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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스케이프] 황진이의 풍경
  • 고정희
  • 환경과조경 2025년 5월호

“누구나 황진이를 알지만 아무도 황진이를 모른다.” 소설 『나, 황진이』의 저자 김탁환이 한 말이다. 황진이? 황진이에 관해 할 얘기가 더 남았나? 이런 반응이 충분히 예상된다. 그러나 황진이의 풍경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도 쓰지 않은 것 같기에 보태보려 한다. 황진이의 풍경이라면 우선 그 녀가 태어나 살다가 죽은 고도(古都) 송도, 지금의 개성을 꼽아야 할 것이다. 황진이 이야기를 처음으로 우리에게 전해 준 허균(1569~1618)은 황진이가 산수를 즐겨 찾아 나서는 풍류벽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허균의 부친 허엽(1517~1580)이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각주 1) 문하에서 수학한 사이다. 그러므로 그 아들 허균이 전한 황진이 이야기는 그의 소설가적 상상력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비교적 정확할 것으로 본다.

 

금강산 유랑

황진이의 풍류벽에 정점을 찍은 것은 금강산 유랑이다. 금강산 유람이 아니라 유랑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저 구경하러 잠시 다녀온 것이 아니라 금강산으로 들어가 오랜 세월을 헤맸기 때문이다. 아주 작정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로 떠났을 것이며, 4년이 걸렸다고도 하고 반년 만에 거지 꼴로 돌아왔다고도 한다. 금강산을 샅샅이 살피고 태백산과 지리산을 거쳐 나주까지 갔다가 다시 송도로 돌아갔다는데 같은 길을 도보로 행진해 본 적이 없으니 얼마나 걸렸을지, 얼마나 힘든 행보였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황진이의 산천에 대한 깊은 애착은 그녀의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와 더불어 삶에 대한 성찰도 깊었다. 기녀로서 혹은 예인으로서 삶의 언저리를 돌며 한숨만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꾸려갔고 마음이 가는 사내에겐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삶에 대한 성찰은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확대되어 거문고와 술을 가지고 화담 서경덕의 서재를 자주 찾게 했다.(각주 2) 그런 점으로 미루어 금강산 유랑은 절경을 제대로 한번 즐겨보겠다는 목적에 앞서 구도의 길이 아니었을지 짐작해 본다. 스승 서경덕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걷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베적삼에 무명 치마 차림으로 대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나섰다는데 산길을 터벅터벅 걸으며 혹은 산사에 들려 밥을 동냥하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영원히 얻을 수 없다. 황진이가 금강산에 관하여 단 한 구절의 시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은 금강산 계곡을 터벅터벅 걸으며 각자 구해야 할 것이다. 황진이가 남긴 화두라 해도 좋겠다.

 

어느 깊은 산속에서 문득 득도하여 속세를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선녀가 되어 홀연히 사라져 또 하나의 전설을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송도로 돌아갔다. 마치 송도에 꿀단지라도 감춰둔 것처럼. 우리도 황진이를 따라 금강산을 뒤로하고 송도로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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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박연폭포

 

 

환경과조경 445(2025년 5월호수록본 일부

 

**각주 정리

1. 화담 서경덕(1489~1546)은 조선의 학자로 독자적인 기일원론을 완성했다. 벼슬길에는 나서지 않고 개성의 화담이라는 곳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다.

2. 허균이 1612년부터 1613년까지 집필한 『성소부부고』의 권 22~24 ‘이인(異人) 편’에서 그리 전했다.


고정희는 1957년 서울에서 태어나 어머니가 손수 가꾼 아름다운 정원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느 순간 그 정원은 사라지고 말았지만, 유년의 경험이 인연이 되었는지 조경을 평생의 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다. 『식물, 세상의 은밀한 지배자』, 『신의 정원, 나의 천국』, 『고정희의 바로크 정원 이야기』, 『고정희의 독일 정원 이야기』, 『100장면으로 읽는 조경의 역사』를 펴냈고, 칼 푀르스터와 그의 외동딸 마리안네가 쓴 책을 동시에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베를린 공과대학교 조경학과에서 20세기 유럽 조경사를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베를린에 거주하며 써드스페이스 베를린 환경아카데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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