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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산책
산책 또는 걷기는 가장 단출하게 공원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집과 일터를 한군데로 합치고는 퇴근길이란 게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오후 여섯 시 반에 일을 마치면 동네 뒤편을 둘러싼 개운산 공원의 야트막하고 고즈넉한 산길을 홀로 걷는다. ‘퇴근 본능’이 이런 걸까. 처음에는 일과를 끝내는 느낌 때문에 발 닿는 대로 자꾸 걸었는데, 날씨에 따라 조금씩 경로가 달라지긴 해도 그럭저럭 반복과 규칙이 됐다.
유명 작가, 철학자들의 걷기와 인생을 주제로 쓴 책에서 나와 비슷하게 산책한 양반을 찾는다면 그건 아마도 ‘칸트’일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칸트는 날씨와는 상관없이 마치 시곗바늘처럼 매일 오후 다섯 시부터 늘 똑같은 길을 혼자서 걷고 또 걸었다. 해질 무렵 정해진 코스를 되풀이한다는 면에서 일견 비슷하지만, 실제 결정적으로 닮아 있는 건 산책의 난이도다. “그(칸트)의 산책은 인색하고 쩨쩨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는 땀 흘리는 걸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여름에 아주 천천히 걸었고 땀이 몇 방울이라도 흐르는 게 느껴지면 곧바로 그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각주 1)
세상의 끝
협의 따위로 바깥 일이 없는 날에는 근처 공원의 어느 한 자락이 일터 겸 집을 기준으로 하루 중 가장 멀리 간 곳이다. 어딘가 걸어야 하루가 마무리되는 기분이 드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하루라는 ‘시간’의 관념적 마무리를 구체적인 ‘공간’의 끝까지 걸어가면서 몸으로 실제 확인하려는 그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습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쨌거나 내게 공원 산책은 하루를 정리하면서 그만치 세상의 끝까지 자분자분 걷는 일이다.인생 자체가 글쓰기와 산책이었던 작가 로베르트 발저가 쓴 『세상의 끝』이라는 짧은 소설이 있다. 주인공인 아이는 ‘세상의 끝’을 찾고자 무려 16년을 바다, 평원, 산을 걸어서 헤맨다. 모질게 고생을 겪은 뒤 길에서 만난 어느 농부에게서 구한 답이 다소 어이없다. “‘세상의 끝’은 근처에 있는 한 농가의 이름”(각주 2)이며, 삼십 분만 더 걸어가면 닿을 곳이란다.
이런 산책은 멀든 가깝든 그저 걷고 걷는 일일 뿐이다. 달리 고민 없이 공원 길을 가만히 따라가면 일과로 뒤엉켰던 머릿속이 실타래처럼 조금씩 풀린다. 어느새 걱정도 아쉬움도 굴욕도 고뇌도 발길에 닳은 듯 사라진다. “네가 최고 강자다―그렇지만 넌 그저 최고 강자일 뿐이다. 이렇게 인간은 사물의 형태를 취한다. 작아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편이 낫다.”(각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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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운산 공원
말끔하고 번듯한 대형 공원이나 정원을 좀체 가지 못한다. 아버지 환갑 때부터 팔순을 지나 사반세기 동안 인구가 통 변하지 않는 어느 허씨 일가의 가족사진처럼. 언제나 혼자였고 혼자이니 그렇게 멀리 외톨이로 가 봐야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게 먼저 꼽는 핑계가 되겠다. 더불어 ‘왜 나는 저렇게 설계할 수 없는가’라며 마음을 온통 들쑤시는 속 좁은 질투심 때문에 그런 공원들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게 또 하나의 유별난 사유다.
하지만 거기서 나아가 예쁘장한 정원과 공원에서 “‘노동’과 ‘노동자’의 흔적이 …… 어떻게 해서 사라지게 되었는지”(각주 4) 곰곰 생각하면 마음이 자꾸 시끄러워진다. 지나치게 매끈하고 반들거리는 시설들에 견주면 정작 사람이 겉돈다. 내개 “공원에서는 어떤 소속감 같은 걸 느끼기가 쉽다”(각주 5)고 하지만 그런 장소들이 내게는 때로 징글맞기도 하다.
