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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이 설계하는 법] 연필을 놓는 법
    19 불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의 멋진 점은 제목과는 다르게 역설적으로 소설 속에서 불멸이 배제된다는 것이다.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첫 번째 주인공의 얘기가 한참 전개되고 있을 때 주인공의 주변을 스쳐 지나간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배경 인물이 다음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며, 소설은 그 사람의 관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포함한 세 개의 연작 중편은 여러모로 쿤데라를 연상시킨다. 한강이 인정하건 아니건 ‘몽고반점’과 ‘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쿤데라에게 바치는 일종의 오마주처럼 보인다. 물론 쿤데라조차도 에리히 레마르크의 영화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한 수 배운 것처럼 보이지만 말이다. 그들은 하나 같이 인생의 본질은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며, 또 모두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불멸』에서 우리로 하여금 무한한 애정을 갖게 만든 여자 주인공은 소설 중간에 (자살을 시도하는 어떤 멍청이 때문에) 뜬금없이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는다. 쿤데라의 다른 소설에 붙여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제목은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에 붙였어야 했다. 또 다른 주인공이며 여자 주인공의 아버지이기도 한 남자는 죽음을 앞두고 자신과 관련된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자신의 물건, 자신에 대한 기록을 포함하여 자신을 기억하게 할 만한 모든 것들을 모조리 없애기 시작한다. 자신이 죽었을 때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고 말이다. 쿤데라는 이 주인공을 통해 어차피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니 그럴 바엔 아예 기억되지 않는 것도 가치가 있다는 점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이건 우리의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지독하고 잔인한 페이소스기도 하다. 하지만 이 터무니없는 페이소스가 이렇게 마음에 와 닿으니 참 터무니없는 일이다.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몇천 년을 버텨왔으니 앞으로도 영원할까. 앞으로 잘하면 몇백 년, 더 잘하면 몇천 년 갈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다. *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진양교는 서울시립대학교 조경학과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환경조경학과,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 조경학과 및 도시지역계획학과에서 공부했으며, 강원대학교와 서울시립대학교에서 10여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2년부터 CA조경기술사사무소를 열고 실무의 최전방을 절절하게 체험하고 있다. 2010년 봄부터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의 전임교수를 겸하고 있다. 주요 설계 작품으로 하늘공원, 한강 반포공원 등이 있으며, 저서로 『기억과 상징으로의 여행』, 『건축의 바깥』 등이 있다.
    • 진양교[email protected] / CA조경기술사사무소 대표,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교수
  • 대통령기록관 Presidential Archives
    기록을 담는 소중한 상자세종시 중심행정타운의 호수공원 가까이에 위치한 대통령기록관은 시민들의 문화 공간이다. 2015년 4월 16일 1단계 준공을 마친 대통령기록관은 2단계 내부 전시 준공을 완료한 후, 2016년 1월 14일 시민들에게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대통령기록관은 세종시 문화 벨트의 중심 공간으로 공원과 호수가 만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위치의 중요성과 역대 대통령을 기념하는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구상이 필요했다. 이 같은 의도를 반영해 덕에 감싸인 기록관, 국새國璽를 소중히 감싸는 보관함이라는 의미를 지닌 호수 변 언덕이 탄생했다. 호수를 향한 언덕‘대통령의 언덕’이라 명명한 언덕은 호수 조망을 위한 최적의 장소다. 불규칙하지만 방향성 있는 포장을 통해 자연스럽고 다양한 이용을 도모한 오픈스페이스다. 진입부의 급경사면에 계단과 잔디 스탠드를 설치해 활용성이 높은 공간으로 만들었다. 언덕 상부에는 교목 식재를 하지 않았는데, 이는 국새인 대통령기록관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외부 환경, 개방감 있는 경관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인 사항이었다. 또 다른 상징 요소로 초대의 마당(진입 광장)에 거울연못을 계획했는데, 기술 제안 과정에서 삭제되어 아쉬움이 남는다. 조경 설계조경설계 이화원건축 설계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시공대림건설발주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위치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진의리 848면적28,000m2완공2016. 1.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양성희는 경원대학교(현 가천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한 이후 스무 해가 넘는 현재까지 조경 설계라는 길 하나만 바라보며 걸어왔다. 모아조경과 서인조경 등에서 다수의 프로젝트를 수행했으며, 2011년부터 조경설계 이화원의 이사로 합류했다. 이화원의 프로젝트 디렉터로 설계 지식과 정보의 공유, 동료들과의 교감을 바탕으로 상생의 결과를 지향해 왔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영인산수목원, 대통령기록관, 국립세종도서관 등이 있다.
