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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감각] 부자가 된 기분
  • 환경과조경 2023년 05월

2023 5월호 풍경감각.jpg

 

어렸을 적, 부모님은 시험을 잘 보면 원하는 걸 사준다는 공약을 걸곤 했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의도였겠지만, 사실 시험 준비보다는 상품 고르는 걸 더 열심히 했던 것 같다. 틈날 때마다 인터넷 쇼핑몰 장바구니에 식물을 넣었다 빼면서 위시리스트를 채워 나갔다.

괜찮은 성적표를 받아오면 그 주 주말에는 쇼핑몰을 운영하는 식물 농장으로 향했다. 인터넷 쇼핑이 막 활성화되던 때였지만, 아버지는 늘 한 시간이나 걸리는 농장까지 차를 운전하셨다. 비닐하우스를 한 바퀴 둘러보며 식물을 구경하고 미리 적어간 식물들과 그 자리에서 반해버린 식물들을 모두 담으면 큰 상자 하나가 가득 찼다.

식물 상자는 무거웠지만 짐처럼 트렁크에 실을 수 없어 옆자리에 두고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그렇게 좋냐고 물었다. 배웅하던 농장 주인 부부는 마치 부자가 된 기분일 거라고 대신 대답했다. 집에 오는 길, 내가 상자 속 식물을 유심히 보는 동안 아버지는 푸른 시골길을 달렸다.

작업실 이사를 마쳤다. 새 작업실에는 작지만 해가 잘 드는 베란다가 있어서 그간 위시리스트에 머물던 식물들을 몇 개 데리고 왔다. 은방울꽃, 수선화, 델피늄, 디디스커스, 아이슬란드포피……. 베란다 창틀에 앉아 이들을 천천히 본다. 오래 전 그 봄날, 아버지 차 뒷자리에 앉아 ‘부자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궁금해하던 기억이 난다. 창밖이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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