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인 HLD 대표 ([email protected])
이 글은 ‘기묘한 이야기’에서 이어진다. 지난 글에서는 공원이 조경가가 하는 과업 목록에 없는 것, 자기 임기 중에는 번거로운 일이 안 일어났으면 하는 발주처, 조경 면허는 있지만 조경 부서는 없다고 하는 회사, 미필적 계약 연장과 이로 인한 피해, 소규모 회사에 더 불리해진 가산점 기준, 말아먹어도 점수가 되는 실적, 아무리 잘해도 싼 가격을 이길 수 없는 평가 제도 등을 살펴보았다. 이상한 일을 이상하다고 말해보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자칫 이를 그저 그런 푸념으로 치부되기 쉽기에,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1. 너는 왜 계속 손님이냐, 돈 내고 가입하고 주인 하라
조경 분야에 이미 많은 조직이 만들어져 있는데 아마 많은 사람이 어떤 단체가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거나, 안다 해도 이 단체들의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사실 ‘협회’가 정말 잘 돌아가는 경우는 조경이나 한국을 떠나서도 매우 드문 일인 듯하다. 협회와 같은 조직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뭉치기는 했지만, 참여나 활동이 강제되지 않기 때문에, 조직의 태생부터가 계 모임보다도 적극적 참여에 대한 희망을 품기 어려울 수 있다. 손님처럼 앉아있고, 방관자처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이 구성원의 절대다수를 이루는 가운데, 늘 나서는 똑같은 사람 (STP, same ten people)의 목소리에 휩쓸리기 쉬운 구조라는 것이다.
소극적인 구성원에게 그저 뭐라고만 할 수 없다. 먹고살기도 녹록지 않으면 정치 활동에 참여하기 쉽지 않다. 또, 너무 순수한 사람은 부조리와 불합리, 불공정을 보면서 더 빠르게 지쳐나간다. 애써 나서보는 사람들도, 방관하는 사람들이 쉽게 내뱉는 비판이나 고질적인 무관심 속에서 겨우 자리만 지키는 경우가 많다.
나는 내가 정말 별로 탐탁지도 않아 하는 어느 정당에 몇 년 전부터 꼬박꼬박 당비를 납부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응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창구를 만들어 놓기 위해서다. 주요한 몇 개 사안에 대해 권리 당원으로서의 투표권을 행사한다. 지방자치단체 후보로 이미 누가 나왔을 때, 누구한테 흠이 덜 있나 고민해봐도 몰라서 연필 굴려 투표해 본 적이 있나? 그럴 때 이 후보는 누가 경선에서 뽑은 것인가, 내가 그때 경선에서 더 좋은 사람을 뽑을 수는 없었을까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물론 경선 후보를 고를 때의 고민도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평소에 정치적 의견이라고 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찍을 사람 없다고 한탄하는 얄팍함에서는 조금 벗어날 수 있고, 내가 속한 정당이 허튼짓할 때 탈퇴나 후원 중단이라는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월 몇천 원의 당비는 안 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학회도 있고, 협회도 있고, 조경이상도 있고, 이제 조경가협회가 발족한다고 한다. 조경계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면서 대체 이런 단체는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는가? 지난 회장을 옆에서 잘 보필한 사람이 차기 회장으로 내정되는 방식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러다 보면 역량이 턱없이 부족한 사람이 단체의 회장을 맡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는가? 누가 왜 회장이 되고, 누가 임원으로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이 단체가 조경이라는 이름으로 어디서 어떤 입장을 표명하는지에 입김(say)을 갖고 싶다면, 단체에 회비를 내고 가입해 주인이 되시라. 밖에서 궁금해만 하거나 뒷짐 지고 훈수를 두는 것은 참여가 아니다.
놀랍게도 글을 쓰다가 나 역시 협회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반성한다.
#2. 기다릴 거 없다. 목소리 내기
새로운 단체가 생긴다고 해서 갑자기 조경계에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 생겨서 정리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그냥 그때그때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공공 프로젝트는 입찰공고 이전에 사전규격공고 기간이 있다. 얼마 전 ○○시에서 낸 한 기본계획 용역의 사전규격공고을 보니 과업내용서는 있는데 입찰 참가 자격이나 평가 기준을 알 수 있는 제안요청서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입찰에 참여하려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전규격공고는 크게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나라장터에 입찰참가자격 등을 공개해달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며칠 뒤 해당 부서에서 전화가 와서 이 입찰은 ‘지역으로 참가를 제한할 것’이라는 답변을 해왔다. 어느 전문분야가 들어갈 수 있는지를 말 안하고 지역업체로 한정한다고만 설명을 하니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니 관심 끄시오’라는 답변처럼 들렸다.
