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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올해의 광장
  • 환경과조경 2015년 12월

지난 9월, 그러니까 거리를 점령한 야외 테이블에서 시간을 보내기 안성맞춤인 계절이었다. 그날도 회사 근처 단골 곱창집 간이 테이블에서 여름 내내 지겹게 쐰에어컨 바람 대신 선선한 저녁 공기를 만끽하던 중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광주에 함께 가자는 한 건축 잡지 편집장의 전화였다. 저녁 공기(?)에 취해있던 나는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고, 본래 취재 예정일보다 빨리 광주행 새벽 기차에 몸을 실었다.


10년 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 국제공모가 치러졌을 때가 가물가물했다. 10년은 긴 세월이다(요즘 나의 기억력은 믿을 수가 없다). ‘빛의 숲’이라는 작품의 제목 정도가 기억 저 아래 남아 있었고, 대부분의 공간을 지하로 넣는 바람에 높고 멋들어진 건물을 원했던 광주 시민들과 갈등을 빚었다는 소식을 풍편에 들었던 듯 했다. 그만큼 광주가 나의(우리의) 관심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도 있다. 과연 당선안대로 만들어졌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 처음 계획안이 좋았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도면이라도 파악하고 답사에 나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쏟아지는 졸음에 눈꺼풀은 이미 감기고 있었다.


광주역에서 잡아 탄 택시에서 내리니 길 건너편으로 몇 블록을 차지한 ACC가 눈앞에 펼쳐졌다. 만약 지하철을 타고 건물 내부의 아시아문화정보원 지붕에서 ACC를 처음 보았다면, 아니면 충장로 쪽에서 5.18민주광장을 바라보면서 들어 갔다면 동선이나 첫인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눈에 처음 들어온 것은 어린이문화원 쪽을 둘러싸고 있는 가림막이었다. 9월 개관인 줄 알았는데, 공식 개관은 11월이었고 일부 공사가 남았던 것이다. 사진작가까지 동행했는데 촬영은 할 수 있을까 더럭 겁이 났다. 메인 출입구 앞 광장은 보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아시아문화광장으로 향하는 계단에 내려섰다. 들어가는 길에 광장 중앙의 1980년대 스타일의 파란색 분수대를 흘깃 보면서 아마 이곳은 대상지가 아닌가보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중에 깨달았다. 이곳이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이며, 건축가와 조경가 모두 이 공간의 목격자들을 세심하게 선별해 남겼다는 것 등. 90년대 학번인 나에게 1980년 광주는 가슴을 채우는 기억은 아니어서 무심결에 넘겼노라고 잠시 변명해보지만 무언가 부채감이 남는다. 인터넷으로 찾아본 1980년 광장의 모습은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여는 장면이었다. 그 사진을 보니 파리의 레퓌블리크 광장Place de la République이 떠올랐다. 지난 11월 13일 충격적인 파리 테러 이후 뉴스에서는 연일 테러의 참상과 추모 물결, 그리고 그 가운데 빛나는 성숙한 시민의식에 관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 배경은 모두 ‘공화국 광장’, 그러니까 내가 지난 여름 답사했고 『환경과조경』 10월호에 소개되었던 그 광장 말이다. 머플러로 눈을 가린 한 청년이 “나는 무슬림이지만 테러리스트는 아니”라고 시민들과 프리 허그를 하며 연대와 포용의 메시지를 전한 눈물의 현장도 레퓌블리크 광장이었다. 이런 광장의 모습이 프랑스인들의 충격과 긴장, 그리고 이슬람 세계와의 구조적 문제를 모두 덮을 수는 없겠지만 광장을 가득메운 시민들의 모습에 가슴이 뛰기도 하고 콧등이 시큰거리기도 한다. 평화로운 오후 스케이트 보더들이 활보하는 광장과 추모와 집회의 현장 모두 레퓌블리크 광장의 일면이리라. 5월의 광장에서 레퓌블리크 광장을 떠올린 것은 그런 광장의 역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남대학교의 천득염 교수는 이제 광주 사람들은 ACC를 굳이 5월과 연결시키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과거의 유산만큼 미래도 중요할 테니. 5.18민주광장이 누군가에게는 그날의 기억을 상기시킨다면, 누군가에게는 새로 만들어진 아시아문화광장과 함께 일상과 축제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조동범 교수가 특집 원고에서 “2015년 가을은 이제 막 시민 광장의 역사가 열리는 시점”이라고 썼듯이 상처를 간직한 광장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시아문화광장은 ACC의 모든 시설로 연결되는 중심의 빈 공간이다. 5.18민주광장에서 시작해서 아시아문화광장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건물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걷다보니 예술극장이었다. 마침 개관 페스티벌 기간이었는데 공연을 준비 중인극장 앞에서는 그루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막 저물기 시작한 해는 흰색 노출콘크리트 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 이미 난 무장 해제되었다. 극장 앞 계단에 걸터앉아 고개를 돌리니, 그 풍경 또한 마음을 흔드는 것이었다. 마치 7가지 다른 사랑 이야기가 동시에 펼쳐지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처럼, 눈앞에서 수많은 프레임이 교차하면서 각기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조금씩 틀어서 앉혀진 건물 사이사이에는 정원이 그리고 저 멀리 구도심의 오래된 건물들과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설계자는 이곳에서 5.18민주광장에서 아시아문화광장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의 클라이맥스를 상상하지 않았을까.


오래 전에 읽었던 건축가 피터 줌토르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좋은 건축적 체험은 ‘분위기atmospheres’로 만들어진다고 했다. 예를 들어 휴일 오전 11시의 햇빛, 그 빛을 받은 건물의 그림자 색깔, 따뜻한 공기, 그 주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 이 모든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평소보다 좀 더 천천히 걷고,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 공간의 분위기와 나의 감각이 화학작용을 하며 지극히 주관적인 의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의 분위기 없이, 즉 그 장소를 떠나면 동일한 느낌은 다시 받을 수 없다. 피터 줌토르는 이를 ‘실제의 마법Magic of the Real’이라고 부른다.


12월이다. 한해를 돌아보고 그 공을 평가하는 각종 시상식이 열리는 시기다. 그래서 나도 아주 주관적이고 편파적인 ‘올해의 광장’을 뽑아보았다. 두둥! 영예의 수상자는 바로 ‘아시아문화광장’이다. 천득염 교수의 특집 원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ACC 앞에는 난제들이 많다. 그럼에도 아시아문화광장이 새로운 역사를 쓰기를 기대한다. 아마 그 역사는 시민 개개인의 마법 같은 기억으로 채워지리라. 아시아문화광장의 미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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