    • 양성희 / 조경설계 이화원
  • 와이시티 공원 & 광장 Y City Park & Square
    기부채납 부지의 새로운 시도그동안 기부채납 부지는, 만들어서 넘기는 입장에서는 사비의 절감이, 넘겨받는 입장에서는 유지·관리 비용의 최소화가 목표였고 이러한 상호간의 암묵적 동의는 흔히 질 낮은 공공장소의 양산으로 이어져왔다. 이에 비해 일산 와이시티는 한 블록 안에 아파트(2,400세대), 쇼핑몰, 오피스텔 등이 들어서는 복합 개발인데, 기부채납 광장과 공원의 경우 각각 쇼핑몰과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발주처에서 단지의 얼굴로 인식하고 특화에 의지를 가지게 된 경우다. 오피스박김은 광장과 공원에 대한 개념·기본·실시설계의 전 정과 주거부, 쇼핑몰 외부 공간에 대한 개념 제안을 행했다.신도시 개발 전 일산은 낮은 구릉과 논밭이 혼재한 지형이었는데 지금은 이러한 땅의 역사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광장과 공원을 통해 그 공간감을 재현하고자 했고, 도시 문화 활동의 장이 될 수 있는 공공장소로 일 수 있기를 바랐다. 광장: 장소로서의 계단설계 초기 와이시티 광장은 지구단위계획상에서 백석역과의 연결 통로를 만들 것이 권고된 상태였다. 이는 광장이 선큰화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했고, 우리는 옛 일산 지형에 있었던 계곡과 같이 길고 완만하게 지하로 연결되며 그 경로 자체가 공공장소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선큰 광장을 만들고자 했다. 설계오피스박김건축 구조황경주토목 구조세나투스시공요진건설산업발주요진개발위치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백석동면적66,137m2완공2016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 부산물만골벙커 국제 아이디어공모 설계공모 경과와 심사평 INTERNATIONAL IDEA COMPETITION FOR BUSAN MULMANGOL BUNKER REGENERATION
    부산 황령산자락 물만골에 자리한 ‘부산물만골벙커’는 일제강점기부터 동굴의 형태로 전쟁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1968년 군 작전 시설로 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계속 방치됐다. 최근 부산시는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서 벙커 재생 사업의 행정적 지원을 추진 중이었고, 지하 벙커와 그 일대의 대지를 소유하고 있던 경동건설은 지하 벙커와 지상 대지의 연계 개발을 계획했다.지난 3월 부산국제건축문화제조직위원회의 주관으로 ‘부산물만골벙커 국제아이디어공모’가 개최되었고 8월 15일 공모 결과가 발표됐다. 1등작에는 다비데 디 프란코Davide Di Franco와 누리아 베르날 리베라Nuria Bernal Rivera의 ‘더 리본, 오가닉 컬처 파크The Ribbon, Organic Culture Park’가 2등작에는 주디 청Judy Cheung의 ‘마운틴 오브 컨템퍼러리 아트 부산Mountain of Contemporary Art Busan’이, 3등작에는 미하엘 에프레모브Mihael Efremov의 ‘케이브 타운Cave Town’, 프란시스 우Francis Wu의 ‘라이프스타일 리제너레이션 LifestyleRegeneration’, 헤수스 헤르난데즈Jesus Hernandez의 ‘오픈 벙커Open Bunker’가 선정되었다.부산물만골벙커는 재개발 중인 고층 아파트 단지, 부산 시청, 저소득 밀집 주거지인 ‘물만골마을’ 등이 있는 접근성이 좋은 도심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벙커를 부산의 독특한 명소로 만들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요구됐다. 주변 쇠퇴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고 경제적인 면의 타당성도 고려해야 한다. 개미굴처럼 얽힌 구조, 연간 평균 온도 12.9˚C 등 벙커가 가진 독특한 장소성의 고려 유무도 중요한 평가 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황령산 정상의 봉수대, 전망대 등의 관광 자원과 자연환경을 적절히 연계 및 활용한 계획안을 제시해야 한다. 한편, 공모 발주처인 경동건설은 기본적인 검토와 추후 논의를 거친 뒤 당선자와 함께 실시설계를 진행할 수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다음은 ‘부산물만골벙커 국제아이디어공모’의 심사평을 요약·정리한 내용이다. 전체적으로 콘셉트나 메시지가 강한 전달력이 있는 작품이 많지 않아 아쉽다. 특히 벙커의 활용에서 출발한 공모임에도 불구하고 벙커에서 유래한 개성 있는 콘셉트의 제시가 다소 미흡했다. 주변 자연환경의 생태성이나 경관성을 향상해 지하 공간을 외부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프로그램의 제시나 조형적인 시도도 부족했다. 프로그램의 창의성과 생태적 환경성, 단계적 개발 가능성과 실행성 측면에서 완결성을 갖춘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다. 이것은 본 프로젝트의 입지와 맥락이 갖는 한계 그리고 아이디어 공모에서 나타날 수 있는 근본적인 한계일 수 있다. 1등작역동적인 자연 경관 기반 시설을 표현한 작품으로, 산꼭대기를 둘러싸는 건물과 동선을 계획했다. 