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과 허균, 신사임당과 율곡을 낳은 강릉. 그곳에 뭔가 특별한 기가 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이번 5월 귀국 길에 강릉행을 계획했다가 실패했다. 허난설헌 기념공원도 둘러볼 생각이었다. 역에 가서 기차표 끊으면 될 거라고 쉽게 생각한 것이 첫 번째 실수였고 5월 초 연휴가 길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실수였다. 기차표도 고속버스표도 일찌감치 완전히 매진된 상태였다. 차를 임대해서 가볼까도 생각했으나 그래 봐야 강릉의 정기는커녕 고속도로에 줄지어 선 자동차의 행렬 속에서 스트레스만 한가득 충전하여 돌아올 것이 뻔했기에 포기했다. 물론 아주 오래전,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이미 여러 차례가 보긴 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둘러본 것이 아마 2008년경인 것 같다. 용평에 머물며 정원을 하나 만들고 있을 때였다. 강릉이 멀지 않았으므로 경포대도 볼 겸 겸사겸사 주말에 길을 떠났다.
강릉에 도착해 경포 해변으로 내려가다가 혼비백산하고 돌아섰다. 언덕의 능선을 결딴낸 호텔과 펜션, 어지럽게 번득이는 오색 등불, 어디선가 들려오는 요란한 음악, 주차장에 종으로 횡으로 진입하는 자동차 등, 아수라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 아수라장을 통과했더라면 백사장으로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토록 망가진 풍경에 대한 노여움이 불같이 치솟아 도저히 머물 수가 없었다. 지금 갔더라면 달라졌을까? 대형 호텔과 펜션, 횟집과 주차장의 자동차들 사이에서 난설헌의 정신을 읽어낼 수 있었을까? 그녀의 위대한 시가 그 추해진 풍경을 다 덮을 수 있을까?
혹시 난설헌이 강릉의 풍경을 거듭 노래했더라면 이를 기리기 위해서라도 강릉시가 풍경을 보존하려 노력해 보지 않았을까? 난설헌의 시는 풍경시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큼 수많은 풍경을 노래했지만 강릉을 노래한 시는 단 한 수밖에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 집은 강릉땅 강가에 있어 / 문 앞 흐르는 물에서 비단옷을 빨았지요 / 아침에 목란배를 한가히 매어 두고는 / 짝지어 나는 원앙새를 부럽게 보았어요.”(번역: 허경진) 그 외 난설헌의 시선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아주 먼 중국이나 혹은 그보다 더 먼 신화의 세계로 향해 있었다.

16세기 조선은 어떤 시대였나
허난설헌은 1563년에 출생해 1589년, 만 26세로 요절했다. 연대로 본다면 황진이와 신사임당의 손녀뻘이었다.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세 여인이 모두 16세기를 살다 갔다. 문득 궁금해진다. 16세기 조선은 어떤 시대였을까? 조금 더 좁혀보자면 연산군(1476~1506)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즉 중종, 인종, 명종 대의 조선이다. 성리학이 아직 경직되기 전이었다. 붕당 정치가 태동했으나 세도 정치가 시작되기 전이었다. 사림 주도의 서원 문화가 활성화되어 온 나라에 무기 철렁이는 소리 대신 글 읽는 소리가 낭랑했다. 신분제도 역시 세분되어 가는 과정에서 계층 간의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우리가 아는 네 번의 사화가 모두 16세기에 일어났다. 정치적 격변의 시대였다. 황진이의 시를 빌려 표현해 본다면 15세기는 청산처럼 단단했고 16세기에 오히려 푸른 파도가 일렁였다. 흐름과 변화가 있었다.
가부장제도 역시 완전히 정착하지 않아서 사임당의 경우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풍습에 따라 혼인 후에도 평생 친정에서 맘 편히 살며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난설헌은 아뿔싸, 친영례(각주 1)가 도입된 직후에 혼인하여 시집살이를 시작한 1세대가 되었다. 난설헌의 시에 이따금 서릿발이 내비치는 것이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설헌의 두 개의 삶
난설헌 허초희는 만 15세에 안동 김씨 가문 김성립과 혼인했고 이 혼인을 전후로 확연히 구분되 는 삶을 살게 된다. 구김살 없이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하루아침에 낯선 가문, 낯선 가풍의 어린 며느리가 되었다. 친영례가 막 시작된 무렵이었으므로 시집살이에 관한 매뉴얼도 아직 없었을 것이다.
