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더관리
폴더명
스크랩

[에디토리얼] 그림자 기록하기, 공원의 비인간 행위자들과 나눈 느린 대화
  • 환경과조경 2025년 6월호

절경의 봉우리에서 버려진 섬으로, 숨겨진 폐허의 정수장에서 숭고의 미감을 발산하는 공원으로 운명이 바뀌어온 선유도. 어쩌면 선유도공원은 서울에서 가장 ‘비인간적’인 공원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비인간적’은 비정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뿐 아니라 식물과 곤충, 빛과 바람, 물과 이끼, 부스러진 콘크리트와 녹슨 철근이 모두 주체가 되어 장소의 행위자(agent)로 작동한다는 뜻이다. 선유도공원은 인간만이 도시의 거주자가 아님을, 인간만이 공원의 주인이 아님을 감각하게 한다. 산업의 폐허 사이사이를 비집고 생명체가 스며든 선유도공원은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을 무력화하는 복합체 경관이다.

 

인간과 비인간이 복잡하게 얽힌 연결망, 선유도공원에 또 하나의 조용한 흔적이 내려앉았다.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선유담담’의 하나로 조성되어 지난 4월 23일 모습을 드러낸 김아연(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의 설치 작품, ‘그림자 아카이브’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선유도의 정수장 구조물(비인간 사물)과 식물(비인간 생명체)이 빚어내는 오랜 거주의 기억과 현재를 시아노타입(cyanotype)이라는 고전적 인화 기법으로 포착한다. 진청색 감광천에 새겨진 그들의 그림자는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비인간들이 단지 기록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풍경의 주체임을 증명한다.

 

시아노타입은 19세기 식물학자들이 빛과 물, 약품을 이용해 식물 표본을 기록하던 인쇄 기법이다. 얼마 전까지 설계 도면을 만들 때 쓰던 청사진도 시아노타입의 일종이다. 햇빛으로 이미지를 현상하기 때문에 ‘선 프린트’라고도 불린다. 김아연은 이 오래된 기록 방식을 공원의 시간과 풍경에 겹쳐놓는다. 그는 “관찰과 발견과 느낌과 상상”을 통해 감각한 선유도공원의 “무위의 풍경을,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자라는 생명을, 오늘의 잠깐을, 물과 햇빛과 약품이 만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기록하고”자 시아노타입을 택했다. 공원 곳곳에서 발견하고 채집한 사물과 식물의 윤곽을 햇빛에 감광시켜 인화했다.

 

그러나 김아연의 기록은 정밀한 재현이 아니다. 실루엣과 흔적, 즉 그림자만을 남긴다. 바람에 흔들리며 명확히 찍히지 못한 경계들, 색의 농도에 따라 드러나는 미세한 잔상들이 그림자로 남아 짙푸른 캔버스에 감광된다. 버드나무, 억새와 수크령, 노린재, 바닥의 몽돌, 철재 펜스, 계단. 어떤 건 바람에 날려 일부만 드러나고, 또 어떤 건 그림자조차 희미하다. 이 불완전성이야말로 ‘그림자 아카이브’의 본질이다. 존재는 흔들리며 기록되고, 완전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선유도공원의 설계는 조경가가 했지만, 실제로는 여러 비인간 생명체와 사물이 끊임없이 공간을 재구성하고 있다. 김아연의 작업은 비인간들의 자기표현을 도와주는 일에 가깝다. 그들의 자율적 행동과 흔적이 드러나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작가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기록자이며, 그들은 대상이 아닌 공저자가 된다.

 

‘그림자 아카이브’는 우리가 기록이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리는 명확성과 명명 가능성에 균열을 낸다. 대신 그것은 도시의 이름 없는 존재들의 자취를 감광해 ‘인간 너머’의 세계를 보여준다. 김아연의 아카이브는 과학적 분류와 세밀한 묘사를 담은 도감이 아니다. 공원에 잠재한 비인간 존재들과 느린 대화를 시도하는 일종의 청취 행위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그 목소리를 다시 도시에 되돌려주는 것. 선유도공원 수생식물원을 바라보는 긴 정자이자 한강 풍경의 병풍이기도 한 ‘그림자 아카이브’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도시는 누구의 삶을, 무엇의 존재를 기억하는가.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의 흔적, 이름조차 없는 잡초의 자취를 빛의 언어로 기록한 김아연의 설치 작업에는 도시에서 잊혀온 비인간들의 그림자가 정성스레 담겨 있다. 명명과 통제가 아니라 감응과 연대의 방식으로.

 

짙푸른 ‘그림자 아카이브’는 계속 변해 갈 것이고 어느 시점에는 완전히 탈색되어 사라질 것이다. “모든 것[이] 언젠가 정해진 생애를 마치면 겸허히 퇴장해야” 하는 것처럼, “그림자 아카이브는 그 기록 장치로 행복한 삶을 살다 서서히 서서히 사라지기를 희망”한다고 김아연은 말한다. 이번 호 지면에 담은 그의 “기록물을 만들기 위한 여정의 기록”을 꼼꼼히 읽어보시길, 책장을 덮자마자 양화대교행 버스에 올라타시길 권한다.



지난 5월호부터 일상의 ‘다양한 공원 사용법’을 청취하는 꼭지, ‘슬기로운 공원 생활’을 새로 마련했다. 매달 다른 필자가 하나의 공원과 그 공원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2020년 6월호부터 이어온 ‘풍경 감각’을 이번 호로 맺는다. 무려 만 5년이 넘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긴 기간을 통과하며 늘 따뜻한 글과 그림을 보내준 조현진 일러스트레이터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월간 환경과조경, 무단전재 및 재배포를 금지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