땅의 풍경과 문화 프로그램이 벙커를 연결하고, 도시를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제공하면서 천연 대지의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스템을 제안하고 있다. 건축 개발 과정이 다이어그램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추후에는 프로젝트를 단순화하여 ‘리본’이라는 개념에 접근하는 방법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2등작참신한 개념과 아름다운 형태를 보여주는 계획안이다. 가장 단순한 접근 방식으로 벙커와 산을 개발해 문화 명소를 제안했다. 열린 튜브 형태의 구조물 하나가 산을 관통하며 ‘겸손한 존재감’을 표현한다. 이 구조물은 중요한 기반 시설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도시를 조망할 수 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자연 경관에 대한 고려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간과 야생 동물, 식물을 위해 다양한 대지의 특성에 주목했다면 더 좋은 안이 되었을 것이다. 주차 및 전망 탑은 도발적이지만 대지에 전반적으로 적용된 최소주의와는 정반대의 접근 방법을 취하고 있다. 3등작‘케이브 타운’은 아름다운 개념과 도면을 보여준다. 이 계획안은 기존의 주거 유형에서 형태적 전략을 끌어와 발전시켰다. 하지만 산의 절반을 없애야 하기에 자연환경에 미칠 영향이 우려됐다.‘라이프스타일 리제너레이션’은 산이라는 대지 조건에 가장 감각적으로 접근했다. 이 같은 접근 방식의 바탕을 이루는 도시와 기반 시설에 대한 생각 또한 훌륭하다. 벙커 입구에 제안된 극장과 한국 전통 탈 전시장 프로그램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파빌리온의 형태와 재료에 대한 전략이 다소 임의적으로 느껴져 아쉽다.‘오픈 벙커’는 아름다운 도면과 벙커의 발전 과정을 보여준다. 프로젝트를 브랜드화하고 사용자가 쉽게 이해하게 만드는 아이디어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막혀 있는 벙커의 체계와 반대로 열린 벙커를 개발한다는 접근 방안도 강력하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접근 방식이 결과적으로 산의 생태계를 크게 파괴할 수도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도시적인 전략을 더 발전시켰다면 좋았을 것이다.
  • 서울 앉기, 서로 알기 2016 공공디자인 공모전
    지난 8월 4일, 서울시 도시공간개선단에서 ‘2016 공공디자인 공모전’의 수상작을 발표했다. ‘2016 공공디자인 공모전’은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의 외부 공간에 설치할 벤치를 ‘서울 앉기, 서로 알기’라는 주제로 디자인하는 시민 공모전이다. 공간을 재해석한 창의적인 시설물을 통해 소통이 있는 활기차고 즐거운 도시 공간을 만드는 것이 이번 공모전의 목표였다. 대상을 수상한 나석영의 ‘마주하는 집’은 길음2동 주민센터를 배경으로 협소한 외부 공간을 활용했다. 좁은 도로와 보도 없이 바로 맞닿아 있어 주변 공간이 부족한 주민센터 외벽에 배관 파이프로 집 모양을 형상화한 벤치를 설치하여 주민의 작은 쉼터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단조로운 건물 외관을 개선하고 주민센터의 친근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면서도 보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협소한 공간을 창의적으로 활용했다. 금상에는 윤소희, 김한슬의 ‘작지만 다양한’과 황도일의 ‘단지 의자’가 선정됐다. ‘작지만 다양한’은 주차장과 보행로 간의 구분이 모호하고 협소한 용답동 주민센터의 외부 공간에 보행 영역을 구분해줄 수 있는 트렐리스형 벤치다. 가벼운 프레임에 접이식 벤치를 설치해 보행 통로, 정원 같은 휴식처, 전시 및 교류 공간 등으로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단지 의자’는 전통 한옥으로 지어진 혜화동 주민센터에 어울리는 장독을 콘셉트로 했다. 누구나 앉아 보고 싶은 친근한 장독 단지 의자가 고풍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긴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은상 4작품, 동상 7작품, 장려상 15작품, 입선 20작품 등 총 49점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시상식 및 전시회는 9월 21일부터 9월 29일까지 서울시청 본관 1층 로비에서 개최된다. 수상자에게는 서울특별시장상과 함께 대상 5백만 원, 금상 2백만 원, 은상 1백만 원, 동상 50만 원, 장려상 30만 원, 입선 20만 원의 상금이 수여된다. 서울시는 수상작을 실물로 제작하여 시민들이 직접 앉아보고 경험할 수 있도록 전시하고 작품집과 매뉴얼을 제작하여 자치구 및 산하사업소에 배포할 예정이다. 또한 전시회에서 시민의 의견을 수렴해 활용도가 높은 작품은 추가로 제작하여 주민센터에 설치할 예정이다. 수상작 및 수상자 명단은 ‘내 손안에 서울’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에디토리얼] 출판기피증