이 용역은 선형공원 기본계획이다. 결국 측량 및 도로 분야 업체를 대상으로 최종 공고가 나왔다.
사전규격공고에 올리는 의견 중 요즘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공공측량 제도 이행 절차 기준 명기요청 의견서다. 관련 있는 거의 모든 용역의 사전공고에 같은 의견서를 공간정보품질관리원의 이름으로 제시하고 있다. 공고 내용 중 공공측량 관련 법령이 요구하는 절차를 미준수한 것이 뭐가 있는지, 법령 근거가 무엇인지, 반영 예시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이 단체가 제시한 의견이 다 맞는지나, 이에 따른 조치가 충분한지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어떤 분야는 이렇게 그 산업의 전문성이 사회에 쓰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을 참고할 수 있다. 조경협회나 조경가협회에서도 이러한 노력을 곧 공식적으로 시작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이것은 협회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공식적인 방편이 마련되기 전에 개별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누구나 먼저 해도 된다.
#3. 발주처랑 같이 일하기
Michael Van Valkenburgh의 책
이 편지가 신선하게 느껴진 것은 발주처가 설계자를 대하는 태도나 매너, 유려한 문장 때문만은 아니다. 편지에는 발주처가 이 공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이 꽤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뭘 만드시오, 어떤 기능을 담으시오, 뭘 고려하시오 등의 기술적 측면보다는 실제 이 공간이 방문자에게 어떤 경험을 주면 좋겠는지에 대한 철학이 담겨있다. Anne Hawley의 편지를 읽고 함께 대상지를 둘러본 Michael Van Valkenburgh는 방문자를 유혹하고 그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하는 “선물”과 같은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발주처의 생각을 어떻게 조경을 통해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했고, Monk’s Garden이 ‘건물 안에서 일어나는 집중으로부터의 해방’, ‘바깥을 거닐도록 하는 재밌는 초대’가 되도록 설계했다고 밝히고 있다.
물론 발주자의 종류는 다양해서, 소유자, 발주자, 관리자, 사용자가 다 다르기도 하고, 이 중 어떤 발주자와 일하고 있느냐에 따라 발주자와 할 수 있는 대화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숙제 검사자’형 발주자를 만난다. 숙제 검사를 통해 틀린 것을 잡아내고 ‘꾸중’을 하는 것은 잘하는데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에 대한 생각은 없는 경우도 많다. 그것도 자기가 낸 숙제가 아닌 경우가 많아서 이 숙제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숙제를 잘했다고 평가하는 기준이 그 프로젝트를 위한 최선의 안이냐 아니냐보다는 ‘나에게 숙제를 내준 사람’에 해당하는 발주처 내 상사에게 꾸중을 덜 듣거나 책임을 덜 질 수 있느냐에 있기도 하다.
‘껍데기형’ 발주자도 있다. 무슨 말인지 설명하려면 우리가 하는 조경 서비스업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임”이나 “위탁”은 발주처가 권한이나 업무의 일부를 용역사 등에 주어 수임자나 수탁자가 자기의 권한으로 행사하게 하는 것이나, “대행”은 대행자가 실질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더라도 그 효과는 원 권한자인 발주자가 직접 행사한 것처럼 보게 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미세하게 “대리”는 원 발주자를 위한 것임을 표시하고 대리자가 자신의 명의로 권한을 행사하나, “대행”은 원 발주자의 명의로 권한을 행사하되, 사실상의 실무는 대행 기관이 하게 하는 차이가 있다.
건축도 마찬가지인데, 인허가 업무 등에 드물게 대리 또는 대행의 성격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조경가가 수행하는 서비스는 위임이나 위탁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계약서의 과업 내용과 책임소재를 토대로 보면,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위임이나 위탁 성격의 업무이고 이에 대한 대가만을 받고 있다.
그런데 간혹 자기 일을 대행하라고 일을 떠미는 발주자들이 있다. 내부 보고 문서를 작성해 달라고 템플릿을 던져준다든지, 조경설계 공간을 마주하고 있는 상가가 어떤 비즈니스 모델이어야 할 것 같은지 의견을 내라고 하던지, 다른 공종 컨설턴트와 미팅을 주관하라든지 하는 것들이다. 수행 프로젝트와 관련된 내부 보고 문서에 들어갈 자료를 활용 가능한 형태로 추출해준다거나, 조경설계를 할 때 상가의 비즈니스 모델과 방문자 특성을 충분히 고려해서 하는 것, 다른 공종과의 설계 방향을 협의하고 간섭이 생기지 않도록 검토하는 것 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자는 사실 생각해보면 발주자 자신의 일이다. 떠넘기는 것은 갑질이고, 무능력의 표출이다. 발주자의 의무도 우리가 다 한다면 발주자 자신은 없어도 되는 껍데기 아니겠는가?
