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 기억이 사라진 도시
    기억의 감각을 잃은 피맛길 불현듯 대학 때 먹던 빈대떡 생각이 나 종로 피맛길을 찾아 나섰다. 특히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 있던 ‘열차 집’ 빈대떡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게 정말 환상적인 맛이었다. 원래 나무판을 기차처럼 늘어놓고 빈대떡을 팔아서 ‘기찻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다가, 1960년대에 피맛길 초입으로 이사 오면서 정식으로 ‘열차집’이라는 간판을 걸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운종가로 불리던 종로를 지나는 고관이나 사대부들의 말을 피해 서민들이 다닌 뒷길이라 하여 피맛길로 이름 붙여진 이 골목길에는 빈대떡 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선술집과 국밥집 등 저렴한 먹거리가 줄줄이 늘어서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을 반갑게 맞아주곤 했다. 골목길을 걸으며 그 맛과 향과 소리를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면, 노릇노릇한 생선전들을 맛깔나게 구워주시던 시골 할머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순대국밥을 시장에서 뚝배기 채로 사오신 어머니, 지글지글 구워지는 빈대떡 소리를 친구삼아 함께 떠들었던 대학 친구들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그곳에 열차집은 더 이상 없다. 피맛길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소중한 추억, 그 감각의기억이 차곡차곡 쌓여있던 공간에는 맛도 향도 없는 거대한 유리 건물이 서있다. 정겨운 골목길이 있던 자리에는 번쩍거리는 상가가 대신 늘어서 있고, 입구에는 홍살문에 ‘피맛골’이라는 간판이 어색하게 서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상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청진옥, 미진, 청일집 등 익숙한 옛 이름들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음식을 먹어보지만, 왠지 내 기억 속의 맛과 향이 아니다. 깨끗한 실내 공간에 옛날 대문처럼 가게 앞을 꾸며놓은 청진옥의 선짓국은 옛날의 향이 아니고, 새로운 가구와 깨끗한 벽으로 바뀐 청일집의 빈대떡은 무엇인가 빠진 것 같다. 미진은 그냥 동네 국수집과 다르지 않다. 같은 주인, 같은 재료, 같은 요리인데, 왜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에게 피맛길의 선짓국과 빈대떡은 단지 맛난 음식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소중한 기억이자 내 감각이며 내 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 장소가 간직한 시간의 맛과 향이 사라진 공간에서 그 음식들은 더 이상 같은 음식이 아니다. 나는 단지 추억의 공간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내 기억의 원천을 잃은 것이며, 그와 함께 내 몸속 감각의 기억 역시 조금씩 조금씩 희미해지며 어느새 나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 기억을 넘나드는 감각의 문, 선유도공원 어느 따뜻한 봄날 선유도공원을 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늘어선 공원으로 들어서니 양화대교를 지나는 차 소리가 어느새 폭포 소리처럼 들린다. 봄을 맞아 여기저기서 물채우는 소리로 요란하다. 콸콸콸, 졸졸졸, 보글보글… 물 솟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어느 대중목욕탕의 기억과 함께 온 몸이 느슨해진다. 붉은 벽돌의 ‘서울이야기’관을 돌아가니 마치 고대 신전의 폐허가 막 발굴된 것 같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진다. ‘녹색 기둥의 정원’이다. 이곳은 원래 정수 과정을 모두 거친 물을 송수하기 전에 담아두던 지하 정수 공간이었는데, 테니스장으로 사용되던 지붕 슬래브를 걷어내고 기둥을 그대로 살려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뒤쪽의 ‘서울이야기’관은 정화된 물을 영등포 지역으로 보내는 송수펌프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경사로를 타고 ‘녹색 기둥의 정원’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마치 인간 군상처럼 줄 맞춰 서있는 기둥들이 나를 맞이한다. 각각의 기둥은 마치 사람처럼 옷을 입고 있다. 어떤 기둥은 벌거벗고 있고, 어떤 기둥은 레슬링 선수처럼 한껏 부풀어 오른 덩굴 코트를 입고 있다. 어떤 기둥은 아랫도리만 가린 채 헐벗은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다. 상부 콘크리트 슬래브를 잘라낸 흔적은 사람의 얼굴처럼 각각의 기둥에 다른 표정으로 남아 있다. 원래 지하 정수 공간을 반으로 나누던 벽이 있던 자리에는 긴 의자가 놓여있다. 의자에 앉아 기둥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고, 기둥을 감싼 담쟁이의 잎사귀 하나하나가 손짓하는 듯 살랑거린다. 오랜 시간 쌓여있던 선유봉과 채석장, 정수장의 기억 하나하나가 다시살아나는 것 같다. 선유도는 옛날에는 신선이 내려와 놀다 간 봉우리라하여 선유봉仙遊峯으로 불렸다. 뱃길로 연결된 양화나루 쪽 잠두봉蠶頭峯, 지금의 절두산과 함께 한강의 절경으로 유명하여, 많은 풍류객들이 선유봉을 배경으로시와 그림을 남겼다. 특히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謙齋 정선鄭歚(1676~1759)의 ‘선유봉’ 그림을 보면, 가운데 우뚝 솟은 선유봉 자락에 소박한 초가집과 웅장한 기와집이 함께 마을을 이루고 있고, 황금빛 모래사장에는 배에서 갓 내린 선비 일행이 걸어가고 있고, 저 멀리 한강에는 양화나루 쪽으로 큰 배들이 오가고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이르자 서서히 존재감을 잃어갔다. 1925년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자 일본은 제방을 쌓기 위해 선유봉의 암석을 캐내더니, 1929년에는 여의도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아예 도로를 만들고 파내기 시작했고, 1936년에는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본격적으로 한강 치수사업을 위한 채석장으로 활용했다. 광복 후에도 미군은 인천으로 가는 길을 만들기 위해 골재를 채굴해갔고, 1962년 제 2 한강교(양화대교)를 선유도 위에 지으면서 그나마 남아 있던 선유봉의 흔적마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조한은 1969년 서울 생으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예일대학교 건축대학원을 졸업한 뒤 지금은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한디자인(HAHN Design) 및 ‘생성/생태’ 건축철학연구소 대표이기도한 그는 건축, 철학, 영화, 종교에 관한 다양한 작품과 글을 통해 건축과 여러 분야의 접목을 꾀하고 있다. 2009년 ‘젊은 건축가상’, 2010년‘서울특별시 건축상’을 수상한 그의 대표 작품으로는 M+, P-House,LUMA, White Chapel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이 있다.
