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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경계의 검은 코끼리
  • 환경과조경 2017년 12월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은 최근 『늦어서 고마워Thank You for Being Late』에서 기후 변화를 테크놀로지, 세계화와 함께 지구를 변화시키는 세 요소 중 하나로 언급했다. 특히 기후 변화를 누구나 방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데도 못 본 척하며 코끼리가 집 안을 풍비박산 낼 때까지 행동을 미룬다는 의미의 ‘검은 코끼리black elephant’에 비유하고 있다. ‘검은 코끼리’는 ‘검은 백조’와 ‘방 안의 코끼리’를 합성한 말이다. 여기서 ‘검은 백조’는 2009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몰고 온 글로벌 금융 위기와 같이 전문가들조차도 일어날 것을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실제로 벌어져 엄청난 충격을 몰고 오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미국 NASA의 자료에 의하면 지구 온난화 속도는 점점 가속화되어 매 10년마다 기온이 0.13ºC씩 상승하고 이 상태라면 2100년에는 지구 온도가 4.8ºC가 상승한다고 한다. 지구 기온이 4ºC 증가하면 세계 GDP가 2% 감소하고, 6ºC가 상승하면 전 세계 생물종의 90%가 멸종할 위기에 처한다고 하니 기후 변화야말로 모른 체하기엔 너무나 위협적인 검은 코끼리인 것이 분명하다.

지난 40년간 고도 성장기의 괄목할 만한 성과에 취해 우리 스스로 간과했던 조경계의 검은 코끼리는 무엇일까? 최근 몇 년간 조경가들은 서울시가 설계공모로 발주한 주요 공원 프로젝트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보행도시 서울’을 표방하며 야심차게 국제 공모전까지 개최한 고가 공원 ‘서울로 7017’ 프로젝트는 네덜란드의 비니 마스를 위시한 건축가들의 잔치로 끝났다. 도시재생 패러다임의 상징 격으로 진행된, 석유비축기지를 시민의 휴식과 커뮤니티 활동이 가능한 문화 공원으로 전환하는 ‘문화비축기지’ 프로젝트에서도 조경가들은 주역이 되지 못했다. 당연히 조경의 영역이라고 여겨왔던 도시 오픈스페이스 설계가 건축가의 손으로 넘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올 한 해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재건축 수주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서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주비와 보상금, 과열된 영업 홍보전 등으로 부작용도 많았지만, 일감 부족에 시달리던 조경 설계 업계에는 모처럼 찾아온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아파트를 상품이라고 여기는 건설사들의 상술과 대중에게는 여전히 낯선 조경 분야의 낮은 위상 탓인지, 많은 프로젝트가 해외 작가들의 식탁 위에 올려졌다. 심지어 국내 조경가가 설계한 작품조차도 해외 작가의 이름으로 포장돼 홍보되기도 했다. 과연 우리 조경가들은 그들보다 아직 많이 부족한 것일까?

나라 전체가 청년 취업난을 걱정한 지 오래다. 경기가 다소 나아진 올해는 기대도 컸지만 여전히 대다수 조경설계사무소는 미래의 조경가를 꿈꾸는 청년들의 취업 노크를 받지 못하고 있다. 너나없이 모두 공무원이 되거나 공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성공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조경가가 되어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꿈꾸던 열정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성공 신화를 보여주지 못한 우리 선배 조경가들의 책임일까?

한때 대부분의 학생이 조경가를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다수 대학의 커리큘럼이 설계 위주로 짜였고, 학생들의 설계 수요에 발맞추어 설계를 하던 현업 조경가들이 대거 학교 강단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대학은 서열화니 평가니 하면서 교수 임용의 핵심 요건을 박사 학위나 논문만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SCI급 논문을 과도하게 요구하여 현직 교수들조차도 설계 수업을 등한시 할 수밖에 없고, 승진과 정년 보장을 위해 논문 숫자 채우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우리가 조경학을 배울 때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모토 ‘종합과학예술’, 그것에 담긴 인문, 사회, 과학, 예술을 아우르는 ‘융복합적’ 조경의 정체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대다수 학교에서 설계 수업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어느 대학의 교수는 이런 조건 때문에 설계 전공 교수를 뽑으려 해도 적임자를 찾을 수 없어 몇 년째 포기하고 있다며 하소연하기도 한다. 조경 설계를 가르치는 교수도 사라지고 조경 설계를 하겠다는 학생도 줄어드는데 앞으로 한국의 조경 설계는 과연 누가 해야 할까?

조경계가 잘나가던 지난 세월, 어쩌면 우리는 방안에 찾아온 코끼리의 등장에 ‘나 아닌 누군가가 해결해 주겠지’ 하며 애써 침묵했는지 모른다. 건축, 도시, 임업 등 타 분야의 업역 확장 시도에 대응하는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하지 못했고, 이른바 스타 조경가 한 명도 제대로 키워내지 못했다. 미래에 더욱 각광받을 분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이 길을 자랑스럽게 선택하는 후배 조경가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직도 조경이 과학인지 예술인지 오래된 논쟁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장님 코끼리 만지듯 모호한 정체성이 자라고만 있다.

조경계의 검은 코끼리는 비단 설계 분야에만 있는 게 아니다. 여전히 산림청과는 정원, 도시숲, 기술자 자격 문제 등으로 마찰을 빚고 있다. ‘국가공원’은 예산 문제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새 정부에서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 있는 도시재생 사업에 조경계가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아직 길머리조차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기대를 갖게 하는 반가운 소식도 있다. 올해 9월 조경계의 숙원이던 국가 ‘조경진흥기본계획’이 수립됐다. ‘조경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한 지 2년 8개월 만이다. 조경진흥기본계획은 조경 인프라의 양적·질적 제고, 조경 산업 및 교육 기반 마련, 조경 인식 개선 및 국제적 위상 제고 등 3대 추진 전략과 6개의 세부 정책 과제를 설정해 추진할 계획을 담고 있다. 또 그동안 삼삼오오 흩어져 하나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조경계가 지난 3월 3일 ‘조경인의 날’에 ‘대한환경조경단체총연합’을 결성했다. 조경계를 아우르는 20여 개 단체가 함께 모인, 조경계로서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총연합의 탄생으로 조경인이 바라는 미래 지향적인 조경 생태계를 구축할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제도와 조직을 바탕으로 그동안 알고도 모르는 척 방관했던 조경계 안의 검은 코끼리를 요리할 때가 왔다. 조직이 만들어져도 모든 구성원이 주체적으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이 또한 사상누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 다가오는 미래, 불확실성이 난무한 시대에 대처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예측 가능한 내일을 준비하자. 이제 새롭게 만들어진 조직을 중심으로 우리 앞에 놓인 난제를 함께 토론하며 조경 분야의 ‘미래 문해력futures literacy’을 높이고, 더 이상 우리 방 안에서 검은 코끼리가 날뛰지 못하도록 힘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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