조경도 대리나 대행에 해당하는 업무를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좀 더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이에 따른 대가와 권한이 함께 필요한 일이지, 위임과 위탁만 한 상황에서 필요할 때마다 본인 일을 떠넘기는 것, 발주자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이다. 애초에 어떤 프로젝트가 시작될 때, 조경가가 원래 뭔가 할 일이 있는데, 감독자가 필요해서 발주자한테 관리·감독을 요청한 것이 아님을 생각해보자.
숙제 검사자 형이나 껍데기 형 발주자가 난무하다 보면, 발주처에는 조직적인 지혜가 쌓이기 어렵다.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노하우는 용역사에게 남고, 발주처에서는 기껏 이전 용역사가 남기고 간 자료를 선례로 제시한다. 발주처에 시스템이 있고 템플릿을 제공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만 일을 하다 보면 아마 발주처는 편의를 위해서라도 ‘말아먹었지만 그래도 해 본’ 사람이 ‘정말 잘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람’보다 좋을 수 있다. 잘하는 놈보다 해 본 놈을 계속해서 뽑다 보면 덩치 큰 고인 물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차피 직접적 소유자나 사용자가 아닌 이들은 정말 좋은 공간이 만들어지는지, 이 공간의 사회적 함의가 무엇인지 등을 생각하고 수호할 동기가 애초에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숙제 검사자나 껍데기를 벗어난다면 그들 스스로 하는 일이 더 즐겁고 보람찰 것이고, 우리는 같이 고민하고, 함께 노력하면서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이런 발주처를 몇 만나게 되어 참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4. 멋있어져라
갑과 을은 본래 부정적인 말이 아니지 않은가? 처음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을이란 말이 기분이 나빠 갑, 을 대신 발주자와 설계자 등으로 바꾸기도 했었는데, 사실 문서작성 편의상 A, B라고 표현한 거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너무 예민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단, ‘갑질’은 좀 다르다. 발주자가 계약 관계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다고 판단하여 권한을 남용하거나, 우월적 지위에서 비롯되는 사실상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상대방에게 행하는 부당한 요구나 처우를 ‘갑질’이라는 말로 폄하해 부르는 것처럼, 이를 바보같이 당하고 있는 ‘을질’은 과연 괜찮은가를 이야기하고 싶다.
자문회의에 가보면 을이 자문위원들에게 혼나고 있다. 갑은 자문위원에게 미진한 발표를 들으러 모시게 되어 죄송하다고 사과한다. 을은 ‘잘 검토하여 반영하겠다’는 정해진 답을 하고 최대한 평화롭게 회의를 끝낸다. 발주자가 자신의 판단을 두려워하면서 책임회피의 방식으로 자문위원에게 전문성이 갖는 가치 이상의 오만한 힘을 실어줬다면 그건 발주자의 잘못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혼나는 것을 당연시하고 들어가는 을의 태도에 더 놀랐다. 내가 자문위원이었던 어느 회의에서, 프로젝트 기간이나 컨소시엄 구성을 이상하게 해놓고 졸속으로 일을 진행하는 발주처에 뭐라 그랬더니 발주처는 자기한테 뭐라 한지 모르고 있고, 자동으로 용역사가 사과하는 기가 막힌 상황도 있었다. 자문회의는 잘만 하면 프로젝트의 난관을 해결하거나 오답을 비껴갈 수 있도록 하는 정말 좋은 방식인데, 이런 식의 자문회의에서는 의견을 주고받고 토론이란 것을 할 수 없다.
소극적, 수동적이고 주눅 든 을의 태도는 을을 을질의 틀 안에 갇히게 한다.
말하는 태도나 비판을 받아들이는 자세도 달라야 하고, 앉거나 서 있는 자세조차도 달라져야 한다. 자리 배치가 이상하면 당당하게 자리를 요구해야 하기도 한다. 이 분야에도 계속해서 필요한 인재가 들어오려면, 미래 세대 중 누군가가 “아, 저 직업 멋있네” 해야 할 것이 아닌가? 나와 같이 일하는 소장은 가끔 어디 좋은 레스토랑에 가면 맛있는 걸 먹으면서 농담 삼아 “캬, 성공한 변호사의 삶, 이거지” 이러는데, 성공한 변호사의 삶 찾지 말고, 성공한 조경가의 삶을 그려보자.
