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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 한태곤 선포탈 대표 자연광이 재조명한 지하의 의미
    이제 지방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대한민국에서 조경의 블루오션은 무엇일까?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첫해, 이 화두를 붙잡고 전국 각지를 꽤나 돌아다닌 것 같다. 그 결과 새로운 공간에 대한 관찰은 사뭇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었다. 곳곳에서 스스로 성장해 온 여러 선구자들에게서 해답의 실마리를 얻었다. 대담함을 요구하는 시대다. 공간에 대한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새롭고 과감한 실천을 벌여 온 개척자들을 통해 새로운 조경 여정의 힌트를 얻었다. 조경의 본질은 결국 새로운 공간 창조이기 때문이다. 라이프스타일은 산업 구조에 따라 변화한다. 기존의 조경 업역이 신도시 개발과 대규모 단지 조성, 신규 건축과 인프라 구축이라는 성장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에 동반해 성장해 왔다면, 이제 성숙과 축소의 사회에서 그 설 자리를 잃고 있음은 대개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지금의 화두는 재생과 재발견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해야 하며, 그동안 이루어 온 도시적 인프라를 긍정적으로 재해석해야 할 입장에 놓여 있다. 곧이어 닥쳐올 시대에는 더 이상 완전히 뜯어고칠 돈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여유도 없어질 것이다. 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개선하는 수밖에 없다. 기존을 인정하고 다만 조금 더 나은 방식으로 바꾸는 과정의 새로움은 결국 긍정에서 나온다. 조경 설계가 단지 디자인 언어의 변용이나 시류에 편승한 스타일의 수정에 머무른다면 판의 확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판을 짜야 하고, 그 확장은 어느 한 분야의 성장이 아니라 전체 조경 산업 생태계를 두고 고민했을 때 가능하다. 이제 계획과 설계는 시공과 관리와 제품에서 거꾸로 영감을 얻어야 한다. 경관과 휴식이라는 용도의 하향식 분배에서 벗어나고 우리 분야가 품지 못했던 영역을 흡수해 조경 스스로가 보편적 의제를 선도하고 새롭게 정의해 나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비단 나만의 위기감일까. 생명공학과 유기농, 디스플레이와 영상 산업, 3D 프린팅과 업사이클링, 탄소 저감과 지구 온난화, 도시재생과 사회 복지, 빗물 관리와 대안 에너지, 도시농업과 첨단 작물, 문화재와 예술 등 기존 조경에서 양념에 그쳤거나 간접적 부산물에 불과했던 주제들을 이제 중심으로 초대할 필요가 있다. 이노베이션의 결합이 아닌 이노베이션 자체가 디자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시기다. 미래지향적 주제를 새로운 국토적 스케일로 조명해야 희망이 있다면, 서울 공화국이라는 좁아터진 부지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타성에 젖은 대상지와 방법론의 반복에서 벗어나려면 대한민국 조경은 수도권의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스타일이 아닌 디자인이 시도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간의 이용에 대한 시각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조경의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을 탐사하기로 한다. 따라서 이 인터뷰 연재물은 정형화된 공간을 조성하기 위한 자본이나 정책의 흐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정답을 정해놓고 누가 더 그럴 듯하게 포장하는가에 대한 문제는 더 이상 영감을 줄 수 없다. 새로운 공간을 향한 인물 개인의 의지, 그것이 산업 구조를 혁신하는 핵심적 에너지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이미 그런 새로운 융합이 일어나고 있다. 이론이 채 따라가기도 전에 그러한 실험이 이미 행동주의자들에 의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거창한 예상과 추측에 비하면 그 성과가 대단치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시리즈의 주제다. 잘 알려지지 않은 텍사스의 중소 도시 포트워스(Fort Worth)에는 무척이나 아름다운미술관이 있다. 루이스 칸(Louis Kahn)이 설계한 킴벨 미술관(Kimbell Art Museum). 초대 관장 리차드 브라운(Richard Fargo Brown)은 미술관을 설계할 때 흥미로운 몇 가지 전제 조건을 제시했는데, 가장 핵심적이고 눈에 띄는 조건은 자연광의 사용이었다(“Natural light should play a vital part”). 16개의 볼트 구조로 이루어진 폭과 높이 각각 6m의 아늑하고 편안한 인체 스케일의 관람 공간이 상층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전시실을 따스한 은빛 태양광으로 채운다. 렘브란트나 터너 같은 작품들이 곡선형 천장으로부터 쏟아지는 섬세한 산란광 아래에서 더욱 신비한 빛을 뿜어낸다. 킴벨은 미술 작품의 관람에 있어 자연광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태양광이 표현해낼 수 있는 색의 섬세함과 자연스러움은 3파장, 5파장 인공조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렇게 소중한 빛을 어두운 지하나 실내 깊숙한 공간으로 끌어온 이가 부산 기업 ‘선포탈’의 한태곤 대표다.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건축시공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영국 레딩 대학교(University of Reading)에서 건설관리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그는 영국 유학 시절 경험했던 자연광 도입 기법에 자극을 받아 독자적 기술 개발에 매진해 왔다. 선포탈의 기술이 킴벨과 같은 기존의 패시브 방식과 다른 점은 태양광을 모아 응축한 다음 100m 이상 전달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선포탈은 특히 그 과정에서 자외선, 적외선, 가시광선 등으로 이루어진 풀 스펙트럼을 유지하는데 탁월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자연광을 통해 지금까지 방치되던 열악하고 어두침침한 도시의 구석들을 고품질의 공간으로 환하게 밝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이다. 선포탈의 기술력은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아 세계 최초의 본격적 지하 공원인 뉴욕 로우라인(Lowline) 프로젝트에 공식 협력사로 참여하게 되었다. 맨해튼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방치된 전차 터미널을 자연광 기술을 이용해 녹색이 넘쳐나는 휴식처로 만들려는 야심찬 계획에서 선포탈이 중심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70여 년간 닫혀있던 지하 공간이 햇빛을 받아 살아나게 되며, 과거의 갖가지 건축적 디테일이나 구조, 장식물도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최이규는 1976년 부산 생으로 뉴욕에서 10여 년간 실무와 실험적 작업을 병행하며 저서 『시티오브뉴욕』을펴냈고, 북미와 유럽의 공모전에서 수차례 우승했다. UNKNP.com의 공동창업자로서 뉴욕시립미술관, 센트럴 파크, 소호 및 대구, 두바이, 올랜도, 런던, 위니펙 등에서 개인전 및 공동 전시를 가졌다. 현재 계명대학교 도시학부에 생태조경학전공 교수로 재직하며 울산 원도심 도시재생 총괄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다.