친정 아버지 허엽, 오빠 허성과 허봉, 동생 허균 모두 뛰어난 문장가여서 난설헌과 함께 허씨 5 문장이라 불렸다. 그중에서도 난설헌의 문장이 가장 격조 높았다고 평가된다.(각주 2) 아버지 허엽은 지 난 호에 이미 등장했던 인물이다.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황진이와 함께 수학했던 열린 사고의 인물이었다. 딸의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장려했으며 오빠들도 초희를 지극히 아꼈고 동 생 허균도 누이를 매우 따랐던 것 같다. 이 시절에 어린 초희는 마음껏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그러다 혼인과 함께 초희의 세상은 급격히 달라졌다. 남편 김성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시어머니와 의 갈등도 컸다고 전해진다. 각별했던 둘째 오빠 허봉이 글을 다시 쓰라고 붓을 보낸 것으로 보아 마음 놓고 글도 쓸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이 둘을 낳아 한때 행복했으나 두 아이 모두 어린 나이에 역병으로 죽고 뱃속의 아이마저 잃게 된다. 곧이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친정이 몰락하기 시작했다. 오빠 허봉은 당파 싸움 끝에 귀양을 다녀와 병을 얻어 객사하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난설헌도 죽는다.
죽음의 정확한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상을 떠났다’라는 표현을 액면 그대로 이해해도 좋을 듯하다. 병을 앓았다는 이야기도 없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증거도 없다. 이제 그만 살겠 다고 작정하고 곱게 누워 영혼을 떠나보냈을지도 모르겠다. 떠나기 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 듯,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라는 의미심장한 시 한 수를 남겼다.(각주 3) 그토록 줄기차게 노래했던 신선의 세상으로 훌쩍 떠나간 것일까? 『난설헌집』의 머리말을 썼던 중국 시인 주지번은 난설헌을 선계에서 인간 세계로 잠깐 귀양 와 구슬 같은 시를 쏟아낸 선녀라고 소개했다. (각주 4)
유선사, 난설헌의 현실 초월일까 아니면 자아가 머무는 곳이었을까
난설헌의 시 세계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선계를 노래한 ‘유선사(遊仙詞)’다. 전해지는 210여 편의 시 중반이 넘는 128편에서 선계를 노래했다. 그중 총 87수로 이루어진 ‘유선사 연작’이 있는데 여기서 난설헌은 인간계의 굴레와 한계를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장엄하게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게 펼쳐낸다. 서왕모로부터 시작하는 신선들의 복잡한 계보와 그들이 깃들어 사는 무한한 세상에 관한 이 대서사시는 해독이 쉽지 않다. 수많은 지명, 신선명, 인명 및 사건을 이해하려면 백과사전을 일일이 검색해야 한다.
난설헌의 유선사는 혼인 후의 갑갑한 인생에서 도피하기 위해 쓴 것으로만 이해할 일은 아니다. 선계에 관한 동경은 이미 어린 시절에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통해 전해진 화담 서경덕의 영향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달달 외울 정도로 탐독했다는 송나라 책 『태평광기太平廣記 』에 실린 7천여 에 달하는 이야기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중에서도 선계의 이야기가 어린 난설헌을 가장 사로잡았던 것 같다. 여덟 살에 지었다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각주 5)이라는 글도 선계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출발해 87수 연작의 서사시로 귀결했고 마지막 시도 선계로 장식했다. 어린 시절 호기심과 재미로 출발했을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선계는 난설헌의 진정한 자아가 머무는 세상이 되었다.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난설헌은 자신의 재능에 대한 확신과 자부 심을 가지고 있었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의 마지막 단락을 보면 꼬마 초희가 하늘의 명을 받 아 “강물이 내달리듯, 샘물이 솟아나듯” 상량문을 지어냈다고 하고 “구절이 아름답고 문장도 굳 세어 이백의 얼굴을 대해도 부끄럽지 않다”라고 썼다.(각주 6) 죽기 전에도 흡사한 주장을 했다. 어느 날 밤 꿈에서 선녀들을 만났는데 시를 한 수 지어보라 해서 지었더니 선녀들이 이건 신선의 글이라 감탄하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시 이태백에 견주었다. (각주 7)
나무에 붉은 말고삐를 매는 청년은 누구일까
유선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그 외에도 난설헌의 시제는 매우 다양했다. 거의 모든 세상만사를 한번 쯤은 시로 읊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중의 일을 묘사한 궁사 연작도 있고 ‘죽지사’라고 하여 풍속 이나 연정을 노래한 것도 적지 않다. 그중 연가 몇 수는 “절창이지만 방 탕하여 문집에 실 수 없다”라는 금지곡 선언을 받기도 했다.(각주 8)
그 모든 난설헌 시를 꿰뚫는 공통점이 있다. 4백 년 전에 쓴 시임에 도 불구하고 꼭 어느 영화에선가 본 듯한 장면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이 다. 그건 아마도 시마다 인물이 등장하고 그 인물이 특정한 행동을 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인물을 등장시켜 특정한 행동을 하게 함으 로써 영화의 스틸 컷과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난설헌 시의 남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 ‘버들가지 노래’라는 시에서는 이런 장면을 그렸다. “청루 서쪽 언덕에 버들꽃 흩어지자 / 아지랑이 낀 가지가 난간 을 스치는데 / 어느 집 청년인가 백마를 채찍질해 와서 / 버드나무 그 늘에다 붉은 고삐를 맨다.”