#5. 공부해라 1. 조경을 공부하기
태도가 바뀐다고 갑자기 멋있어 보일 리는 없다. 우선 자문회의를 예로 들어, 몇 달 또는 몇 년을 집중해서 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사람이 제아무리 전문가라고는 하지만 잠깐 보고 검토 의견 내는 사람에게 반박조차 못 할 정도로 일을 허투루 했다면 그때는 ‘잘 검토하여 반영하겠다’고 하고, 나와야 한다.
멋있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공부할 게 너무 많다. 개인차가 크겠지만 나를 포함해 전반적으로 조경하는 사람들이 조경 분야가 다루는 특수한 대상인 식물, 자연을 모르는 것뿐 아니라, 지금 환경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 이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만드는 과정에 대해서도 충분히 모른다. 우리는 몰탈이 다 몰탈인 줄 아는데, 그렇지 않더라. 우리가 만드는 공간의 이용자인 시민이나 대중의 욕망이나 취향, 불편함과 심리도 잘 모르고,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줘야 하는 공공이 무엇에 따라 움직이는지, 그들이 뭐는 가능하고 뭐는 못 하는지도 잘 모른다.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직접 할 수 있을 만큼 알 필요도 없고, 알기도 어렵겠지만, 어떤 건지는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냥 이 분야에 묵었다고 해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서 공부가 필요하다.
충분한 지식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태도와 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공허하다. 땅을 대하는 태도, 수평성 같은 걸 멋지게 이야기하려면 조경뿐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조경 내부적인 언어가 아닌 다른 사람, 다른 분야와 소통이 가능한 언어로 주장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될까? 공부가 득이 되게끔 제도가 달라지고 질 좋은 교육이 제공될 필요가 있다. 최근 다시 조경사 제도의 도입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데, 조경사 제도의 도입은 장기전이 될 수 있으므로, 그전에라도 조경 관련 자격증, 기술 등급의 평가 제도에서 불합리한 점이 있다면 이를 손봐서 조경 공부를 해서 얻는 개인적인 뿌듯함 외에도 분명한 동기부여가 있도록 해야 한다.
#6. 공부해라 2. 조경아 공부해라
조경계가 더 공부했으면 하는 것은 주로 스스로에 대한 부분이다. 주로 공원에 대한 이슈가 많아 공원을 예로 든다면, 공원의 유형은 어때야 하는지 (기존의 공원 유형에서 시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추가될 것은 없는지), 공원 조성비는 얼마인지, 공원에 대한 가치 추정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공원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데 필요한 업무와 프로세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 측정은 잘 되었는지 등이다. 당연히 다 나와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답을 찾아보면 없다.
앞서 #3의 이야기와도 연결되지만, 어느 시에 공원을 조성하는데 합당한 공원 조성 단가가 얼마인지 또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는 공원 사례가 뭐가 있는지를 시가 용역사에 물어보고 있으면 안 된다. LH 단가가 있어도 너무 오래되었고, 그게 지역별로 다를 수 있으므로 해당 지역의 데이터는 스스로 가지고 있어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뭐 그렇게 어려운가? 조성 단가가 제대로 없으니 공원을 지을 때 타당성 조사는 늘 난항을 겪는다. 하나 마나 하고 논리적 비약이 정말 많지만 예전에 써봤던 방식으로 얼버무리고 냈는데 공공이 좋은 뜻에서 하는 일이니 넘어가면 다행이고, 정치적 탄력을 받지 못하면 없던 일이 되고 만다. 이게 일개 지자체 부서에서 할 일이 아니면 조경계에서 스스로 필요한 연구를 좀 했으면 좋겠다.
“제가 공부를 제일 잘하는데 (그래서 공부 그만해도 되는데), 제가 제일 공부를 많이 해요.”
어디서 수석을 했다거나 만점을 받았다는 학생들이 하는 말이다. 원인과 결과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인데, 나는 여기서 ‘공부를 젤 잘하는 사람도 여전히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젤 잘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왜 안 하고 앉아있냐?’는 측면에 주목하고 싶다.
마무리하며
탈조경이라는 말이 언젠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환경과 생태 위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정원을 필두로 살아있는 자연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가하고 있어 조경이 예전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가, 너무 오래 쪼그라들어있어서 그런지 그런 동력이 잘 보이지 않아서 걱정이다.
물이 들어오는데 저을 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