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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서랍에 꿈을 넣어 두었다(각주 1)
  • 환경과조경 2025년 5월호

독일의 아우토반을 거침없이 달리는 스포츠카처럼 광활한 아프리카 초원을 누비는 들소 무리. 보기만 해도 아찔해 보이는 절벽 사이에서 비단의 실 가닥을 길게 뽑듯이 떨어지는 폭포. 사뿐사뿐 산책하듯이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가 드리운 드넓은 칼데라. 봄의 마지막을 알리며 흩날리는 벚꽃처럼 고운 연분홍 자태를 뽐내며 흩어지는 호수 위 홍학 무리. ‘아름답다’는 말을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기어코 입 밖으로 발음하고 싶어지는 이 모든 광경을 경비행기 안에서 지켜보는 한 쌍의 커플.

 

먼훗날 기술의 발달로 풍경 속 오감과 분위기, 온도와 습도, 감정을 저장할 수 있는 서랍이 발명된다면 저 풍경의 모든 걸 서랍에 가장 먼저 넣고 싶다. 실제 나의 경험담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경비행기로 아프리카의 대자연을 누비는 풍경은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6)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약 160분에 달하는 긴 러닝타임에 담긴 커플의 극적인 서사보다 짧게 스쳐지나가는 저 풍경에 마음이 괜히 동했다. 수렵을 취미로 하며 어딘가에 얽매이는 걸 거부한 채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남자 주인공 ‘데니스’가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 주인공 ‘카렌’과 함께 경비행기 데이트를 하는 사소한 장면에 불과했는데, 광활한 아프리카 풍경이 너무 좋아서 같은 장면을 몇 번이나 돌려보곤 했다. 그래서 언젠가 자동차 면허를 못 따더라도 경비행기 면허는 꼭 따고 싶다. 경비행기 면허를 진짜로 따는 날이 온다면, 욕심을 조금만 더 보태서 경비행기로 세계 일주를 하며 세계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아 두고 싶다.

 

내가 다소 허무맹랑하고 무모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동안 실제로 무모한 계획을 실행한 이가 존재했다. 경비행기를 세계 일주를 위한 교통수단으로 택한 나와 달리 『노플라잇 세계여행』의 저자 조진서는 비행기를 타지 않은 채 오직 육로와 해로를 통해서 세계를 누비며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그의 동기는 단순했다. 심신을 지치게 했던 15년간의 직장인 생활을 정리한 뒤 지구의 크기가 얼마나 큰 지를 몸소 체험하기 위해 세계 일주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출발해 시애틀에 도착할 때까지 걸린 기간은 111일. 비행기로는 가면 하루도 채 안 걸리는 거리를 기차와 배로 건너고 세계 각국의 국경을 넘나들며 횡단한다.

 

꽤나 낭만적인 여행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낭만은커녕 불운의 아이콘이 겪은 고난과 수난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는 산전수전을 겪었다. 지갑을 잃어버리는 건 기본이고, 남들은 모두 따뜻하게 기차 여행할 때 난방 장치가 고장 난 객실에서 추위 때문에 홀로 바들바들 떨고, 난동에 가까운 호객 행위를 벌이는 택시 기사 무리를 퇴치하고, 때론 난민 무리에 휩쓸려 배를 타지 못할 뻔했다. 우여곡절을 겪는 저자의 모습을 보며 안타깝기도 하면서도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부모의 도움 없이 유치원에 홀로 씩씩하게 등원하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비의 심정으로 대견한 마음과 동시에 괜히 응원하고 싶더라.

 

물론 조금 궁금하거나 부러운 것도 있었다. 꼬맹이 현지인이 여느 베테랑 못지않게 능숙하게 모는 말의 안장에 앉아서 멋진 협곡을 구경한다거나 스페이스X의 우주 로켓 발사를 유튜브 생중계가 아닌 실제 현장에서 직접 감상하는 기분은 어떨지 궁금했다. 렌탈 스포츠카를 타고 포레스트 검프가 영화 속에서 달렸을 것 같은 탁 트인 미국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경험은 가장 부러웠다. 무면허라서 그 경험을 정확히 이해하는 건 어렵지만 아마도 결승선을 향해 질주하는 카레이서만큼 짜릿하지 않았을까.

 

나의 추구미는 데니스와 조진서 작가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삶에 가깝지만, 실행력이 다소 부족한 몽상가라서 경비행기 세계 일주 계획을 그들처럼 실천하지 못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삶의 기억을 서랍 속에 고이 넣어 보관하듯 시를 썼던 한강 작가처럼 가장 소중한 것을 첫 번째 서랍에 고이 넣는 마음으로 나의 계획을 계속 써내려가고 싶다. 일본의 한 광고 카피(각주 2)와 같이 말만 하면 계획이지만 이렇게 쓰면 이룰 수 있는 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젠가 나의 서랍에 꿈을 살포시 넣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각주 정리

1.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의 제목을 오마주했다.

2. 신인 작가 발굴을 위해서 개최되는 일본의 ‘도련님 문학상’ 포스터 광고에는 다음과 같은 카피가 활용됐다. 그 청춘, 떠들면 건방짐, 쓰면 문학. 그러한 매일, 생각하면 평범, 쓰면 문학. 그 불만, 말하면 푸념, 쓰면 문학. 그 인생, 말하면 설교, 쓰면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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