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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사들의 정원 생활] 고산 윤선도, 늙은 어부 혹은 신선으로 살기
    한국 최고의 정원가 고산 윤선도는 역사상 최고의 시조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최고의 정원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다. 그를 한국 최고의 정원가라고 할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역사상 그만큼 많은 정원을 만든 이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전 생애에 걸쳐 머무는 곳마다 정원을 짓고 즐겼다. 현재 흔적이 남아 있는 곳만도 해남 삼승三勝이라 불리는 수정동ㆍ문소동ㆍ금쇄동,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과 백련지, 보길도 부용동, 강진 덕정동의 추원당, 남양주 수석동의 해민료와 명월정 등 여러 곳이 있다. 유배지였던 함경도 경원과 삼수, 경북 기장과 영덕 등에도 그가 즐긴 정원 관련 지명이 있다. 둘째, 그가 만든 정원들은 한결같이 한국의 대표 정원으로 내세울 만한 걸작이다. 그의 정원은 대체로 바위와 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자연 경승지에 있다. 고산은 자연 요소와 경치를 탁월한 안목으로 읽어내 과학적ㆍ생태적 지식과 기술은 물론 예술적 감각이 충만한 정원으로 만들었다. 셋째, 그는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원을 이용하고 즐기는 데에도 탁월한 감각과 수준을 과시했다. 아름다운 산수간에 만든 정원에서 그는 시, 음악, 무용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즐김으로써 정원이 단순히 휴식이나 완상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문화 예술을 생산하고 체험하는 장임을 실제로 보여준 셈이다. 대표 정원들 고산은 51세 때 보길도에서 처음으로 정원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출발이 순전히 자기 뜻만은 아니었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청나라에 굴욕적으로 항복하게 되자 부끄러워 하늘을 볼 수 없어 탐라에라도 가 은거하겠다고 결심한 고산이 도중에 잠시 들렀다가 아예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곳이 보길도였다. 이후 그가 죽기 전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해 나간 보길도 부용동芙蓉洞 정원의 면모는 후손 윤위가 쓴 『보길도지』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탁월한 풍수 안목으로 섬 중앙 계곡부를 중심으로 혈처(낙서재), 안산(동천석실), 외수구(세연정) 등의 요지에 각기 다른 성격의 정원을 조성하고는 그곳들을 오가며 즐겼다. 요처에 최소한의 인위로 정원을 만들고 섬 전체를 자신의 왕국인양 즐긴 호방한 공간 사용 전략을 잘 구사했다. 하지만 불과 1년도 안 되어 2차 유배를 당하면서 보길도의 첫 정원 생활은 낙서재 등 극히 일부만 완성한 상태에서 중단되고 만다. ...(중략)...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있다. 연구소와 설계사무소에서 기획부터 설계, 감리에 이르는 실무를두루 익힌 후 지금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93 대전세계엑스포 조경계획 및 설계, 인사동길 재설계, 용산국립중앙박물관 조경설계, 신라호텔 전정 설계 및 감리, 선유도공원 계획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환경과조경348호(2017년 4월호)수록본 일부
  • [시네마 스케이프] 맨체스터 바이 더 씨 봄의 흙은 헐거워지고, 헐거워진 흙은 부풀어 오른다
    봄이다. 형형색색 꽃이 만개하는 계절. 『자전거여행』(문학동네, 2014)에서 김훈은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이렇게 묘사한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 산수유는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 목련은 등불을 켜듯이 피어난다. … 꽃이 질 때, 목련은 세상의 꽃 중에서 가장 남루하고 가장 참혹하다. … 목련 꽃은 냉큼 죽지 않고 한꺼번에 통째로 툭 떨어지지도 않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꽃잎조각들은 저마다의 생로병사를 끝까지 치러낸다.” 보고 나면 가슴 한편이 아린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에서는 스쳐 지나가듯, 창문을 통해 마른 나뭇가지에 달린 꽃봉우리 비슷한 것이 보인다. 내내 차가운 바람과 눈발 날리는 바다 풍경만 보다가 그 단 한 장면에 이르면, ‘아!’ 하는 탄식이 나온다. 여기 보스턴에 사는 한 남자가 있다. 아파트 관리인으로 일하는 리 챈들러(케이시 애플렉 분)는 무표정하고 불친절한 태도로 매일 쓰레기를 정리하고 막힌 하수도를 뚫는다.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 화를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치우던 어느 날,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맨체스터 바이 더 씨’(놀랍게도 도시 이름이다)로 향한다. 