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정원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어릴 적 분재와 꽃꽂이 취미의 유행으로 여성을 중심으로 소비되던 식물이 2010년대 이후 정원박람회라는 대형 이벤트와 SNS 콘텐츠의 주요 소재가 되면서 전국민 모두가 즐기는 밈(meme)이 되었다. 오픈스페이스와 생태 서식지가 환경 오염과 기후 위기 대응의 방편으로 우리 ‘사회’에 들어왔다면, 정원은 우리 감각에 미적 즐거움을 주는 매체(medium)로 우리의 ‘일상’에 향수처럼 퍼졌다. 일반적으로 공원과 오픈스페이스 디자인이 도시, 문화, 생태적 맥락 등을 신중히 고려한 사회적 예술이라면, 정원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순수한 창의성으로 자유로운 형식과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자율적(autonomous) 예술 활동이다. 그리하여 우리 문화에서는 정원 디자이너를 종종 정원 ‘작가(author)’라 부른다.
올해 10주년을 맞은 서울정원박람회는 보라매공원이라는 거대한 오픈스페이스를 정원의 세계로 탈바꿈시켜 현재 한국 정원 디자인과 문화의 최전선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디자이너의 자기완결적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가정원과 초청정원, 기업‧기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공간 디자인을 통해 구축하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기업‧기관정원, 정원 디자인 교육의 산물인 학생정원 등 다채로운 정원 팔레트가 공원 도처에 펼쳐져 있다. 박람회장 입구에 다다르면서 우리는 서서히, 그러나 강력하게 정원에 가스라이팅, 아니 ‘가든라이팅(gardenlighting)’ 당하며 정원의 세계에 빠져든다.
의미를 경험으로
지난 십여 년 동안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정원 디자인의 미묘한 변화가 관찰된다. 무엇보다 정원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강박이 줄어들고 대신 직관적으로 정원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연출 전략이 펼쳐지고 있다. 거대한 의미를 정원의 구성에 대입하여 설계 설명 없이는 좀처럼 감지하기 힘들었던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이, 재료의 물성과 시설물의 형태로 공간에 구체화되고 현상학적인 분위기로 연출되면서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체험된다.
김윤빈의 ‘영원한 생명의 정원(Garden of Eternal Life)’은 생태계의 순환, 정원의 생태성,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는 의미를 원형(circular)의 공간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연출했다. 작품의 경계를 구성하는 링 형태의 동선 구조물 하부는 고사목으로 장식된다. 죽은 나무의 단면을 드러내어 방문자에게 목재 분해 과정을 시각적으로 알아채도록 하여 정원의 생태적 작용과 생태계의 순환을 재현하고 있다. 정원의 내부는 숲 경관, 습지 경관, 초지 경관을 조합하여 생태계를 재현한다. 이 중 숲 경관에 마련된 작은 샘에서는 물을 마시며 가볍게 춤을 추는 듯한 새들의 몸짓이 눈앞에 펼쳐진다. 방문객이 내딛는 동선 표면을 내후성 강판의 거친 물성으로 처리하고 돌더미, 쓰러진 나무, 자생종 초지 등의 거칠음과 병치시켜 인간 문명과 야생 자연의 회복력을 체험하도록 한다.(각주 1) 이와 유사하게 틸 레발트(Till Rehwaldt)와 가르트흐 볼라손(Garth Woolison)의 ‘네스팅(Nesting)’은 새의 둥지 형태에서 모티브를 얻어, 공원의 자연 재료를 생태적으로 부식시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기능을 하는 거대한 나선형 미로 구조의 둥지 구조물을 만들어 생태계의 사이클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정원 디자인 전략은 조경 이론가 엘리자베스 마이어(Elizabeth K. Meyer)의 이론을 설명하는 적절한 사례가 된다.(각주 2) 마이어는2008년에 발표한 에세이 “지속가능한 아름다움(Sustaining Beauty)”에서 지속가능한 디자인을 “경험의 구축(constructing experiences)”으로 설명하고, 그러한 경험이 “우리를 세계와 연결하고, 생각하게 하고, 함께 있도록 만든다”라고 주장했다. 두 정원에서 생태계의 순환이라는 개념은 경관을 매개로 재현되어 방문객에게 하나의 현상으로 경험하게 하고, 그러한 경험이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크기변환]jun 1.jpg](http://www.lak.co.kr/data/ebook_content/editor/20250702095238_smdkfqsh.jpg)
