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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조경계의 화이트 스완
  • 환경과조경 2022년 12월

‘화이트 스완(white swan)’은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반복적으로 일어나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지 못하는 상황을 일컫는 경제학 용어로, 뉴욕 대학교 누리엘 루비니(Nouriel Roubini) 교수가 『위기의 경제학(Crisis Economics)』(2011)에서 처음 사용하면서 알려졌다. 그는 모든 경제 위기는 시기와 상황에 따른 고유한 요인에 의해 발생하지만, 통화 정책의 완화, 금융 시스템에 대한 느슨한 감독, 과도한 차입에 의한 자산 가격 거품, 투자자들의 지나친 탐욕 등 공통적 요인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며 예방 역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같이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을 이르는 말인 ‘블랙 스완(black swan)’과 대비되는 이론이다. 블랙 스완은 월스트리트 투자 전문가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가 2007년 월스트리트의 허상을 파헤친 동명의 책을 출간하면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고, 전 세계의 경제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의미로 쓰였다. 최근에 벌어진 코로나19 사태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블랙 스완이라면, 카카오 먹통 사태와 레고랜드발 금융 위기, 세월호 참사에 이어 수많은 사전 징후에도 전혀 대비하지 않아 소중한 젊은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이태원 참사는 정부의 정상적인 사전 대응이 있었다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었던 화이트 스완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미국발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거래량이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고, 강원도 레고랜드의 지급 보증 거부 사태가 낳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의 혼란으로 건설 경기가 얼어붙고 있는 상황에서 조경계의 긴장감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조경 분야의 블랙 스완의 예로 폭우, 가뭄, 혹한 등 기후위기에서 비롯된 예측 불가능한 식생 환경을 들 수 있다. 이상 기후로 식재 수목이 예전과 다르게 높은 하자율을 보이고 있지만, 최근의 불규칙한 기후변화는 통계 예측 수준을 넘어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대응이 불가능할 정도로 위협적이다.

 

반면 조금만 더 면밀히 살펴보고 준비하면 충분히 예측하고 대처할 수 있는 화이트 스완도 있다. 올해 탄생 반세기를 맞은 한국 조경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 발전과 함께 학문과 산업 모두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고도 성장기에 급속한 개발로 인해 훼손된 국토의 상처를 치유하고 도시 환경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데 누구보다 조경인들이 앞장서 왔다. 하지만 여전히 조경은 위상에 걸맞은 사회적 인정을 못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조경 분야에 대한 정책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 그중 하나다. 조경계가 잘 나가던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누군가가 해결해 주겠지’ 하며 우리의 권익을 찾는 데 침묵해왔다. 반면 건축 등 인접 분야는 정부의 지원과 업역 확대를 위한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분주히 움직인 결과, 설계대가를 현실화하고 설계공모 제도를 정착시키는 등 그들만의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런 결과는 정부의 지원을 받는 대한건축사협회나 건축공간연구원과 같은 정부출연 연구 기관의 치밀하고 지속적인 연구와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조경 분야도 조경진흥법을 마련하고 체계적 연구를 지원할 수 있는 조경진흥원 설립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요원하다. 한국조경협회를 비롯한 여러 조경 단체는 여전히 정부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쌈짓돈으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조경 분야의 정책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환경조경발전재단 또한 조경진흥법에 지원 관련 조항이 명시되어있음에도 여전히 관련 기관에서 정책 자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법과 시행령 등 제도적 장치없이는 정부의 정책 지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조경계는 그동안 능동적 준비와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 결과 늘 위기를 겪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 조경계의 첫 번째 화이트 스완이다.

 

조경이 사회적 가치나 중요도에 비해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은 조경 분야를 지원하는 강력한 중앙부처가 없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장기적으로는 국토교통부의 일개 녹색도시과를 넘어 산림청과 환경부 그리고 여러 부처에 흩어져 있는 조경 관련 사업을 모두 아우르고 하나로 통합하는 강력한 녹색 정부 부처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조경가로서 전문성을 확실히 인정받을 수 있도록 자격 제도도 보완해야 한다. 건축가처럼 창의적 디자인을 수행하는 조경가에게 조경기술사와 기사로 대표되는 엔지니어 라이센스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이나 다를 바 없다.

 

올해 한국조경학회와 한국조경설계업협의회는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가칭 ‘조경사’ 제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조경가를 위한 법정 단체를 구성하고 ‘조경사’ 제도를 도입해 정책적, 제도적 지원을 받게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국토교통부도 올해 조경진흥법 제5조에 따른 ‘제2차 조경진흥기본계획’의 ‘조경설계 자격 및 면허제도’ 신설로서 ‘조경사 제도’를 검토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늦었지만 반가운 소식이다. 조경계도 앞으로 진행 상황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힘을 실어야 할 것이다.

 

조경계의 두 번째 화이트 스완은 조경 분야의 성장을 이끌어야 할 인재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다. 전국 대학에 50개가 넘는 조경학과가 있고 매년 1,000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지만, 대다수 학생은 전공인 조경 분야로 진출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이로 인해 설계, 시공, 자재 할 것 없이 조경 업계 모두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조경계가 호황일 때 대부분의 학생이 조경설계가가 되고 멋진 조경시공기술자가 되는 게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MZ세대의 특성상 건축, 토목 등 타 분야도 비슷한 현상을 겪고 있지만, 기후위기라는 시대상을 생각하면 그 어떤 분야보다 역할이 크고 비전이 있는 조경 분야에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후진 양성을 소홀히 해온 선배 조경인의 노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하고 반성해야 한다. 이제라도 미래의 전문 조경인이 될 조경학과 학생과 후배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비전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 인재 양성이야말로 건강한 조경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올해는 한국 조경이 50주년을 맞이하고 ‘제58차 세계조경가대회(IFLA 2022)’가 30년 만에 다시 한국 광주에서 성공리에 개최된 뜻깊은 해다. 코로나19 사태로 여전히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도, 세계 40개 나라에서 1,500여 명의 조경가가 참여해 어느 대회 못지않은 성황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한국 조경의 위상과 저력을 세계에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경가는 코로나19와 기후위기로 야기되는 도시 환경과 생태계의 변화, 인류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선도적이고 실천적인 해법을 제시해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를 탄소중립적인 미래로 옮기는 데 크게 공헌하고 있다. 조경계가 과거의 성장을 이어가고 새로운 비전을 가지려면 학회와 관련 단체는 전략적 연구를 바탕으로 안정적 미래를 위한 제도적 틀을 마련해야 하며, 업계도 인재가 우리의 업을 계승할 수 있도록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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