  • 시장의 교체와 시정의 변화 : 민선 20년의 흐름을 읽다
    크게 보고 흐름을 읽자 “시장市長보다 시정市政이 더 중요하다. 그리고 시정보다 시민市民이 더, 더 중요하다.” 지난 해 출간한 책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의 마무리 부분에 “좋은 시장 < 좋은 시정 < 좋은시민”이란 제목의 글을 넣어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참한 도시든 아름다운 도시든 정말 좋은 도시를 원하고 그런 도시에서 살고 싶다면 우선은 좋은 시장을 뽑아야겠지만 거기에 멈추지 말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시장이 욕심꾸러기 시장市場에 잡아먹히지 않고 오로지 시민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는 바른 시정市政을 확정하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시장이 얼굴이라면 시정은 몸통이다. 시장이 이미지라면 시정은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현실이다. 시장 선거 때부터 후보의 됨됨이뿐만 아니라 그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바람이 담긴 정책, 즉 ‘시정’을 면밀히 살펴야 하고, 시장을 뽑은 뒤에도 계속 지켜봐야 한다. 그가 약속한 대로 시정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눈을 부릅뜨고 감시해야 한다. 시장으로 하여금 좋은 시정을 펼치도록 하는 일을 누가 할까? 바로 시민이다. 시민뿐이다. 좋은 도시는 오직 좋은 시민만이 누릴 수 있다. 아름다운 도시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아름다운 시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 도시다. 그래서 시장보다, 시정보다, 시민이 더 중요한 것이다. 지방자치제도의 부활에 따라 1995년 6·27 지방 선거로 민선 1기 서울 시정이 출범한 이래 민선 5기까지 20여년을 보냈고, 이제 눈앞에 닥친 6·4 지방 선거를 통해 조만간 민선 6기를 열어갈 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서울 시민들은 조순, 고건,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시장까지 다섯 명을 서울 시장으로 뽑았다. 다섯 명의 서울 시장들이 지난 20년 서울 시정을 이끌어 왔다.시장이 바뀔 때마다 시정 또한 바뀌었다. 미세한 변화도 있었고 아주 큰 변화도 있었다. 연속된 흐름도 있었고, 정반대의 역류도 있었다. 서울 시정을 조금 크게 보았으면 한다. 지난 20년은 꽤 긴 시간이었고 우리의 현대사 격동기의 한 매듭을 지은 아주 중요한 역사이기도 하다. 시장의 교체와 그에 따른 시정의 변화를 크게 보고 흐름을 읽어보고자 한다. 과거와 현재, 그 흐름을 읽으면서 서울의 미래를 가늠하고 꿈꾸기 위해서다. 민선 1기와 민선 2기 1990년대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1995년 7월 1일 민선 1기 ‘조순 시정’이 시작되었다. 부활한 지방자치제도에 따라 시행된 첫 번째 선거로 선출되었다는 점에서 조순 시장과 그의 시정을 살펴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왜 서울 시민은 조순 후보를 시장으로 선출했고, 시장이 된 그는 어떤 시정을 펼쳤을까? 조순 시장의 ‘개발은 이제 그만’ 초대 민선 시장으로 당선된 조순 시장은 취임식 하루전날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취임식을 무기연기한 채 사고 수습에 전념했다. 두 달 후인 9월 1일 남산 백범광장에서 취임식을 가진 뒤 각 부서 업무 보고를 들었다. 도시계획국의 업무 보고 때 용산, 뚝섬, 마곡, 문정 등 서울시 대규모 미개발부지 전략 개발 구상 보고를 듣다가, 아직도 서울에서 이런 식의 개발을 지속할 것이냐며 보고를 중단시켰다. 미래를 대비한 전략적 구상을 당장의 개발 계획으로 오해한 탓도 있었겠지만 서울 시정에 대한 조순 시장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순 시정은 무엇보다 안전과 방재를 중시하였다. 시정 과제의 첫 번째 꼭지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서울’이었다. 40여년 지속되어온 개발 시대의 관성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100여명의 전문가들로 ‘녹색서울시민위원회’를 구성하고 녹색서울계획 수립 작업에 착수하였다. 환경을 중시하는 환경 정책이 본격화되었고, 문화와 예술과 복지 정책이 강화되었다. 시민단체들의시정 참여 사업을 유도하였고, 교통행정과에 ‘녹색교통계’를 신설하여 보행과 자전거와 대중교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교통 정책을 바꾸려 노력했다. 정석은 1962년 전북 전주 출생으로 서울대학교에서 학사(도시공학) 및석·박사(도시설계) 학위를 받았다. 서울연구원(1994~2006)과 경원대학교(2007~2013)를 거쳐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공학과에 재직 중이다. 북촌, 인사동, 걷고 싶은 도시, 마을 만들기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고, 저서로는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 『저성장시대의 도시정책』(공저) 등이 있다. 블로그(blog.naver.com/jeromeud)와 페이스북(facebook.com/jerome363)으로 시민 대중과 열혈 소통 중이다.
