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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의 정원 생활] 퇴계 이황의 정원, 호랑이 꼬리 혹은 살얼음 위의 삶을 위한 유식遊息의 장
  • 환경과조경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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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변의 예던길. 예던길은 퇴계가 생전에 청량산을 오가며 걷던 길이다. ‘예(曳)’란 ‘끌다, 고달프다’란 의미이니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걸어 다녔던 길을 뜻한다. 퇴계가 12살 때부터 글공부를 위해 청량산을 오르내린 이후 수많은 선비가 무수히 걸었던 길이다. 산과 물이 굽이지며 어울린 절경 속을 걷던 퇴계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면서 경관 감수성을 한껏 고취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 유학자 중 단연 최고 인물로 꼽는 퇴계 이황(1501~1570)은 평생 자연과 짝한 철학가이자 시인이었다. 어릴 적에 잠시 숙부에게서 배운 것 말고는 독학으로 학문을 깨우친 그는 큰 선생을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다 주자(1130~1200, 주희)를 평생의 스승으로 삼고자 했다. 백 번을 훨씬 넘는 왕의 부름을 절반 이상이나 고사하면서 그는 벼슬길 대신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을 택했다. 

그에게 산수는 책과 더불어 평생의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철저한 절제와 몸에 밴 근면으로 일관된 그의 삶은 자칫 궁핍해질 수도 있었지만 아름다운 산수를 가까이 취함으로써 학문적 경지는 물론 문예적 지평까지도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벼슬도 수차례 지냈고, 물려받은 재산이 넉넉한 편이었지만 그는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다. 여러 번 이사로 집을 지으면서도 한 칸 남짓한 방에다 소박한 가구로 일관했다. 그러면서도 자연환경만큼은 면밀히 따져 반드시 아름다운 산과 물 가까이에 터를 잡곤 했다. “수려한 산천 속 한적한 들과 고요한 물가에 머묾”으로써 퇴계는 “번화한 환경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한가하게 쉬면서 정서를 함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산수자연과 친화하면서 마음속에 이는 감흥을 퇴계는 아름다운 시로 표출해 냈다. 그는 평생 2,000여 수가 넘는 시를 지었다.

 

풍경 철학자 혹은 정원가 퇴계

사실 물적 차원으로만 보자면 퇴계가 조영한 정원에는 별로 주목할 만한 게 없다. 규모도 작고 특별히 볼만한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사 가는 곳마다 연못을 만들기는 했으나 규모가 작고 형태도 단순했다. 조경 행위라야 단을 만들고 소, 대, 매화, 국화를 심었을 뿐이다.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택하되 집은 최대한 작고 소박하게 지었다. 방은 대체로 한 칸, 커봐야 두 칸을 넘지 않았고, 마루는 그보다 넓으면서 주변으로 열린 구조를 취했다. 최대한 주변 정원 혹은 자연에 개방되도록 하여 쉽게 교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결같이 집은 작고 소박하게, 그러면서 주변 산수에 열린 관계를 취함으로써 퇴계는 수시로 자연과 만나곤 했다. ...(중략)...

 

성종상은 서울대학교에서 조경을 공부한 이래 줄곧 조경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대학에서 조경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선유도공원 계획 및 설계, 용산공원 기본구상, 201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마스터플랜,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설계 등이 있다. 최근에는 한국 풍토 속 장소와 풍경의 의미를 읽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으로서 조경 공간이 지닌 가능성과 효용을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환경과조경 356(2017년 12월호수록본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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