형이 죽고 남겨진 조카의 후견인이 되어야 하는 상황, 그는 당황한다. 아직 고등학생인 조카,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돌봐야 한다. “그 유명한 리 챈들러야?” 고향 사람들은 그를 보고 수군거린다. 불쑥 기억을 통해 그가 아내와 함께 세 아이를 키우던 행복한 순간들이 소환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관객은 영화 중반까지 알 수 없다. 그저 그 남자의 공허한 눈빛과 처진 어깨를 바라볼 수밖에. ...(중략)... 서영애는 조경을 전공했고, 일하고 공부하고 가르치고 있다. 상처가 그리 호락호락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한편의 영화, ‘문라이트’. 어떤 선택지도 없는 벼랑에 선 아이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희곡 ‘달빛 아래서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가 원작이다. 영화 초반부에 잠시 등장하지만 소년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후안이라는 조연이 인상적이다. 영화의 주제이기도 한 그의 대사다. “네 삶을 다른 사람이 정하도록 두지 마라.”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
  • [예술이 도시와 관계하는 열한 가지 방식]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제주에서 일이 끝나고 하루 이틀간의 여행을 계획할 때, 한 지인은 내게 공동묘지를 산책해 보라고 권했다. 이에 옆에 있던 또 다른 지인은 몸서리를 치며 시체들이 있는 그런 곳에서 어떻게 산책을 하느냐 했다. 그러나 어찌 생각해보면 내가 일상에서 디디는 모든 곳이 몇 십만 년에 걸쳐 그런 시체들을 켜켜이 품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매일같이 지르밟고 거니는 이 땅에는 온갖 이야기와 살들이 부산스러운 우리 발에 잘 다져진 채로 묻혀 있다. 이 퇴적층은 일상을 사는 우리 눈에는 비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지만, 때때로 스며 올라와 낯선 내음을 풍기거나 삽 아래 적나라하게 파헤쳐진 채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지금도 건물을 짓기 위해 토목 공사를 하다보면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는데, 이렇게 발견되는 것들 외에도 유형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렇다고 기록에 남지도 않은 채 묻힌 사람들의 이야기와 문화의 층위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좋든 싫든 이 땅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과거의 유물과 이야기들은 미래를 향하는 우리의 시선과 어떤 관계를 가질까? 그것은 새로운 것을 그리기에 이미 너무 더럽혀진 종잇장, 또는 상상조차 불허하는 숨 막히는 박제에 불과한 것일까? 실용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든 미적 관심 또는 이념적 관점에 입각한 것이든,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하는 모든 계획의 목표이거나 또는 부수적인 작용인 바. 퇴적층을 깨끗하게 쓸어내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면 우리의 상상력을 장애물없이 펼칠 수 있을까? 그런데 도시에서, 특히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가 축적됐고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그런 곳에서, 시공간적, 사회경제적 맥락으로부터의 무중력 상태가 과연 가능하긴 한 것일까? ...(중략)... 진나래는 미술과 사회학의 겉을 핥으며 다방면에 관심을 갖고 게으르게 활동하고 있다. 진실과 허구, 기억과 상상,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흐리고 편집과 쓰기를 통해 실재와 허상 사이 ‘이야기-네트워크-존재’를 형성하는 일을 하고자 하며, 사회와 예술, 도시와 판타지 등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기술의 변화가 만들어내는 지점에 매료되어 엿보기를 하고 있다. 2012년 ‘일시 합의 기업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를 공동 설립해 활동했으며, 2015년 ‘잠복자들’로 인천 동구의 공폐가 밀집 지역을 조사한 바 있다. www.jinnarae.com * 환경과조경 348호(2017년 4월호) 수록본 일부
    • 진나래[email protected] / ‘일시 합의 기업 ETC’, ‘잠복자들’ 공동대표
  • 크로싱 패럴렐(스) '경계: DMZ 지하 대중목욕탕’ 아이디어 공모 1등작
