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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걸어서 한강을 건너기
Editorial: Crossing the Han River on Foot
  • 환경과조경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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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의 시대 쌍팔년보다 한 해 전 1월, 대입시험에서 해방된 나는 해보지 않은 것들, 못해본 것들을 매일 하나씩 하며 시린 겨울을 통과하고 있었다. 급기야 걸어서 한강을 건너기로 마음먹었다. 이유는 없었다. 아무 목적 없이 북단의 성수동에서 남단의 청담동까지 영동대교를 걸었다. 주현미의 노래가사처럼 밤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희뿌연 밤안개가 자욱했고, 버스로 건널 때와는 다르게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출렁거렸다. 그날의 기억은 다 사라졌지만 강한 진동감만큼은 아직도 온몸에 생생히 남아 있다. 한강에는 무려 스물세 개의 다리가 있지만 다리 위를 걸어 한강을 세로지른 건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번 2월호의 다리 특집을 교정보다가 불현듯 영동대교를 다시 건너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잠자고 있던 영동대교의 기억이 다시 살아난 건 걸어서 건넌 유일한 한강 다리가 영동대교인 탓도 있겠지만 그 시절 듣기 싫어도 끊임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트로트 ‘비 내리는 영동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무렵엔 한강 다리가 등장하는 대중가요가 제법 있었다. ‘어제 처음 만나서 사랑을 하고 / 우리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라는 가사 때문에 금지곡이 되었던 혜은이의 ‘제3한강교’나 ‘너를 보면 나는 잠이 와 / 잠이 오면 나는 잠을 자’라는 몽환적 가사로 유명했던 박영민의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를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에 한강 다리를 주제로 한 가요가 많았던 건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던 당시 자본과 사람과 유흥 문화가 강남으로 몰려들던 현상의 상징이라는 평도 있다. 한동안 뜸했던 한강 다리 노래가 최근 다시 부활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 / 어디냐고 여쭤보면 항상 / 양화대교, 양화대교 … 어디시냐고 어디냐고 / 여쭤보면 아버지는 항상 / 양화대교, 양화대교 / 이제 나는 서있네 그 다리 위에….”

여러 음원 차트에서 1위 자리를 내려놓지 않던 자이언티의 ‘양화대교’가 대표적이다. 베테랑 래퍼인 딥플로우는 ‘양화’라는 제목을 단 3집 앨범 전곡에 양화대교 양쪽의 이야기를 담았고, 인디밴드 제8극장의 2집 제목도 ‘양화대교’다. 작년 「동아일보」의한 기획 기사에 따르면 양화대교가 제목이나 가사에 등장하는 대중가요가 14곡이나 된다. 양화대교는 홍대와 그 주변을 중심으로 한 동시대 청년 문화의 공간적 투영이라는 게 대중음악 평론가들의 해석이다. 그럼 이번에는 영동대교 말고 양화대교를 건너볼까? 그러나 오늘은 영하 18도, 체감 온도는 영하 30도. 외국 다리만 보고 감탄하지 말고 우리나라 다리도 사랑해주어야 한다는 애국심만으로 2km의 양화대교를 건널 수는 없다. 그 중간에 매력적인 겨울의 선유도가 있다 하더라도, 건너가면 제 아무리 핫한 홍대 문화가 있다 하더라도, 극지를 탐험하는 심정으로 한강을 건널 이유가 없다.


반년 넘게 뜸들여가며 신중하게 기획하는 특집이 있는가 하면 이번 호의 ‘다리, 연결 그 이상’처럼 우연하게 착안해 속전속결로 진행하는 특집도 있다. 몇 달 전에 이미 수록하기로 결정한 보행교 작품이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다리 프로젝트의 검토의뢰가 들어왔고 때마침 섭외에 성공한 해외 작품도 다리였다. 본래 캐나다 조경가 클로드 코르미에 Claude Cormier의 근작들로 특집을 엮으려던 구상이 난관에 부딪힌 참에 아예 다리 작업 몇 개를 더 섭외해서 다리 특집을 꾸리기로 방향을 급선회했다. 이번 특집에 싣는 다섯 개 프로젝트만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듯, 요즘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는 다리가 도시 생활과 문화의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다. 멀리 떨어진 두 공간을 연결하는 기능, 한 시대의 최첨단 토목 기술을 대표하는 구조물, 거대한 규모와 완벽한 구조를 갖춘 빼어난 건축미와 같은 다리의 전통적 가치 때문이 아니다. 도시를 섬세하게 수술하고 치료하여 다시 살리는 과정의 촉매제로서 다리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다리는 도시, 건축, 조경을 가로지르는 융합적 프로젝트의 매개체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보행자와 자전거의 천국 코펜하겐에 새로 들어선 시르켈브로엔Cirkelbroen은 규모는 작지만 문화적 파급력은 강력한 ‘강소형’ 랜드마크로 뜨고 있다. 이 다리는 자전거와 보행자 모두 운하를 쉽고 안전하게 건널 수 있게 해주는 동시에 운하를 지나가는 배도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게 해주는 다목적 다리다. 다리를 들어 올리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원형판이 엇갈려 회전하며 다리가 열리는 혁신적인 해법을 취하고 있다. 연결하고 통과하는 다리를 넘어 ‘멈춤’의 공간이 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운 시르켈브로엔에 잠시 머물며 코펜하겐의 명소를 배경으로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 로테르담의 뤼흐트신헬Luchtsingel 보행교는 방치된 건물, 폐허가 된 블록, 사각지대가 된 오픈스페이스 등 도심의 18개 공간을 다리 하나로 다시 엮어낸 수작이다. 수십 년 동안 단절된 로테르담 중심부의 세 구역을 세심하게 연결하여 도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이 다리는 크라우드 펀딩으로 건설 비용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다리라는 이름표를 달아줄 만하다.

구조공학자 이종세(한양대학교 교수)의 말처럼, “다리는 기능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다리가 놓이는 순간 다리는 더 이상 단순한 기능적인 구조물이 아니게 된다. … 모든 다리는 세상에 대한 시선을 구현하고 변화시키며 말을 걸어온다. 다리는 도시와 사람과 자연이 만드는 생태계의 일부가 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낸다”(『명화 속에 담긴 그 도시의 다리』, 씨아이알, 2015). 이런 점에서 보면 한강의 다리들은 참 재미가 없다. 강 양쪽을 물리적으로 잇는 기능뿐이다. 사람과 물류를 바쁘게 실어 날라야 하는 자동차를 위한 기계적 장치일 뿐이다. 한강의 다리들은 확장과 속도와 효율만을 신봉하던 개발 시대 서울의 단면이다. 아마 서울 시민 중 센 강의 퐁네프 다리나 템즈 강의 밀레니엄 브리지를 걸어서 건너며 기념사진을 찍어 본 사람은 많아도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며 서울의 풍경을 감상해 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걸어서 건널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건너는 과정은 모험이고, 건너기 전과 후도 막막하다. 30년 전의 나처럼 목적 없이 영동대교를 건넌다면 그건 일상에서 벗어난 일탈이거나 탐험일뿐이다.

좋은 도시의 필요충분 조건은 안전하고 쾌적하고 즐거운 ‘걷기’다. 누구나 말하듯 산과 강은 서울의 소중한 자산이자 고유한 정체성이다. 모험이 아닌 일상으로 한강 다리를 쉽게 걸어 건널 수 있을 때, 건너야 할 자연스러운 이유가 있을 때, 서울도 살기좋은 도시의 랭킹에 이름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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