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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서재] 맛
Editor’s Library: Une Gourmandise
  • 환경과조경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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뮈리엘 바르베리 | 홍서연 옮김 | 민음사 | 2011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가볍게 붙였다 떼고 혀를 천장에 갖다대며 “맛”이라고 발음하는 짧은 순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상상을 할 수 있는가. 쓴맛, 단맛, 신맛, 짠맛 등 네 가지 기본 맛에서부터 19금의 불온한 이미지까지. 고백하건대 이 책을 사게 된 건 순전히 제목 때문이었다. 이 책이 어떤 상을 받았는 지, 작가가 누구인지, 언제 나온 소설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표지의 덜 떨어져 보이는 인상의 젖소 쿠키가 잠깐 구입을 망설이게 했지만 결국 단순하면서도 함축적인 제목에 끌려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146쪽 밖에 되지 않는 소설쯤이야 ‘호로록’ 읽어버려야지’하는 생각으로 야심차게 책의 첫 장을 폈지만 몇 장 넘기지 않아방구석 양지바른 한 편에 고이 모셔두게 되었다. 뮈리엘 바르베리의 『맛』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음식 평론가가 인생의 마지막 48시간 동안 그동안 경험했던 수많은 음식 중 최고의 맛을 찾는 미식 여정을 묘사한 소설이다. 책의 주인공이 음식 평론가이다 보니 원초적이고 간결한 제목과 달리 소설의 문장은 너무 길고 화려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도 많이 등장해서 읽다보면 ‘내가 지금 같은 구간을 계속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몽롱해지는 기분마저 들었다. “콩을 뿌려 장식한 수척한 마들렌 몇 개를 접시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르케의 디저트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페이스트리는 하나의 구실, 즉 설탕과 꿀이 들어간 살살 녹고 크림이 발린 시편時篇을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케이크, 설탕에 절인 과일, 글라사주,1 크레프, 초콜릿, 사바용,2 붉은 열매, 아이스크림, 소르베에 대한 광기 속에서 뜨거움과 차가움의 점진적인 변화가 연주되고 있었고 내 숙련된 혀는 강박적인 만족으로 지친 채 엄청난 희열의 무도를, 격렬한 지그를 추고 있었다. 

번역이 썩 매끄럽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아이스크림에 대한 위의 묘사는 화려한 수식어를 너무 진지하게 구사하는 바람에 우스꽝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 나는 성급하게 책을 집어 들기 전에 책의 프랑스어원제목 ‘Une Gourmandise’는 직역하면 ‘맛’보다는 ‘진미’라는 뜻에 가까운, 상당히 고급스럽고 까다로운 단어라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했어야 했다.


음식이든 책이든 음악이든 취향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상하게 고집이 세서 조금 부끄럽지만 편식이 심한 편이다. 책이나 글을 읽을 땐 간결하고 담백한 문체를 사랑한다. 특히 화려한 수식어나 관념어가 많고 길게 늘어지는 문장은 싹둑 잘라 깔끔하게 다듬어주고 싶다. 확고했던 나의 취향이 조금 바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편집 일을 하고부터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장을 가차 없이 재단하고 마름질해 ‘읽기 편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어쩐지 글을 고쳐놓고 읽어보면 입에 잘 붙지 않았고 개성 없는 문장이 되어 버렸다. 담당한 연재 원고를 매달 꼼꼼히 읽다보니 꼭지마다 필자의 특색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읽기 불편하고 어딘가 투박하더라도 글쓴이의 개성이 묻어나는 글이 내가 고친 무미건조한 글보다 친근하게 읽혔다. 익숙한 ‘맛’에 길들여져서 시간을 들여 읽으면 발견할 수 있는 매력을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최근에 『맛』을 다시 읽었다. 처음 책을 읽을 땐 그토록 정신 사납게 느껴지던 문장이 이번에는 감칠맛 나게 느껴졌다. 질색을 했던 모호한 관념어와 화려한 수식어도 어느 정도 참을만 했다(솔직히 아직 극복하지는 못했다). 기억을 더듬으며 그동안 경험했던 황홀한 맛을 묘사할 때면 죽어가는 시한부임에도 과도(?)하게 흥분하는 주인공의 어투마저 왠지 모르게 유쾌하게 느껴졌다. 생야채를 마요네즈에 찍어먹는 행위의 관능성을 묘사하는 부분은 어찌나 아찔하던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소설 속에서 식탁 위의 군주로 군림하던 음식 평론가의 미식 여정은 슈퍼마켓의 싸구려 슈케트4를 맛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어릴 적엔 몰랐던 양파의 달짝지근함, 가지의 고소함, 고추의 풋풋함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씩 알게 되는 것처럼 확고하고 뚜렷했던 취향도 삶의 경험이 쌓이고 보는 시각이 넓어짐에 따라 조금씩 바뀌기 마련이다. 사실 편식은 편견과 무지로 비롯되는 것임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 호에는 조경, 도시, 건축계에서 이슈가 되었던 3개의 공모전이 연달아 실린다. 공모전이 많이 실린 잡지는 독자들에겐 다양한 유형의 설계 해법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만 편집자에겐 설계자의 의도와 전략을 이해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동안 설계안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려워서, 이미지가 별로라서 등 수많은 핑계를 대며 설계안과의 정면 승부를 피한적이 없었을까? 뒤돌아보니 성미가 급한 나는 맛을 보기도 전에 삼키려고 한 적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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