    지난 2016년 11월 20일부터 2017년 2월 17일까지, 아키아웃라우드arch out loud(이하 AO)는 ‘경계: DMZ 지하 대중목욕탕Borders: DMZ Underground Bath House’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었다. 대상지는 북한과 남한을 가르는 비무장 지대DMZ 한가운데로, 제3땅굴 서쪽에 위치해 개성공단과도 멀지 않은 곳이다. AO는 “DMZ의 지정학적 맥락에 응답할 수 있는 지하 대중목욕탕을 창조하는 것이 과제”라고 밝혔다. 또한 디자인을 통해 군사적 충돌과 레저 활동 사이의 관계, 대중목욕탕이 사회적 상호 관계에 미치는 영향, 건축이 대지를 물리적으로 점유하는 방식, DMZ의 정치적 문제에 대한 건축적 형태·공간의 역할을 탐색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지난 3월 14일 공모 결과가 발표됐다. 심사에는 스탠 알랜Stan Allen(Stan Allen Architects), 마티아스델 캄포Matias del Campo(SPAN Architects), 문훈 소장(문훈발전소), 서예례 교수(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조민석 대표(매스스터디스)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 11명이 참여했다. 1등 의 영예는 전진현, 송민경, 그리고 지강일의 ‘크로싱 패럴렐(스)Crossing Parallel(s)’가 안았다. 2등에는 시아오 왕Xiao Wang과 위티안 왕Yutian Wang의 ‘크로스Cross’, 김연문과 이충효의 ‘프라이머티브 필드Primitive Field’, 북필리픽Vuk Filipic과 안나 무라인카Anna Murynka의 ‘디스로프티 스카이This Lofty Sky’, 스펙터클Spectacle의 ‘워터월Water Whirl’, 저 펑Zhe Peng의 ‘하이파터누스 테르메Hypotenuse Thermae’ 등 다섯 팀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이외에도 가작 열 점과 디렉터스 초이스 한 점이 뽑혔다. 본지는 1등 수상팀의 작품 소개 글을 수록한다. _ 편집자 주 작업 방향 우리는 건축, 도시, 조경 분야의 전문가로 4년여에 걸쳐 ‘세종대로 역사문화공간 설계공모(2015, 공동 작업, 1등)’, ‘서울 어반 디자인 공모(2013, 1등 없는 2등)’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함께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함께 작업한 결과물을 살펴보면 이 모두를 관통하는 일련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경계: DMZ 지하 대중목욕탕’ 역시 그 흐름의 연속선상에 있다. 우리는 대상지의 장소적 특징을 관찰하고, 이로부터 발견한 고유한 상황과 질서를 개념적으로 재조직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이후 재조직한 상황과 질서를 물리적 형태로 변환하는 과정을 통해 공간을 구성했다. 프로젝트에서 요구한 프로그램은 구성된 공간의 특징에 맞추어 배치했다. 크로싱 패럴렐(스)도 위와 같은 작업 방향을 따랐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사물이나 건물이 없는 DMZ에서는 도시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영역화된 장소의 특징이나 질서를 관찰하기 어려웠다. 대신 남한과 북한 사이에서 반복되는 긴장‑화해 관계가 DMZ라는 거대한 물리적 환경을 유지해온 힘 또는 질서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러한 양가적 감정의 교류를 공간적으로 드러내는 이중 나선 구조를 기반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관객과 배우라는 상반된 역할을 통해 만들어지는 연극이라는 형식을 프로젝트의 서사적 기반으로 설정한 후 생각을 발전시켜 나갔다. ...(중략)... *환경과조경348호(2017년 4월호)수록본 일부
  • 위치·공간 정보 기술로 엿본 세운상가의 미래 도시재생의 기술: 미로, 회로, 여로’, 세운콘퍼런스
    세운상가 일대가 새 옷을 갈아입을 준비로 분주하다. 지난 3월 2일 서울시는 ‘다시·세운 프로젝트 창의제조산업 활성화 대책’을 발표하며 세운4구역의 사업 정상화를 선언했다. 대규모 철거 재개발 계획과 용적률 상향 문제로 오랜 기간 표류해온 세운4구역을 3D 프린터, 웨어러블 디바이스 등 최신 기술을 활용하는 스타트업 기업과 함께 4차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만들 계획이다. 세운4구역을 포함해 세운 상가 주변은 171개 구역으로 분할 개발되어 산업과 주거, 문화가 복합된 메이커 시티Maker City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될 예정이다. 세운4구역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오르며 세운상가에 활력을 불어넣을 다양한 프로젝트와 이벤트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2월 27일부터 3월 2일까지 세운상가에서 열린 ‘한 걸음 더 세운’도 이 중 하나다. 그동안의 세운상가 재생 사업 성과를 발표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축제에는, 지난해 진행된 주민공모사업과 기술협업프로젝트의 성과물을 전시하는 ‘세운쇼케이스’, 세운상가 일대를 주제별로 돌아보는 투어 프로그램 ‘세운 사파리’, 세운상가의 기술을 주제로 토론하는 ‘세운콘퍼런스’가 마련됐다. 도시재생의 기술: 미로, 회로, 여로 종묘와 세운상가를 잇는 ‘다시·세운 광장’, 건물 곳곳을 연결하는 ‘공중 보행교’, ‘플랫폼셀’ 등 침체된 세운상가 일대를 활성화할 공간이 오는 8월까지 조성될 예 정이다. 새로운 하드웨어가 마련되면 이전과는 다른 주체들이 세운상가로 유입될 것이다. 이들은 세운상가를 구성하고 있는 공간과 사물 그리고 사람들과 어떤관계를 맺게 될까? 좀 더 많은 또 다양한 사람들이 세운상가를 방문하게 만들기 위한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2월 28일 세운콘퍼런스의 일환으로 열린 ‘도시재생의 기술: 미로, 회로, 여로’는 위치·공간 정보 기술을 통해 그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중략)... *환경과조경348호(2017년 4월호)수록본 일부
  • 굴취맨, 하자는 ‘줄고’ 나무 이식은 ‘빠르게’ 지아이조경건설의 한국형 굴취기기