  • [정원 탐독] 다른 세상이 다른 정원을 만든다
    자연스럽다 vs. 인위적이다 자로 잰 듯 어김없는 직선과 방사선의 길, 패턴 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정교하고 화려한 문양, 한 치의 뻗침도 용서할 수 없는 단정한 나무들의 칼 정렬, 더 이상의 틈도 없이 완벽한 섬세함을 보여주는 조각, 하늘을 뚫고 치솟는 엄청난 물줄기의 분수!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를 아우르는 유럽 정원의 아름다움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인위성’이 아닐까. 잠깐 생각해 보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단어 중에 하나가 바로 ‘자연스럽게’라는 표현이다. 이 자연스럽게의 반대말로 우리는 ‘인위적으로’라는 말을 쓰고, 이 말 속에는 ‘억지로’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숨어 있기도 하다. 결국 ‘자연스럽게’에는 ‘좋다’의 착한 이미지가 투영돼 있고 인위적이라는 말 속에는 나쁘다까지는 아니어도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의 생각도 우리와 같을까? 영어로 인위적임을 뜻하는 ‘artificial’ 안에는 ‘예술(art)’이 숨어 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내는 모든 예술품과 행위 그리고 과학 기술이 포함된다. 그들에게는 ‘natural’이 긍정적이고 ‘artificial’이 부정적이라는 잣대가 없다. 여기서 한발짝만 더 나아가면 오히려 인위성이 바로 예술의 기초가 된다. 그것은 기술과 과학의 시작이다. 다시 유럽의 정원으로 돌아가 보자. 그 철저한 인위적 정원을 거닐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얼마나 감동을 할까? 유럽의 많은 정원을 지인들과 둘러보았을 때 그들의 입에서 “정말 아름답다!”라는 감탄사가 나오는 걸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최고의 극찬이라면 그 정성에 대한 답례 정도인 “대단하다!” 정도. 그런데 유럽에도 뭔가 다른 정원이 있다. 영국의 시싱허스트 캐슬 가든(Sissinghurst Castle Garden)은 중세 때 지어진 성을 시인 비타 섹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가 1930년대에 사들여 만든 정원이다.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l)과 히드코트 매너(Hidcote Manor)의 로렌스 존스턴(Lawrence Johnston)의 식재 디자인 노하우가 실현된 이 정원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너무 예쁘다’를 연발한다. 넘치도록 풍성하게 심어진 각양각색의 식물이 정리되지 않은 듯 마구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이 정원에서야 드디어 ‘너무 자연스러워서 좋다’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물론 ‘아트 앤드 크래프트(art and craft) 정원’이라고 명명되는 이 정원이 우리가 생각하듯 식물을 손도 대지 않고 제멋대로 자라도록 내버려둔 정원이 아니라는 진실이 후에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라도 말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오경아는 방송 작가 출신으로 현재는 가든 디자이너로 활동 중이다. 영국 에식스 대학교(The University of Essex) 리틀 칼리지(Writtle College)에서 조경학 석사를 마쳤고, 박사 과정 중에 있다. 『시골의 발견』,『가든 디자인의 발견』, 『정원의 발견』, 『낯선 정원에서 엄마를 만나다』 외다수의 저서가 있고, 현재 신문, 잡지 등의 매체에 정원을 인문학적으로바라보는 칼럼을 집필 중이다.
  • [시네마 스케이프] 로스트 인 더스트 쇠락한 도시, 그 풍경의 서사
    첫 시퀀스부터 예사 영화가 아님을 감지할 수 있다. 에드워드 호퍼 그림처럼 환한 빛이 내리쪼이는 텅 빈 거리, 따뜻한 색감의 벽면, 펄럭이는 작은 깃발, 화면 안으로 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기다렸다는 듯 멀리서 파란색 차 한 대가 다른 길로 돌아서 천천히 다가온다. 파란색 차가 건물 뒤로 사라지는 동안 담배를 물고 차에서 내린 여자는 벽에 잠시 서서 담뱃불을 끄고 건물 입구로 향한다. 문 앞에서 열쇠를 꺼내는 순간 복면을 한 두 남자가 나타나 그녀 머리에 총을 겨눈다. 롱테이크로 느릿하게 움직이던 화면 안으로 두 명의 복면강도가 훅 하고 들어오는 순간, 이거 뭐지? 범죄 영화인가? 요약하자면 형제가 은행을 터는 범죄 영화이자 텍사스를 배경으로 하는 현대 서부 영화다. 왜 그들은 강도가 되었을까. 둘 중 키가 큰 동생은 복면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선하고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졌다(얼굴도 보기 전에 반하다니, 드문 일이다). 거침없는 형 태너(밴 포스터 분)와 달리 겁에 질린 듯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는 동생 터비(크리스 파인 분)는 이 강도 행각 전체를 설계한 자다. 태너는 아버지를 싸움 끝에 총으로 쏘아 죽인 죄로 10년 동안 복역한 후 출소했다. 그 사이 어머니는 병들어 세상을 떠나고, 유일한 재산인 농장을 동생인 터비에게 물려주었지만 저당 잡힌 은행으로 바로 며칠 후 소유권이 넘어간다. 이 와중에 농장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 막노동으로 살아가는 터비는 이혼한 후 양육비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두 아들을 만난 지 1년이 넘었다. 어떻게든 만기일 전에 은행 대출금을 갚아야 한다. 영화의 원제는 ‘Hell or High Water’다. 무슨 일이 닥치든 해낸다는 의미다. 터비가 며칠 안에 합법적으로 돈을 마련할 방법은 사실상 없다. “나의 부모님, 조부모님 모두 가난했다. 가난은 전염병과 같아서 주변 사람 모두에게 옮아간다. 내 자식에게만은 절대 물려주지 않겠다.” 터비의 고백은 차라리 처연하다(무얼 해도 잘생긴 등장인물에게 한결같이 마음을 뺏기다니, 흔한 일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홍상수의 신작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을 보면서 등장인물보다 연남동과 경의선숲길에 더 눈길이 갔다. 오래된 골목과 새로운 공원, 그리고 그 사이를 메우는 사람들의이야기가 돋보이는 영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어떻게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가.
