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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예술가로 살아가기
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바벨’ 전
  • 환경과조경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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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입구의 하늘색 벽에는 전시에 참여한 17개 팀과 그 구성원의 이름이 적혀 있다.

 

몇 년 전부터 서울의 작은 골목길, 외딴 곳에 소규모 전시 공간과 예술가의 작업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전시를 하는 예술가들은 이름 있는 미술관의 보도 자료 대신, 소셜 미디어에 독특한 포스터나 문구를 게시해 전시회를 홍보한다. 전시 방식도 독특하다.

뜻이 맞는 예술 그룹이 함께 단발성 프로젝트를 기획하기도 하고 작가가 전시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현대 예술은 더 이상 미술관의 벽에 얌전히 걸려 있는 작품이 아니다. 몇몇 사람은 이 같이 미술관의 하얀 직육면체 공간을 탈피한 전시 공간, 주로 20~30대의 젊은 작가가 직접 운영하는 창작 공간 등의 예술 플랫폼을 ‘신생 공간’이라 부른다. 신생 공간은 일반적인 예술가들이 기성 작가의 반열에 오르기 어려운 현실과 전시 공간 부족으로 인해 생겼다는 점에서 1990년대 생겨난 ‘대안 공간’과 닮아 있다. 하지만 신생 공간은 대안 공간처럼 기성 미술계에 저항하기 위한 정치적인 이유로 생겨난 것이 아니다. 예술가로 살아가기 힘든 현실 속에서 예술가로서 자립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이 같은 예술 플랫폼에서 작업 중인 작가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의 전시장에 모였다. 서울시립미술관 SeMA(Seoul Museum of Art)의 ‘서울 바벨(2016. 1. 19. ~ 4. 5.)’ 전은 ‘SeMA 삼색 전’ 중 하나로, 젊은 유망 작가의 그룹전인 ‘SeMA 블루’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다. 을지로, 창신동, 청량리 등 서울의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예술 플랫폼과 SNS 등의 웹을 기반으로 한시적 공동작업을 진행 중인 대안적 공동체의 활동과 방식을 조망한다. 전시에는 총 17팀, 70여 명의 예술가가 참여했다. 본 전시와 함께 퍼포먼스, 작가와의 대화, 아카이브 웹사이트 론칭 등 다채로운 연계 행사가 4월 5일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경계가 없는 공간

관람객은 서울시립미술관의 커다란 유리문을 통과한 순간부터 전시장에 들어선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서울 바벨’이라는 글자가 가장 먼저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그 아래에 커다랗게 뚫려 있는 전시장의 입구로 ‘임시재생목록’의 영상 작품이 상영되고 있는 스크린이 보인다. 굳이 전시장의 입구를 통과하지 않아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시장 바깥의 오른편에는 수레에 TV, 버스 손잡이 등을 설치한 작품인 ‘펭귄 2-나-9’가 놓여 있고 왼편의 또 다른 입구에는 ‘활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도통 어디서부터 전시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 전시장 내부에도 작품 간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의 감상을 돕기 위해 공간을 분리하는 가벽을 찾아보기 힘들다. 미술관 바닥이나 벽면에 으레 표시되어 있는 작품 감상 순서를 안내하는 화살표도 없다. 한 작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다른 작품의 감상을 방해하기도 한다. 활동 지역 혹은 팀 별로 묶어서 비정형적으로 배치된 작품들과 그 사이를 관람객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전시장의 풍경은 시끌벅적한 행사의 현장을 떠올리게 한다.

작품을 감상하기엔 산만한 전시 구성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는 ‘서울 바벨’ 전의 기획 의도와 딱 맞아 떨어진다. ‘서울 바벨’ 전은 작가들의 작품에 주목하고 하나하나 소개하려 기획된 것이 아니다. 전시의 목적은 현대의 젊은 예술가들이 어떤 공간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펼치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이곳에 모인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실이나 전시실이 위치한 지역의 상황에 맞추어 작업을 진행한다. 예술가들 사이에는 어떤 경계도 없으며 오히려 물리적으로 혹은 SNS등의 웹 공간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그렇기에 공간의 구획은 아무 의미가 없다. 경계가 없이 펼쳐져 있는 전시 공간은 서울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작업 방식과 공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변지혜 큐레이터는 이 공간에 대해 “이 시대에 서울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의 고민이 만들어 낸 지형도”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들의 이야기

정신없이 배치되어 있는 작품들 사이에는 작가의 인터뷰 영상과 헤드폰이 설치되어 있다. ‘아카이브 봄’은 전시장에 작업실을 옮겨왔는데, 인터뷰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은 단순히 전시장에 작업실을 흉내 낸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공간에서 영상, 음악 편집 등 실제 작품을 만들기 위한 작업 활동을 진행한다. 이전시가 장소특정적인 전시로 오해받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작업 공간을 화이트 큐브에 재현하는 것은 연극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했고 어떤 형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지 행위 자체를 보여주려 했다. ‘보증금/월세’ 형식의 독특한 이름인 ‘800/40’, ‘300/20’, ‘200/20’은 세운상가에 자리한 공간이다. ‘800/40’에서는 24시간 레지던스 프로그램이 운영되며 이를 모태로 한 상품 판매가 ‘300/20’에서 이루어진다. ‘200/20’에서는 서점이 운영되며 미술과 관련된 글을 수집하고 생산하는 작업이 진행된다. 하나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파생되는 독특한 예술 플랫폼이다. ‘합정지구’의 바닥에 뉘인 채 전시된 작품들은 빠르게 흘러가는 현실과 달리 자신의 작업 속도에 따라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싶은 작가의 바람을 담고 있다. 뉘어진 작품 사이를 오가기 위해서는 작품을 세워서 전시했을 때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이용해 관람객이 천천히 작품을 감상하게 만든다. 작품 위에 앉거나 서서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제안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를 통해 관람객은 작가에 게 맞는 작업 속도가 있듯이 자신에게 적당한 속도로 작품을 감상하게 된다.

작품과 인터뷰를 통해 작가들은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과 이를 헤쳐 나가기 위해 어떤 대안을 모색해가고 있는지 이야기한다. 가만히 전시장과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예술가들의 고민거리가 나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꿈과 현실, 보증금과 월세의 문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다. 때때로 ‘임시재생목록’의 영상에서 울려퍼지는 지하철 안내 방송 소리가 관람객들을 자극한다. 이 공간은 매일 출근, 통학을 하며 듣는 지하철 안내 방송처럼 우리의 삶과 밀접한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예술가만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서울 바벨’ 전은 예술가의 독립적이고 유기적인 행보를 지원하는 동시에 우리 모두의 관심을 모으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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