자율적 형상
정원의 형태 만들기가 이전보다 자유로워졌다. 직선보다는 자유 곡선이 많아졌고 시각을 즐겁게 유희하는 기하학적 패턴이 증가했다. 형태 만들기가 자유로워졌다는 말은 경직되지 않은 비정형적 형태를 만드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무리하게, 직관적 공간 디자인의 원천이 아닌 단순한 디자인 레토릭으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디자인 태도다. 외부적 여건을 참조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결정적(self- determined)인 경관의 형태를 빚어내는 예술가적 접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판단력 비판(Kritik der Urteilskraft)』에서 아름 다움은 개념에 의한 것이 아닌 대상에 대한 “무관심성(disinterestedness)” 의 판단으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각주 3) 실용적이거나 도덕적인 목적을 비롯한 일체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태도. 정원 디자인이 기능과 교훈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공원과 도시 디자인에서 요청되는 다양한 맥락에서는 다소 해방되어 작가 의 마음 가는 대로 순수한 감각적 즐거움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 정원의 자율적 형상 추구는 20세기 초중반 모더니스트의 접근법을 닮았다. 모더니즘 조경의 아이콘인 토머스 처치(Thomas Church)와 로렌스 핼프린(Lawrence Halprin)이 함께 디자인한 주택 정원인 ‘도넬 가든(Donnell Garden)’에서 콩팥 모양을 닮은 소위 생물 형태적(biomorphic) 수영장은 건물의 중심축을 느슨하게 풀어헤쳐 배치한 것 같다. 이번 서울국제정원박람회에 조성된 알레산드로 트리벨리(Alessandro Trivelli)의 ‘워터루츠(Waterrooots)!’는 간결하지만 자율적인 형태가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무한과 통로를 상징하는 원형 형태의 금속 재질 링 구조물이 지상 위에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 지표면에 부정형의 형태가 강조된 서로 다른 크기의 금속 화단 경계가 마치 땅에 새겨진 것처럼 구성되어 있다. 내부에는 식물이, 주변에는 군데군데 암석이 배치되어 있다. 다양한 형상의 화단이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동선을 따라 걸으며 식물을 감상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링 구조물이 하나의 창틀이 되어 하늘을 담고 있어 무한성의 경험으로 이끈다.
![[크기변환]jun 2-1.jpg](http://www.lak.co.kr/data/ebook_content/editor/20250702145431_ssymgozl.jpg)
예술로서의 정원
정원은 조경 디자인을 예술로 읽히게 한다. 정원은 19세기 사회적 예술인 공원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오랫동안 조경 예술 형식의 하나였다. 제1의 자연인 야생의 자연을 순치해 일군 제2의 자연인 인간의 문명, 여기에 바로 인간의 문화적 욕구를 반영하는 제3의 자연인 정원이 만들어졌다. 정원 디자인은 조경 고유의 업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원 예술은 조각, 미술, 건축, 원예 등 다양한 분야가 혼성적으로 결합된 다학제적 실천이자 공간, 시간, 생태를 다루는 하나의 ‘확장된 장(expanded field)’ 속에 위치한다.(각주 4) 어쩌면 조경은 정원 덕분에 대중에게 보다 친밀하게 예술 장르로 인식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서울국제정원박람회의 작품은 유럽의 대지 미술적 접근인 생태 예술의 경향을 보여준다. 미국의 대지 미술이 거대한 규모와 재료의 거친 물성을 강조해 땅을 조각처럼 형식적으로 변경하면서 숭고의 미학을 드러냈다면, 유럽에서 전개된 생태 예술은 자연의 프로세스 기반의 설치 미술적 접근을 통해 생태학적 메시지를 전달해 왔다. 앞서 설명한 ‘영원한 생명의 정원’과 ‘네스팅’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나무의 자연적 분해 프로세스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생태학적 순환을 재현하고 있다.
