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우먼스케이프] 제인 라우던의 풍경
  • 환경과조경 2025년 7월호

정원과 책은 마치 목도리와 장갑처럼 한 세트가 되어 우리의 삶을 포근하게 한다. 글 쓰는 사람 중에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글쟁이가 아니라도 정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대개 책도 좋아한다. 그래서 풍경과 문학은 서로 관계가 깊다. 이 둘을 엮으면 정원 서적이 된다. 정원의 나라 영국의 경우, 정원을 만드는 속도와 정원 서적을 읽고 쓰는 속도가 거의 비례한다는 느낌도 든다. 문학 속에서 풍경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풍경 속을 자주 걷는다. 그녀의 이야기들이 ‘픽처레스크’한 풍경을 배경 삼지 않았다면 리안 감독이 『센스 앤드 센서빌리티』를 영화로 찍고 싶어 했을까?

 

제인 오스틴 이후에도 샤를로테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영국의 풍경 묘사는 지속된다. 브론테 자매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다. 브론테 자매 외에도 빅토리아 시대는 출중한 여성 작가를 많이 배출했다. 빅토리아 시대란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 즉 1837년에서 1901년까지 거의 70년 가까운 기간을 말한다. 빅토리아 여왕이 특별히 통치를 잘했거나 못했기 때문에 그리 불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조선의 성종대, 중종대라고 일컫듯 시대를 구분하기 위한 방법이다. 이 시기에 영국에는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부강해졌고 과학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혁명이 일어날 때 영국은 의회 개혁을 통해 혁명의 발발을 막았다. 1870년경부터 영국 제국주의가 최고조에 달해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 식민지 정책에 기반을 두었던 대영제국이었기에 지금은 부끄러워 하지만 당시 대영제국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신분 계급에도 변화가 나타나 상공인을 주축으로 중산층이 크게 성장했다. 엔지니어, 건축가, 변호사 등 전문직도 이에 속해 중산층의 직업 구조도 다양해졌다. 이들은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외곽에 소위 빌라라고 불린 고급 주택을 짓고 살았다. 대개 3층 규모에 방이 열 개 정도 있고, 앞뒤로 정원이 딸린 구조였다. 이와 더불어 제인 오스틴의 무대였던 풍경 정원의 시대가 지나가고 도시의 빌라 정원의 시대가 시작됐다. 그런데 빌라 정원 시대와 함께 ‘여성의 정원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좋을 듯하다. 이 무렵 또 다른 제인, 제인 웰스 라우던(Jane Wells Loudon)이 나타나 모름지기 여성 정원의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하게 된다.

 


wojuly01, 02.jpg
제인 웰스 라우던의 유일한 초상화와 존 클라우디우스 라우던의 초상화. 존은 제인의 남편이자 멘토였다. 제인의 초상화는 제인 라우던의 증손녀 렉스 스포포스(Rex Spofforth) 소장 ⒸPublic Domain

 

풍경 정원에서 잠들면 생기는 일

어느 뜨거운 여름날, 17세의 제인은 머릿속이 복잡해 집을 나섰다. 2년 전, 제인이 17세 되던 해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유산으로 빚을 정리하고 나니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야 함을 깨달았다. 그런데 양갓집 규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세 가지밖에 없었다. 세밀화를 그리는 것, 모자나 의상을 만드는 일, 그리고 가정교사였다. 그중 가정교사가 가장 흔했지만, 좋은 직업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보수도 형편없었다.

 

