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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자연스럽고 기분 좋은, 그리고 확실한 리듬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 글을 계속 읽어주지 않겠지
  • 환경과조경 2023년 05월

매대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진다. 무항생제 계란, 동물복지 특란, 신선한 왕란. 여러 문구들 속에서 고심하다 가장 저렴한 것을 집어 들 때면 자꾸 이 지면의 값을 생각하게 된다. 올해 초 잡지 가격을 인상하며, 꽤 깊이 고민했다. 물가와 인건비 상승 등에 의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권당 2천 원이면 1년에 2만4천 원이나 된다. 500원 차이에도 동물복지 같은 단어를 포기해 버리는 나를 떠올리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2만2천 원을 지면 수로 나누면 한 쪽에 약 135원이다. 꼭지마다 성격이 다르니 모든 지면이 같은 값을 가질 순 없다. 특히 ‘편집자가 만난 문장들’은 정보 전달에 주력하는 지면도 아니고, 머리 식히며 가볍게 읽기 좋은 덤 같은 꼭지다. 50원 정도의 값을 매기려다 주말 오전에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가 가여워져 100원 정도는 쳐주자고 혼자 정했다. 웃기게도 그 순간부터 또 이 지면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길어야 2분이면 후루룩 읽어버릴 수 있는 이 글이 100원을 받고 팔만 한 것일까.

 

“같은 돈 내고 더 오래 보면 가성비가 좋은 것 아닌가?” 제임스 캐머런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던진 질문이다. 아직도 보지 않았지만,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캐릭터 생김새와 상영 시간 때문에 일었던 논란은 잘 알고 있다. 13년 만에 나온 아바타 2편의 러닝타임이 무려 190분이나 되었던 것. 캐머런은 인물 관계와 감정에 초점을 맞추느라 길어졌다고 설명했지만, 190분을 꼼짝없이 의자에 앉아 스크린만 쳐다봐야 하는 관객의 원성이 터져 나왔다. 불만이 계속 일자 캐머런은 자신의 아이가 OTT에서 한 시간짜리 에피소드를 다섯 번 연속으로 보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러니 자신의 영화는 가성비가 좋은 게 아니냐는 거다.

 

관람 방식이 전혀 다른 OTT 콘텐츠와 영화를 비교하고 영상의 길이와 티켓 가격을 연관시키는 게 이상하지만, 그만큼 자기 영화에 자신 있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가벼운 해프닝인 줄 알았는데, 이후에 일어난 논란들이 재미있다. 아바타의 투자 배급사 뉴NEW의 양지혜 이사는 “재미있게 잘 만 들었다면 핵심 관객은 기꺼이 시간과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적 경험보다 OTT를 더 선호하는 관객까지 잡아당길지는 물음표”라며 확신하지는 못하는 투였다. 영화시장 분석가 김형호는 “관건은 긴 러닝타임이 아니다. 에피소드를 빨리 전환해 한 영화를 마치 여러 번 체험하도록 해준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는 영화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오히려 OTT 콘텐츠와의 차별화를 위해 더 긴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1 캐머런이 러닝타임이 9시간에 달하는 아바타 3편의 가편집본을 넘겼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하나의 주제를 여러 번 체험하게 하는 것이 긴 영화의 성공 요인이라는 대목에서 잡지를 생각했다. 형식이 꽤 비슷하다. 잡지의 상영 시간은 어떻게 될까. 먼저 장편 소설 읽을 때의 내 모습이 어떤지 생각해봤다. 책 읽는 시간은 일상 패턴과 연관된다. 아무래도 여유가 있을 때 읽는다. 시간을 내 읽기도 하지만, 내가 원할 때 그 흐름을 끊을 수 있다. 반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30분만 읽고 일어나야지 다짐해도 너무 흥미진진하면 책장을 덮지 못한다. 책갈피가 이동하는 속도는 내 여유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일상이 바쁘고 고되면 한자리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잡지는 소설과 달리 읽어야 하는 순서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꼭지를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 영원히 펼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같다. 여러 성격의 콘텐츠를 담아야 할 뿐 아니라, 일상에 녹아 호흡하기 위해서는 지치거나 질리지 않게 해줄 리듬감도 필요하겠구나. 잡지에 읽어야 할 글이 너무 많아 부담스럽다는 리뷰를 만나면 서운하기도 했는데, 숨 쉴 틈을 달라는 부탁이었구나 깨닫는다. “음악이든 소설이든 가장 기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리듬이다. 자연스럽고 기분 좋은, 그리고 확실한 리듬이 없다면 사람들은 그 글을 계속 읽어주지 않겠지. 나는 리듬의 소중함을 음악에서 (주로 재즈에서) 배웠다”는 하루키의 말은 잡지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일상의 리듬을 좀 더 흥겹게 해줄 새로운 꼭지를 준비하고 있다는 예고를 슬쩍 흘려본다. 한 달 동안 잡지에 꽂힌 책갈피가 이리저리 바쁘게 옮겨 다니길, 매대 앞에 선 당신이 ‘조경 문화 발전소’라는 문구를 포기하지 않길 바라며.

 

각주 1. 손효주, ““상영 시간 3시간 10분”…‘쇼트폼’ 대세 역행하는 ‘길고 긴 영화’들이 온다”, 「동아일보」 2022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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