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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스케이프] 기억과 기록 사이,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 환경과조경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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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원은 인물이나 사건을 기리는 장소가 된다. 이는 대개 실재하는 공간이지만 은유나 상징으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한다. 많은 경우 정원은 즐거움을 위한 곳이지만 어떤 때는 은둔과 회피의 장 혹은 기억과 각성의 매개체가 된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조르조 바사니(Giorgio Bassani)의 자전적 소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Ⅱ (giardino dei Finzi-Contini)(1962)에 나오는 정원은 앞서 말한 정원의 특징을 모두 지닌다.1

 

소설은 반유대주의적 인종법이 통과되고 파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1938년의 이탈리아 페라라(Ferrara)를 배경으로 한다. 유대인 차별이 점차 심화되던 때 페라라의 부유한 유대인 가문 핀치콘티니의 몰락과 이에 대한 회상이 주요 내용이다. 소설의 화자 조르조(작가와 이름이 같다)는 유대인 문학도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어두운 시대라고 표현한 이 시기 집단주의의 광기 속에서 상처받고 모욕받는다.

 

유대인들이 사회에서 배제되는 시기에도 핀치콘티니 가문의 정원은 낙원과 같다.2 세상은 유대인들에게 문을 닫는데, 오랫동안 닫혔던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이 유대인들을 위해 열린다. 테니스 클럽 입장이 금지되면 친구들을 정원으로 초대해 테니스를 치고 피크닉을 즐긴다. 오후의 산책도 너른 정원에서 하면 그만이다. 공공 도서관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난 조르조는 그보다 더 훌륭한 핀치콘티니 저택의 도서관에서 졸업 논문을 쓴다.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은 외부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 자족적 세계다.

 

이 핀치콘티니가의 정원은 조르조에게 완전하고 안온한 세계와 미콜 핀치콘티니라는 다다를 수 없는 연인을 동시에 은유한다. 핀치콘티니 가문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담장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개인 교습을 받고, 시험을 치러 오거나 시너고그(유대교 회당)에 갈 때만 다른 아이들을 만나는 미콜은 그 자체가 닫힌 정원이다. 소년 시절, 미콜은 조르조에게 담장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하지만 조르조는 갈 수 없었다. 10여 년 후에야 핀치콘티니의 정원에 들어가 점차 미콜과 가까워지지만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조르조에게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그리고 미콜이라는 정원은 끝끝내 다다르지 못한 이상이다. ...(중략)

 

환경과조경 391(2020년 11월호수록본 일부

 

황주영은 서울대학교 협동과정 조경학전공에서 19세기 후반 도시 공원의 모더니티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파리 라빌레트 국립건축학교에서 박사후 연수를 마쳤다. 미술과 조경의 경계를 넘나들며 문화사적 관점에서 정원과 공원, 도시를 보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와 관련된 강의와 집필, 번역을 한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책을 사거나 빌렸고, 그중 아주 일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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