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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이름을 부르는 지혜
  • 환경과조경 2022년 11월

삶에서 가장 소중한 장면을 영화로 만든다면 어떨까? 영화 ‘원더풀 라이프’(1998)의 주인공은 천국에 가는 사람들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각자가 꼽은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기억을 영화로 만들어 천국으로 가는 이들에게 선물로 준다. 말하자면 천국의 프로덕션 회사에서 진행하는 텀블벅 프로젝트라고 할까? 문득 지옥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행운(?)이 주어진다면 어떤 기억을 선택할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여러 장면이 있겠지만, 클라이언트로서 한 가지 요청이 있다면 장면을 구성할 때 미장센으로 ‘비 온 다음 날 아침 집에서 본 안개 낀 앞산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써달라고 하고 싶다.

시골집 마당에 서면 산세가 훤히 보이는 맞은편 산에는 왜가리 군락지가 있었다. 그 자체로도 하나의 수묵화였지만 비 온 다음 날 젖은 아스팔트 도로가 채 마르지 않은 아침, 안개가 산을 자욱하게 두른 풍경은 특유의 운치를 자아냈다. 소설가 김승옥의 표현을 빌리자면, 밤사이 진주한 안개라는 적군이 가하는 기습에 무장해제가 될 수밖에 없는 진풍경이었다. 그러한 날에 맡을 수 있는 젖은 흙냄새와 깨끗해진 아침 공기의 맛은 날씨를 보관하는 서랍이 있다면 그 안에 넣고 싶을 만큼 좋았다. 만약 겸재 정선 선생님이 이곳의 경관을 그림으로 그렸다면 인왕제색도에 버금가는 그림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그때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았다.

풍경의 순간을 담지 못했던 나와 달리 영국에서는 귀여운 조직적 움직임을 2005년부터 선보이고 있다. 레딩대학교 기상학과 방문연구원 출신 개빈 프레터피니(이하 개빈)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추종자에 맞서 구름을 감상하는 모임인 ‘구름감상협회’를 창립했다. 이른바 구름 추적자라 불리는 회원들이 120개국에 5만여 명이나 있다. 사이비 종교 혹은 모종의 음모를 꾸리는 이상한 단체는 아니고, 순수하게 구름이 좋아서 모인 이들이 각자가 발견한 구름 사진, 그림, 시 등을 홈페이지에 공유하는 일종의 구름 커뮤니티다.

최근 창립자 개빈은 회원들이 보내온 사진과 명화를 엮어 책 『날마다 구름 한 점』(2021)을 출간했다. 이 책은 구름의 생성 원리나 광학 현상, 이름의 유래, 구름과 어울리는 문학 작품의 문장 등을 소개한다. 책을 통해서 텔레토비 동산의 햇님 주위로 퍼지는 빛의 이름이 부챗살빛(Crepuscular Rays)이란 것과 비행운처럼 선박의 배기가스가 선박 자국(Ship Tracks)이라는 구름을 만든다는 걸 새로 알게 됐다. 또한 SF영화에서 재앙을 예고하는 장면에 등장할 것 같은 ‘거친물결 구름(Asperitas)’은 협회 회원이 발견한 구름인데, 세계기상기구가 발행하는 『국제구름도감(International Cloud Atlas)』에 정식으로 수록됐다. 구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학계에서 못한 일을 해낸 것이다.

인터뷰이로 만난 박승진 소장으로부터 구름감상협회와 결이 비슷한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를 듣게 됐다. 개빈이 구름감상협회를 통해서 생소한 구름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했던 것처럼, 박 소장은 일반인에게 다소 낯선 식물의 세계를 알려주고자 했다. 우연히 공사장 근처를 지나다가 가림막을 배경 삼아 아름답게 나 있는 잡초를 발견하고, 잡초마다 갤러리 작품명처럼 스티커로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고 한다. 잡초를 하나의 작품처럼 감상할 수있도록 일종의 오픈 갤러리를 만든 것이라고 할까. 일회성에 그친 프로젝트였지만, 이러한 취지에 동조하는 이들이 많이 모인다면 우리도 식물 사진을 찍고 서로의 감상을 공유하는 초록감상협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 그런 협회가 만들어진다면 맨 먼저 가입서를 쓰고 싶다.

구름의 평균 수명은 10분밖에 되지 않고, 잡초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배우처럼 주목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구름, 잡초라는 단어로 그들의 존재를 뭉뚱그리는 대신 권운, 적운, 개망초 등 정확한 이름을 호명해보는 것은 어떨까.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은 “지혜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대상을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름에 집착하느라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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