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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풍경의 말
  • 환경과조경 2025년 6월호

화재가 발생했을 때 집에서 꼭 한 가지 챙겨야 할 물건이 있다면 무엇일까. 당연히 값비싼 물건을 먼저 챙겨야 하겠지만, 값비싼 물건을 대체할 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 한 개를 고르라고 한다면 수집한 시집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집에 애착이 생긴 건 순전히 그 노트 때문이다. 대학 시절 동아리방 책상 위에는 늘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노트의 이름은 열린 마음. 그 이름 그대로 각자 적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적으면 된다는 원칙 아래 동아리 창립 때부터 전통처럼 내려오는 노트였다. 동아리방 한쪽 구석의 캐비닛에는 선배들이 적은 수백 권의 노트가 빼꼭하게 들어있었다. 나를 포함해 또래의 동기나 선배들은 주로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시험 정보, 소모임 모집, 사소한 고민과 푸념 등 신변 잡기의 이야기를 적어 놓는 게시판으로 활용했다.

 

어느 날 캐비닛 속 먼지가 뽀얗게 쌓인 선배들의 노트에 호기심이 생겨 창립 선배들의 노트를 읽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기들과 함께 노트에 적은 내용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선배들의 치열한 고민과 세상을 향한 관점과 시선이 대단했다. 역사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두운 시기를 관통하는 가운데 진취적이고 열정적인 선배들이 강의실이 아닌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치열한 현장의 열기를 글로나마 엿볼 수 있었다. 선배들의 여느 산문가 못지않은 글쓰기 솜씨 덕분에 읽는 재미가 나름 쏠쏠했다.

 

탁월한 문장을 구사하는 선배들이 노트에서 인용했거나 추천했던 시집들은 모두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그중 학교 도서관에서 빌렸던 시집에는 이런 메모가 첫 장에 적혀 있었다.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새운 자에게만 온다. 꼬박 밤을 지새운 자만이 새벽을 볼 수 있다.” 그 시집을 추천했던 선배가 적은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시적인 문장 한 줄이 내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별것 아닌 문장일 수도 있지만 새벽과 같은 어둠을 숱하게 통과한 사람만이 말하고 쓸 수 있는 문장인 것 같아서 오랫동안 떠올랐다. 그때부터 시집을 모으기 시작했다. 언젠가 이해하기 어려운 시집을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며 저런 비옥한 문장을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시집을 수집하면서 나름의 취향과 요령이 생겼다. 선호하는 시인선 중 하나는 바로 문학과지성 시인선이다. 이 시인선은 시인들 라인업도 좋지만, 표지 속 시인들의 자화상 캐리커처가 귀여워서 괜히 더 눈길이 갔다. 특히 맨 뒷표지 네모 박스에 실리는 글이 맘에 들면 종종 시집을 샀다. 시도, 산문도 아닌 형태의 글을 통해 시와 시인을 나도 모르게 상상하며 그려보기도 한다. 가령 “쌓이지 않을 만큼 내리는 눈을 쓸고 있다”(각주 1)와 같은 문장을 읽으며 ‘시’라는 싸리눈을 정성스럽게 쓸고 있을 시인의 마음은 어떤 것일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래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600호 기념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가 출간됐을 때 참 반가웠다. 이 책은 뒷표지 글을 시 자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의 말’로 정의하며 501호부터 599호에 실린 시의 말을 정리했다. 지루한 스펙의 나열이 전부인 쇼핑용 카탈로그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감각적인 문장들 덕분에 읽는 내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시집을 사고 싶은 맘이 들게 하는 쪽을 연신 접다가, “숲이 흔들리면 바람이 된다”와 같이 감각적인 문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잠시 감탄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어느 먼 숲의 풍경을 본 날을 떠올리며.

 

시의 말이 나를 시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처럼 잡지의 맨 첫 꼭지로서 독자들을 잡지의 세계로 데려 왔던 연재 ‘풍경 감각’이 이번 호를 끝으로 막을 내린다. 『환경과조경』 에디터로서 처음 편집했던 원고였고, 매월 담당 편집자이자 원고를 맞이하는 가장 첫 번째 손님으로서 늘 기쁘게 읽었다. 한 독자는 이 연재를 잡지의 시작을 알리며 여는 창문 같다고 했는데, 내게는 ‘풍경의 말’과 같았다. 시가 가진 고유한 목소리를 담아 시와 시인의 세계를 그리게 하는 시의 말처럼 이 원고를 읽으며 편집하는 시간은 각 풍경이 가진 고유한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그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매월 다가오는 마감이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단 한번의 지각없이 매번 정성스러운 글과 그림을 보내준 조현진 작가에게 담당 편집자로서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각주 정리

1. 최정진, 『버스에 아는 사람이 탄 것 같다』, 문학과지성사,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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