    나무 이식을 잘하는 기계가 있다. 바로 ‘굴취맨’이다. “나무 이식을 잘한다는 것”은 적은 인력을 투입해 시간 당 많은 나무를 옮겨 심는다는 뜻이지만, 이후 하자가 적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다. 나무를 캐서 옮기는 과정이 물건 옮기듯 단순하지 않은 이유는 살아있는 나무를 죽이지 않고 운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무의 생명과 연관된 섬세한 작업을 돕는 장비 ‘굴취맨’의 작업 비결을 알아보자. 굴취맨의 나무 이식 과정 보통 나무를 이식하는 과정은 이렇다. 우선 나무 근원직경 3∼5배 크기로 땅을 파서 뿌리분을 뜬다. 그리고 분이 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녹화마대나 가마니로 분을 감싼다. 이것을 새끼로 단단히 감아서 이식할 장소로 운반하고, 땅을 파서 심는다. 이 과정에서 잔뿌리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해야 옮긴 후에도 수분을 잘 공급받아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굴취맨의 작업은 이렇다. 우선 이식할 나무가 굴취맨의 중앙에 들어오도록 위치를 조정한다. 그리고 굴취맨의 특수 삽날을 하나씩 땅속에 삽입하여 분 모양으로 나무를 담아낸 뒤, 함께 들어 올리면 분뜨기가 된다. 들어 올린 나무를 가지고 이식할 장소로 이동한 뒤, 미리 굴취맨이 분 모양으로 파 놓은 구덩이에 나무를 내려놓으면 작업이 완료된다. 굴취맨의 방식이 기존 작업과 다른 점은 우선 특수 날을 이용하기 때문에 땅을 파기 쉽고, 분을 떠서 그대로 이동하기 때문에 녹화마대로 감싸거나 새끼로 감아주는 작업이 생략된다. 또한 수목지주장치가 달려 있어서 운반 시 나무를 잡아주기 때문에 나무의 손상이 적다는 점이다. ...(중략)... *환경과조경348호(2017년 4월호)수록본 일부
  • [편집자의 서재] 상냥한 폭력의 시대
    스물여덟 살. 그중 스물다섯 해를 한 동네에서 보냈다. 몇 번 이사를 다니긴 했지만, 걸어서 십여 분이면 오갈 수 있는 거리였다. 덕분에 동네가 변하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며 자랐다. 초등학생 시절 동네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시장 한가운데 있던 교회였다. 그런 교회의 첨탑이 중학교에 입학할 즈음 다른 건물에 가려지기 시작했다.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이 사거리 모퉁이를 차지했고, 주상 복합 건물이 들어섰다. 동네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중학교로 향하는 구불구불한 골목에 벽보가 붙기 시작한 때도 그 무렵이었다. 재개발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빼곡하게 들어찬 벽보가 담벼락을 채웠다. 때론 붉은 스프레이로 ‘투쟁’, ‘생존’, ‘죽어도 못 나간다’ 등 뉴스에서나 볼 법한 단어와 문장들이 적히기도 했다. 그 모습이 왠지 무서워 혼자 골목을 지날 때면 걸음을 서두르곤 했다. 골목은 주기적으로 정돈되고 다시 채워졌다. 덜 떼어진 벽보 귀퉁이가 남은 자리에 다시 벽보가 붙고 붉은 글자 위에 페인트가 덧칠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뒤 골목은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벽보의 끄트머리가 헤져 팔락거리고 붉은 색 글자가 바래 흐릿해지자, 나는 혼자 골목 걷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 풍경에 익숙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벽보와 골목을 메운 단어가 갖는 힘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제 그 자리에는 모양새가 제각각인 주택 대신 반듯반듯한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앞을 지날 때면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붉은 스프레이를 들고 숨죽여 골목을 누볐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담벼락의 주인들이 벽보를 떼어 내고 페인트칠을 하는 모습을 보며 느낀 불편함은 어쩌면 정이현이 말하는 ‘상냥한 폭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로 이루어진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정이현 작가가 『오늘의 거짓말』(2007)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단편집의 제목이다. 2013년부터 2016년 5월까지 쓴 일곱 편의 단편을 묶은 책으로, 그는 이 책을 “피를 흘리지는 않지만 고통 속에 놓여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고통을 각각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관찰해가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스릴러나 험난한 인생사를 다룬 소설에 등장할 법한 ‘고통 속에 놓여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각종 학원 버스를 갈아타는 초등학생, 피곤이 가득한 얼굴에 미소를 띠고 손님을 맞는 아르바이트생, 날이 갈수록 오르는 식재료 값에 한숨을 쉬며 퇴근하는 직장인, 자녀가 찾아오는 걸 본 적이 없는 이웃집 할머니 등 현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아질 기미가 없는 삶에 지친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도치 않은 폭력을 행사한다. 