  •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 광장의 함성으로부터, 예술과 시대상 ‘클럽 몬스터’(국립아시아문화전당), ‘동백꽃 밀푀유’(아르코미술관)
    신년이지만 차분히 모임조차 하기 쉽지 않다. 혼란스런 시국 속에서 예술 작품에 몰입하기는 더욱 쉽지 않다. 그러나 예술은 검열과 금지, 각종 규율 속에서도 억압에 맞서며 사회적 부조리와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호소해 왔다. 이와 관련해 오늘날의 시대상에 담긴 정서와 사회적 구조, 소외된 삶을 다루는 두 전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클럽 몬스터’와 서울 아르코미술관에서 열리는 ‘동백꽃 밀푀유’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매주 광장에서 울려 퍼진 노래의 가사다. 세월호 추모곡으로 등장한 민중가요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에는 시대적 참사에 대한 애도와 더불어 사회·정치적 진실을 호소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깃든다. 2016년 10월 말부터 매주 토요일이면 광장에서 시민들의 함성이 끊이지 않는다. 광장에서는 민중가요, 저항 가요, 인디 뮤직 외에도 현실을 풍자한 여러 패러디곡이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익숙한 모양새로 입을 모아 합창한다. 정치 검열로 인해 꽤 오랫동안 금지곡이었던 ‘임을 위한 행진곡’이 광주로부터 여러 도시의 광장으로 소환되어 역사를 마주한다. 현 정권 퇴진을 외친 ‘하야가’, ‘헌법 제1조’ 등 오늘의 시국을 반영한 새로운 곡들도 등장했다. 촛불을 든 사람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며 정부를 향해 분노의 함성과 구호를 외치는 일이 주말마다 일어나듯이 변화를 향한 사람들의 갈망은 식지 않는다. 축제처럼 평화롭게 모여 있지만 분노로 인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가슴은 뜨겁다. 집회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민중가요는 사회·정치적 상황으로부터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해 왔다. 뿐만 아니라 대중가요는 오랫동안 시대적 정황과 사회적 아픔, 애환을 표현하며 많은 사람들과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이러한 시국에 예술과 음악의 관계를 의미심장하게 다루고 있는 전시가 열리고 있어 소개한다. 대중음악과 예술의 저항 정신, ‘클럽 몬스터’ 전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2017년 2월 26일까지 열리는 ‘클럽 몬스터(Club Monster)’는 대중가요로부터 영감을 얻은 현대 미술을 선보인다. 제목만 들어서는 어떤 전시인지 유추가 쉽지 않은데, 사실 여기서 몬스터는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Metallica)의 한 노래 제목에서 유래한다. 전시는 음악 전문가들로부터 추천을 받은 세계인의 애창곡 108곡을 예술가와 공유하여 이로부터 영감을 받은 현대 미술 작업을 전시한다. 전시 제목에서 지칭하고 있는 ‘몬스터’의 존재가 사회적으로 함축하는 의미는 크다. “사회의 기득권을 가지지 않은 자, 사회 소수자들, 약자들, 빈곤층뿐만 아니라 각종 트라우마에 노출되어 고통 받고 있는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전시 기획자가 기획 노트에서 밝히고 있는 ‘몬스터’다.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억눌린 사람들, 바로 우리를 의미한다. 사람들의 정서를 어루만지는 음악은 흥을 북돋우기도 하고 감성을 어루만지기도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음악이 인간에게 일으키는 힘은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 소통일 것이다.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종종 내면에 가려진 목소리를 거센 음성으로 마주하기도 한다. 참여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뮤지션으로는 밥 딜런, 존 레논, 레오나드 코헨, 핑크 플로이드, U2, 한대수, 신중현, 노래를 찾는 사람들 등이 언급되며, 다수의 음악은 시대, 사람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람들과 교감해온 노래는 시대를 불문하고 이렇게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현재의 삶과 새로운 공명을 일으킨다. 이 음악들은 개별 작가들의 작업에서 공명하는 현시대적 배경과 공명을 일으킨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심소미는 독립 큐레이터이며 미술과 도시 관련 비평을 쓰고 있다. ‘신지도제작자’(2015), ‘모바일홈 프로젝트’(2014)등 현대 미술과 도시 연구를 매개한 전시 기획을 해왔으며,도시 개입 프로젝트‘마이크로시티랩’(2016)을 선보였다. 2016년 난지창작스튜디오 연구자 레지던시에 입주해 활동 중이다.