대부분의 정원이 물성, 형태, 디테일에 대한 탐구를 주로 정원 시설 물의 디자인을 통해 드러낸다. 공원 부지의 평평한 특성 때문인지 지형 을 디자인하는 정원은 드물다. 마이어는 조경을 대중에게 예술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조경 디자인의 근본이자 전제 조건”이라고 하면서 하이퍼네이처(hypernature) 디자인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각주 5) 다소 과장되고 증폭된 자연의 특성을 재현하면서 자연처럼 보이는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김기한의 ‘마지막 식사(The Last Meal)’는 흡사 페트리 접시(petri dish)처럼 보이는 금속 재질의 거대한 원형 수반을 테이블로 형상화하고 내부를 얕은 수공간으로 마련해 개구리밥으로 가득 채워 우리의 농경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주변에 심은 큰 잎이 도드라지는 머위와 토란이 자잘한 개구리밥의 질감과 대비된다. 농경지 풍경을 원형의 밥상 위에 올린다는 연출 전략은 그 자체로 독특한 예술 작품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다.
정원, 환경 가치를 전달하는 매체
정원은 감각적 아름다움과 더불어 환경에 대한 생각을 담아내면서 비 로소 예술로 완성된다. 자율적 형상 만들기와 현상학적 경험의 연출은 방문자에게 환경적 가치라는 교훈을 자연스레 전달한다. 과거의 정원 디자인이 환경적 가치를 텍스트를 통해 교조적으로 주입하려는 경향이 있었다면, 이제는 그러한 교훈이 정원 공간에 구현되어 우리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 체화된다.
마이어는 조경의 지속가능한 아름다움은 경관의 겉모습의 성능(performance of appearance)을 통해 완성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성능은 생 태적 기능을 넘어서 사회적·문화적·환경적 가치를 포함한다. 경관의 경험은 우리에게 “환경을 알아보고, 돌아다니고,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지도록 하면서, 환경 가치를 배우고 가르치는 지속가능한 실천 방식”이 된다.(각주 6) 앞서 설명했듯 작가 정원들은 생태학적·환경적 가치를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체험하도록 한다. ‘영원한 생명의 정원’에서 생태계의 순환 은 목재의 분해 과정을 관찰하고 숲, 초지, 습지 경관을 순회하면서 경험되며, ‘마지막 식사’에서 방문객들은 생태적 생명력이 느껴지는 수생 식물이 가득한 테이블 앞에 둘러앉아, 우리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다. 초청정원인 마크 크리거(Mark Krieger)의 ‘비행사의 정원(Aviators Garden)’은 우리 땅에서 자랄 수 있는 숙근초를 이용해 야생 벌과 조류의 서식 공간을 조성한다. 군데군데 배치된 고목들은 수많은 작은 구멍을 통해 야생벌의 미래 서식처로 기능하는 동시에, 자라나는 나무처럼 연출되어 설치 예술 작품으로 감상된다. 표지판에 적힌 설명을 찾아 읽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생태 서식처의 중요성을 알아챌 수 있다.
브랜드스케이프
기업·기관의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투영된 정원은 대중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면서 공간적 홍보 수단으로 기능한다. 반대로, 정원 디자인을 대중의 이목에 집중시키는 좋은 소재가 바로 유명 기업과 기관의 브랜드이기도 하다. 전자를 브랜드의 정원화로, 후자를 정원의 브랜드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실로 이번 박람회장의 기업·기관정원은 방문객으로 가득하다. 오픈니스 스튜디오가 디자인한 농심의 ‘인위자연’은 식품 회사인 농심 브 랜드 로고와 식품 제조 과정에서 모티브를 얻어 정원 시설을 디자인한다. 로고의 형태를 한 여러 개의 수반은 캐스케이드로 구성되어 차례대로 물이 흐르며 식품 공정을 떠올리게 하며, 과감히 로고 형태와 색상을 한 조각품은 모빌이 되어 정원 부지 위를 하늘하늘 부유하며 방문객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킨다. 국립생태원의 ‘순환하는 원, 생태정원’은 사방으로 뻗은 짐승의 뿔처럼 생긴 고사목들을 툭툭 던져 놓는 단순한 제스처로 기관의 아이덴티티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우리의 산 생태계와 생태공원에서 생물 서식처로 기능하는 고사목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면서 우리를 단박에 저 멀리 숲 속 어딘가로 데려다 놓는다.

