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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가르치기와 가리(르)키기
  • 환경과조경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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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가르치냐”는 물음에 “설계 가르킨다”고 하자이내 지적이 돌아온다. ‘가르치다’는 (지식이나 기술을)깨닫거나 익히게 하는 것이고, ‘가르키다’는 (무엇을)짚어 보이거나 알리는 것이란다. 맞다. 그런데 설계를 가르칠 수는 있는 건가? 가르친다면 무엇을, 어떻게, 왜 가르쳐야 하는가?

돌아보면, 우리의 선배들은 손이 좋았다. 그만큼 교육 방법도 명확했던 것 같다. 좋은 드로잉이 좋은 설계로 인정받았다. 그런 설계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복과 숙련이 요구되었다. 칭찬보다는 잘못을 지적하는 훈육을 통해 성장을 유도했다. 도제식에 가까웠다. 오래전부터 훌륭한 디자이너들을 배출한, 뼈대 있는 교육 방식이기도 했다. “발로 그려도 이것보다 낫겠다”면서 밤새워 그린도면을 찢어버렸다거나, “아닌 것 같은데” 한마디에 달포 가까이 고민한 결과가 물거품이 되었다는 일화들은 이런 교육 과정의 단면을 보여준다. 아

닌 것 같다면 ‘왜’ 아닌 건지? 설계 수업은 교육자의 취향과 경험을 배우는 건지? 같은 질문보다는 “괜찮은데” 정도의 사인을 얻기 위해 교수의 스타일과 취향을 파악하는 선택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떤 이는 의식 있는 설계가로 성장했지만, 어떤 이들은 좌절하고, 어떤 이들은 앙금을 가졌다. 이들 가운데는 갑이 되어, 잘해야 을이나 병인설계가를 좌지우지하는 위치가 되었다.

설계를 배우는 것이나 가르치는 것은 쉽지 않다. 설계라는 작업 자체가 녹녹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해야 하고 개인적 시간을 줄여야하는 고단함이 있다. 그 고단함의 대가가 큰 것도 아니다. 자긍심이 이를 상쇄하곤 하지만, 앙금을 가진 갑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게다가 일감마저 줄어드는 상황이 그들을 떠나가게 한다. 이들에게는 절실한 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병풍이 되기도 한다. 설계 시장이 불황인데 “설계를 왜 이렇게 많이 가르치느냐”는 말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 된다. 대학의 커리큘럼이 모두 직무와 관련되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독립적 업이 없는 미학이나 역사, 생태학 같은 과목은 가르치지 말아야하나? 조경 분야가 설계 시장이 어려워지면 다른 부문은 좋아지는 제로섬 게임인가? 혹시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집단을 동원하는 것은 아닌가? 아카데미즘으로서 조경의 지향을 거론하기 이전에 드는 우문들이다. 교육의 성과를 취업률로 평가하는 시대인 것은 분명하다. 취업을 위해서는 실무에서 요긴한 실시설계, 시공과 적산 등을 더 많이 가르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취업을 위해서는 조경기사가 필수고, 기사 시험에 합격하려면 설계 기법 연습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아직까지 기사 실기는 제도판과 T자를 이용한 수작업이기 때문이다. 사십 년 전부터 해오던 선 긋기, 심벌 그리기, 방위와 범례 그리기, 스케치 등이 지속되고 강조되는 이유이기도 한다. 학생들은 기법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만, 사고 과정은 생략된다. ‘어떻게’ 그리는지는 알지만, ‘왜’ 그리는지는 모른다. 간혹 이런 단순 반복 작업을 왜 시키느냐고 묻는 학생도 있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다. 교육받은 시대의 프레임 안에 있는 교육자와 학생 사이에는 삼사십 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교육 내용은 거의 같다.

늘 실무를 의식한다고 하지만, “실무에 나온 학생들이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오래된 불만은 여전하고, 학교가 철지난 것을 가르친다는 불만도 제기된다. 삼사십 년 된 조경 교과서들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조경은 시대 변화와 함께 그 역할과 정의가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변화하는 시대와 경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조경의 운명이다. 그러나 조경은 변하지 않는 본질이 있다고 믿는 교육자는 불편하다. 본질을 가르쳐야지 경향을 가르치려 하냐고 힐난한다. 기본을 탄탄히 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 기본이 삼사십년 전의 방법이라면 동의하기 어렵지 않은가 교육은, 교육자들이 교육받은 시대의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성장해서 활동할 시대를 염두에 두어야하는 것 아닌가. 꿈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수도 꿈을 꾸어야 한다. 같은 이유로 설계 교수는 설계 참여를 통해 최소한의 설계 감각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설계 교수의 아이덴티티이자 경쟁력이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주당 수업 부담은 많고,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않다. 논문보다는 공모전이나 작품 발표, 전문지게재를 통해 실적을 평가받고 싶어 하지만, 공모에 당선된다고 해도 인정 실적은 SCI 논문의 1/10에 불과하다. 설계를 연구 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실증적 평가 관행도 건재하다. 게다가 실기 실적이 논문에 비해 수월하지 않느냐는 위협구가 날아온다. 설계 시장에서는 “교육이나 하지 왜 설계에 참여하느냐”고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진다.

그러는 사이 설계가로서 경쟁력은 사라진다. 이미 대학에 오면서 예고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계는 생각이라고, ‘왜’ 그래야 하는지, 적어도 “아닌 것 같다”면 ‘왜 아닌 것 같은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가져보려는 노력이 한낮 학생들을 부추기는 관념의 유희로 치부되는 것은 참담하다. “설계는 답이 없다”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며 설계를 경험과 취향의 세계로 몰고 간다. 그렇다면 힘센 사람의 취향에 맞추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인가?

거의 모든 교과목이 그렇듯이, 설계 과목이 모두를 설계가로 키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될 수도, 될 필요도, 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누구는 좀 더 잘할 수 있고, 누구는 조금 못할 수도 있지만, 열등감과 앙금을 남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젊은 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 공부한 자신의 전공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지 못하고 앙금만을 가진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여러 교과목의 관계성을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왜곡되지 않은 교육이 자긍심을 가지게 해야 할 것이다. 조금 못하더라도 학생의 생각을 읽으려 애쓰고 그 생각이 발전 할 수 있게 돕는 것이 필요하다. 그 생각이 자의적이라면 논리를 가질 수 있게, 개인적이라면 다수를 위할 수 있게. 그것은 위계적이고 훈육적인 ‘가르치기’가 아니라, 서로 다른 눈높이에서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다. 설계 수업이기에 할 수 있고, 설계 수업이기에 필요하다.

 


최정민은 순천대학교 조경학과 교수로, 설계 실천과 교육 사이의 간극을 고민 중이다. 대한주택공사에서 판교신도시 조경설계 총괄 등의 일을 했고, 동심원조경기술사사무소 소장으로 다양한 프로젝트와 설계공모에 참여했다. 제주 서귀포 혁신도시, 잠실 한강공원, 화성 동탄2신도시 시범단지 마스터플랜 등의 설계공모에 당선되었다. 조경비평 ‘봄’ 동인으로 현실 조경 비평을 통해 조경담론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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