  • 서울의 오늘을 읽다
    지자체 장을 뽑는 지방 선거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민선 시장 시대가 시작된 이후, 대도시의 행정가는 도시의 구조와 형태, 삶과 문화를 그리는 ‘그랜드 플래너’의 역할을 해왔다. 그들의 선언과 비전에 따라 대규모 공공 프로젝트가 추진되었고, 도시의 큰 밑그림이 그려졌다. 특히 대한민국 수도서울은 그 영향이 크고 깊었다. 민선 6기 시대의 도시 정책에는 과연 어떤 철학과 비전이 담기게 될까? 아니 담겨야 할까? 건축, 도시, 조경 전문가들이 ‘시정, 기억, 랜드마크, 거리, 공원’을 열쇳말 삼아 대도시 서울의 오늘을 비판적 시선으로 조명해본 이번 특집은 서울의, 우리의 ‘내일’을 위한 제언이다. 1. 시장의 교체와 시정의 변화 _ 정석 2. 기억이 사라진 도시 _ 조한 3. 위압적 랜드마크에서 수평적 랜드마크로 _ 송하엽 4. 걷고 싶은 도시 서울? _ 이경훈 5. 공원 도시 서울 _ 조경진
    • 편집부
  • [칼럼] 서울, 경계 긋기와 경계 허물기
    강변도로를 달리면서 혹은 고층 건물에서 서울 시내를 바라보면 나 자신이 서울이라는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 속의 작은 부품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천만이라는 많은 인구가 먹고 자고 일하고 노는 데 큰 불편 없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과 더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서울은 진정 아무 문제도 없는 도시인가 서울의 사대문 안은 600년의 역사를 지녔으며, 강남으로 확장된 현재의 서울시는 백제 시대부터 계산하면 2,000년의 역사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현재의 서울은 짧게는 600년 동안, 길게는 2,000년 동안 진화해온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 중에서도 한국 전쟁 후 부터 현재까지의 60년은 그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급속한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세계 도시로 발돋움한 오늘의 서울로 성장하기까지 와우시민아파트 붕괴, 재개발로 인한 철거민 이주,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붕괴, 남산외인아파트 철거 등 많은 시행착오와 아픔이 있었으나, 이러한 성장통이 있었기에 오늘의 서울이 가능했다. 서울의 변화는 대략 2000년을 기점으로 그 전후의 성격이 달라진다. 즉 1990년대까지는 대규모개발 위주의 과격한 변화가 주를 이룬 ‘경계 긋기’ 작업이었다면, 21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시민의 눈높이에 맞춘 친환경적, 친문화적, 친보행적 개발이 대세를 이룬 ‘경계 허물기’ 작업이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개발 방향의 전환은 뉴 어바니즘으로 불리는 보행자 중심의 서구 도시 개발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지만,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방자치제와 지자체장 직선제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표를 의식한 시민 중심의도시 행정이 전국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시민의 피부에 와 닿고 가시적 효과가 큰환경, 교통, 경관, 문화, 복지 등이 도시 행정의 키워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도시계획의 근간이 되는 토지이용계획은 대표적인 경계 긋기라 할 수 있다. 2000년 이전까지는 지구 생태계의 일부인 토지에 주로 경제적, 기능적 관점에서 상업지역, 공업지역, 주거지역, 녹지지역 등 평면적, 기하학적 경계를 만들고 분리시켜 생태계를 파괴하는 무리한 개발을 관행으로 일삼아왔다. 이러한 무모한 개발을 제어하는 수단으로 등장한 그린벨트 역시 또 하나의 경계 긋기에 지나지 않았다. 1971년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의 대규모 도시 외곽에 그린벨트(도시개발제한구역)가 지정되었는데, 경계선 안과 밖의 차별적 행위제한에 따른 그린벨트 내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린벨트 해제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2001년 제주도 그린벨트의 전면적 해제를 시작으로 수도권에서도 부분적 해제가 이루어져 개발과 보존의 부자연스러운 구역 경계가 허물어지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 초의 한강 개발은 수로를 정비하고 둔치를 조성하여 일면 정돈된 강변 경관을 만들었으나, 이 역시 또 하나의 경계 긋기가 되고 말았다. 모든 제방이 직선형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자연 하천의 모습은 사라지고 물 흐르는 곳과 흐르지 않는 곳을 직선적으로 경계 짓고 말았다. 이러한 비생태적 경계 긋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2000년대에 들어 활발하게 진행되는데, 콘크리트의 경직된 경계를 허물고 유연한 자연형 하천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한강공원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1980, 90년대의 주택지 재개발과 재건축은 저층주거지 한가운데에 고층의 나 홀로 아파트를 만들어 기존 주거지와의 물리적·사회적 경계를 만들고 말았다. 기존 도시 조직의 붕괴와 원주민의 낮은 재입주율 등의 부작용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민 주도의 ‘도시 재생’ 개념을 도입하여 대규모의 택지 개발보다는 중소규모의 현지 개량 혹은 정비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경계 긋기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은 2000년 넘는 역사의 층위가 공존하고 있는 박물관 같은 도시이기도 하다. 강동의 암사동에서는 원시 시대 주거지가 발굴되었으며, 한성백제 시대의 몽촌토성, 조선 시대의 왕궁, 도성, 정자 등 많은 역사적 유물을 볼 수 있다. 또한 서울은 전후 폐허에서 시작해 짧은 기간 동안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하여 한옥부터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거 양식이 부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도시다. 따라서 서울은 서로 다른 시기를 대표하는 지역 간의 시간적 경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역사성과 조화성이 충만한 도시로 발전해야 한다. 최근 들어 도시 개발과 성장의 그늘에서 만들어진 사회 계층 간의 경계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면서 환경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많은 도시 가운데 특히 서울은 양극화가 두드러지고 계층 간의 경계가 매우 두껍다고 할 수 있는데, 소외 계층이 평등하게 도시 환경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다. 저소득층 주택과 골목의 개량, 보행 약자를 위한 시설 개선, 노인과 어린이를 위한 복지 시설의 건립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계층 간의 경계를 허무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서울은 개발과 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공간적, 시간적, 사회적 경계를 만들어왔는데, 21세기 들어오면서 이들 경계를 해체하려는 작업이 여러 측면에서 시도되고 있음은 다행이다. 이러한 시도가 성공해야 서울은 진정한 세계 일등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 이러한 경계 허물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는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아직도 만연해 있는 경제성 중심의 개발 행태, 전시성 생색내기 행정, 집단이기주의와 개인주의는 시민 모두가 함께 행복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주민, 전문가, 행정가 등 사회 구성원 모두가 뜻을 모아 장기적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힘을 모아 흔들림 없이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경계 허물기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임승빈은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조경학 석사를, 버지니아 공과대학교에서 환경설계계획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런던대학교에서 박사 후 연구를 하였고,하버드 대학교에서 객원 교수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환경심리와인간행태』, 『경관분석론』, 『조경이 만드는 도시』, 『도시경관계획론』 등이 있으며, 한국조경학회, 한국농촌계획학회, 한국경관협의회, 한국인공지반녹화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이며, 환경조경나눔연구원 원장을 맡아 조경을 통한녹색환경복지의 평등한 구현과 그린유토피아 건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 임승빈[email protected] / 환경조경나눔연구원 원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에디토리얼] 내 고향 서울
