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에디토리얼] 세 번째 트랙, 비평으로서의 디자인
  • 환경과조경 2025년 7월호

십여 년 전 기억 한 토막. 어느 한여름 밤, 무더위는 생맥주로 이겨내야 한다는 신념으로 뭉친 번개 모임 1차가 끝나자 누군가 신선한 제안을 했다. 2차 대신 공원 벤치에 떨어져 앉아 호젓하게 아이스크림을 먹자. 편의점에서 각자 최애 아이스크림을 골라 근처 보라매공원에 들어섰다. 정적만 감도는 고요한 밤을 기대했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놀라운 풍경. 군중이라고 표현해야 할 만큼 많은 사람이 넓은 공원을 힘차게 걷고 있었다. 넓은 운동장의 트랙을 따라 한 방향으로 줄지어 걷는 군중.

 

알고 보니 그날 밤의 비현실적 장면은 일상의 풍경이었다.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자리한 보라매공원에는 여느 공원의 공간 구성과 다른 특징이 있다. 공원 한가운데 대형 운동장이 있는 것. 한 바퀴 도는 데 600m가 넘는 트랙을 따라 다양한 연령대의 동네 주민들이 날씨에 상관없이 새벽에도, 낮에도, 늦은 밤에도 걷고 뛴다. 낮보다 밤에 더 붐비는 공원. 이 공원 운동장은 원래 공군사관학교의 연병장이었다. 1958년 이곳에 터를 잡은 공군사관학교가 1985년 말 청주로 이전하자 서울시는 부지와 시설물, 수목을 매입하고 보수해 1986년 어린이날 보라매공원(면적 413,352㎡)을 열었다. 이전적지 공원화 사업의 초기 사례다. 쉽게 짐작할 수 있듯, 공원 이름의 ‘보라매’는 대한민국 공군을 상징한다. 명칭뿐 아니라 공원의 여러 공간과 시설도 공군과 공군사관학교의 기억을 잇고 있다. 1960년대 초에 조성한 연병장은 공원의 대형 운동장으로 쓰이고 있고, 당시의 연못도 계속 유지되면서 공원 경관의 주연 역할을 하고 있다. 보라매탑과 성무탑을 비롯한 많은 기념물과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고, 건물 일부도 재활용되고 있다.

 

보라매공원 초창기에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간과 시설이 강조되었다. 개원 직후 연못 근처에 작은 동물원이 조성됐고, 1990년대에는 수영장과 롤러스케이트장이 운영됐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 다양한 청소년 시설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점차 전 연령대가 이용하는 공간들이 마련되면서 당대 공원 문화 트렌드를 반영했다. 운동장 트랙을 가득 메운 남녀노소 산책자들과 러너들이 보여주듯, 보라매공원은 체육과 운동 중심의 공원으로 각광받으며 시민들의 건강한 일상을 담아내고 있다.(각주 1) 스타 조경가가 각 잡고 디자인한 공원이 아님에도 보라매공원은 공원의 양과 질이 취약한 동작구, 영등포구, 구로구, 관악구 등 서울 서남권의 멀티플레이어 공원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지난 5월 22일부터 보라매공원에서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개최되고 있다. 공군사관학교에서 대형 공원으로 이어진 70년 가까운 장소의 기억 위에 무려 111개의 전시 정원(show garden)이 뿌려졌다. 10월 20일까지 다섯 달 동안 쇼는 계속된다. 서울시 보도자료에 따르면, 개막 열흘 만에 120만 명 넘는 시민이 정원박람회를 찾았다. 방문객 수만 보자면 성공한 축제다. 각각 존재감을 뽐내는 화려한 정원들의 전시장으로 바뀐 보라매공원, 발 디딜 틈이 없다.

 

요즘 조경가들 모임이나 대학원 세미나에서는 대형 공원과 정원박람회―또는 전시 정원―의 관계를 둘러싼 열띤 토론이 벌어지곤 한다. 정원박람회의 정원들은 공원의 장소성이나 도시(계획)적 맥락과 상관없는 특별한 주제, 형태, 메시지를 전시한다. 전시 정원의 핵심은 일시성이다. 화려한 축제가 끝나고 나면 오랫동안 작동되던 공원의 일상 풍경이 빠르게 회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보라매공원 정원박람회는 반년 가까이 운영되며, 행사가 끝난 뒤에도 전시 정원 대부분이 유지‧관리될 예정이다. 정원의 존치에 지속가능성이나 친환경성 같은 시대정신까지 부여된다. 일시적이어야 할 전시 정원들이 영속되며 공원을 재구성한다면, 공원을 체계적으로 재편하는 마스터플랜이 선행됐어야 한다. 첼시 가든쇼로 유명한 영국왕립원예협회(RHS) 정원박람회들의 설계 지침서를 보면 체계적 철거 계획과 철거 후 자재 재활용 계획이 중요한 심사 항목 중 하나다.

 

알록달록한 정원들로 가득 찬 이번 호 지면에서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 초청정원인 ‘세 번째 트랙’에 특별한 주목을 해주시길. 박승진(디자인 스튜디오 loci)의 작업은 공원 속 전시 정원의 한계, 즉 공원의 장소성이나 도시적 맥락과 무관하게 전시되는 정원 형식과 메시지의 난맥을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다. 그는 운동장 둘레를 걷고 뛰는 보라매공원 특유의 공원 문화를 그대로 수용했다. 빠르게 걷거나 뛰는 첫 번째 트랙과 보통 속도로 걷는 두 번째 트랙 안쪽에 ‘아주 느리게(largo)’ 걷는 세 번째 트랙을 삽입했다. 원래 있던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몇 그루 사이에 날렵한 트랙을 끼워 넣고 도시 주변 야산에서 만날 수 있는 관목과 풀을 심은 게 전부다. 화려한 형태도, 잔뜩 힘준 메시지도 없다. 박승진은 이렇게 말한다. “공원을 방문한 이들이 아주아주 천천히 이 길을 걷기를 바란다.”

 

박승진의 ‘세 번째 트랙’은 서울형(?) 정원박람회에 대한 예리한 비평이기도 하다. 글이 아닌 디자인으로 쓴 비평. 그는 박람회에 초청된 뒤 “가장 큰 부담과 고민은 쇼 가든, 즉 전시 정원이 공원에 계속 남는다는 점”이었다고 말한다. “일시적인 정원이라면 마음껏 형태와 주제, 메시지를 펼칠 수 있겠지만, 계속 유지되는 작품이라면 그건 공원 설계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세 번째 트랙’은 마치 공원의 그 자리에 오랫동안 있었던 것 같은 작은 흔적이자, 그 장소의 일상이 더 풍성하게 확장되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각주 정리

1. 보라매공원의 조성 과정과 변화, 도시계획적 의의에 대해 더 상세히 알아보고자 한다면, ‘도시경관연구회 보라’가 서울시 공공 기록물을 토대로 작성한 다음 논문을 권한다. 서영애, 박희성, 길지혜, 김정화, 이상민, 최혜영, “이전적지 공원으로서 서울 보라매공원의 변화와 의미”, 『한국조경학회지』 51(1), 2023, pp.85~97.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