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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DA] 판타스틱 빌리지, 해방촌?
Is Haebangchon a Fantastic Village?
  • 환경과조경 2016년 2월

“우리 토요일에 파티 해.” “무슨 파티” “『남산골 해방촌』 발간 파티!” 파티에 초대한 B는 잡지의 발행인이다. 해방촌에서 9년간 살고 있는 (겨우 9년밖에 안돼서 동네에서 명함도 못 내민다는) B는 4년 전부터 일 년에 두세 호씩 ‘남산골 해방촌’이란 이름의 동네 잡지를 만들고 있다. 아홉 번째 잡지를 내면서 이번에는 행사를 좀 크게 벌려보겠다며 거창한 초대장을 보냈다. 전부터 B가 해방촌에서 주민들과 이런저런 모임을 갖는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심드렁했던 난 이번에는 3월호 필자인 S가 온다는 소식에 금쪽같은 토요일 저녁 맥주 한 패키지를 사들고 해방촌으로 향했다.

남산과 용산미군기지 사이에 자리한 산동네(?) 해방촌은 녹사평역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천생 길치인 나는 그날도 휴대폰의 지도 앱을 보면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친절하게 모임 장소까지 안내해준 한 주민 덕택에 헛걸음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색다른 친절을 한 번 경험했다고 해방촌을 정이 넘치는 ‘도시 마을’의 반열에 올려놓고 싶진 않았지만, 꿀렁꿀렁 언덕을 오르는 마을버스 안에서 역시 좀 남다른 동네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토속적인 이름과 달리 해방촌이 주변의 이태원, 경리단길, 한남동 등에 이어 핫하고 힙한 플레이스로 떠오른 지도 몇 년이 지났다. 미군과 외국인들이 많이 오가고, “스타벅스 하나 들어설 번듯한 땅이 없는” 이 지역의 낮은 임대료는 젊고 자유로운 디자이너나 아티스트들을 불러들였다. 개발이 비껴간 오래된 동네의 오밀조밀한 분위기에 다양한 사람들이 조용히 스며들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이제는 들썩거리는 임대료에 젠트리피케이션의 위협을 피해갈 수 있을지 우려도 피어나는 동네다.

모임 장소는 해방촌 오거리에 있는 한 정보디자인협동조합의 카페 공간이었다.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니, 해방촌에 거처를 두고 있거나 작업실을 꾸리고 있는 아티스트나 디자이너, 일러스트나 카툰을 그리는 이들, 연주자 등이다. 그리고 해방촌을 설계 스튜디오의 사이트로 삼았던 건축학과 학생들 여럿과 교수들도 몇몇 참석했다.

발간 파티의 첫 번째 순서는 『남산골 해방촌』 9호 글쓴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 B는 ‘해룡빌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해룡빌딩이 어디더라’ 알고 보니 B의 기사는 나 같은 외지인은 몰라도 해방촌 주민들은 모두 아는 ‘뚜레쥬르(가 1층에 입점한) 빌딩’ 탐사기였다. 해방촌에서 가장 높은 3층짜리 근생인 해룡빌딩은 1969년에 지어진 건물로 겉에서는 눈치 채기 어렵지만 안에 들어서면 부동산개발회사와 예술가 작업실이, 디자이너 사무실과 교회가, 그리고 야밤에 음악을 틀어가며 파티를 벌여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옥상 공간이 동거하는 야릇하고 오묘한 공간이란다. “우중충한 2층의 복도 양옆으로 한쪽에는 뭔가 아기자기하고 재미있는 물건들과 에너지로 가득 찬 작업실이, 한쪽에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바둑을 두시는 기원이 나란히 배치”된, 마치 오래된 동네를 무대로 토박이 어르신들과 문화와 예술을 업으로 삼는 젊은 이주민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살고 있는 해방촌의 풍경을 축소판처럼 보여주는 건물이다.

옆자리에 서 있는 잘생기고 스타일 좋은 청년에게 동네 주민이냐며 말을 붙여 보았다. 해방촌에서 세탁소 겸 카페를 운영하고 있단다. 건축을 전공했다는 그는 한 눈에 보기에도 고전적인 세탁소 사장님은 아니었다. “여기 해방촌에는 단기로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서 이들이 세탁을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어요.”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그가 운영하는 ‘론드리 프로젝트Laundry Project’는 독특한 공간 구성과 세련된 인테리어로 혹은 마치 “뉴욕에 갔을 때 봤던 공간”으로 이미 블로거나 인스타그래머들에게 유명한 카페였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없어지는 게 세탁소잖아요. 꼭 이런 형태가 아니더라도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싶었어요.” 지역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그의 비즈니스 모델이 대기업과 대형 프렌차이즈 카페 등이 주도하는 변화의 파고를 넘을 수 있을까? 해룡빌딩도 그의 카페도 계속 볼 수 있기를 기대하는 만큼 걱정이 앞선다.

해방촌과 이런저런 연을 맺고 있는 필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동네 잡지를 훑어 보니 역시 해방촌의 예술가들과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사가 빠지지 않았고, 해방촌 도시재생사업 회의 참관기, 건축학과 학생들의 (과제)작품 등도 실려 있었다. 그 밖에는 해방촌에서 추운 겨울을 나는 법이나 병원과 운동에 관한 생활 정보, 감나무가 있는 집 취재 같은 소소한 이야기들이 50쪽 남짓한 이번 호를 채우고 있었다. 잡지 제작비 모금을 위한 작은 바자회와 우크렐레의 반주에 맞춘 노래 등 마지막 축하 공연까지 파티의 분위기는 내내 따뜻했고 마치 동아리 모임을 연상케 했다. B는 “비슷한 사람들이 친구가 되니 동네에 좀 더 애착을 가지게 돼.” 또 그러다보니 잡지뿐만 아니라 작은 이벤트도 하게 된다며 그간의 해방촌살이를 들려줬다. “결국은 비슷한 분야에 종사하거나 취향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 모이기 마련이네요. 해방촌에 오랫동안 살았던 원주민들과는 섞이기 어려울 것 같아요.” “원주민이라서가 아니라, 세대와 가치관이 달라서 같이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을 굳이 하나로 묶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떤 글에서 읽었는데, 합일의 공동체가 아닌 차이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인상적이었어. 다종다양한 그룹들이 그 차이를 인정하고 느슨하게 연대하는 것” B와의 대화에서, 이번 달 서예례 교수의 ‘그들이 설계하는 법’의 “생동적이고 아름다운 도시란 다양한 취향이 상충적으로 공존하는 도시다”라는 대목이 떠오른다.

TV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중 얼마 전 종영한 ‘응답하라 1988’은 그 어느 때보다 가족과 동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옛 추억을 더듬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았으나 2016년을 사는 나에게 봉황당 골목과 평상이 상징하는 가족 같은 이웃과 오순도순 세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삶은 이제는 실현불가능한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지금 우리가 찾는 마을은 분명 그때와는 다른 형태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혹시 해방촌이 그런 대안적 공동체의 단서를 보여주지 않을까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날 기다리던 S는 배를 한 상자 들고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경제학을 전공한 후 대중문화와 산업을 연구했던 그가 요즘 발표하는 논문의 주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이다. 음악에 대한 저서를 내던 그가 갑자기 왜 지역에 대한 연구로 돌아섰을까 궁금했다. “사실 나로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홍대의 음악 산업과 문화에 관심이 있었는데, 홍대가 핫한 동네로 부상하면서 아티스트들이 밀려나는 것을 보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거죠.” 미리 홍보하자면 문화예술과 부동산이 결합하고 충돌하는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그의 관찰과 통찰은 3월호 특집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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