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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의 식물이야기(10): 사람과 같이한 식물의 긴 역사 3
  • 환경과조경 2011년 2월

사과나무 정원의 불가능성에 대하여
얼마 전 중국 산둥반도의 위해시(威海市)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위해시는 지리적으로 한국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어 기후조건이 한국 서해지방과 거의 같다고 한다. 한국에서 눈이 내릴 때 거기도 눈이 내렸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기까지 차로 한 시간 남짓 달리는 동안 무심히 내다본 창밖에 뜻밖에도 눈 덮인 사과나무 밭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궁금해서 안내인에게 물어보니 위해시는 중국의 대표적 사과산지라고 한다. 중국 사과의 80퍼센트가 이곳에서 생산된다고 하니 대단한 양이다.
사과나무 팬으로서 이처럼 반가운 일이 또 있을까.

(중략)

사과나무를 귀히 여기는 영국의 오랜 전통과 함께 위해시가 사과의 도시라는 우연의 일치가 내게는 행운으로 여겨졌다. 드디어 사과나무를 정원의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온 듯 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되는 바가 있었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사과나무를 잘 알고 있다고 믿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사과나무는 열매 생산을 위해 여러 세대에 걸쳐 과수원에서 길들여진 것들이다. 해마다 크고 붉은 열매를 맺게 하기위해 투여하는 비료와 농약에 익숙해진 나무들이다. 그런 나무는 농약과 비료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마치 마약중독자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정원에 심기가 어렵다. 정원의 나무를 과수원과 같은 방법으로 약을 투여해가며 관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과수원처럼 일년에 십여 차례씩 약을 뿌리게 된다면 그곳은 이미 정원이라고 할 수 없겠다. 야생종 사과나무 혹은 정원용으로 재배하는 사과나무를 구할 수 있다면 모를까. 정원용 사과나무라면 대부분 꽃사과일 것이다. 결국 또 막다른 골목에 도달할 것이 염려되었다.

(중략)

그러나 사과나무가 본래부터 병충해에 약하고 까다로운 나무는 아니었다. 사과뿐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도 본래부터 병충해에 약하고 까다로운 식물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는 인류가 꾸려온 오랜 농경생활의 결과일 뿐이다. 최대의 수확을 얻기 위해 약을 뿌려 벌레를 제거해 주고 비료를 주어 쉽고 편하게 양분을 취하게 했다. 그 결과 사과나무는 땅 속 깊이 뿌리내려 양분을 찾아 나설 필요도 없고 귀찮게 하는 벌레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가는 능력, 즉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지키는 능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환경으로부터 격리되어 홀로 서게 된 사과나무는 지금껏 공생을 누려왔던 생태계의 보호 없이 인간의 관리와 통제 하에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인간들의 작품이다. 열매를 맺는 도구가 되어 인간의 식탁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본래의 자연성을 잃고 기형이 된 것뿐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식탁이 진정 풍요로워진 걸까? 풍요로운 식탁으로 해서 우리의 삶도 풍요로워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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