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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장면으로 재구성한 조경사] 파리, 혁명 전야
  • 환경과조경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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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와토의 ‘키테라 섬으로 가는 길’ 첫 번째 작품(1710년 작) 
ⓒHelmut Börsch-Supan, Antoine Watteau: 1684~1721 , h. f. ullmann, 2007

 

#48

오 샹젤리제 - 앙투안 와토

바다 물거품에서 솟아오른 비너스가 육지에 첫 발을 디딘 곳은 펠로폰네소스의 키테라Cythera 섬이었다. 프랑스 로코코 화가 앙투안 와토Antoine Watteau (1684~1721)는 ‘키테라 섬으로 가는 길’ 혹은 ‘키테라 섬의 순례’ 등의 제목으로 비슷한 그림을 세 번 그렸다. 포구에 정박한 배와 배를 타고 순례를 떠나려는 듯 여행복을 입고 지팡이를 든 남녀를 그린 것이다. 첫 번째 그림은 초기작이었던 까닭에 인물들의 동작이 다소 경직되어 있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나중에 그린 원숙한 그림들이 훨씬 흥미롭겠지만 조경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로 이 첫 번째 그림에 관심이 간다. 그림의 배경에 희미하게 보이는 구조물 때문이다. 이 구조물은 실존하는 것으로 파리 센 강변에 있는 생 클루Saint Cloud 정원의 캐스케이드 난간이다.1 문제는 그림의 해석이다. 그림을 보는 사람은 ‘그림 속 인물들이 배를 타고 멀리 그리스의 키테라 섬으로 순례를 가려나 보다’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센 강을 건너서 맞은편의 생 클루 정원으로 가려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비너스의 섬 키테라는 ‘사랑의 섬’이라고도 불린다. 파리 역시 사랑의 도시인데 파리를 키테라 섬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굳이 그리스까지 갈 필요가 있나. 강 건너 아름다운 생 클루 정원으로 가면 되는 것을. 그림 속 인물들이 실제로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위 사랑의 정원으로 일컬어지는 곳이 목적지이니 여행자체가 사랑을 찾아가는 길에 대한 비유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현실도 아니고 상상의 세계도 아닌, 단순하게 연극 무대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키테라 섬의 순례’라는 연극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 인물들의 화려한 여행 의상이 그런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오히려 무대 의상에 더 어울린다. 이렇게 모호한 그림이 탄생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사회를 들뜨게 했던 연극과 연회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17세기는 유럽 연극의 중심지가 이탈리아에서 파리로 옮겨간 시대이기도 했다. 과시욕이 무척 강했던 무대 체질의 루이 14세에 의해 연극이 크게 번성

했다. 그는 대단한 연출가이기도 했다. 궁정 생활 자체가 연극이 되어 갔다. 아침에 기침하는 순간부터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일거수일투족, 대화 하나 하나가 각본에 의해 움직였다. 베르사유 궁과 정원은 궁정 생활이라는 연극을 종일 공연하는 거대한 무대였다.

앙투안 와토는 바로 이런 루이 14세 시대를 살았던 화가였다. 와토의 삶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 작품처럼 신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네덜란드 국경 지방의 발랑시엔 출신이었다. 내성적이고 폐쇄적인 성격으로 사람들 속에 섞여 살지 못했으므로 다른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고 그 덕에 현실과 연극, 가면과 얼굴 사이에 큰 차이가 없음을 간파했다. 18세에 활동을 시작하여 만 35세에 결핵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불과 15년 남짓 작품 활동을 했으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새로운 장르를 창출해냈다. 1717년, 와토는 파리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등록하기 위해 그림을 한 점 제출했다. 그것이 ‘키테라 섬의 순례’ 시리즈 중 두 번째 그림이었다. 첫 번째 그림이 너무 연극 무대 같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왕립 아카데미에서 요구하는 형식에 맞추어 다시 그렸다. 그럼에도 심사위원들은 이 출중한 그림을 어느 분과에 소속시켜야 할지 판단을 하지 못했다. 역사화도 아니고 전쟁화도 아니며 신화를 소재로 한 것도 아닌데 다가 초상화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렇다고 풍경화로 분류하기에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았다. 논의 끝에 ‘품격 있는 야외 연회를 그린 그림fête galante’이라고 정의내렸고 이것이 새로운 장르로 확립되어 갔다.