    짐작하건대 『환경과조경』에서 독자 여러분의 시간을 가장 덜 빼앗는 꼭지는 ‘워크 & 크리티시즘work & criticism’, 특히 외국 작품이 실린 지면일 것 같다. “그냥 사진발 아닐까?” “페이스북 링크에서 두 달 전에 이미 본 건데?” “설계비 제대로 받을 수 있고 공사비 넉넉해서 좋은 재료 쓸 수 있으면, 설계자가 합리적인 조건으로 감리까지 할 수 있으면, 우리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뭔가 다르고, 근사하네! 다음에 시간 날 때 제대로 읽어보자.” 적지 않은 독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며 작품 지면을 빛의 속도로 넘기실 것이다. 작품을 설명하는 텍스트를 정독하는 독자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환경과조경』 리뉴얼을 기획하던 3년 전 가을, 가장 큰 혁신이 필요한 지면은 작품 꼭지라고 많은 사람이 입을 모았다. 사진의 질을 높인다, 해외와 국내 작품의 비율을 잘 조율하는 건 물론이고 국내 작품을 적극적으로 발굴한다, 사진만 나열하는 화보식 구성을 극복하고 가급적이면 비평을, 아니면 설계 노트나 인터뷰라도 함께 싣는다는 큰 편집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해외 작품의 비율을 낮추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조경 전문지가 국외의 최신 경향이나 디자인 쟁점에 지면을 할애하는 게 잘못된 방향은 아니다. 다양한 경로의 취재와 조사, 여러 단계의 검토 회의를 통해 양질의 외국 작품을 선정하려고 애쓰고 있다. 실은 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잘 알려진 유수의 세계적 사무소든 가진 거라곤 의욕밖에 없는 동구권의 신생 사무소든 대체로 해외의 조경설계사무소에서는 반응이 아주 빨리 오기 때문이다. 게재 의사를 타진하면 대부분의 경우 잘 정리된 텍스트, 저작권이 해결된 사진, 출판에 최적화된 도면과 그래픽 등이 한 묶음으로 며칠 안에 바로 날아온다. 작은 사무실이더라도 홍보나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를 따로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장에서 디자인이 크게 바뀌었어요. 초기 콘셉트와 완전히 달라져서 우리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워요.” “재하도 업체가 시공을 한 터라 완성도가 많이 떨어집니다.” “감리 계약을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니 설계 이후의 과정에 참여하기 어려운 실정이에요. 우리가 설계한 거라고 도저히 보기 어렵습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가 점점 터무니없어져서 결국 산으로 갔어요. 말도 하기 싫어요.” “이제 겨우 완공해서 식재가 아직 볼품없을 텐데요.” “준공 직후라 지주목이 나무보다 더 주인공이에요.” “관리가 안 되어서 엉망이에요.” 홍길동도 아니고 자기 작품을 자기 작품이라 부르지 못하는 상황, 근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국내설계사무소에 연락을 하면 흔히 들을 수 있는 하소연이다. 섭외 단계부터 녹록지 않다. 어렵게 섭외가 되더라도 게재까지 걸리는 시간이 해외 작품보다 서너 배는 더 길다. 작품 구하기부터 지난하다 보니 비평 의뢰는 말할 것도 없다. 조경설계사무소가 넘쳐나는 이 땅에 작업의 양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대부분의 조경가가 작품 게재를 꺼려하거나 기피하는 현상. 우선 시스템 상의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설계와 감리, 설계와 시공이 호흡을 함께 할 수 없는 제도적 여건 속에서 설계자의 의도대로 작품이 완성되기 어렵다. 잦은 설계 변경과 클라이언트의 비합리적 요구를 겪고 어렵게 실현해낸 작업이지만 만족스럽기 쉽지 않다. 적어도 수천 명의 손에 들릴 잡지를 통해 공개하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물론 겸양의 미덕이라는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잡지 편집자로서의 편향된 시각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조경가들에게 출판에 대한 마인드가 조금 부족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매체를 통해 작품을 출판한다는 것은 현재의 산물과 그 수준을 기록하고 공론의 영역에 소통시키는 과정의 첫걸음이다. 이런 거창한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출판은 홍보와 마케팅을 위한 아주 현실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출판에 신경 쓰고 정성 들이는 게 오히려 경제적이다. 열악한 설계 환경, 미비한 제도, 침체된 경기에 대처하기도 벅찬데 작품은 대체 뭐고 출판이 무슨 소용이냐는 반론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신세 한탄, 소모적이다. 불안감과 피로감을 확대 재생산할 뿐이다. SNS에 작품 이미지를 올리는 것처럼 즐겁게 『환경과조경』의 문을 두드려주시면 좋겠다. 『환경과조경』의 작품 지면은 일생일대의 역작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동시대의 실험과 성과를 함께 나누고 이야기하는 생산적 공간을 지향한다. 모처럼 이번 달에는 오피스박김과 이화원의 근작 여섯 개를 담는다. 지난 10년간 자신만의 설계 문법을 실험하고 구축해 온 그들의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시선이 오래 머무르기를 기대한다.