물리적인 폭력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의 고통을 모른 척하고 때때로 자신의 고통을 덜기 위해 다른 이의 죽음을 외면하는 등 상냥한 외피를 뒤집어쓴 폭력은 주먹보다 서늘하고 잔인하다. “예의 바른 악수를 위해 손을 잡았다 놓으면 손바닥이 칼날에 쓱 베여 있다. 상처의 모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누구든 자신의 칼을 생각하게 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책 속의 이야기는 나도 몰랐던 내 안의 폭력성을 발견하게 한다. 이제 열여섯 살이 된 어린 딸이 낳은 미숙아의 수술 결정을 미루며, 인큐베이터 안에서 죽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 섬뜩함을 느끼면서도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엄마의 심정에 일부 공감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고개를 돌려 버리면 쉽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 수 있기에 얼마나 많은 일들을 외면해 왔을까. 취재를 위해 방문한 세운상가가 어렸을 적 보았던 동네의 모습과 겹쳐 떠오른다. 재개발 논란과 몇 십 년간 계속된 상인 그리고 주민과의 갈등 끝에 거대한 주상 복합 건물은 간신히 철거를 면하게 됐다. 지난 3월 세운4구역 사업의 정상화가 발표되며 세운상가와 그 일대를 대상으로 한 각종 공모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상가의 일부는 허물어져 새롭게 태어날 것이고, 상가 곳곳에는 4차 산업혁명을 실험할 단체가 들어서는 중이다. 하지만 여전히 세운상가를 검색하면 기존 상인의 입장과 의견을 포용하지 못해 불만을 사고 있다는 기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도시재생이라는 명목으로 세운상가에 상냥한 폭력을 행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운상가가 신중한 방식으로 재생되기를 기대한다. 벽보를 무시하고 붉은 아우성을 덮어버리기보다, 모든 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느리게 나아가기를. 세운상가는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 갈 것”이니까.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세운상가는 세운상가의 속도로 살아가 시대에 맞추어 천천히 소멸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 [CODA] 아파트
    건설사에 다니는 J는 광주에서 고층 아파트를 짓는 현장에 있다. 시간되면 내려갈게 라는 공수표 날리기를 1년여. 이번에는 진짜라고, 당장 내려가 화창한 토요일 오후 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연도 보고 광주 시내도 함께 누비자고 했다. 이번에는 J가 난색을 표한다. 샘플하우스 오픈 준비 때문에 바쁘단다. 그래, 괜찮아. 일이 먼저지. 앞으로 계속 바쁠 일만 남았다구? 그래, 다음에는 너 틈날 때 내가 딱 맞춰 날아 갈게. 그러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우린 맨날 이렇게 고달프냐. 그래서 어디냐고? 나 예술의전당.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곧 끝난다잖아. 근데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코르비 옹이 이렇게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거야? 전시장에 들어가려면 1시간이나 줄을 서 기다리란다. 젠장, 토요일 오후 데이트 장소가 여기밖에 없는 거니! 르 코르뷔지에 전시가 장안의 화제이긴 한 모양이다. 평소 미술과 디자인 분야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했던 동생이 이 전시는 꼭 봐야 한다며 강력하게 권유했으니 말이다. 요즘 주말에 스케치를 배우는 동생은 전시회에 다녀오더니 르 코르뷔지에는 대단한 사람이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건축 설계를 했던 나의 부친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 남매가 동네 미술 학원에서 그려온 그림들을 보시곤 일찌감치 남동생을 포기하고 나에게 꿈을 물려주려고 하셨다. 안타깝게도 나 역시 그쪽으로 큰 재능이나 열정이 없었다는 점이 부녀지간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화가로서 르 코르뷔지에를 재조명하고 있는 전시를 보니 동생이 받고 있는 취미 미술 수업에서 왜 건축가 전시를 찾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르 코르뷔지에는 처음부터 자신을 화가로 여겼다. 그는 건축가이기보다는 위대한 화가로 인정받기를 바랐다. …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을 때만, 그는 자신을 건축가로 생각했다.”(앙드레 보겐스키) “내가 건축이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내 그림이라는 운하를 통해서였습니다.”(르 코르뷔지에) 마치 한 편의 자서전처럼, 혹은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전시는 친절하게 화가이자 건축가로서 그에 대해, 또 형에게 빼앗긴 어머니의 사랑을 평생 갈구했던 아들이자, 뮤즈였던 아내 이본느를 사랑했던 한 남자로서 르코르뷔지에에 대해 이야기한다. “난 롱샹 성당에 꼭 가보고 싶어.” 