    “내 고향 서울은 만인의 타향이다. 그러므로 서울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뜨내기일 뿐이다.” 얼마 전 열린 한양 도성 학술회의, 작가 김훈의 음성이 가슴을 파고든다. 부산에서 났지만 백일을 갓 넘겨 서울로 이주했으니 내 고향도 서울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누가 고향을 물으면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자랐다”고 답한다. 서울과 고향 사이에 등호를 넣지 못하는 나는 서울의 구경꾼이나 이방인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참 이사를 많이 다니셨다.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니 스물 세 개의 주소가 찍혀 있다. 2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다닌 셈이다. 덕분에 나는 셀 수 없이 많은 동네에서 거대 도시 서울의 변화와 발전을 역동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했다. 내가 서울을 고향이라 말하지 못하는 건 단지 유목민 같았던 이사의 역사 때문일까? 아마도 거주한 장소의 숫자보다는 그곳들에 대한 기억의 상실이 고향의 부재를 낳았을 것 같다. 어쩌면 고향은 공간이기보다는 시간일 것이다.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고 붙잡을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의 힘을 빌려 시간의 역류를 꿈꾼다. 기억은 시간의 방향을 거스를 수 있다는 기대감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고향, 그것은 곧 기억이다. 초록의 산야보다 콘크리트 주차장이 더 익숙한 원조 아파트 키드이지만, 나에게도 장소의 기억은 여러 개의 파편으로 조합되어 남아있다. 그러한 단편들의 콜라주가 그나마 나의 고향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서울은 고향의 매개체를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화시켜 왔다. 연 날리던 들판이 롯데월드가 된 건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의 로데오거리에선 스릴 넘치는 화약 놀이 카니발이 열렸었고, 타워팰리스 자리에선 총천연색 만국기 아래를 달리며 스케이트를 탔다. 기억할 수 있는 고향이 물리적으로 사라졌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이제 시간을 거스르기 위해, 고향의 파편을 경험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침대 맡에서 아이패드의 스크린을 두 손가락으로 벌리고 오므리기를 반복하며 옛 위성사진을 들여다보는 일뿐이다. 2012년에 서울시가 시행한 ‘서울시민의 고향 인식도’ 조사를 보면 매우 놀랍게도 시민의 81.1%가 서울이 고향이다, 또는 고향 같다고 응답하고 있다. 서울을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 중 반은 서울 태생이고, 나머지 반은 다른 지역 출신이다. 이들에게 서울은 고향‘이기’보다는 고향‘이어야’ 하는 도시인 셈이다. 그것은 패티김이 노래한 “종이 울리네 꽃이 피네 새들의 노래 웃는 그 얼굴 … 아름다운 서울에서, 서울에서 살렵니다”(서울의 찬가, 1969년)라는 역설과 다르지 않다. “아, 우리의 서울,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서울을 사랑하리라”(서울, 1982년)는 이용의 맹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 네버 포겟 오 마이 러버 서울”(서울 서울 서울, 1988년)이라는 조용필의 고백도 고향을 갖고자 하는 보편적 욕망의 표상일 것이다. 우리가 서울을 고향이라 여기고 싶은 건 서울이 육백 년의 역사 도시이기 때문이 아니다. 산 많고 강좋은 도시라서 그런 것도 아니다. 전쟁의 상흔을 딛고 짧은 시간에 일구어낸 기적 같은 경제 발전때문도 아니다. 63빌딩이나 DDP 같은 화려한 랜드마크가 서울을 고향으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울을 고향으로 열망하는 건 서울이라는 도시의 시공간이 일상생활의 현실과, 또 그 기억과 뒤엉켜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터키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은 그의 고향 풍경과 삶을 담은 자전 에세이 『이스탄불』에서 이렇게 말한다. “도시는 우리 자신의 삶과 정신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우리 자신 외에 도시의 중심부란 없다.” 도시의 핵심은 사람이며 삶임을 강조한 것이다. 도시 자체가 정치의 최전선이었던 지난 10여 년간 서울은 또 한 번의 큰 변화를 꿈꾸었다. 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시장은 도시의 구조와 형태를 재조직하고 삶과 문화를 재편성하는 그랜드 플래너를 자임했다. 계획가로서의 서울 시장들, 그들이 선언하고 추진해 온 서울의 비전과 대형 프로젝트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희망과 어떻게 접속해 왔는가? 이번 호의 서울 특집은 이런 의문에서 기획되었다. 애초에 구상했던“그들의 서울, 우리의 서울”이라는 주제는 “서울의 오늘을 읽다”로 축소되었지만, 그들의 ‘세계 도시서울’, ‘걷고 싶은 서울’, ‘디자인 수도 서울’, ‘공유도시 서울’, ‘푸른 도시 서울’이 서울을 우리의 고향으로 만드는 일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하는 문제의식은 읽힐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나는 튀는 도시보다 참한 도시가 좋다』의 정석,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의 조한, 『서울은 도시가 아니다』의 이경훈,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의 송하엽, 『건축·도시·조경의 지식 지형』의 조경진 등 조경, 건축, 도시 분야의 베스트셀러 필자들이 이번 특집에 흔쾌히 참여해 주셨다. 이들은 시정市政, 기억, 거리, 랜드마크, 공원을 단면으로 잘라 건강하고 편리하고 아름다운 도시 살이를 디자인해야 할 우리 전문가들의 과제를 드러내 주고 있다. 김훈은 이렇게 글을 끝맺는다. “나는 내 고향 서울이 만인의 … 고향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타향사람들아, 서울이 당신들의 고향이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
  • [CODA] 부산시민공원이 남긴 것
    특집의 원고 청탁이 이렇게 수월했던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일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 오랜 시간 붙잡고 있던 하야리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황금연휴의 다음날 부산으로 향했다. 하루 일찍 부산에 도착한 사진작가는 그 연휴에 엄청난 인파가 부산시민공원에 몰렸다고 전했다(그래서인지 이달의 사진에 사람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아무리 개장 직후라지만 우리나라 도시 공원의 인기가 이렇게 높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5월의 부산은 더웠다. 공원을 걷는 연인들이 그늘을 찾으며 불평하는 소리도 들렸고, 벤치마다 이미 주인이 있어 앉을 자리를 찾아헤매는 이들의 조급한 눈초리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늘이 좀 부족한 것 쯤이야 어떠랴 싶었다. 공원의 나무야 자랄 것이고, 그늘은 시간이 만들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새 공원이라 그런지(?) 공간보다는 시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도시인의 로망인 저 푸른 잔디밭을 둘러싼 각종 놀이 시설에서, 바닥 분수에서, 미로 정원에서 수많은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게다가 시민공원의 시설은 무료이니 웬만한 테마파크 못지않은 매력으로 다가서는 듯했다. 나중에 들은 설명이지만, 부산 사람들은 바람을 쐴 때 대개 바다를 찾는다. 그런데 내륙에 대규모 공원이 들어섰으니, 이 새로운 유형의 공간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공원 문화도 학습하며 형성되기 마련이다. 지금 부산 시민들은 부산의 유일한 공간에서 공원 문화를 탐색하는 단계인 셈이다. 