이 그림을 연회 장면으로 해석한 것은 그림 속 등장인물 대부분이 제목과는 달리 배 타러 온 사람처럼 행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선착장에서 떨어져 남녀 한 쌍씩 짝을 지어 풀밭에 눕거나 앉아 있는데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포즈가 아니다. 오히려 야외에서 벌어지는 연회 장면을 연상시킨다. 물론 그림 왼쪽에서 배에 올라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어딘가 행선지를 향해 떠난다기보다는 물놀이를 하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돛대 주변을 분주히 날아다니는 큐피드와 어린 천사들, 그리고 오른쪽에 서 있는 비너스 동상은 굳이 사랑을 찾아 먼 곳으로 떠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곳이 바로 사랑의 섬인 것이다. 사랑의 연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앙투안 와토의 ‘품격 있는 야유회’ 작품 중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그림이 또 한 점 있다. 1719년경에 그린 샹젤리제Champs-Élysées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샹젤리제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명품 상점이 즐비한 파리의 대로를 떠올리게 되지만 실은 그 길 양쪽으로 펼쳐져 있는 샹젤리제 정원을 말하는 것이다. 샹젤리제는 엘리시안의 들Elysian Field, 즉 그리스 사람들이 사후에 가는 극락이다. 그러니 샹젤리제 정원은 파리 사람들의 지상 낙원일 것이다. 이 샹젤리제 정원 역시 루이 14세의 조경가 앙드레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1613~1700)가 1667년에 디자인한 것이다. 원래 농경지 였던 곳인데 튈르리 정원의 축을 연장하여 넓은 가로수 길을 내고 길 양쪽에 숲을 만들었다. 가로수 길에는 느릅나무를 두 줄로 심고 길이 끝나는 곳을 원형 광장으로 마무리했다. 이 광장이 지금은 열두 개의 도로가 방사형으로 모이는 원형 교차로가 되었으며 가로수 길 역시 폭도 넓어지고 길이도 연장되어 지금의 샹젤리제 거리가 되었다. 샹젤리제의 숲은 바로크의 원칙에 따라 질서 정연한 격자형으로 조림되었고 숲 한가운데에 긴 육각형의 공터를 만들어 이를 샹젤리제라 불렀다. 비록 격자형으로 나무를 심었다고는 하지만 나무 사이의 공간이 넉넉하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숲 속에 수많은 사각형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파리지엔들이 모여들어 품격 있게 야외 연회를 즐겼다. 앙투안 와토의 그림은 바로 이런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여인들의 비단옷, 등을 보이고 있는 신사의 한 쪽 어깨에 걸친 망토와 실크 스타킹, 이들의 우아한 포즈와 토실하게 살이 오른 아이들로 미루어 보아 상류층의 야유회임에 틀림이 없다. 높은 대 위에 잠들어 있는 여신상이 장면의 한가로움을 더욱 강조해 준다. 그런데 나무가 자라고 있는 양상을 보면 격자형의 질서가 많이 흐트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사실과 다르다. 앙투안 와토가 화가적 재량을 발휘하여 르 노트르의 디자인을 ‘수정’한 것이다. 그것이 우아한 야유회의 분위기에 더 적합하다 여겼을 것이다.

그로부터 약 오십 여년 후, 이 그림을 보고 지금의 우리처럼 “어, 여기가 샹젤리제야”했던 인물이 있었다. 클로드앙리 와틀레Claude-Henri Watelet(1718~1786)라는 재력가 겸 미술 수집가였다. 그는 와토의 그림을 보며 이런 식으로 르 노트르의 질서를 약간 흩트리는 것도 괜찮은 아이디어라 여겼다. 그의 책상 위에는 루소의 저서, 영국의 훼이틀리와 챔버스 등이 발간한 정원 책이 쌓여 있었다. 센 강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그는 수년 전부터 그곳에 정원을 조성하면서 계속 아이디어를 모으는 중이었다. 챔버스의 중국풍 영국 정원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고 중국식 목교도 만들어 세웠으며 훼이틀리가 제안한 방식대로 장식 농장을 만들기 위해 물레방아, 낙농장, 양봉장 등 농업과 관계된 스타파주를 넣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풍경을 만들고자 하니, 바로크의 후예로서 자연을 그대로 모방하는 데 거부감이 느껴졌다. 이 때 앙투안 와토의 그림이 해답을 주는 듯했다. 정형적 원칙을 그대로 둔 채 조금만 어지럽힌다면 적절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파리의 풍경화식 정원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시작되었으며, 정치적 이념이 아니라 사랑과 놀이와 아름다움을 담고자 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를 비롯 총 네 권의 정원·식물 책을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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