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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멘트 슈테트바흐(Allmend Stettbach)는 스위스 취리히의 동쪽 경계에 있는 들판이다. 뜀걸음으로 5분이면 가로지르는 넓은 풀밭 한쪽으로 나무가 드문드문 자라는 거친 언덕이 자리한다. 다소 생경한 이곳의 풍경은 1980년대 취리히산에 터널을 뚫으면서 파낸 40만㎥의 흙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처음 만들어졌다. 지하 깊은 곳에서 꺼낸 흙은 척박하고 예산은 적었기에 조경가는 이곳에 통상적인 공원의 이미지를 구현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연접한 기찻길의 소음을 막는 언덕을 만들고 몇 그루의 선구 식물을 심은 것이 계획의 전부다. 그리고 한 해에 두 번 풀을 베고 10년에 한 번 생물 조사를 하며 자연이 스스로 자리를 찾게 두기로 한다. 프로젝트가 실행된 당시에는 투박한 결과물을 두고 냉소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도시에서 보기 드문 초지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호지역이 되었다.
독일어 알멘트(allmend)는 공유지(common)(또는 common land)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보호구역인 이곳 역시 모두가 공유하는 땅으로,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거나,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놀거나, 산악자전거를 타거나, 양궁 연습을 해도 된다. 홀로 언덕 위에 앉아 지는 해를 보며 시를 쓰거나 이상한 춤을 춰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행동은 이 들판이 천이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듯하다.
종종 홀로 이곳을 찾는다. 매번 같은 경로로 반시간 정도 걸으며 관찰하고 기록한다. 지난여름에는 열기를 피해 줄기 끝에 모여 마치 하얀 꽃무리처럼 보이는 달팽이들을 보았고, 가을비가 오기 시작할 즈음에는 비를 피해 꽃 속에 숨은 작은 벌과 축축한 풀밭에 아랑곳하지 않고 둘만의 저녁 소풍을 즐기는 연인을 보았다. 화려하고 복잡한 계획이나 시설물 없이도, 척박한 불모지에서 공유지가 된 이 들판은 도시의 모든 존재를 차별 없이 반긴다. 자연의 시간을 존중하고 40년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서 일어난 작은 변화를 관찰하며 사랑하고 기록해 온 사람들의 친절함 덕분이 아닐까.
어제 새벽, 오래간만에 들판을 다시 찾았다. 이슬일까, 아직 땅에 닿지 못한 채 나무 위에 머물던 지난주의 눈송이가 녹은 것일까, 나뭇가지마다 작은 물방울이 많다. 자세히 보니 작은 물방울 안에도 섬세하고 복잡한 세계가 담겼다. 질척거리는 진흙 길을 걸으며 물방울들을 사진에 담았다. 다음에는 또 어떤 발견을 할지 궁금해하며 걸음을 이어갔다. 2024년 가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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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속도로 걸으며 바라볼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도시에서 숨을 곳을 찾는 수줍은 많은 새나 장마에도 꽃이 피는 길가의 작은 풀들, 더위를 피해 벽돌 사이에 움츠린 달팽이. 이들의 목소리는 결코 크지 않지만, 도시라는 교향악에 꼭 필요한 낮은 음계를 더한다. ‘웅크린 이야기들’은 이미지를 곁들인 글, 또는 글을 곁들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 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지 못하는 것, 그러나 결국 보아야만 하는 이 웅크린 존재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신영재는 스위스 취리히 연방공과대학교(ETH) 건축학부 조경학 석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조경설계사무소 초신성의 소장이다.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아름답고 쓸쓸한 것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