  • 국립세종도서관 National Library of Korea, Sejong
    행복도서관, 그 첫 장을 열다세종시의 호수공원에서 바라보면, 하얀 종이 한 장이 사뿐히 내려앉은 듯한 자태의 건물이 있다. 바로 2013년 말에 개관한 국립세종도서관이다. 설계가 진행되던 2009년에는 일명 ‘행복도서관’으로 불리던 프로젝트다. 건물의 곡선은 한국적이기도 하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다. 설계 당시 도서관은 아날로그 형태로 디지털을 수용하고, 감성까지 담는 감성 도서관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우리는 세종국립도서관을 세종시의 도시 브랜드와 정체성이 구현된 상징적 아이콘이자, 내외부가 연결되는 소통의 장으로서 사람과 정보가 상호 교류하는 체험 도서관으로 만들고자 했다. 대지의 기억과 풍경을 담다국립세종도서관은 중심행정타운의 도시축, 즉 세종시 중앙녹지공원으로 연결되는 상징적인 축에 있다. 이곳은 호수 변을 따라 자리한 대통령기록관, 정부세종컨벤션센터 등으로 이루어진 도시 문화 밴드 상에 있는 중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공시설의 외부 공간을 연계한다면 매우 의미 있는 장소가 될 것으로 보았다.세종시가 계획되기 전의 모습도 중요하게 고려했다. 옛길의 흔적은 거의 사라졌지만, 솔숲이 있는 언덕과 작은 연못을 설계에 반영했다. 또한 건축 설계팀과 협업해 건물의 매스를 들어 올려 건물과 지표면의 접점을 최소화했다. 이로 인해 외부 공간은 더 넓어지고 건물은 더 경쾌한 느낌을 갖게 됐다. 조경 설계조경설계 이화원건축 설계삼우종합건축사사무소시공대림건설발주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청위치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송담리 산4면적29,817m2완공2013. 12.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조경설계 이화원은 조경 분야를 중심으로 창의성에 기반한 디자이너 그룹이다. 복잡한 현상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도시와 자연의 조정자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국립생태원, 북서울미술관, 대통령기록관, 당인리발전소 공원 등이 있다. 문제 중심이 아닌 관계 설정의 관점으로 현상을 바라보며 시간, 공간, 문화 등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김이식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환경대학원에서 조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에 조경설계 이화원을 설립한 이후, 현재까지 다수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조경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꿈꾸며 앞으로도 설계가의 길을 걸어갈 계획이다.