공원을 돌아본 후 공원의 북문으로 나서는데, 지금은 아주 일부만 남은 캠프 하야리아 시절의 담장에 시선이 가 닿았다. 그 너머로 집들이 보였다. 의외로 너무 가까운 거리였다. 지난 100여 년간, 부산 시민의 지척에서, 이 큰 공간이 저 담장 아래 꽁꽁 숨겨져 있었겠구나 싶으니 새삼 기가 막혔다. 그리고 다음날, 이번 특집의 두 필자인 김승남 사장과 강동진 교수를 함께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하야리아공원포럼을 통해 오랫동안 캠프 하야리아의 공원화에 노력해 온 만큼 현재 공원의 모습에 아쉬움도 컸다. 특히 캠프 하야리아의 역사적이고 문화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이 토양 오염을 이유로 대부분 철거된 점을 안타까워했다. 환경 오염을 정화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 함부르크의 도시 재생 사업인 하펜시티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김승남 사장은 독일에서도 역시 기름이 유출되었으나 5년에 걸쳐 천천히 치유했다고 설명한다. 반면 부산시민공원의 경우는 ‘싸고 빨리’ 추진하기 위해 한꺼번에 밀어버리고 덮어버리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건물들도 새로 페인트를 칠하고 부재를 새것으로 바꾸어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이 안쓰럽다. 디자인의 완성은 디테일이 아니던가. 옛 건물을 무조건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상책은 아니겠지만, 차라리 그대로 두었다면 어땠을까. 마치 하야리아 담장의 파편처럼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장소의 기억을 호출하는 매개체가 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대부분의 미군 기지의 토양이 오염되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금, 반환되는 땅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는지, 환경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에 집중하는 것만큼 어떻게 치유와 보존을 병행 혹은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한편 부산시민공원에는 기억의 숲이 조성되어 있다. 캠프 하야리아 곳곳에 심어져 있던 플라타너스를 한 곳에 모아 가식해 둔 것인데, 오히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아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된 공간이다. 개인적 선호의 차이가 있겠지만, 부산시민공원에서 지금 자연스러운 경관은 이렇게 과거의 것이 그대로 남은 곳들이다. 안타까운 것은 부대 내부의 철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캠프 하야리아의 부지와 부전역 사이에는 삼각형 모양의 주거 지역이 쐐기처럼 부대 쪽으로 밀고 들어온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효율적인 공원 토지 이용’과 뉴타운 계획을 이유로 이 주거지역을 철거하고 공원 부지로 편입시켜 부지를 정형화했다. 이를 두고도 두 필자는 입을 모아 안타까움을 표한다. 이 오밀조밀한 주거 지역이 남았다면, 독특한 상업 공간과 문화 공간으로 진화해 가며 공원의 경계에 활력을 불어넣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한번 없애버린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으니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지만, ‘하야리아공원포럼’의 노력으로 기존의 계획을 변경시켜 몇몇 건물을 남긴 것도 의미 있는 결과다. 무엇보다 부산시민공원의 성과는 사람들에게 남은 듯하다. 여하튼 부산의 시민들은 공원의 탄생에 크고 작게 기여했고, 이러한 경험에서 오는 자신감도 그 성과의 일부다. 이 경험은 부산에 남아있는 다른 많은 것, 폐선부지나 워터프런트(북항), 달동네 등에서 다시 진화하리라 믿는다. 부산시민공원을 담은 6월호 특집을 마무리하는 지금, 용산공원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때, 또 대한민국의 현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월호 참사의 여진이 강하게 남은 지금, 예술평론가 수전 손택의 글을 공유하며 글을 닫고 싶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매혹의 공간, 정원을 이야기하다 9인의 정원 디자이너가 펼친 가든 토크
    정원 디자이너 9인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올해 설립된 한국조경학회(회장 김한배) 정원학연구센터(센터장 조경진)가 ‘정원문화 심포지엄’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판을 깔았다. 부제는 좀 길다. ‘Garden Talk: 매혹의 공간, 정원을 디자인하다.’ 그 밑에 설명이 한 줄 더 달려있다. ‘아홉 명의 디자이너의 정원 이야기.’ 9인의 발표자는 30대 신진 디자이너부터 50대 중견 디자이너까지 연령대만 다양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숲 같은 대형 공원을 설계한 조경가부터 설계 교육과 실무를 병행하는 대학 교수, 여러 프로젝트에서 색다른 플랜팅 디자인을 선보인 정원 디자이너, 쇼 가든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정원 설계사의 대표, 정원은 물론 인테리어 성격의 공간까지 통합적으로 다루는 디자이너까지, 활동 무대도 경력도 다양했다. 그들이 풀어낸 정원 이야기도 개인 주택 정원부터 공공 정원, 전시회까지 그 폭과 결이 다채로웠다. 지난 5월 8일 고양국제꽃박람회와 코리아가든쇼가 펼쳐진 일산호수공원 내 플라워컨퍼런스룸에서 만난 정원 디자이너들의 9인 9색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9인 9색 정원 이야기 “우리의 도시는 가꿈과 돌봄이 필요하다”는 말로 발표를 마무리한 정욱주 교수(서울대학교)는 복지관 정원 두 곳과 보육원 정원 조성 사례를 소개했다. 본지 4월호 특집 “다시, 정원을 말하다”에 “어느 정원의 8경”이란 제목으로도 소개된 바 있는 ‘어울누리뜰’(지적장애인복지관)은 일반적인 개인 주택 정원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엄연한 정원이다. “가꾸는 도시”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그의 발표는 정원의 범주와 정의가 확장되고 있으며, 정원의 핵심 키워드인 가꿈이 왜 도시로 확산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했다. 박승진 소장(디자인 스튜디오 loci)은 아예 스몰 퍼블릭 가든이란 용어를 언급하며, 식물원이나 미술관처럼 공공이 만들었으나 법적으로 공원으로 분류되지 않는 곳, 개인이 만들었으나 공공에게 개방된 장소에 만들어지는 정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공공 정원을 조성하는 과정의 지난함에 대한 그의 위트 넘치는 발표도 흥미로웠지만, 공공 정원을 많이 만들어야 하는 이유로 그가 제시한 여러 근거(커뮤니티 활성화, 범죄율 저하 등)도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의 발표 제목이기도 했던 “열린 정원, 공공 정원”이 도시를 풍요롭게 하리란 기대감도 싹텄다. 이어진 발표에서 이재연 소장(조경디자인 린)은 자신이 디자인한 세 곳의 정원을 소개했다. ‘삶 속의 정원, 일터의 정원, 장식적인 정원’으로 구분된 정원 사례는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한 볼거리를 전달했지만, 그 정원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소개된 에피소드는 이미지에서 얻을 수 없는 더 많은 생각거리를 전달했다. “오래된 정원은 가족사의 기록이다. … 때로 정원은 식물에대한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 정원은 시간이 완성한다.” 특히 1년 동안 경관이 변화하는 모습을 4계절 9절기로 나누어 디자인을 한다는 대목은 꽤 인상적이었다(그가 소개한 작품 중 한 곳은 이번호 48쪽에 수록되었다.) “때론 나뭇가지 하나가 정원의 분위기를 좌우하기도 한다”는 말로 발표를 시작한 김용택 소장(KnL환경디자인스튜디오)은 “도시 정원의 유형과 디테일”이란 제목 하에 구체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어떤 방식으로 디자인을 풀어나가는지를 찬찬히 소개했다. 마치 원래 그러한 지형이었던 것처럼 보이는 사진 속 정원의 모습이 섬세한 지형 조작을 통해 완성되었다는 설명에서는 디테일의 중요성이 달리 보이기도 했다. 우현미 소장(디자인 알레)은 다채로운 오브제를 갖춘 쇼룸, 실내외 조경, 플라워 & 인테리어 데커레이션, 디스플레이 등 복합적인 디자인 솔루션을 제안하는 디자이너답게 현대백화점 옥상 정원을 비롯한 독특한 상업 공간 정원 사례를 소개했고, 김아연 교수(서울시립대학교)는 “네 개의 정원, 두 개의 질문”이란 타이틀로 개인 정원과 공공 정원(하나는 전시회)을 디자인하면서 각각 맞닥뜨렸던 근본적인 질문 두 가지를 던졌다. ‘당신이 꿈꾸는 자연은 무엇입니까’는 “통제 가능한 자연과 야생의 거친 자연”을 원했던 각기 다른 개인 정원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며 마주했던 물음이고, ‘당신에게 자연은 어떤 의미입니까’는 한 사람의 꿈보다 여러 사람에게 의미 있는 자연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디자인한 공공 정원 작업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안계동 대표(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는 한옥 정원 한 곳과 가든 카페 한 곳을 디자인했던 경험을 나누어주었다. 