동생은 그의 그림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며 롱샹 성당이 무척 감동스러웠다고 한다. “하긴, 전에는 합리적이고 미니멀한 빌라 사부아를 설계한 사람과 시적인 롱샹 성당을 설계한 사람이 동일인이라는 점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평생 그림을 그리고 게 껍데기 따위를 모으며 형태를 연구했다고 하니, 이젠 좀 납득이 가긴 해.” 동생은 르 코르뷔지에가 아내 이본느를 위해 지었던 4평짜리 오두막 카바농Cabanon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정신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게 틀림없어.” 동생은 최소의 기능만을 담았던 단출한 카바농에서 초가삼간이나 정자를 지어 마음을 가다듬고 자연을 즐겼던 조선 선비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일까. 여하튼 큰 감동 받은 동생이 사들인 비싼 도록을 휘휘 넘겨보았다(동생아, 패킹도 안 뜯고 책장에 꽂아둘 거면 책은 왜 사니?).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가 영향을 미친 것이 어디 건축 양식뿐이랴. 전 세계의 천재들이 모여든다는 파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항상 동그란 안경을 쓰고 나비넥타이에 양복을 차려입으며 자신을 브랜딩했던 그의 사진을 보니(마치 스티브 잡스가 검정색 터틀넥 니트와 청바지, 운동화로 스스로를 아이콘화했던 것처럼), 여전히 많은 르 코르뷔지에의 후예들이 동그란 안경을 즐겨 쓴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러나 가장 큰 상념을 안겨 준 것은 아파트를 창안한 혁명가로서 르 코르뷔지에였다. 어렵게 비집고 들어간 전시장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수백만 서민의 거주지를 해결한 공동 주택(아파트)을 창안해 집이 없는 이들의 삶을 바꾸다”란 문구였다. 지면을 녹지로 활용할 수 있게 한 필로티, 옥상 정원, 인간이 최소한의 공간에서 불편함 없이 움직일 수 있는 최적의 비율 모듈러가 적용된 마르세유 유니테다비타시옹(1952년 준공)은 세계 최초의 현대식 아파트의 모티브가 되었고,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정작 유럽에서 건물을 고층화해 지상을 녹지 낙원으로 조성하겠다는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계획이 실패했다고 평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난 나는 아파트 단지를 고향처럼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번 달 칼럼을 쓴 송준규가 과천의 아파트 단지에 느끼는 애착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오래된 아파트 단지와 그곳에서 몇 십 년을 자란 나무를 보면 편안함을 느낀다. 그 아파트 단지들이 재건축되고, 내가 다녔던 학교가 초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로 둘러싸인 격변을 목도하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다. 지금은 코르비 옹이 서민 주거를 해결하기 위해 창안했다는 아파트 한 채를 서울에 마련하지 못한 채 새로운 변화를 지켜보고 있다. 4~5년 전쯤 내가 새로 정착(?)한 동네는 망원동이다. 조용한 서민 동네이면서, (홍대나 상수동 등지에서 높은 임대료 때문에 밀려난) 개성 있는 상점이나 카페들이 군데군데 숨어있는 묘한 분위기가 좋았다. 골목길이 있고 세탁소와 철물점 그리고 전통 시장이 있는, 거리에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동네다. 아파트는 장만 못했지만 이런 동네 생활이 좋다고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러나 망원동의 변화는 이미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예견되어 있었다. 요즘은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는 ‘망리단길 싫어요’ 서명 운동 글이 올라왔다. 최근 몇몇 TV 프로그램과 신문 등에서 망원시장 일대를 ‘망리단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가로수길이나 경리단길과 같은 소위 핫 플레이스로 소개하면서 언론에서 붙인 이름이다. 시장 주변 골목에는 젊은 창업자들이 차린 트렌디한 음식점과 프렌차이즈 카페들이 점점 많아지고, 주말이면 맛집 탐방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서명 운동을 제안한 주민은 망원동이 주목받으며 임대료가 상승하고, 음식점과 카페가 오래된 원주민들의 근린 생활 시설을 밀어내고 있음을 우려하고 있었다. “반짝 뜨고 지는 핫플레이스가 아니라 모두가 오래오래 살고 싶은 동네이고 싶다”는 바람에서 ‘망리단길 안부르기 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좋아요’를 꾹 누르고 서명을 했지만, 과연 변화를 막을 수 있을까. 근처 합정동에 얼마 전 준공된 높다란 새 아파트를 보면서 착잡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골목길이 있는 동네의 정취 역시 오래 누릴 수 없다면, 늘 날 어린애 취급하며 걱정했던 J의 말처럼 진작 아파트 분양 정보나 열심히 찾아볼 걸 그랬나 후회도 슬며시 고개를 든다.