정원화된 공원
이번 서울국제정원박람회는 정원을 매개로 공원을 사용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행사를 위해 임시로 여러 유형의 정원을 나열해 설치 한 것이 아니라 방문객이 정원을 누비면서 공원을 구석구석 탐색할 수 있도록 신중히 배치된 기획의 산물이다. 이러한 재기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초청정원인 박승진의 ‘세 번째 트랙(The Third Track)’을 꼽을 수 있다. 디자이너는 공원 운동장 육상 트랙 일부의 내부 영역에 트랙 형태의 선형 정원을 조성했다. 탁 트인 운동장 트랙을 하염없이 뛰다가 템포를 늦추고 싶을 때 슬쩍 경로를 변경해 세 번째 트랙인 숲길로 뛰어들어 자연의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
작가, 초청, 기업, 기관, 학생정원들이 공원 곳곳에 배치되면서, 공원은 하나로 통일된 정체성보다는 패치워크식 구성으로 나타난다. 애초에 공원과 정원이 추구해 온 미학은 서로 다르다. 공원이 넓은 잔디밭이 드리워진 풍경화 같은(picturesque) 전원 경관을 닮았다면, 정원은 화려하거 나 자연주의적인 초화류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이질적인 미학적 산물 이 한 데 꿰어진, 이토록 정원화된 공원(gardenized park)은 보라매공원의 아이덴티티를 불가피하게 변경한다. 진화인가 아님 파괴인가. 이 공원이 그간 이용이 뜸했다면 정원박람회는 공원을 재생하는 효과적인 대안으 로 작동될 것이다. 한편으로, 보라매공원은 오랫동안 시민들에게 이용되어 다채로운 기억이 켜켜이 쌓인 양피지(palimpsest)다. 새로운 정원이라 는 화려한 조각보로 누벼진 땅에 기존 보라매공원의 아이덴티티를 신중히 살핀 정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양희와 오세훈의 ‘제3의 플라타너스 숲’은 보라매공원의 플라타너스 숲을 보존하고 야생 자연의 특성을 연출한 뒤 그 위에 식생 태피스트리라는 레이어를 얹어 대상지의 본래 역사와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화려하거나 새로움이 직관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지만 기존 공원의 풍경과 이질감 없이 어우러진다. 지금 은 축제의 시간이다. 초여름 햇살을 듬뿍 머금은 정원 천지에 시민들과 함께 푹 빠져 걷다가, 문득 축제가 끝나고 난 뒤 보라매공원이 어떤 풍경 일지 궁금해졌다.
**각주 정리
1. 인간 문명과 야생 자연의 거친 풍경을 병치하는 방식은 숭고의 미학을 연출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을 참조할 것. 이명준·배정한, “숭고의 개념에 기초한 포스트 인더스트리얼 공원의 미학적 해석”, 『한국조경학회지』 40(4), 2012, pp.80~81.
2. Elizabeth K. Meyer, “Sustaining Beauty: The Performance of Appearance”, Journal of Landscape Architecture 3(1), 2008, pp.6~23.
3.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역, 『판단력 비판』, 아카넷, 2009.
4. Elizabeth K. Meyer, “Expanded Field of Landscape Architecture”, In G. Thompson, and F. Steiner, eds., Ecological Design and Planning , New York: John Wiley & Sons, 1997, pp. 45~79.
5. 2번 글, p.17.
6. 2번 글, p.20.
이명준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에서 오랫동안 공부하다가 2020년, 안성으로 이사 와 한경국립대학교 친구들과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 2025 서울국제정원박람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정원의 마력에 휩쓸렸다. 이건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정원 개벽의 현장이야! 정원 천지가 된 서울의 풍경에 먼저 감탄했고, 곧이어 정원 디자이너들이 나를 어떻게 가든라이팅(gardenlighting)하는지 마법의 레시피가 몹시 궁금해지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던 보라매공원은 어디로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