특히 제대로 된 한옥 정원 사례가 많지 않은 상황이기에, 그가 소개한 율수원 디자인 과정은 그 의미가 더 커보였다. 또 사옥 1층을 가든 카페로 디자인한 사례는, 자신이 디자이너이자 클라이언트였기에 가능했던 여러 가지 디테일 실험이 흥미로웠다. ‘화무십일홍’을 늘 마음에 새기며 작업을 한다는 조혜령 소장(정원사친구들)은 “식재 계획시 꽃의 화려함만을 고려하는 것은 어리석다”며 정원의 즐거움이 시각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 후 자신만의 ‘정원 문화 사용법’을 들려주었고, 최윤석 대표(그람디자인)는 이제 국내에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쇼가든에 얽힌 경험담을 전했다. 가장 대표적인 과일인 사과의 경우, 사람들이 사과 열매는 잘 알아도 정작사과나무를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어서 쇼 가든에 일부러 포함시켜보았다는 이야기를 비롯해 색다른 아이디어와 접근방식에 시선이 쏠렸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든과 힐링은 같지 않다. ‘가드닝’과 힐링이 같다”는대목을 힘주어 강조했다. 심포지엄이 끝난 후 코리아가든쇼를 둘러보는 내내최윤석 대표가 이야기한 “정원은 늘 우리 곁에 있던 것이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 남기준
  • 나무는 삶의 무늬다 고규홍의 ‘우리나라의 특별한 나무 이야기’
    나무를 매우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비로 수목원을 세우고 증권사를 다니며 번 돈으로 나무를 세심하게 돌보고 관리했다. 수목원이 커지면서 관리에 많은 노력이 투입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가 고수한 세 가지 원칙이 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는다(현재는 생육을 위한 최소한의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 농약을 치지 않는다. 이는 모두 나무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고 식물의 생육 환경을 좋게 해주기 위함이었고, 그만큼 나무를 사랑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그가 특별히 아낀 나무가 있었다. 벌컨magnolia vulcan 이란 이름의 목련이다. 수목원의 모든 나무를 사랑했지만, 벌컨은 꼭 한 번 더 들여다보고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던 그가 2000년 암 선고를 받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무슨 조화인지, 그 해 벌컨은 꽃을 피우지 않았다. 푸른 눈의 한국인 고 민병갈 원장과 벌컨의 이야기다. “나무는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생명체다. 내가 없으면 그가 없고, 그가 없으면 내가 없다.” 지난 4월 24일 삼성에버랜드 디자인 그룹의 렉처 시리즈 강연자로 나선 고규홍 교수는 민병갈 원장과 천리포수목원 내 수목의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고 민병갈 원장의 나무 사랑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벌컨이 꽃 피지 않았다는 일화는 아는 이가 드물다. 신비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때 고 교수는 “전설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인문학이란 사람이 삶의 무늬를 찾아가는 것이다. 삶의 무늬를 가장 잘 간직한 것은 나무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은 사라지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나무의 결에 그대로 살아있다.” 나무가 사람의 흔적을 일러주는 화자임을 강조한다. 마치 옛날이야기를 전해주는 할아버지를 대하는 듯하다. 고규홍 교수는 기자 생활을 그만둔 이후 16년 동안 사람의 이야기를 간직한 큰 나무를 찾아 다녔다. 나무와 살았던 사람살이의 무늬가 남아있는 나무를 찾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쓰고 사진으로 남겼다. 자주 찾아와서 바라보던 사람이 오지 않아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나무 이야기는 그중 하나다. “사람 사는 곳 어디라도 나무가 없는 곳은 없다”면서 그가 전한 또 다른 이야기는 나무를 보는 관점을 달리하게 했다. 가족에게도 버려진 한센병 환자의 외로운 마음을 받아준 소록도 솔송나무(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와 사람의 손길이 닿자 꽃을 피웠다는 전곡리 물푸레나무(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이야기가 그랬다. 특히 전곡리 물푸레나무는 고규홍 교수가 천연기념물 지정에 기여한 나무로 손꼽히는데, 일화가 하나 있다. 이곳은 6·25 전까지 마을을 형성하고 물푸레나무를 당산나무로 모셔 당산제를 지냈다. 이후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면서 마을이 사라졌고, 물푸레나무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고 교수가 이 나무를 찾았고, 2003년 문화재청에 보호를 신청해 2005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근처에 거주하던 할머니 증언에 따르면 수십 년 동안 이 나무는 2004년과 2006년 딱 두 번 꽃을 피웠다고 한다. 하나는 사람이 나무에게, 하나는 나무가 사람에게 마음을 표현한 사례다. 서로 교감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관계를 통 한 상호작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나무를 교감의 존재로 대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마 대부분 배경으로 인식하고 지나칠 것이다. 한 나무를 지키려 전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주변의 나무가 조금은 달리 보일지 모르겠다. 용포리느티나무(경상북도 상주시 낙동면) 이야기다. 이 마을에는 15가구의 노인들이 살고 있는데, 팔려갈 처지의 당산나무를 지키기 위해 몇 년에 걸쳐 투쟁하고 결국 나무를 사 공동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중 돈을 꾸어 나무 구입에 보탠 사람도 있는데, 고규홍 교수가 마을 사람들에게 그렇게까지 나무를 지키려 한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우리 삶의 기반을 지키기 위해 돈을 꾸러 다니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다. 당산나무를 지키는 건 우리 조상의 얼을 지키는 일이다.” 그 나무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은 새로운 무늬를 그리며 살고 있다. 고 교수는 사람처럼 나무도 말을 한다고 강조한다. 다만 사람이 듣지 못할 뿐이다. 그는 나무가 전하는 말을 해석해 이야기로 풀어내고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나무는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그’ 안에 들어서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오던 이가 사라지자 꽃을 피우지 않은 목련, 누군가 찾아가니 꽃을 피웠던 물푸레나무, 그리고 나무에서 위안을 얻은 사람들과 모든 걸 바쳐서라도 나무를 지키려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나무는, 그리고 이 나무들에게 사람은 교유交遊의 대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 어쩌면 누구나 나무와 교유의 순간이 있었는지 모른다. 가만히 돌이켜볼 일이다. 고규홍 교수의 ‘나무 이야기’는 나무주변에 그려지는 삶의 무늬를 담고 있다. 고규홍 교수는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출판사를 거쳐 10년간 중앙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이후 큰 나무를 찾아 전국을 돌며 사진과 글로 세상에 알려 왔으며, 솔숲닷컴(www.solsup.com)을 통해 ‘나무 편지’를 발행하고 있다. 다수의 방송으로 나무 이야기를 전해왔고, 저서로는 『이 땅의 큰 나무』를 시작으로 『나무가 말하였네』, 『한국의 나무 특강』 등이 있다. 그가 소개한 나무의 다수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천리포수목원 감사로도 활동 중이며, 현재 인하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하고 있다.