  • 서울,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만들기 제1회 서울은 미술관 국제 콘퍼런스
    1. 공공 미술의 주인은 시민이다. (서울은 미술관은)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서울시민을 가장 먼저 배려한다. 1. 공공 미술은 시민의 삶을 위한 것이다. (서울은 미술관은) 예술의 이름으로 시민의 일상과 생업을 방해하지 않는다. 1. 공공 미술은 공간과 자원을 소중히 여긴다. (서울은 미술관은) 신중하고 절제된 방식으로,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만큼 개입한다. 1. 공공 미술은 도시의 결점을 가리고 표면을 치장하는 것이 아니다. (서울은 미술관은) 도시의 문제를 찾아내고 개선한다. 1. 공공 미술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함께 변화한다. (서울은 미술관은) 가변적이고 일시적일지라도 지금 이 시대의 의미와 가치를 담는다. _ 공공 미술 프로젝트 ‘서울은 미술관’의 약속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에는 사진을 촬영하고 추억을 남기려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랜드마크 하면 보통 에펠탑이나 자유의 여신상처럼 거대한 건축물을 떠올리기 쉽지만, 그리 크지 않은 공공 미술 작품이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기도 한다. 시카고의 클라우드 게이트, 뉴욕 월스트리트의 황소가 그 예다. 지역의 특색을 담은 공공 미술 작품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관광 수익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서울에서도 이 같은 공공 미술 작품을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2016년 4월 강남 코엑스 앞에 가수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 ‘말춤’의 손동작을 본뜬 거대 청동 조형물이 들어섰다. 강남 마이스 관광특구를 외국 관광객의 명소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인데, 시민들의 반응은 그리 탐탁지 않았다. 시시각각 트렌드가 변하는 오늘날 이미 유행이 지난 문화 상품이 랜드마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와 일차원적인 조형물의 형태가 다소 유치하다는 의견이 인터넷을 떠돌았다. 세금으로 만들어지는 만큼 시민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공공 미술이 제 역할을 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것일까? 2016년 12월 13일과 14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1회 서울은 미술관 국제 콘퍼런스’는 서울의 공공 미술의 방향에 대해 고찰했다. ‘서울은 미술관’은 서울시가 추진 중인 ‘비전 2030, 문화시민도시 서울’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공공 미술 프로젝트로, 도시 전체를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만드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부드럽고도 강한 미술과 예술의 힘을 서울 전역으로 확산해 역동성과 아름다움을 불어넣겠다는 의도다. 서울시가 주최한 이번 콘퍼런스는 미술계 및 각계 전문가, 예술가와 시민이 기존 공공 미술의 문제점과 한계를 살피고 관행을 변화시킬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중략)...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 [편집자의 서재] 곶감과 수필
    기자들이 돌아가며 쓰는 ‘편집자의 서재’의 차례가 돌아오는 달이면 주섬주섬 에피소드를 챙기기 시작한다. 최근에 만난 사람들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스크랩해 둔 기사나 이메일 목록을 뒤지기도 한다. 편집부 전원이 함께한 행사나 특별한 기획 기사가 있는 달이면,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두고 편집부 내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정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없으면, 오랫동안 묵혀두어 종갓집 씨간장처럼 발효된 첫사랑 카드도 꺼내든다. (아직도 어느 밤 문득 ‘이불킥’하게 하는 첫사랑 카드까지 꺼내들 만큼, 나는 뻔뻔하고 절박해졌다.) 코너의 제목은 ‘서재’인데 에피소드에 의존하고 있다니, 기자의 얄팍한 독서량에 의구심을 가질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독서 기록과 감상을 소개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취향과 삶,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멋진(그럴듯한) 이유를 대고 싶지만…. 역시 80%는 빈약한 독서 때문이다. 게다가 내 차례가 아닐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 놓고 여유를 부리다가 덜컥 ‘편집자의 서재’를 쓰게 된 이번 달 같은 경우는 더욱.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새로 나온 책도, 신선한 작가의 책도, 잡지와 관련된 책도 아니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책을 소개하고 싶다. 윤오영의 수필집 『곶감과 수필』. 처음엔 몰랐다. 중고 서점에서 2,500원 주고 산 이 책이 내게 가장 소중한 책이 될 줄은. 학창 시절, 문학 교과서에서 윤오영의 ‘달밤’을 인상 깊게 읽은 기억이 나 책을 샀는데 새 책이 아니라 그런지 책장에 처박아두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대학교 3학년, ‘문장과 수사’ 강의에서 수필 쓰기 연습을 하며 참고를 위해 펼쳐본 것이 벌써 6년째다. 내게는 글쓰기의 새로운 세계로 이끈 ‘글쓰기 교본’ 같은 책이다. 시골 노인과 함께 달구경을 한 소박한 경험이 전부인 짧은 수필, ‘달밤’을 읽고 ‘수필도 시처럼 아름다울 수 있구나’ 느꼈다. 수사적인 표현이나 설명을 최대한 절제하고 담백하게 썼는데도, 달밤의 호젓한 풍경이 회화적으로 그려졌다. ‘씀바귀’는 친구와 씀바귀 나물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경험을 쓴 수필이다. 그는 씀바귀의 쓴맛에서 두보의 시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까지 꿰뚫는 인생의 심오한 철학을 논한다. 아내와 밤에 붕어 물 먹는 소리를 듣고 쓴 ‘붕어’는 ‘뭐 이런 것까지도 글로 쓸까’ 싶기도 하지만, 붕어 물 먹는 소리를 듣기 위해 부부가 잠도 안자고 숨 죽여 귀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코믹하고 정겨워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평범한 경험들을 소중하게 글로 엮어 내는 작가는 얼마나 맑은 사람일까. 