  • [PRODUCT] (주)예건 도피오 벤치 출시 단숨함이 주는 강렬함
    (주)예건이 도피오 벤치Dopio Bench를 새롭게 선보였다. 러프한 스케치처럼 강렬한 시각적 인상을 벤치의 형상으로 구현했다. 대개 러프 스케치는 주곡선과 이를 보조하는 덧곡선으로 이루어지는데, 제품의 모든 디테일을 표현한 도면이나 사진보다 그 특징을 명료하게 전달한다. 콘셉트와 도피오의 유래 도피오Dopio는 두 잔의 에스프레소가 들어가는 커피를 뜻하는 이탈리아어인데, 일반 커피에 비해 풍미가 짙고 끝 맛의 여운이 오래간다. 강렬한 인상의 드로잉처럼, 두 잔의 에스프레소가 담긴 도피오의 짙은 정체성이 벤치의 디자인 콘셉트와 일부 유사하여 도피오라 명명했다. 재질을 통한 콘셉트의 구현 펜 드로잉의 주곡선과 덧곡선의 리드미컬한 선형을 구조적 형상으로 구현한 벤치다. 알루미늄 프레임의 측면을 에지로 다듬었는데, 키네틱kinetic 요소를 적용해 펜의 날렵하고 유연한 흐름을 금속의 유체 흐름으로 시각화했다. 도피오의 매력은 전체적인 외관의 미적 요소뿐만 아니라 디테일 속에 숨어 있다. 두 선이 만나고 분리되는 유기적인 홀hole의 정교한 마감은 벤치 전체 선형의 미려함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사용성과 안정성에 대한 디테일 등받이는 척추선과 유사하고,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103도(권장 100~110도)로 설정했다. 103도로 기울어진 등판은 이용자가 착석했을 때 편안함과 시각적인 안정감을 준다. 생산성과 가격 적정성에 대한 디테일 벤치 좌대 금속부의 돌기는 목재 좌대의 설치를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기능적인 측면과 더불어 시각적인 미감을 고려했다. 대부분의 일체형 좌대 목재 교체 소모비는 크지만, 도피오의 좌대는 개별 목재를 결합해 각 목재의 심미적인 디테일을 살릴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치와 교체를 개별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기성 벤치와 비교해 경제성과 시공의 용이성을 확보했다. 지면 고정부의 디테일 도피오의 다리 내측에 일체화된 볼트 포켓bolt pocket을 적용해, 시공 후 눈높이에서 투박하게 보이는 볼트 체결부의 외부 노출을 최소화해 기성 벤치와 차별화했다. TEL. 031-943-6114 WEB. www.yekun.com
    • 예건 / 예건
  • [에디토리얼] 광장의 계절을 보내며
    광장의 계절이다. 지난 가을과 겨울 광화문광장을 촛불로 타오르게 한 집회 참가자 연인원이 3월 초면 1,50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이 차디찬 계절의 뜨거운 광장을 한 외신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민주주의라 평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도시 문화에서는 낯선 공간이었던 광장에 그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 호 특집 ‘광장의 재발견’의 배경에는 최근의 국정 농단과 ‘광화문광장 현상’이 광장이라는 공간과 문화에 대한 다각도의 해석을 요청하고 있다는 진단이 자리한다. 그러나 도시의 그 어느 곳보다도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와 활동이 교차하는 공간인 광장을 어떻게 설계하고 경영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이번 특집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이다. 이번 광장 기획은 또한 월간 『환경과조경』이 공동 주최하는 제14회 대한민국 환경조경대전과 켤레를 이룬다. 공모전 취지문을 아래에 옮긴다. “광장보다 골목과 길이 더 친숙했다. 꽤 오랫동안 광장은 우리의 것이 아닌 서구의 것이었다. 광장과 같은 빈 땅을 필요로 하는 집단적 종교 활동도 없었고, 군중의 집합이 동반되는 시민 사회의 성숙 역시 뒤늦게 발현되었다. 사람들은 가로의 일종인 선형의 시장에서 만났고, 아이들은 골목에서 뛰어 놀았다. 개인이나 마을 단위의 대소사를 치르기 위해서는 마당이면 족했다. 그도 아니면 사람들은 당산나무 그늘을 찾았다. 우리네 광장의 역사가 짧은 까닭이다. 한강 백사장과 여의도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관제 집회와 종교 집회의 시기를 거쳐, 본격적으로 광장이 주목받게 된 계기로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꼽지 않을 수 없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대규모 거리 응원도 광장의 흥분을 온 국민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세기가 바뀌기 시작할 무렵부터 전 세계적으로 광장은 공원과 유사한 하나의 오픈스페이스로 변신하며, 그 고유한 특질을 잃어갔다. 공원 같은, 광장 아닌 광장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고,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여의도광장은 여의도공원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서울광장엔 잔디가 깔렸다. 청계광장 역시 일상적 이용에 초점이 맞춰졌다. 정부도, 시민도 비일상적인 대규모 집회용 광장보다는 녹색 옷을 입은 일상적인 오픈스페이스를 선호한 탓이다. 광활한 비움보다는 불확정적이며 유연한 설계가 더 각광받았다. 