  • 참여의 마당 꿈꾸는 용산 국가공원 ‘국민이 만들어가는 용산공원’ 주제로 전문가 세미나 개최
    국토해양부(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는 지난 2012년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를 실시했다. ‘치유’라는 콘셉트로 공모에 당선된 West8과 이로재의 “Healing: The Future Park”를 바탕으로 후속 설계가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국회의 예산 전액 삭감으로 기본설계 진행에 차질을 빚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5월 21일 용산공원추진기획단과 한국조경학회가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국민이 만들어가는 용산 국가공원’이라는 주제로 ‘용산공원 전문가 세미나’를 개최했다.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를 통해 채택한 마스터플랜이 난항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시민참여 방법과 전략, 현실적 대안 제시와 제도화 방안을 논의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다. 집단 지성 발휘해 창의적인 공원으로 “대중의 지혜는 전문가의 지식보다 더 정확한 답을 이끌어낸다” 김영민 교수(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는 영국의 유전학자인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의 말을 인용하며 대중의 지혜를 강조했다.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에 위치한 수퍼킬렌Superkilen을 예로 들었다. 덴마크에서 이민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에 조성된 이 공원은 고향 국가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나타내고 싶어 하는 시민들의 적극적인 아이디어 개진으로 이국적이면서도 창의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김영민 교수는 “수퍼킬렌 공원 조성 과정에서 적용된 시민들의 아이디어가 어떻게 보면 너무 직설적이고 유치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것들이 모여 있을 때 다양성을 드러내기도 한다”며 “단순한 상징적인 시설물만으로도 주민들은 이 공간이 자신의 공간이라고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용산공원 설계 국제공모 출품작들이 제시한 ‘마당’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에서 시민참여를 이야기했다. 용산공원 부대 시설을 모두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부분적으로만 해체해 시민들이 창의적이고 생산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마당’으로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다. 홍윤순 교수(한경대학교 조경학과)는 국제공모에서는 당선을 위해 도시 스케일을 넘는 힘이 들어간 계획안이 많았다고 평가했다. 그는 “거시적인 마스터플랜이 조금 와해되고 있는 처지에서 중간 단계의 임시 공원을 중심으로 어떻게 세부적으로 발전시킬까 하는 점이 세부적인 마당이나 주민참여와 연결되어 조금 더 정교하게 모색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마당’은 전기나 수도와 같은 초기 인프라를 갖춘 공간이기 때문에 이용자에 따라 창의적으로 응용되어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융통성 있고 창의적인 공간의 조성에 관해서 한창섭단장(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은 6개 단위 공원에서 생태 중심의 공원으로 용산공원 조성의 기본 방향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융통성을 주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6개 단위공원으로 조성하게 되면 각각의 단위공원 개념에 맞춰 공간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전체적으로 공모 당선작의 개념은 받아들이되 생태 중심 공원으로 단일화시켜서 거기에 필요한 스포츠 시설이나 생태 습지 등 여러 가지를 만들어서 조금 더 융통성 있게 바꾸는 것이지 구체화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대형 공원 조성 시 시민참여 사례와 교훈’에 대해 발표한 민병욱 교수(계명대학교 생태조경학과)는 밀레니엄파크, 다운스뷰 파크, 서울숲, 센트럴 파크를 예로 들며 시민참여의 다양한 형태를 소개했다. 그는 “용산공원의 규모와 성격, 한국의 실정을 고려할 때, 국가가 주도하되 민간 파트너십으로 민간의 영역을 키워서 대등하게 이끌어갈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민간 참여 전략으로는 세제 혜택과 제도적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제시했다. 참여란 소통이다 세미나에 참여한 발표자와 토론자들은 용산공원 조성과정에 시민참여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입을 모았지만, 구체적인 시민참여의 범위와 형태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기도 했다. 안상욱 단장(LH공사)은 “미군 기지의 이전 시기와 범위가 유동적인 상태이다 보니 문체부, 국방부 등 다른 중앙부처와 의견 조율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라며 용산 전체의 재생이란 틀에서 기초를 다지려면 행정 실무 협의회가 우선으로 구조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영민 교수는 “시민단체들의 목소리는 과연 시민 전체를 대변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며 “어떻게 보면 시민단체들은 특정 목적을 가진 경우도 있어서 공원을 이용하는 불특정 다수의 의견은 어떻게 개진하나 이런 부분을 고민했다”고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김연금 소장(조경작업소 울)은 “시민참여를 도구가 아닌 과정으로 봤으면 좋겠다”며 “전문가와 시민을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소통이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둘은 구분되고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소통하는 대등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전문가와 시민의 관계를 함께 공동선을 추구해야 하는 관계로 본 그의 의견은 현재 용산공원 조성계획이 난항을 겪는 상황에 비춰볼 때 시사점이 크다. 미군기지 이전 계획변경, 신분당선 조정 등 용산공원 조성에 있어서 가장 큰 장벽들은 사실 전문가와 시민이 함께 소통으로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한배 회장(한국조경학회)은 “설계자가 시민을 고려해서 하는 설계도 시민참여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참여의 개념을 넓게 확장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용산공원은 국제 설계공모를 통해 이미 큰 그림이 마련되었고 설계자도 정해져 있는 상황이지만, 여타의 공원과는 상황이 무척 다르다. 미군기지의 이전 시기와 범위, 신분당선의 조정에 따른 교통문제, 침수에 대비한 물관리체계 수립 등 여러 문제들이 쌓여있다. 또한 국민 참여는 완공 이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폭넓게 추진되어야 할 과제다. 서울의 심장부에 있으면서도 외국군 주둔의 역사로 인해 ‘미지의 땅’으로 인식돼오던 용산 미군 기지가 아픈 역사 위에서 새 시대를 여는 공원으로 탈바꿈하기위해서 공공기관과 민간의 지혜로운 소통이 필요한때다.