그 작은 경험들로부터 인생의 어떤 통찰을 이끌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글을 읽었을까. 거칠고 긴 문장이 군더더기 없이 단정해지기까지 몇 번을 고치고 매만졌을까. 윤오영은 ‘곶감과 수필’에서 수필을 곶감에 비유했다. 감(문장)이 곶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고운 껍질을 벗기고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하며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감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는 모양을 내 매만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그다운 친근하고 멋진 비유다. 사람들을 만나 소개를 할 때면 전공 학과를 밝히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국문과를 나온 기자라고 하면 ‘글은 술술 쉽게 쓰겠다’고 기대하는 분들이 많지만, 고백건대 난 여전히 글 쓰는 것이 어려운 3년차 기자다. 한때는 좋아하는 수필가의 글이나 유명한 기자의 칼럼을 따라 글 구성 방식이나 문장 스타일, 글을 시작하고 끝맺는 법 등을 흉내내보기도 했다. 지금도 좋아하는 글은 스크랩해두었다가 시간이 있을 때 필사하기도 한다. 하지만 글, 특히 수필처럼 경험이 묻어나오는 글은 “그 제재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 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이 고치를 만들 듯이’ 써지는 것”이라서 다른 사람의 글을 흉내 낸다고 비슷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민 교수는 「윤오영론」에서 “허물이 없고서야 탈피가 있을 수 없듯이, 과거의 문장을 모르고 전통을 계승한 바 없고 대가에 사숙(私淑)한 바가 없으면 탈피할 무엇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수필이 가장 오래된 문학이면서 미래의 문학일 수 있는 이유다. ‘문장과 수사’ 강의 말, 시나 소설은 별다른 평을 받지 못했지만 수필에서 받은 작은 격려가 지금까지 이 어려운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게 했다. 내용은 우리 가족 남자들의 탈모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담백한 글쓰기를 포기하고 에피소드를 수집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환경과조경345호(2017년1월호)수록본 일부
  • [CODA] 그들이 시작하는 법
    대망의 2017년 1월호 준비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바쁜 걸음을 옮기던 편집장은 날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불안했다. 예의 그 친절한 말투로 “팀장님, 제가 오늘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잡지협회 교육생 인터뷰 좀 대신 해주세요.” 흡. 우선 전쟁터 같은 책상의 물건들을 책장 안으로 숨겼다. 조한결 기자가 머뭇거리며 사진 촬영도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런 젠장. 얼른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작업복(트레이닝복)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고쳤다. 다행히 머리는 아직 동여매지 않은 상태였다. 꿈과 희망을 안고 잡지사 탐방을 오는 그들에게 너무 생생한 현실로 실망감을 안겨 주고 싶진 않았다. 가까스로 우아한(멀쩡한?) 모습으로 미팅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잡지협회의 교육 과정을 이수한 그들의 마지막 과제는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잡지사에 인터뷰를 다녀와 기사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취재기자의 업무와 사내 문화, 채용 관련 이야기를 담아 후배 교육생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단다. 그들이 물었다. 『환경과조경』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능력이 필요하냐고, 조경을 전공해야 하냐고 물었다. 조경을 전공하지 않아도 이 분야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면 오케이. 해외의 정보와 자료를 접해야 하므로 외국어를 잘하면 물론 우대.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잘 써야 한다고 답해주었다. 그것이 공식적인 답변이지만 사실 내 기준은 이 일에 대한 열정이라고 말했다. 함께 시작했던, 또 그 후에 만난 여러 기자들이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미처 모두 알 수 없는 지금, 과연 글쓰기 능력이 우선일까, 하고 싶다는 열망이 더 중요할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 엄혹한 시대에 후배들에게 ‘꽃길’을 깔아줄 수도 없으면서 ‘열정’이라고 입 밖으로 내뱉으니 참 식상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사실 이는 분야를 막론하고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기준이 아닐까. 물론 “기껏 가르쳐 놓았더니 내 길이 아니라고 떠나버리면 회사로서는 손해다”라고 한탄하는 여러 설계사무소 소장님들의 말씀이나, 적성을 찾기 위해 직접 부딪혀 경험해 볼 수밖에 없는 사회 초년생들의 고민과 선택 또한 모두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다. 10월 말, L 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들이 설계하는 법을 부탁할 요량이었다. L 소장은 이 꼭지의 필자로 편집부의 리스트에 계속 올라 있었지만 시점이 문제였다. 꼭지명이 ‘그들이 설계하는 법’이니 ‘설계’에 방점이 찍히지만, 글이 중요하게 드러나는 잡지의 특성상, 그들이 글 쓰는 성향도 고려의 대상이다. 새해를 맞이해 분위기를 전환해 줄 필자가 필요했다. 그가 미루거나 거절하지 않기를 바랐다. 필자에게 원고를 청탁할 때 최대한 그들이 거절할 수 없는 멘트를 준비한다. 그들이 머뭇거리며 고민하거나 거절의 이유를 찾는 동안, 난 그가 얼마나 이 주제에 적합하며 ‘유일한’ 필자인지 떠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이 약해진 그들은 (편집주간의 표현에 따르면) 스스로의 일상을 마감이라는 감옥으로 보낸다. L 소장에게는 “언젠가 제가 전화할 줄 아셨지요”라고 했다. 피할 수 없다고, 지금이 그 때라고 정공법을 택했던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L 소장의 원고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앞으로 석 달 동안 그 특유의 문체를 즐감할 수 있으리라. 