호사롭지 않아도 그저 일상의 평화와 안식을 줄 수 있다면 그런 공원이 내게는 우선이다.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위치한 서울 성북구 ‘개운산 공원’은 1940년에 지정된 해발 134m 산지형 공원으로서 나이로 치면 딱 우리 아버지 연배다. ‘개운산(開運山)’은 조선시대 창건한 개운사(開運寺)라는 절에서 비롯됐는데, 다른 이름 진석산(陳石山)은 채석장이 있던 자리라서 그리 불렸다고 한다. 바위가 워낙 많아선지 산을 둘러 생긴 동네들인 종암동, 안암동, 돈암동 모두 형제처럼 바위 암(巖) 자 돌림이다. 지금도 공원 산길을 걷다 보면 높직한 돌덩이 절벽이 간간이 서 있고 울퉁불퉁 튀어나온 커다란 바위들도 많다. 공원 길 옆으로 동네 쪽을 내려다보면 오래 전 원석을 잘라내고 널찍하게 남긴 자리가 완만히 펼쳐져서, 그 경사진 바위로 걸어 나가 털썩 앉아서 멀리 용마산, 아차산, 수락산, 북한산을 빤히 바라보는 게 제법 장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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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걷는 길은 개운산 공원 중에서도 고려대학교가 개방한 사유지에 있 다. 돌 계단이며 흙길, 데크 등으로 길이 차분히 이어지는데, 주변은 울울창 창하지도 삭막하지도 않게 적당히 빽빽한 숲이다. 수십 년 전 심은 소나무, 스트로브잣나무, 팥배나무, 산벚나무, 때죽나무 등 수목들이 어울려 자라고 상수리, 갈참나무, 졸참나무가 군데군데 버티고 선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천이되는 과정인 듯하다.
나무들 뒤로 외래종 서양등골나물의 추억이 따라온다. 주말 대낮이었다. 생태 교란종 서양등골나물 꽃들이 대거 창궐해서 심각하다는 기사를 봤는 데, 과연 문밖 아파트 곳곳까지 이미 널리 침투해 있었다. 늘 가던 대로 걷다 가 개운산의 높은 지점을 지나 반대편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빛이 거의 안 드는 숲 가장자리에도 떡하니 그 망할 흰 꽃들이 번지고 있는 게 아닌가. 부아가 치밀어서 풀을 잡아 뜯어도 만만치 않다. 여간해선 뿌리까지 나오질 않 는데 마침 주위에 아무도 없길래, 내친김에 아예 큰 나무들 밑으로 들어가 서 피하던 땀까지 흘려가며 그 풀들을 열심히 뽑아내던 참이었다.
“지금 뭐 하세요?” 삼사십 대로 보이는 여인네가 홀연히 나타나서 묻는 다. 놀랐지만 그보다도 혹시 오해할까 두려웠다. 겉보기에 가녀린 들꽃을 피 사리하듯 뽑은 건 글쎄다, 사이코패스에게나 어울리지 않는가. “음, 이게 그 냥 꽃 같아도 말하자면 생태 교란종이라는 겁니다. 외국에서 온 녀석들이 하도 퍼져서 우리 고유의 좋은 식물들까지도 죄다 못 살게 굴어요.”
“아, 그렇구나.”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몸을 돌려 몇 발짝 내려간다. 나도 다시 내 임무에 충실하려는 순간, 돌연 그녀가 홱 돌아서면서 웃음을 짓더 니 두 손을 마구 흔들며 부른다. “오빠, 같이 가요, 같이 내려가요!” 그녀의 동공이 왠지 묘하게 흔들렸다. 그늘에서 솎아낸 ‘꽃을 든 남자’와 그에게 애 타게 ‘손짓하는 여인’. 누군가 호젓한 산길에서 이런 장면을 마주한다면 과연 뭐라고 할 것인가.