제인은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독서광에 상상력이 풍부했던 제인은 글을 쓰기로 했다. 글쓰기는 돈벌이로 취급하지 않았기에 주변의 시선도 의식할 필요가 없었다. 단편 소설 몇 편을 쓰고 시도 쓰고 외국의 이야기를 번역해 책으로 묶었다. 다행히 출판사에서 받아들여 약간의 인세를 받았다. 이제 장편 소설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영웅 이야기를 쓸까? 그런데 어떤 영웅? 제인이 여태 읽은 이야기 속의 영웅들은 모두 비슷했다. 서로 형제나 되는 듯 비슷하게 잘나고 비슷하게 용감하고 비슷하게 낭만적이었다. 그런 건 내 취향이 아닌데……. 뭐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이런 생각에 잠겨 제인은 집 뒤에 있는 언덕을 올랐다. 거기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다. 골짜기 사이로 구불거리는 오솔길과 그 옆을 흐르는 시냇물, 저 멀리 드문드문 보이는 마을들 그리고 아주 먼 곳에 아련히 보이는 높은 산허리. 제인은 풀밭을 지나 큰 떡갈나무 그늘로 향했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으니 바람이 솔솔 불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잠이 들면 꿈을 꾸기 마련이다. 눈앞에 문득 젊고 아름다운 신령이 나타났다. 머리엔 꽃으로 엮은 관을 쓰고 아지랑이 같은 날개옷을 떨쳐입었는데 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너 아이디어를 찾고 있지? 이거 네게 줄게 하면서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이게 미래의 연대기야. 이걸 줄 테니 이야기를 만들어 봐. 왜 미심쩍어? 그러면 주변을 한번 둘러봐. 그제야 제인이 눈을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전혀 다른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lak447(2025년7월호)_웹용_page92_image.png
라우던 부부의 런던 빌라

 

2126년의 영국이었다. 무려 3백 년 뒤의 미래로 온 것이다. 제인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 이는 대로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인은 자신의 공상과학 소설 『미라(The Mummy)』가 그렇게 탄생 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물론 그것도 허구지만 이야기를 전개하는 솜씨가 대단했다. 그때 제인의 나이가 20세였다. 소설은 잘 팔려 바로 이듬해에 재판을 찍었다. 문학적으로 그리 높게 평가받지는 못했지만, 소설 속에 그려낸 미래의 세계와 뛰어난 과학 기술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작가의 어린 나이에 비추어 볼 때 사회와 세상에 대한 높은 성찰이 번득이는 점 또한 대단했다. 제목 이 ‘미라’인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고대 지식을 얻기 위해 이집트의 파라오 케옵스의 미라를 부활 시켰기 때문이다. 케옵스가 깨어 보니 세상은 기술의 경이로 가득했다. 비행선이 하늘을 날고 의사와 변호사, 판사는 모두 로봇이었다. 의료 사고도 없고 법정의 오판도 없었다. 가전제품이 있고 농업에도 기상천외한 기계를 도입해 생산력을 높였다. 그러나 좋은 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케옵스는 22세기 사회를 지켜보며 인간의 오만, 과학의 오용과 정치적 혼란을 목격했다. 자신의 역할이 시대를 관찰하고 증인이 되어 주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살아 있지 않은 자신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임을 성찰한다. 그래서 다시 피라미드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그러나 제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라』 덕분에 인생의 2부가 시작됐기 때문이 다. 런던에 존 클라우디우스 라우던(John Claudius Loudon, 1782~1843)이라는 저명한 식물학자 겸 조경 가가 있었다. 제인의 소설이 발표될 무렵 그는 40대 중반이었다. 우연히 소설을 접하고 무척 재미 있게 읽었다. 특히 제인이 발명한 각종 기계에 흥미를 느껴 자신 발행하는 잡지 『가드너스 매거진(Gardener’s Magazine)』에도 소개했다. 그 역시 개량 온실 또는 테양열 난방 시스템을 고안하는 등 기 술 발전에 관심이 많았기에 소울 메이트를 찾은 느낌이었다. 저자를 꼭 만나고 싶었다. 알음알음으로 저자와 식사 약속을 정했다. 소설이 무명으로 발표됐기 때문에 존은 저자가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약속 장소에 가보니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존은 즐겁게 놀랐고 둘은 서로 첫눈에 반했다. 그때가 2월이었는데 두 사람은 그해 9월에 결혼한다. 그리고 제인은 버밍햄에 있던 아버지의 전원주택을 떠나 남편을 따라 런던의 빌라에 입성했다. 약 4천 제곱미터 크기의 정원이 있었다. 