  • CJ 블로썸 파크 CJ Blossom Park
    광교는 오피스박김의 소사小史에서 뜻깊은 도시다. 광교산 남쪽에 자리 잡은 신도시다 보니 도시계획으로 부지를 잘라 놓은 후 남게 된 산자락들이 구릉의 형태로 산재해 있고, 가장 환금적 생산성이 낮은 도시 프로그램일 수밖에 없는 근린공원들이 거의 모두 그 남겨진 산지에 위치해 있다. 산 위의 공원 열세 개의 기본 설계를 진행했던 우리가, 근린공원8호의 남쪽 경계와 닿아있는 약 30,000m2 부지에 CJ 통합연구소 랜드스케이프를 설계하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봄이었다. 광교지형술CJ 블로썸 파크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화학, 농업, 제약 등의 연구소를 한군데로 모아 시너지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는 그에 맞는 외부 공간을 설계함에 있어서 연구원들이야말로 신체적 활동에 비해 정신적 활동이 월등히 많은 직업군이라는 것과 연구소가 위치한 광교가 다른 어느 도시보다 지형적 맥락이 풍부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연구원들이 틈틈이 산책하며 휴식하고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미국의 유명한 몇몇 연구소처럼 광활한 대지의 ‘평면적이고 편평한’ 캠퍼스 형 연구소와 달리 본 연구소는 고밀도의 도시 안 협소한 부지 내에 많은 프로그램이 담겨야 하므로, ‘양감적이고 입체적인’ 외부 공간 조성을 의도했다. 광교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도시 속 구릉지들―혹은 신도시 조성으로 사라진 광교산의 작은 구릉 경관―은 우리가 주목한 주요 설계 문맥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첫째, 연구소 안으로 지형을 직접 끌어들여 ‘새로운 산세’를 만들었고, 둘째, 이를 확장하여 분산된 외부 공간을 ‘흐름의 공간’으로 통합했으며, 셋째, 이러한 지형들이 여러 시점에서 각각 다르고 다양하게 경험될 수 있도록 그 크기와 높낮이를 달리 조성했다. 여기에서 공간 경험은 건물 안에서 볼 때와 그 안에서 거닐 때 모두 마치 광교의 원지형처럼 깊고 서로 중첩되어 보이도록 했다. 조경 설계오피스박김건축 설계Yazdani Studio of CannonDesign(개념 및 기본설계), 희림건축(실시설계)시공(주)정한조경발주CJ제일제당위치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우만동면적35,319.5m2완공2016 *환경과조경 341호(2016년 9월호) 수록본 일부 박윤진은 하버드 GSD를 졸업하고 치치 지진메모리얼 국제설계공모 당선을 계기로 김정윤과 함께 네덜란드에서 오피스박김을 설립하였다(2004). 미국 보스턴 건축대학교 등에 출강하였고 타이완 쉬이첸 대학교(2007), 미국 하버드 대학교(2008, 2010), 오하이오 주립대학교(2011), 호주 멜버른 대학교(2012) 등에서 교육, 전시, 강연을 위해 초청되었다. 김정윤은 서울대학교와 하버드 GSD에서 조경학을 전공하였고, 네덜란드 조경건축사이며 바허닝엔 대학교에 출강하였다. 차세대디자인리더(산업자원부 2007), 광교신도시 공원디자인 커미셔너(2008), 서울형공공건축가(2011)로 선정되었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놀튼건축대학원이 선도적 조경가에게 수여해 온 글림처 특훈 교수(2011)로 임명되어 강의하였다.
  • [CODA] 술과 공원
    K의 남편 L에게 감사한다. 그가 밤낮으로 도면을 그리며 저녁 없는 삶을 보내는 바람에, 나는 L 대신 창경궁의 밤 풍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고궁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싶던 내 예상과 달리 창경궁 야간특별관람은 인기가 좋아서 난 번번이 예매에 실패했다. 예매에 성공한 부지런한 K는 어느 초여름, 나를 데리고 홍화문에 들어섰다. 제한된 인원만 예약을 받아 운영하니 붐비지는 않았다. 저녁 바람은 시원했고 길을 따라 세워진 미색 조명은 땅거미가 지는 고궁에 은근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연인들은 명정전을 배경으로 서로를 찍어주기 바빴고, 녹색과 푸른색 조명으로 빛나는 통명전에서는 고궁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여자 둘이서, 명정전을 지나 한창 공연 중인 통명전을 흘깃 보고 춘당지를 따라 걷다가 불 꺼진 대온실을 보고 돌아오니 산책은 금방 끝이 났다. 생각보다 심심한, 그런 풍경이었다. 무얼 기대했던 걸까. 다시 홍화문을 빠져나온 K와 나는 맥주나 한잔 하자며 원서동까지 걸었지만, 9시면 문 닫을 준비를 하는 조용한 북촌 동네에서 그날의 음주는 불발되었다. 사실 창경궁의 야간 개방 역사는 짧지 않다. 그렇다고 왕조 시대에 지엄한 궁궐을 개방했을 리 만무하니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고, 일제가 창경궁을 유원지 창경원으로 만들면서, 원내에 ‘사쿠라’를 대량으로 심었다. 