그가 글과 함께 보내온 첫 번째 그림은 모카주전자와 찻잔이다. 그 그림을 보니 반갑다. 잡지 교육생들이 물었다. 필자 섭외는 어떻게 하냐고. 우리는 취재원들과 오랜 관계를 맺으며 교류한다고 답했다. 나도 예전에 그런 게 궁금했던 것 같다. 잡지에 실리는 정보들은 다 어디서 나냐고 나의 첫 번째 편집장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그때 편집장은 “잡지사에 있다 보면 다 들어와”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그 대답에는 많은 것이 생략돼 있었다. 2014년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무렵, L 소장이 설계한 대관령 하늘목장에 함께 갔을 때였다. 양다빈 기자와 조한결 기자가 떨어진 나뭇잎들을 비로 쓸어가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을 때, 나는 L 소장과 어느 정원에서 저 모카주전자에 커피를 내려 마셨다. 지금도 잡지에 사진으로 남아 있는 양다빈 기자의 어깨와 초록색 비를 보면 괜히 미안해진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십오륙여 년 전에 즐겨 다녔고, 그 이전부터 그가 즐겨 다녔다는 대학로 한 카페에서 그가 깎아주던 사과가 기억난다. 나는 그 시간들과 내 선배들이 그와 맺어온 인연을 믿었나 보다. 그래서 L 소장에게 맡겨 놓은 원고를 내어 놓으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나 보다. 2017년에는 최이규 교수가 1년 만에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이란 이름의 인터뷰 꼭지로 돌아왔다. 2013년부터 그는 ‘조경의 영토를 넓혀나가는 주목할 만한 조경가’(2014년부터는 ‘조경의 경계를 넘어, 조경 속으로’)라는 이름으로 현장에서 뛰고 있는 우리 시대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는 전문가들을 인터뷰했다. 2013년 당시 뉴욕에 있던 최이규 교수와 국제 통화로 연재의 방향에 관해 이야기하며, 바다 건너 있는 그는 원칙을 중시하는 까다로운 필자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 귀국한 그는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공간을 향한 인물 개인의 의지, 그것이 산업 구조를 혁신하는 핵심적 에너지”라며 기존 조경에서 주변부에 존재했던 주제들을 중심으로 초대해 펼쳐 놓는다. 인터뷰이의 목소리를 빌려 풀어 놓는 그의 글에서는 혁신을 갈망하는 그의 메시지가 음성 지원되는 듯하다. 이젠 믿고 보는 인터뷰 필자다. 그리고 안동혁의 ‘가까이 보기, 다시 읽기’, 오경아의 ‘정원 탐독’ 등이 새롭게 선보이는 연재다. 올해는 유난히 다르게 보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시 읽는 글들이 많다. 다른 제목을 떠올리기 어려웠으니 우연이거나 말장난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 주변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욕구가 충만한 것은 아닐까. 새로운 필자들과 쌓아갈 시간도 기대가 된다. 2017년 1월호의 문을 닫는 글을 쓰다 보니, 이번 달은 새로운 연재들 때문인지 다양한 성격의 글들이 지면을 메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잡지雜誌란 단어의 의미를 풀어보면 본래 잡다하게 뒤섞인 기록이 아니던가. 잡지협회 교육생들과의 인터뷰가 마무리될 무렵, 『환경과조경』을 한 마디로 정의해 달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당당하게 ‘조경 문화 발전소’라고 답해 주었다. 올해도 새로운 필자들과 발전소를 열심히 돌리리라. 독자 여러분들도 이 다양한 글 어디엔가에서 ‘열정’의 실마리를 찾으시길 바라며 이달의 문을 닫는다.
  • [PRODUCT] Tank-Solar Smart Bench
    Tank-Solar Smart Bench(태양광 스마트 벤치) 현재 태양광 시장의 일반적인 시설물은 지붕에 설치된 획일적인 모습으로, 미관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일조권 침해 등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에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가 없는 풀뿌리 발전소가 기후 변화 대응·에너지 분산화의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게다가 시민이 직접 보고, 만지고, 느껴볼 수 있어 태양광에 대한 이해를 돕고, 에너지 절감과 관련된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기존의 태양광 시스템과 조화를이룬다면 또 다른 모습으로 승격도 가능할 것이다. 2014년 설립된 (주)한축테크는 보도블록 기능을 수행하면서 태양광 발전이 가능한 태양광 발전 블록을 개발했다. 또한 이를 적용한 태양광 벤치, 펜스형 태양광 가로등 시스템, 횡단보도용 태양광 펜스, 도난 방지 태양광 자전거 보관대, 보도블록형 일체형 태양광 보안등, 태양광 버스정류장, 조경용 태양광 발전 블록 등의 제품을 출시해 시민에게 보다 가까운 태양광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주)한축테크의 모든 태양광 제품의 기본을 이루는 태양광 발전 블록은 블록 표면에 441개의 굴절 렌즈 어레이를 형성하는데, 이는 항상 태양 빛을 직각으로 유지시켜 기존의 태양 전지 모듈보다 높은 발전 효율을 얻을 수 있도록 만든다. 특히 태양 전지 모듈을 블록형과 일체형으로 제작해 내구성을 확보했으며, 보도블록에 사용할 수 있어 별도의 태양광 설치 장소 없이 태양광이 비추는 어느 곳이든 소·중·대형의 에너지 존(E-Zone)을 형성할 수 있다. (주)한축테크의 태양광 스마트 벤치는 옥외용 벤치로 내구성이 강해 시민이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다. 벤치의 좌판에 태양광 발전 블록을 설치해 주간에 전기를 생산하도록 했다. 저장된 전기는 야간에 보안등, 경관 조명 등으로 활용할 수 있어 공원, 자전거도로, 학교, 휴양지 등에 다양한 형태로 설치가 가능하다. 또한 주변 환경을 개선해 야간의 범죄를 예방하고 안전을 도모할 수 있으며, 주·야간에 휴대폰을 손쉽게 유·무선으로 충전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TEL031-966-4246 WEB www.tanksolar.co.kr
    • (주)한축테크
  • [CODA] 기성세대