그 사이 오프라인에서의 직접적 만남은 온라인상에서의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 이른바 SNS로 대체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교류할 수 있는 플랫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난 것에 비례해서 광장에는 녹음을 드리우는 녹색의 면적이 커져갔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 광장의 의미와 쓰임은 무엇일까? 혹은 무엇이어야 할까? 광장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신선한 모색을 초대한다. 작아져만 가던 광장을 다시 호출한, 슬프고도 우울한 시국은 ‘광장의 재발견’에서 절대적인 단서가 아니다. 우리는 이 엄중한 시기를 지나 다시 우리의 일상을 살아가야 하니까.” 특집의 첫 번째 글 ‘아고라포비아’에서 박승진 소장은 설계자들이 갖는 광장공포증을 다루지만, 광장 설계를 둘러싼 거의 모든 핵심 쟁점들도 샅샅이 조회하고 있다. 그의 말처럼 “광장은 대중 민주주의의 상징이면서 전체주의의 통치 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광장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사용된다.” 그는 광장공포증을 극복하는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며 글을 맺는다. “좋은 광장을 만드는 데 있어서 위대한 설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열정적인 협력 그룹, 뛰어난 집단지성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편집자로서 가장 굵은 형광펜을 그은 문장은 “광장은 다수의 군중을 위해 존재하지만, 외로운 도시 산책자를 외면하지 않는다. 어쩌면 도시에 더 많은 광장이 필요한 이유다”였다. 전상인 교수는 ‘광화문광장인가, 광화문극장인가?’에서 도시의 계획·설계와 문화라는 관점으로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의 몇 가지 쟁점을 검토한다. 이 글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광화문광장은 광장이 아니라 극장”이라는 주장이다. 광화문광장은 “그 자체의 전통으로 빛나는 시민의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연출과 기획을 기다리는 미장센”이며, 그것이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의 장이 될지, 푸코가 말하는 권력의 장이 될지 선택은 우리의 몫”이라는 해석은 토론을 초대한다. 반면, ‘광장, 군중, 이벤트’에서 김세훈 교수는 최근의 평화 집회가 광장이라는 도시 공간을 재발견할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고 진단하고, “다양한 집단의 사회적 활동을 풍부하게 담을 수 있으면서 동시에 즐겁고 쾌적한 광장, 그리고 이벤트에 몰입하는 경험과 함께 자유로운 참여 선택의 여지를 주는 광장”을 위한 과제를 탐색한다. 특히 ‘군중관리학’에 토대를 둔 정교한 광장 설계와 이벤트 계획의 가능성을 짚는다. 광장을 광장답게 쓰는 방식이 정해져 있다, 정해져 있지 않다는 지점에서 두 필자의 견해가 엇갈린다. 특집에는 남기준 편집장의 ‘‘광장의 재발견’에 단 편집자 주’와 편집부의 조사와 토론을 바탕으로 김정은 편집팀장이 갈무리한 ‘편집부가 추천하는 광장 10선’을 함께 싣는다. ‘광장 10선’은 지난 10년간 『환경과조경』에 실린 광장 프로젝트 전수를 놓고 에디터들이 열띤 토론과 투표를 통해 선정했다. 환경조경대전 출품을 준비하는 독자들에게 광장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실험을 접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한다. 이번 특집 ‘광장의 재발견’은 완성본이 아니다. 지금, 여기, 한국 사회와 조경계의 교집합이 있다면 그 중심에 광장이 놓이기에, ‘광장의 재발견’은 현재진행형 프로젝트다. 광장을 다시 생각하며 도시사, 건축사, 조경사의 내로라할 고전들을 계속 뒤적거리지만, 그래도 자꾸 손이 가는 책은 최인훈의 『광장廣場』이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 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누구나 밑줄 그어놓았을 1961년 판본의 서문 한 대목이다. 희망의 새봄을 맞는 『환경과조경』에 몇 가지 뉴스가 있다. 김정은 편집팀장이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기쁜 소식을 먼저 전한다. 논문 주제는 한국 근대 유원지의 공간문화사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정확하게 조사하지는 않았지만) 국내 조경과 건축 전문지 역사상 최초의 박사 기자가 탄생한 셈이다. 하지만 2014년 6월호부터 합류해 서른 세 권의 잡지를 만든 조한결 기자가 대학원 진학을 위해 퇴사한다는 아쉽고 섭섭한 소식도 있다.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조 기자는 『환경과조경』의 지면 혁신을 실천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잡지 곳곳을 업그레이드시킨 유능한 편집자였다. 미술사를 전공할 그의 새로운 항해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편집자가 아닌 필자로 『환경과조경』 지면에 곧 등장하리라 기대한다.
    • 배정한[email protected] / 편집주간, 서울대학교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