히 더 좋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수퍼매스 스튜디오에서는 이러한 특화 분야를 특정한 프로젝트 유형이 아닌 프로젝트에 특화된 방법론으로 접근한다. 수퍼매스 스튜디오가 특화점을 갖고 있는 분야는 새로운 프로그램의 개발, 친환경 기술의 시각적·경험적 구현, 공간의 조직적·구조적 처리 등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특화된 방법론은 모든 프로젝트 유형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사회적·환경적 책임감 예전 회사에서 일할 당시 우리끼리 하던 농담이 있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실릴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한다(We’ll do anything for one magazine shot).” 물론 최고의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이를 통해 보다 나은 공간을 더 많은 대중에게 제공하고자 했지만 그 이면에는 그 작업이 대중으로부터 인정받고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무척이나 강했던 것이다. 친환경성을 가장 중요한 기치로 내세우는 회사에서 일하며 가장 친환경적인 경관을 만들고자 할 때에도 이러한 것들이 결국은 회사의 수익이 맞춰진 후에야 시작된다는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실 대다수의 뛰어난 설계사무소들은 모두 최상의 설계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설계의 질을 조금이라도 더 높이고 이를 통해 조경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이러한 노력이 정당하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회사들을 거쳐 오면서 나는 아직도 많은 설계가들이 (특히 그들의 설계가 뛰어날수록) 우리가 처한 사회적·환경적 문제의 많은 부분을 간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 설계하는 대부분의 공간은 다수의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이러한 ‘일반 대중’에 속하지 못하는 빈곤층과 소외계층이 존재한다.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를 조금만 벗어나 더 큰 세계로 눈을 돌리면 우리의 빈곤층·소외계층의 생활에도 미치지 못하는 생활을 하며, 최소한의 기본권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 너무도 많이 있다. 친환경적 설계 또한 이제는 거의 기본이 되어버렸지만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 지금, 설계가들이 과연 우리가 처한 절박한 환경적 위기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하고 있는지 묻는다면 아마도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수퍼매스 스튜디오의 세 번째 가치인 사회적·환경적 책임감은 이러한 자각에서 시작됐다. 때마침 사무실을 시작하던 해인 2011년 가을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스미스소니언(Smithsonian) 박물관이 기획한 ‘나머지 90%와 함께 하는 디자인(Design with the Other 90%)’이라는 획기적인 전시가 있었다. 지구촌 65억 인구 중 90%에 해당하는 58억의 인구가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기본적인 생필품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며, 그중 절반은 가장 기본적인 요건인 먹을 것과 깨끗한물, 그리고 잠잘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디자인을 통해 이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방법들을 찾고자 하는 전시회였다. 이 전시회는 나에게 매우 큰 감명을 주었고 설계가의 보다 실천적인 사회 참여에 대한 적극적 인 가능성을 제시해 주었다. 수퍼매스 스튜디오는 지난 3년간 직·간접적으로 이와 같은 다양한 사회 문제의 해결에 참여하고 있다. 2011년에는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주제로 뉴욕에서 활동하는 12명의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들이 공동으로 기획한 ‘지구촌의 위기와 디자인(Global Crisis & Design)’ 전시회에 참가해 환경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2012년에는 필리핀 태풍 와시의 피해를 입은 이재민 구호를 위한 정착민 마을 조성 기본 계획안을 필리핀 당국에 제안하였으며, 지진으로 황폐된 아이티(Haiti)에 산림녹화를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에 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비정통적 창의성’과 ‘기회주의적 다양성’은 2006년 『건축문화Architecture and Culture』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당시 필드 오퍼레이션스에서의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개념이었다. 이것이 AECOM에서의 작업을 통해 보다 구체화되고 여기에 ‘사회적·환경적 책임감’이 더해지면서 수퍼매스 스튜디오의 실무 철학이 된 것이다. 그러나 2006년의 첫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이런 용어들은 내가 만들어낸 말들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을 훨씬 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수퍼매스 스튜디오가 설계하는 법에 대해 다시 한 번 묻는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한 줄로 답할 것이다. “남과 다르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그러나 책임감 있게 한다.” 차태욱은 미국 뉴욕에 위치한 수퍼매스 스튜디오(Supermass Studio)의 대표로 미국을 근거로 한 17년간의 국제적 설계 경력을 통해 설계및 프로젝트 운영, 시공에 이르는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하버드 GSD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뉴욕, 매사추세츠, 네바다, 노스캐롤라이나에 공식 등록된 미국 공인 조경가로서 친환경전문자격증(LEED)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