    시작과 끝이 교차하는 12월이다. 한 해를 마감하는 12월호를 준비하다보니 조금 일찍 송년의 기분에 젖어든다. 특히 연재를 마감하는 필자들의 마지막 원고를 보고 있자니 여러 소회가 엇갈린다. 한껏 지적인 글의 필자도 마지막 순간에는 독자와 자신의 거리를 좁힌다. 마치 연극이 끝난 후 무대 인사를 하듯이 본연의 모습을 살짝 드러내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다. 짧게는 3개월, 길게는 3년의 연재를 마무리하며 내비치는 필자들의 속내를 보니 할 일을 끝냈다는(이젠 마감을 안 해도 된다는) 홀가분함보다는 아쉬움이 묻어난다고 느끼는 것은 멜랑콜리한 연말 기분 탓일까. 가끔 필자와 편집자의 관계는 연애하는 사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감을 두고 벌이는 밀고 당기기와 그로 인해 쌓이는 일종의 애증(!) 때문이다. 10년 전쯤 만난 한 필자는 매달 빚쟁이처럼 원고를 받아가는 나를 힘겨워했다(당시 나는 필자가 마감 날짜를 잘 지키도록 유도하는 편집자가 좋은 편집자라고 생각하고 원고 독촉 전화를 즐겨하곤 했다). 연재를 마무리하고, 연재 원고를 묶어 단행본을 출간하는 지난한 과정까지 모두 마치고 난 후 하루는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혹시 내가 더 할 일이 없냐”고 묻는 전화였다. 매달 당연하게 쓰던 원고를 쓰지 않으니(매달 받던 독촉 전화를 받지 않으니) 갑자기 주말에 뭘 해야 할지 당혹스럽단 이야기였다. 그는 얼마 뒤 취미로 밴드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알려 왔다. 지금도 가끔 그가 생각난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나의 연애 방식도 다변화되었다. 심소미 씨와는 그녀가 기획한 전시회에서 만났다. 첫눈에 반했다고 할까. 도시와 예술, 조경과 건축의 영토를 넘나드는 듯한 그녀의 관심사에 호기심을 느낀 난 “우리 앞으로 자주 만날 것 같지 않나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시장을 떠났다. 결국 올해 ‘떠도는 시선들, 큐레이터 뷰’에서 좋은 글과 사진으로 매달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바쁜 가운데 필요한 말만 주고받아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필자다. 굳이 필자 유형을 구분해 본다면 이심전심형 필자랄까. 아쉽게 내년 1월호면 연재가 마무리될 예정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지면으로 만나고 싶다. 다른 이들의 연애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매달 독일에서 원고를 보내온 고정희 박사의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는 조한결 기자가 맡았다. “처음에는 형식적인 관계였어요. 사실 박사님과 전 일면식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에는 펜팔하는 기분이에요.” 조 기자는 20세기부터 고대 이집트까지 5천 년 조경사를 종횡무진 늘어놓는 필자의 박식함과 원고를 뒷받침하는 사료의 방대함에 늘 감탄하는 애정을 보인다. 그녀에게 필자는 흠모의 대상처럼 보인다. 조 기자 역시 만만치 않은 꼼꼼함으로 질문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갔다. 몇 시간씩 구글링을 하며 원고를 확인하다 질문을 보낸 후 원하는 답변을 얻어내곤 다시 필자에게 탄사를 내뱉는 식이다(내가 보기엔 너님도 대단하다). 지난 해 이맘때, 그러니까 2015년 12월호 에디토리얼에 배정한 편집주간은 ‘마감에 임하는 필자들의 태도’를 유형화한 적이 있다. “별다른 이야기가 없다가 마감이 한참 지나 독촉 문자, 메일, 전화를 하면 그제야 아직 못 쓴 사연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읍소형”과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는 잠수형”을 오고가는 필자 덕택에 매달 애를 태우는 기자도 있다. 하지만 인쇄소로 넘어가기 직전 주옥같은 원고를 토해(?)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쁘고 반가운 것이 또 편집자의 마음이랄까. 매달 반복되는 두 사람의 줄다리기는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는 연애를 보는 듯하다. 이번 호에 여러 필자들이 덧붙인 ‘연재를 마치며’를 살펴보니 그들과 함께 연재를 기획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지금은 내년 연재를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연재를 마감하는 필자가 여럿 있는 만큼 2017년 새로운 꼭지로 독자들을 만날 준비를 하는 필자도 여럿이다. 새로운 연재 꼭지의 기획 의도와 방향, 호별 주제 목록 등이 담긴 기획서를 보면서 마감 유형을 가늠해 보는 것도 이즈음의 즐거움이다. 누군가는 “마감을 칼같이 지키는 모범생형”이지만 까다로울 것 같고, 어떤 이는 기획서부터 기한을 지키지 못해 애를 태우지만 결국 편집부가 예상치 못했던 흥미로운 기획으로 새로운 연애에 대한 설렘을 유발한다. 개인적으로 2016년이 어떤 의미였는지 되돌아본다면, 올해는 내가 마흔 살이 된 해다. 얼마 전 마흔 살이 되니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냐는 질문을 받았다. 웃으며 얼버무린 그 자리에서 삼켰던 말은 이러했다. 항상 젊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닌 것 같다고. 사실 마흔 살이 되면서 내가 ‘기성세대旣成世代’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 단어가 떠올랐을까. 사전을 찾아보니, “현재 사회를 이끌어 가는 나이가 든 세대”를 뜻하는 말이다. 예전에는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지금의 사회에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올해는 나도 어디엔가 후원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단체를 물색했다. 그러다 언론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한 시민 단체가 재정적 어려움으로 어렵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잡지사에 몸담은 내 첫 번째 후원 대상으로 언론을 바로 세우기 위해 노력하는 단체는 좋은 선택처럼 보였다. 온라인 가입 신청서의 최소 금액 버튼을 누르고도 내심 뿌듯했다. 이후 그 시민 단체로부터 매달 소식지가날라 왔다. 포장지도 뜯지 않은 채 책상 한구석에 쌓여가는 소식지를 보면서 그 시민단체의 살림살이를 걱정했다. 나처럼 적은 회비를 내는 사람에게까지 소식지를 보내면 과연 운영이 될까 싶었다. 그러다 우연히 포장지를 뜯고 소식지를 넘겨보았다. 소식지는 흑백의 소박한 편집이었지만, 한 달간의 활동 내용과 여러 필자와 회원들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후원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뜻에 동의하고 관심을 기울이며 참여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일원이 되었구나. 늘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전문지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려 보면, 어려움이 닥치면 습관처럼 환경을 탓하곤 했다. “문화가 성숙해야” 혹은 “저변이 확대되어야” 하는 말들을 되뇌기도 했다. 세상은 남이 바꿔주는 것이 아님을 이제야 깨닫는다.