나무에 말고삐를 매는 청년 혹은 귀공자는 난설헌의 시에 꽤 자주 등장한다. 청년의 말고삐와 채찍의 색상이 바뀌고 장소도 달라져 궁궐 로 출근도 하고 장안 길가에도 나타났다가 기생집 앞에 말고삐를 매기도 한다. 마치 시그니처처럼 여기저기 불쑥불쑥 나타나 말고삐를 매는 이 청년은 대체 누구일까? 혹시 난설헌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스스로를 이태백과 견준 난설헌의 기개로 볼 때, 그리고 “조선에서 여자 로 태어난 것과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을 3대 불행으로 꼽았던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신도 오빠들처럼 벼슬길에 올라 궁으로 출퇴근도 해보고 자유롭게 나들이도 하며 기생집 기둥에 말고삐도 한번 매보고 싶지 않았을까?

허난설헌의 다원적 자아 - 선인, 궁인, 귀공자, 전장의 장수
입새곡(入塞曲), 새하곡(塞下曲) 내지는 출새곡(出塞曲)이라는 한시의 장르가 있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와 병사들에 관한 시다. 난설헌은 입새곡 5수, 새하곡 5수, 출새곡 2수를 남겼다. 아마도 그녀의 시 중 가장 의외적 주제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말고삐를 매는 청년티를 그만 벗고 장수가 되어 하늘 높이 걸린 석양을 바라보며 칼 차고 만 리 출정 길을 떠나 보고 싶었던 것일까? 깊은 구름 자욱한 사막에서 봉화 살펴보고 나서 밤 평원을 달려가는 기병들을 그리기도 했고 열 겹 포위망을 뚫고 흉노를 무찌른 뒤 백마를 타고 눈을 밟으며 돌아오는 장군의 노래도 불렀다. 그대로 웰메이드 사 극의 한 장면 같고 소설의 시놉시스 같다.
16세기의 조선에 갇혔던 난설헌은 시를 통해 선계에서 수만 년을 보내고 문득 인간의 세상으로 내려와 베를 짜는 가난한 여인도 되어 보고 궁녀가 되었다가 상인이 되어 강상을 누비기도 했다. 붉은 말고삐를 쥐고 길 떠나는 청년으로,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자아를 무수히 쪼개가며 살았다. 그녀가 그렸던 풍경도 그만큼 다채로웠다. 그러나 어느 것도 그녀의 것은 아니었기에 결국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2022년 국립발레단이 허난설헌의 시를 무용극으로 무대에 올린 적이 있다. 난설헌의 시 중에서 ‘감우(感遇)’와 ‘몽유광상산(夢游廣桑山)’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감우는 난설헌이 드물게 자신의 정서를 직접 표 출한 감성시로서 4수로 이루어졌다. 그중 1수에 난초와 서리, 즉 난설이 나타난다. 몽유광상산은 문자 그대로 선계에 있다는 광상산을 노니는 꿈을 꾸고 나서 지은 것으로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는 바로 그 장면이 묘사된 시다. 난설헌은 이 시에 특별히 서문을 지어 첨부했는데 거기서 스스로를 이태백에 견준다.
그녀의 난해하고 환상적인 풍경을 형상화하기에는 기념공원보다는 오히려 오페라나 발레 무대, 혹은 영상 예술이 적합할 수 있다.
이렇듯 난설헌은 20세기 후반부터 다각도로 크게 조명을 받고 있 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는 차라리 난설헌이 다시 태어나 한번 마음껏 훨훨 살아주었으면 생각해 본다.
**각주 정리
1. 신부가 시댁에 가서 일생을 보내는 제도.
2. 임미정, “허난설헌 시자료의 재검토”,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제42호, 2021, p.80.
3. 몽유광상산(夢游廣桑山)
4. 홍경진, 『허난설헌 시집-10(한국의 한시)』, 평민사, 1987, p.227.
5. 선계의 광한전이라는 궁전에 백옥으로 된 누각을 새로 지었는데 그 대들보에 넣어둘 상량문을 상상해서 쓴 것이다.
6. 4번 책,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p.203.
7. 위의 책, p.211.
8. 난설헌과 동갑이었으나 더 오래 살았던 이수광(李睟光, 1563~ 1629)이 한시를 정리하며 그리 평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