 

우리도 삽질할 수 있다 

남편을 통해 제인은 식물과 정원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했다. 전원에서 성장하긴 했어도 제인의 머릿속에는 과학과 기술에 대한 생각이 가득해 정원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특유의 지 적 호기심과 긍정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에 접근했다. 결혼하던 해에 남편의 역작 『호르투스 브리 타니쿠스(Hortus britannicus)』가 출판됐다. 브리타니아의 자생 식물, 원예 식물, 도입 식물을 총망라 한 식물 도감이었다. 존은 류머티즘성 열과 관절염으로 오른팔을 못 쓰게 되었다가 결국 절단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 오른팔이 없는 관계로 집필을 위해 제도사와 비서를 고용해야 했다. 제인이 그 일을 자청하고 나섰다. 낮에는 정원에서 식물 공부를 하고 저녁이면 서재에 나란히 앉아 책을 쓰는 생활이 지속됐다. 남편의 집필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다. 다음으로 ‘브리타니아의 수목’이라는 방대한 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를 도우며 제인의 지식도 날로 늘었고 정원 일에서도 의외로 큰 기쁨을 얻었다. 제인의 과학기술에 관한 관심이 제대로 주인을 만난 것 같았다. 제인은 식물과 정원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그렇게 8년이 지난 뒤 제인은 『젊은 여성들을 위한 식물학』이라는 책을 냈다.  이 즐거운 학문 을 대중적으로 소개하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남편 존의 책은 지극히 전문적이어서 아마추어들은 읽기 어려웠다. 특히 제인은 자기와 같은 세대의 여성들에게 식물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알 려주고 싶었다. 이어서 여성 정원 잡지 『가드닝 여성지(Ladies Magazine of Gardening)』를 발간하는 등 1858년 만 51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인은 근 이십 권의 정원 책을 썼는데 모두 실용서였다. 그림도 잘 그렸으므로 책에 넣을 식물 세밀화도 직접 그렸다. 소설 쓰는 것보다 정원 책이 수월하고 재미있었다. 독자들은 제인과 함께 경험을 쌓고 성장해 갔다. 

 

빅토리아 시대에 제인의 책 외에도 정원 서적이 꽤 많이 출판되었는데, 크게 두 개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우선 18세기 중반부터 제인이 시작하고 다른 여성들이 부지런히 따라서 쓴 가드닝 가이드 책이 많이 나왔다. 이렇게 여성들의 경험과 지식이 쌓이고 전문성이 커지면서 18세기 후반에는 정원 에세이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급기야는 거트루드 지킬(Gertrude Jekyl, (1843~1932) 같은 거물급 정원 전문가가 탄생하게 됐다. 이 무렵 ‘뉴 우먼(New Woman)’이라는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여성상은 정원에서 태어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 우먼이란 곧 삽질하는 능동적인 여성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정원을 장악해 가고 있었는데 사회에서는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정원은 집에 속한 것이므로 사회의 통제를 덜 받았다. 여성의 영역으로 인정받아 남성들도 견 제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원에서의 여성을 “사랑스럽게 꽃을 꽂고 우아하게 풀밭을 거니는”  존재 로 이해했지만, 여성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땅 파고 거름 주고 전정하고 토양을 개량하고 디자인 하고 땀을 흘려가며 능동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제인은 『여성을 위한 실용적 가드닝 지침서』라는 책을 써서 첫 장에 땅 파는 방법부터 자세히 소개했다.  정원 일의 시작은 땅 파기인데 이것이 얼 핏 보기에 여성에게 힘든 작업 같지만 역학의 원리와 운동의 법칙을 잘 이용하면 쉽다고 설명했다. 삽을 쥐는 법, 발로 삽날을 땅에 수직으로 박는 법, 손잡이를 지렛대 삼아 흙을 뒤집는 법, 파 낸 땅 덩어리를 삽날로 찍어 펼친 뒤 등으로 평평하게 두드리는 법 등을 설명했다. 이때 삽을 조금 작게 제작하는 것이 좋다고도 조언했다. 제인의 전용 삽 손잡이는 가벼운 버드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정원이라는 내 공간, 내 땅에 대한 여성들의 책임 의식이 싹트면서 정원은 정원 이 상의 것이 되어 갔다. 자신을 구현할 수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지식과 기술을 쌓고 문화적 책임을 지는 곳이었다. 정원 여성들 사이에 네트워크도 만들어졌다. 1880년경이 되면서 정원 서적의 어 조도 달라졌다. 이제 기술은 익혔으니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고 보면 되겠다. 정원에 관한 토론은 곧 사회, 문화, 정치에 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여성들이 쓴 여성을 위한 정원서에서는 여성의 발 언권이 제한되지 않았기에 마음 놓고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정치색을 띠고 ‘뉴 우먼’에 관해 토론하고 정원 스타일도 자유분방하게 변해갔다. 모두 제인 라우던으로 인해 비롯된 일이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