    • 조한결
  • 미디어로 말하는 도시 도시를 살리는 ‘소통’ 세미나
    통섭의 시대다. 대화와 소통이 더욱 중요해졌다. 미디어는 사람과 사람, 영역 간 소통의 매개체로 역할을 해왔는데, 전통 미디어의 신뢰 하락과 기기의 발달로 뉴미디어가 확산되고 공동체 미디어가 다변화하면서 그 지형이 변하고 있다. 미디어 홍수 속에서 각각의 미디어들은 ‘소통’이라는 키워드를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고 있다. ‘도시’의 문제도 공간을 넘어 다른 이슈들과 함께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미디어를 통한 ‘소통’은 많이 이야기 되고 있지만, 정작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지는 ‘도시의 소통’에 대한 고민은 얼마나 되고 있는가? 그리고 누가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것인가? 지난 5월 9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열린 “도시를 살리는 ‘소통’ 세미나”에서 전상인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가 던진 물음이다. 도시와 소통, 두 키워드가 만났다. 서울대학교 환경계획연구소와 서울연구원은 최근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문제들을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닌, 도시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로서 총체적 관점에서 진단하는 세미나를 주최했다. 이창현 원장(서울연구원)은 최근 화두로 떠오른 ‘안전’을 상기시키며 포문을 열었다. “도시는 살아있는 유기체다. 현대 도시는 아주 복잡하고 기계적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몸과 같이 도시도 막힌 곳이 없이 잘 소통해야 건강하고 시민이 안전하게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소통’이라는 키워드를 살림으로써 도시가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에 세미나에서는 전통 미디어와 뉴미디어, 공동체 미디어, 공공 환경, 그리고 시각적 측면에서 미디어의 모습 등 ‘소통’의 수단을 다각적으로 진단했다.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5인의 주제 발표 이후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소통을 위한 자리인 만큼 토론에 보다 비중을 두고 플로어와 패널의 대화에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미디어 전문가 3인과 공간을 다루는 전문가 2인으로 발표자가 구성됐다. 실체가 없는 미디어와 공간이라는 주제를 함께 다루다 보니 하나의 맥락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문제 해결의 방안으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거론되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차재영 교수(충남대학교 언론정보학과)는 “미디어가 자본과 국가에 의해 독점되는 상황에서 공동체 미디어를 그 대안으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전통 미디어가 특정 계층이 전담하는 일방향 체계였던 데 반해 공동체 미디어는 일반 시민의 참여를 원칙으로 하는 쌍방향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차 교수는 공동체 미디어가 “주민들의 관심과 요구에 부응하여 지역 사회에 관한 질 높은 정보를 제공하고,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공론장 역할”을 함으로써 지지를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종혁 교수(광운대학교 미디어영상학부)는 도시 속 불통의 결과를 해소하는 데 디지털 사이니지digital signage가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교수는 “도시의 소통은 사람들이 일상 속에서 지나치던 잠재된 문제를 발굴하고 그것을 일깨워 줌으로써 자발적으로 문제의식을 고취시켜 주어야 한다”면서, “도시 인프라와 기술의 접점에 놓여있는 디지털 사이니지의 활용은 수용자의 능동적 참여를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경진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는 시각적 커뮤니케이션 관점으로 도시를 바라보고 도시의 시각 미디어 환경인 동영상 전광판을 사례로 이야기를 풀었다. 조교수는 “온갖 시각 정보로 채워진 도시 경관에서 사유와 소통을 위한 여백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면서, 시민들이 미디어 환경 속에 놓여 일방적으로 무의미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시사했다. 반면 동영상 전광판이 공동체 커뮤니케이션 플랫폼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수용하려는 변화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원재 소장(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도 비슷한 시각에서 소통의 수단이 사유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소장에 따르면 도시는 일방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고 그 대표적인 것이 광고인데, 이는 정보 전달의 사유화로 흐른다. 공간과 미디어의 역학 관계 전상인 교수는 한국의 플래카드 문화를 비판했다. 플래카드의 난립으로 도시 미관이 오염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플래카드 설치가 불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시민들이 이를 당연시 여기고 지나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원재 소장은 이를 절박함의 표현으로 해석했다. 플래카드 문화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 하지만, 도시에 담긴 사회적 현상을 파악해 보면 시민들의 절박함이 드러나는 것이 플래카드이기에 이를 비판적으로만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라도삼 실장(서울연구원 미래사회연구실)도 이에 동의했다. “압축된 공간에서 한정적인 소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노력의 결과가 플래카드 문화”라면서,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도시의 소통 문제로 귀결되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미디어의 문제로도 연결되는 현상이라고 풀이했다. 미디어와의 관계에서 도시의 물리적 측면을 살펴보면 또 하나의 쟁점이 발생한다. “도시를 아무리 멋있게 조성해도 시민들이 보지 않는다”(이재현,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점이다. 토론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발언들을 접할 수 있다. 조경진 교수는 “지구 어디서나 정보 소통이 실시간으로 가능해졌고 시공간의 압축을 넘어 시공간의 소멸이 진행되고 있다”며, “디지털 미디어가 도시 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고, 디지털 미디어의 침투는 물리적 공공 공간에서도 가속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미디어와 공간 간의 역학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컴퓨터의 발달과 함께 외부 활동이 축소되었다는 건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스마트폰의 발달로 미디어가 외부 활동과 공간에 미치는 영향이 가속화되었다는 게 발표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라도삼 교수는 SNS를 통해 미학적 공간을 찾고, 장소 읽기의 수단으로 미디어가 활용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김찬호 교수는 사람들이 “꽃을 보고 감동하지 않고, SNS에 올리고 관계하면서 그때서야 감동하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공간과 미디어 그리고 관계성에 대해 새롭게 짚어볼 것을 요구했다. 조경진 교수는 미디어를 통해 장소에 관심을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는데,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는 “장소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에 서울의 ‘동네 문화’가 활기를 띠도록 공간을 다루는 사람들이 역할을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상인 교수가 서두에 밝혔듯이 세미나의 배경에는 분야의 절박함도 있다. 참석자들이 도시와 미디어의 위기 의식을 가지고 공론화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도시를 살리는 ‘소통’, 그 후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미디어 지형과 도시의 모습, 그 변화에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