매년 늘려 심은 벚나무가 자리를 잡아가자, 1924년부터 창경원에서 밤벚꽃놀이, 야앵夜櫻이 시작되었다. 봄이 되면 흰 꽃이 구름처럼 피고 지며 밤을 밝히는 풍경을 보기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창경원 야앵은 1945년 광복 때까지 단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매년 열렸다. 1920~30년대 창경원의 밤벚꽃놀이는 기자들의 단골 취재거리였다. 이번 휴일에는 얼마나 많은 입장자들이 몰렸는지,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어떤 새로운 조명 시설을 갖추었는지, 연예장에서는 또 어떤 공연이 펼쳐지는지, 그리고 곳곳에서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일들에 대한 개탄까지. 당시 창경원의 봄밤은 무질서와 향락, 일탈의 도가니였다. 야앵의 첫날밤. 20일 밤 7시 반 대경성의 지붕 밑에는 춘흥에 취한 무리들이 수백수천으로 떼를 지어 창경원으로 창경원으로! 꽃구경하러 밀려든다. 창경원 쪽 하늘을 바라보면 큰 불이 난 듯이 환한 화광이 하늘을 뻗찌르고 그 속에는 검은 하늘 산허리에 안개가 끼인 듯 밤 벚꽃은 흰데 찬란한 오색등이 열을 지어 꽃 속에 꽃을 피우고 흥에 겨워 미친 듯한 사람 떼는 물결을 이루고 있다. … 이 나무 밑에 춘흥에 취한 떼의 젊은이들이 잔디 위에 둘러 앉아 잔을 돌리는데 삐루는 거품을 내며 넘쳐흐른다. 요란스럽게 울려오는 축음기 소리에 장단을 맞추어 손뼉 치는 사람 엉덩춤추는 사람, 가고 오는 사람보고 웃는 사람까지 모다 취하여 버렸다.1 신문과 잡지 기자들은 난장판이 되어가는 창경원의 밤벚꽃놀이에 혀를 끌끌 차면서도 꾸역꾸역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대중잡지인 『별건곤』의 한 여기자는 퇴근 무렵 ‘야앵 첫날밤에 창경원에 가보라’는 편집국장의 명령을 받았다. “그저 구경을 하러 가라는 말은 아니겠고 무슨 기사를 얻어 오라는 말이겠는데 창경원 야앵 기사야 그동안 신문에서 잡지에서 신물이 나도록 우려먹지 아니했나? 그러니 그대로 평범한 꽃 이야기만 늘어놓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다지 신기한 것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2 80여 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퇴근 무렵 잡지사 풍경은 별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광복 이후에도 그런 창경궁의 밤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창경원의 밤벚꽃놀이는 1958년 재개되었고, 창경원이 다시 창경궁으로 복원되는 198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다. 해마다 벚꽃이 망울질 무렵인 4월 15일쯤부터 시작해서 약 한 달간 계속되는 창경원의 밤벚꽃놀이는 이제 40여년의 역사를 가진 시민축제라기보다는 온 백성의 축제인지도 모른다. 매년 높아가는 인기 속에 맞는 밤벚꽃놀이지만 “오색등에 조명된 벚꽃 아래서 조용한 봄밤의 정서에 젖어 본다”는 낭만은 요란한 고고 리듬이나 니나노 가락에 흥청대는 소란 속에 밀려나고 있고 놀랍게 번창하는 갖가지 바가지 상혼과 폭력 풍기 사범 등으로 한때나마 서민의 휴식처를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마음 아픈 일. … 요새는 10대 20대의 청소년들이 포터블 전축을 간편히 들고 들어와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고고춤의 일대 향연을 벌이고 있으니 세상은 많이도 변했다.3 광복 이후에도 갈 곳이 마땅치 않았던 서울 시민들에게 창경원은 대중적인 공원과 다름없었다. 벚나무 아래서 니나노 가락을 흥얼거리는 어르신들에게나, 음악을 틀고 고고춤을 추는 청소년들에게나. 일제의 강점에서 벗어난 지 30여 년이 넘었는 데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유원지에서 식민지 시대와 똑 닮은 모습으로 봄밤을 즐기는 모습을 떠올리면 서글프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그 창경원의 봄밤이 세파에 시달리는 서울 시민들에게 해방구 역할을 하지 않았나도 싶다. 사람들의 관성은 쉽사리 변하지 않는다. 얼마 전 서울시에서 ‘건전한 음주문화 조성에 관한 조례안’이 입법 예고되었다고 한다. 도시공원이나 어린이 놀이터, 그 밖의 서울시장이 지정한 장소에서는 술을 마실 수 없는 일명 ‘음주청정지역’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한강공원이나 얼마 전 개장해 인기를 누리는 경의선숲길도 역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버린 쓰레기나 밤이 되도 멈추지 않는 소음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하니 공원에서의 음주가무의 역사는 길고도 끈질기다.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공원이 우리의 해방구가 되고 있다는 의미인지 입맛이 쓰다.