  • [편집자의 서재] 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
    2006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영화가 개봉했다. 론 하워드 감독의 ‘다빈치 코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발생한 의문의 살인 사건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예술 작품 속의 비밀, 시체 주변에 남겨진 다잉 메시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밀 단체, 전설 속에서나 볼 수 있던 성배 등 각종 흥미로운 요소로 흥행에 성공했다. 암호를 풀면 열리는 신비한 장치들은 현란한 액션 없이도 ‘인디아나 존스’나 ‘툼 레이더’를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각종 자료로 뒷받침해 관객들을 실재와 허구를 넘나들며 영화에 몰입하게 했고, 이는 다빈치 코드의 원작 소설가 댄 브라운을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기까지 했다. 다빈치 코드의 중심에는 명화 최후의 만찬이 있다. 사실 다빈치 코드뿐만 아니라 여러 영화나 드라마가 명화를 재해석해왔다. 북구의 모나리자라 불리는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작품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속 소녀의 삶을 그린 동명의 영화나 조선의 풍속화가 신윤복이 사실 ‘미인도’ 속 여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담은 드라마 ‘바람의 화원’ 등. 그림은 화가에 의해 포착되어 멈춰진 장면이다. 앞뒤 맥락을 알 수 없어 자유로운 해석이 가능하고, 이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래서인지 유독 명화를 소재로 한 책에는 의외의 전개로 재미를 주는 작품이 많았고, ‘르네상스 명화에 숨겨진 살인사건’이라는 문구를 표지에 내건 『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 역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스토리로 나를 이끌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반대였다. 『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는 오히려 설득력 있는 역사적 자료를 제시해 명화에 숨겨진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책이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다빈치 코드의 로버트 랭던 교수는 없지만 숨겨진 사건을 풀 힌트를 제공하며 나를 따라다니는 해설가가 있다. 초반에는 지면을 가득 메운 사진과 예시들이 버겁게 느껴졌지만, 어느새 책장의 앞뒤를 넘겨가며 자료를 살피고 사건의 추적에 동참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살인자, 화가, 그리고 후원자』가 다룬 명화 ‘채찍질’은 회화의 군주라 칭송받던 삐에로 델라 프란체스까의 작품이다. 그림은 크게 좌우로 나뉜다. 왼편에서는 세 명의 남자가 기둥에 묶인 예수를 채찍질하고 있다. 그러나 채찍질이라는 잔인한 단어와는 거리가 먼 낮은 채도의 색이 그림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어 평화롭게 느껴진다. 고문당하고 있는 예수의 몸에는 피는 물론이고 작은 생채기 하나 없다. 게다가 고통스럽지 않은지 담담한 표정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이 현실을 뛰어넘은 초인 같아 보인다. 이 공간에는 괴로운 신음도 채찍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도 없다. 이 고요함은 오른편에 서 있는 세 남자에 의해 더욱 커진다. 왼편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을 전혀 모르는 듯 평온한 표정의 남자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 남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서로를 보지 않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더라도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가득해 보인다. 베른트 뢰크는 이처럼 고요한 그림 속에 살인의 키워드가 숨어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림 오른편의 세 명의 남자 중 왜 가운데 남자만 맨발일까?’라는 트집 같은 호기심에서 시작됐는데, 무려 맨발의 남자가 ‘오단또니오 다 몬데펠뜨로(이하 오단또니오)’ 백작이라는 결론에까지 이른다. 오단또니오는 사치스러운 생활과 각종 범죄를 일삼은 이탈리아 우르비노의 고문관으로 1444년 7월 시민 봉기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밤중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난 그는 십자가 앞으로 끌려갔다. 봉기군에게 살려 달라 애원했지만 살해당했고 죽은 후에도 이리저리 끌려다녀 사지가 찢겼다고 한다. 작가는 오단또니오와 맨발의 남자를 ‘붉은 튜닉’이라는 매개로 엮는다. 맨발의 남자가 입고 있는 붉은 튜닉이 오단또니오 백작이 살해당할 당시 입고 있던 잠옷이며, 붉은색은 순교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맨발은 오단또니오의 결백함을 상징한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는 이 그림 자체가 오단또니오를 그의 이복동생 페데리꼬 다 몬떼펠뜨로(이하 페데리꼬)가 죽였다며 고소하는 기소장이라 주장한다. 고작 행색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림 안에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암투와 살인사건이 숨어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베른트 뢰크는 삐에로 델라 쁘란체스까의 다양한 작품에 나타난 “적절한 증거”와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이야기의 파편들”을 제시하며 자신의 주장을 공고히 다져나가고, 이는 충분히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페데리꼬가 오단또니오의 작위를 물려받은 해가 오단또니오가 죽은 지 30년 되는 해이며, 로마의 살인 공소 시효가 끝나는 시점이라는 대목에서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책을 덮고 나니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분명 “나는 엄정한 사료 분석에 따라 채찍질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을 것이다”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내겐 몬떼펠뜨로 가문의 형제 살인 사건이 역사적 사실처럼 느껴진다. 너무 많은 자료와 그 사이를 연결하는 ‘~한 것이 아닐까’라는 그럴듯한 추측을 반복적으로 접한 탓이다. 만약 베른트 뢰크의 가설을 무너뜨릴 만한 정보를 접하게 된다면 난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A는 B다’라는 뉴스와 ‘A는 B가 아니다’라는 뉴스가 동시에 올라오는 시대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거짓과 진실을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답은 하나뿐이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 언론인이 갖춰야 할 소양 중 하나일 텐데, 인내심이 없는 내겐 항상 힘든 일이다. *환경과조경344호(2016년12월호)수록본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