“저저, 전, 어이, 올라가는 길이었어요!” 숲 아래서 황급히 튀어나와 반대 방향으로 부리나케 올라갔다. 그날 나의 공원의 끝, 개운산 꼭대기에는, 비 교적 낡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쓸 만한 조합형 생활체육시설과 철봉이며 역기며 운동 기구를 두루 갖춘, 얼기설기 잇대고 덮은 막사 같은 서민형 피트니스 클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어쩌면 공원에서
“세상의 종말은 모든 것이 멈출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도 없이 계속될 때 다. 그러니 차가운 달빛 아래서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내딛기만 하면 된다.”(각주 6)철학자 프레데리크 그로는 칸트가 반복한 걷기의 특징을 단조로움, 규칙성, 필연성, 세 가지로 꼽으면서 필연성이 규칙성의 개념에 덧붙으면 그것이 바로 ‘운명’이라고 한다. 무언가 맹렬한 추구와는 정반대로 마음을 내려놓은 한 인간의 ‘수동적 의지’가 지닌 힘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평생의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가 그런 운명이었을까. 발저는 1919년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산문에서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각주 7)라고 썼다. 공교롭게도 1956년 성탄절 아침 그는 산책을 나섰다가 눈밭에 쓰러져 죽은 채 발견됐다. 극적이라도 이렇게 쓸쓸한 운 명은 굳이 마다하겠다. 걷다 보면 그게 아닐 거라고, 마침내 어딘가에서 누군가 만나도록 흘러갈 거라고, 그렇게 되려고 혼자 걷는 중이라고 애써 되뇐다.
건축학과에서 가을 학기 조경학개론을 몇 년간 강의한 적이 있었다. 주 중 행사로 밤새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의 주적은 무엇보다 ‘졸음’이다. 누군가 조언을 해서 중간고사가 끝난 추석 무렵이면 수업 대신 서울숲 답사를 갔다. 가기 전에 학생 대부분 입이 댓발은 나와서 툴툴거렸다. 설계 과제는 몰려 있고 마음은 바쁘고 몸은 피곤하며 학교가 있는 용인에서 서울 답사지는 멀기도 하고.
그러다가 단풍이 곱게 들어가는 오후의 공원에서 수십 명 출석을 부르고 마음대로 흩어지라고 하면 강의실에서는 절대 못 볼 밝은 얼굴들이 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볕 좋은 가을날 두어 시간 동안 이곳저곳으로 제 방식대로 아름답게 섞여 들어간 청춘들을 여기저기서 천천히 돌아봤던 기억이 지금 도 생생하다. 그들에게도 좋은 기억으로 남았으리라 믿는다.
혼자서도 좋지만 각자 짊어진 세상의 모서리들이 모처럼 둥그러니 느슨 하게 이웃하는 그런 순간 잠깐 드러나는 ‘세계의 끝’, 뭐 현실판 피안 같은 그런 널찍한 곳도 공원이 아닐지, “나는 연락하러 그곳에 간다.”(각주 8)
**각주 정리
1. 프레데리크 그로, 이재형 역, “일상적인 외출, 이마누엘 칸트”,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 책세상, 2014, p.222.
2. 로베르트 발저, 배수아 역, “세상의 끝”, 『산책자: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한겨레출판, 2017, p.83.
3. 폴 발레리, 백선희 역, 『폴 발레리의 문장들』, 마음산책, 2021, pp.66~67.
4. 제이디 스미스, 케이티 머론 편, 오현아 역, “보볼리, 피렌체/빌라 보르게세, 로마”, 『도시의 공원』, 마음산책, 2015, p.44
5. 위의 책, p.44.
6. 1번 책, p.318.
7. 2번 책, p.24.
8. 황지우 시 “인천으로 가는 젊은 성자들”의 마지막 구절
허대영은 서울대학교 조경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부터 설계사무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좀처럼 화내지 않는 유능하고 성실한 친구들과 함께 주로 교육·연구 시설과 공공 업무 시설의 외부 공간을 설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