  • [편집자의 서재] L의 운동화
    『L의 운동화』의 주인공은 실력을 인정받은 예술 작품 복원 전문가다. 이야기는 어느 날 그에게 운동화 복원 의뢰가 들어오며 시작된다. 복원함의 유리창 너머로 마주한 운동화의 고무 밑창은 거의 다 떨어져 나갔고, 손끝으로 건드리면 당장에라도 내려앉아 먼지가 되어버릴 것처럼 낡았다. 심지어 왼쪽 한 짝은 어디로 갔는지, 보관함에는 오른쪽 운동화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이런 낡은 운동화가 소중히 보관되고 있는 이유는, 운동화의 주인이 ‘L’이기 때문이다. 소설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L은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청년 이한열이다. 1987년 6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여했던 그는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았고, 현장에는 최루탄 냄새가 밴 오른쪽 운동화만이 남았다. 작년은 이한열의 28주기였고, 미술품 복원 전문가인 김겸 박사가 3개월에 걸쳐 운동화의 복원 작업을 진행했다. 책의 저자인 김숨은 김겸 박사의 연구소에서 복원 작업을 지켜보았고, 그 과정을 소설로 재탄생시켰다. 해외 작품을 소개할 때면, 번역에 애를 먹을 때가 있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1를 영어로 완벽하게 옮길 수 없듯이, 다른 나라의 언어에도 한국어로 대체할 수 없는 단어나 문장들이 있다. 결국 문장의 맥락이나 작품의 사진을 보고 유추해 적절한 단어를 고르게 된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했던 일인데, 시간이 흐를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과연 내가 고른 단어가 맞는 것일까. 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가치관이 정보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간에 쫓겨 섣부르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L의 운동화』가 느릿하게 그려내는 운동화 복원 과정이 내겐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주인공의 끈기와 깊이가 부러웠다. 소설은 총 271페이지인데, 그중 본격적인 복원 작업이 담긴 지면은 118페이지뿐이다. 전체 분량의 채 반도 되지 않는다. 그 나머지 페이지는 복원 작업에 들어가기 전 끊임없이 계속된 주인공의 고민과 생각들이 차지했다. 주인공은 자신이 운동화복원 작업의 적임자임을 알지만 의뢰를 받아들일지 말지 고민한다. 한참 후에야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한 뒤에는, L에 의해 운동화가 어떻게 변형되었을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L에게 척추 측만증이 있었다면 어깨가 평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울었을 것이고, 기운 쪽 발 운동화 밑창이 그렇지 않은 쪽 운동화 밑창보다 빠르게 닳았을 것이다”2 이어 그는 L이 걸을 때 왼발에 더 힘을 주었을지, 오른발에 힘을 더 주었을지 또 보폭은 어땠을지 생각한다. 그 이유는 “습관뿐 아니라 성격과 기질이 그 사람의 옷과 신발과 가방 같은 물건에 고스란히 기록된다는 것”3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L의 운동화는 단순한 신발 하나가 아니다. 과거 L의 친구였던 이는 편지로 “제 친구 M도, J도, L도, K도 R도 운동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L의 운동화는 저의 L의 운동화는 … ‘우리 모두’의 운동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4라고 말한다. 운동화에는 L의 모습이 담겨있으 며,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 당시 일어났던 사건을 넘어 L과 함께했던 모든 이들을 대표한다. 주인공이 L의 운동화를 소중하게 다루는 만큼, 김숨 역시 L을 조심스럽게 그려나간다. L의 모습은 주변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서 어렴풋이 서술되며, 담담한 서체는 독자에게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복원 작업을 상세하고 느리게 묘사하며 그 사이사이 주인공의 고민을 숨이 막히도록 빽빽하게 늘어놓는다. 그 과정과 고민들을 통해 L의 운동화가 지닌 무거움 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최소한의 복원을 할지, 레플리카 방식의 복원은 어떨지, 운동화 끈을 풀지 말지 고민하는 주인공을 보니 자연스럽게 잡지 편집 작업이 연상됐다. 작품에는 작가의 가치관이 담기기 마련이고, 작품을 설명하는 사진은 여러 가지 기법을 사용해 의도를 드러낸다. 활기찬 공간을 표현하기 위해 노출 시간을 늘려 사람들이 움직이며 남기는 궤적을 찍기고 하고, 밑에서 올려다보는 구도를 사용해 수목이나 구조물의 웅장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긴 수평선이 주는 안정감은 바닷가의 평화로운 풍경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된다. 이런 의도를 잘 파악해야 작품을 잘 소개할 수 있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주인공은 운동화의 고무 밑창을 복원하기 위해 에폭시수지를 주입한 후, 이틀 내내 L의 운동화를 바라보기만 한다. 밑창이 딱딱하게 변하기를 기다리며 그저 운동화가 담긴 플라스틱 상자의 온도와 습도를 확인할 뿐이다. 잡지의 마감 기간, 교정부호 하나 없이 깨끗한 교정지를 눈앞에 둔 내 모습이 떠오른다. 꼼꼼히 살폈는데도 오타나 비문을 찾을 수 없을 때, 불안함에 원고를 더 샅샅이 뒤지게 된다. 한참을 들여다보면 모든 문장이 어색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오타는 꼭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툭 튀어나와 나를 민망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뭔가를 할 때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