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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연재의 굴레, 그럼에도
  • 환경과조경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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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게도, 15년이나 묵은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의 개정판을 내보라는 권유를 받곤 한다. 대폭 뜯어고칠 궁리를 하며 개정판이 나온 책들을 골라 읽는 취미 비슷한 게 생긴 적이 있는데, 진중권의 앙겔루스 노부스개정판(아트북스, 2013)서문 한 구절에 그만 나의 심정이 포개지고 말았다. “13년 전에 쓴 자기 글을 다시 읽는 것은, 마치 밤에 쓴 글을 낮에 읽는 것만큼이나 민망한 일이다. 감상적 어조로 쓴 부분은 특히 그러하다. 그 글을 쓰던 청년의 몸속에 지금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앉아 있다. 옛글을 다시 읽는 민망함보다 강렬한 것은 그리움이다.” 진중권은 그 그리움을 양분 삼아 헌 집 위에 새집을 덧대어냈지만, 나는 그 민망함을 받아들이고 주저앉았다.

 

개정판 포기의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다. 정작 하려던 이야기는 책의 초고가 된 연재 글쓰기의 추억과 고통이다. 현대 조경설계의 이론과 쟁점의 내용 대부분은 20013월부터 20028월까지 환경과조경에 연재한 동시대 조경 이론과 설계의 지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남기준 편집장의 권유로 시작한 연재. 반은 필라델피아에서, 나머지 반은 천안에서 썼다. 동시대 조경의 지형도를 그려보겠다는 기획 초기의 열정만으로 매달 다가오는 마감의 중압감을 이겨내기란 쉽지 않았다. 마감 전쟁을 치르고 탈진하면 순식간에 닥쳐오는 다음 마감. 좁은 방안을 계속 걸어 다니며 한 문장씩 중얼거린 후 키보드를 두드리고 다시 일어나 걷기를 반복하는 나의 글쓰기 습관은, 벗어나기 힘든 굴레와도 같았던 그 연재 과정에서 생겼다. 지은 지 반세기가 넘은 필라델피아 외곽의 허름한 목조 아파트 아래층에는 조경가 J가 살고 있었다. J 부부와 그들의 갓난아기는 나의 고질적 글쓰기 습관이 발생시키는 극심한 층간 소음을 묵묵히 견뎌주었다. J는 쿵쾅거리는 내 발 소리의 양과 강도만으로도 원고 마감이 며칠 남았는지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고 한다.

 

2014년의 잡지 리뉴얼 이후, 많은 필자에게 여러 연재 꼭지를 부탁했다. 편집자의 꾐에 넘어가 덜컥 연재를 수락한 그들은 텅 빈 순백의 모니터 앞에서 속이 타고 피가 마르는 밤을 보냈을 테다. 연재, 그것은 일상을 스스로 감옥에 가두는 일이고 불안과 초조의 늪으로 자신을 내모는 일이다. 과월호들을 다시 펼쳐보니 연재 필자들의 분투가 새삼 피부에 와닿는다. 환경과조경의 지면을 풍성하게 해 준 그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린다.

 

지난한 과정을 감내하며 집필한 연재물 중 몇 가지가 단행본으로 새롭게 편집되어 독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는 점은 필자에게도, 편집자에게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김영민의 스튜디오 201, 설계를 다시 생각하다(2014년 연재)는 스튜디오 201, 다르게 디자인하기(한숲, 2016), 김세훈의 그들이 꿈꾼 도시, 우리가 사는 도시(2015년 연재)는 도시에서 도시를 찾다(한숲, 2017)로 출간되어 한국 조경과 도시설계 이론의 지층을 두텁게 하는 데 기여했다. 장장 3년간 연재된 고정희의 ‘100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2014~2016년 연재)는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한숲, 2018)로 묶여 조경 문화와 역사의 교점을 읽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 자생적 도시재생의 현장을 탐사한 최이규의 인터뷰 다른 생각, 새로운 공간(2017~2018년 연재)도 곧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서영애의 장기 연재 시네마 스케이프가 이번 달로 막을 내린다는 아쉬운 소식을 전한다. 315호부터 이번 374호까지 60회를 이어온 시네마 스케이프는 그 어느 지면보다 높은 열독률을 가진 인기 꼭지였고, 연재 3년째를 넘어서던 여름에 시네마 스케이프(한숲, 2017)로 출간되어 영화와 경관론의 접면을 넓히기도 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필자는 영화를 보고 나서 한 호흡으로 써내려 간 적도 있지만, 한 달의 절반을 원고와 보낸 적이 더 많았다고 술회한다. 2014년 여름은 어느새 2019년 여름이 되었다. 5년간의 수고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번 호 특집으로는 한국, 중국, 미국을 가로지르며 조경의 사회적 책무를 실천하고 문화적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는 랩디에이치Lab D+H의 근작들을 싣는다. 서울의 최영준, 선전의 중후이청, 상하이의 리중웨이, 세 파트너가 함께 이끄는 랩디에이치는 정원과 주거 단지부터 도시 공원과 복합 상업 공간, 신도시 마스터플랜과 도시재생 프로젝트에 이르는 다양한 스케일을 넘나들며 동아시아 조경의 혁신을 실험하고 있다. 아키데일리, 디자인붐, 아키텍트매거진, 도무스웹 등 다수의 저널이 이미 주목한 바 있는 랩디에이치의 작업들은 도전과 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책장을 뒤져 최영준 소장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20181월호~3월호)도 재독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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