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페이지에서 한 페이지만 앞으로 넘기면 새책 지면이 나온다. 이 지면을 편집하다 장기 기억소에 저장된 추억의 장소를 발견했다. 거제도에 위치한 외도 보타니아다. 환경과조경 입사를 도와준 곳이기도 하다. 당시 채용 공고에 적힌 제출 서류 중 ‘필력을 볼 수 있는 A4 3매 이내의 원고’가 있었다. 기명 기사, 에세이, 독후감 혹은 가상의 작품 취재기나 인터뷰를 적으라는 미션이었다. 어떤 걸 쓸지 소재 선정에 고민이 깊었다. 이력서, 자기소개서는 얼추 완성했는데 원고 미션은 한 글자도 작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 속 장면이 원고 작성의 실마리가 되었다. 외도 보타니아를 소개하는 장면을 보고 프로젝트 지면처럼 장소에 대한 설명에 나의 감상을 곁들인 원고를 적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커서만 깜빡이던 한글 파일에 글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외도 보타니아를 소재로 선정할 수 있었던 건 사실 그 즘에 다녀온 여름휴가 덕분이다. 거제도와 부산광역시로 휴가를 떠났는데, 외도 보타니아도 함께 들렸다. 직접 다녀왔으니 생생하게 글을 쓸 수 있었다. 거제도에서 1박을 하고 부산시로 넘어갔는데, 가덕 해저 터널을 이용했다. 가덕 해저 터널은 경상남도 거제시 장목면에서 부산시 강서구를 잇는 터널로, 세계 최초로 파도와 바람, 조류가 심한 외해에 건설됐으며 48m 해저에 위치해 있다. 터널을 통과하는 동안 내비게이션 속 자동차는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고속도로에 있는 터널과 다를 것 없었지만 해저 터널 중간에 있는 현 위치의 수심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내가 지금 바닷속에 있구나를 깨닫게 해주었다.
바닷속을 아무렇지 않게 다닐 수 있는 모습은 초등학생 때 매년 개최되던 과학 상상화 그리기 대회 단골 주제였다. 해조류가 해류에 일렁이고 물고기가 돌아다니는 풍경을 배경으로, 네모난 건물들과 그 안에서 밥을 먹는 가족들,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거품들. 한 반에 서너 명은 이 풍경을 그렸다. 또 많이 등장하는 소재는 우주 도시와 날아다니는 대중교통이었다. 그땐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상상 속 풍경이었는데, 해저 터널을 지나고 보니 곧 그때의 상상이 실제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상상화 그리기 대회에 참여할 필요가 없어진 직장인이 된 내가 최근 다시 상상의 나래에 불을 지폈다. 넷플릭스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한국 애니메이션 ‘이 별에 필요한’(2025)을 본 것이다. 화성 탐사를 꿈꾸는 우주인 난영과 뮤지션의 꿈을 접어둔 제이가 만나 꿈과 사랑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다. 한 줄의 영화 소개 글만 보고도 어떤 내용일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2050년 서울을 배경으로 전개된 점이 애니메이션을 보게 했다. 세운상가, 을지로와 근방이 주요 무대인데, 홀로그램, 네온 같은 그래픽 디자인과 사이버펑크(각주 1) 스타일에 레트로가 더해진 서울의 모습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특히 공중에 매달려 다니는 지하철은 몇 십 년 전에 그린 상상화의 모습을 구현해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난영의 화성 탐사를 응원했지만 난영이 꿈을 이루게 되면 강제 이별하게 될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알 것 같아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 안타까움은 난영과 제이보다 과거에 사는 내가 멋모르고 한 동정이었다. 30년 뒤 기술은 두 사람을 헤어질 수 없게 했다. 우주 정거장에는 와이파이가 터져서 (시차가 있지만) 실시간으로 연락이 가능하고, 증강 현실이 도입된 영상 통화 기술 덕분에 제이와 난영은 우주 정거장에서 데이트를 한다. 무사히 지구에 돌아온 난영은 제이와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재회하며 영화는 끝난다.
영화 속 가깝지만 먼 미래의 모습은 잊고 지냈던 상상 속 풍경의 실현성에 대한 기대감을 되살렸다. 기웃거리는 편집자(2023년 6월호)에서 메타버스로 만나는 2023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 있다. 정원박람회를 가지 않아도 PC와 모바일로 박람회장을 둘러볼 수 있었다. 2년이 지난 지금, AI의 발달로 사진을 지브리,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타일로 바꿔주기도 하고, 적절하게 명령을 던지면 자료 조사부터 기획서 작성까지 도와준다. 곧 메타버스를 넘어, 가보고 싶었던 나라를 버튼 하나로 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 버튼으로 이탈리아 돌로미티의 알페 디 시우시로 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푸른 초원 위에 누워있고 싶다.
**각주 정리
1.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과 펑크(punk)의 합성어로, 컴퓨터로 대표되는 첨단 기술과 반체제적인 대중문화의 결합, 나아가 기계와 인간의 대등한 융합을 시도하는 데서 비롯된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흐름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