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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공터의 힘
  • 환경과조경 2021년 10월

 

개관과 동시에 장소 덕후들의 성지로 등극한 안국동 서울공예박물관. 400년 수령의 장엄한 은행나무, 테라코타 관을 둥그렇게 쌓은 크레이프 케이크 형태의 파사드, 곡선형 콘크리트로 유려하게 지형 틀을 잡은 경사 초지, 지극히 이질적인 이 세 요소를 한 프레임에 담으면 대충 찍어도 어느 각도에서나 그림이 나온다. 요즘 인스타그램을 도배하고 있는 장면이다.

공예박물관 안마당의 이 매력적인 풍경은 포토제닉할 뿐 아니라 고즈넉한 산책과 휴식도 넉넉히 담아낸다. 그러나 공예박물관의 도시적 잠재력은 감고당길과 안국역 쪽으로 담장 없이 활짝 열린 박물관 앞마당에서 펼쳐진다. 이 공터는 2017년까지 70년 넘게 풍문여고의 운동장으로 쓰였다. 겹겹이 쌓인 기억의 지층은 훨씬 더 두껍다. 감고당길 입구에는 안동별궁 터표지석이 서 있다. “조선 초부터 왕실의 거처였다가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례처로 사용된 궁터.” 안동별궁은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별궁으로 쓰였고, 세종이 승하한 곳이자 문종의 즉위식이 열린 곳이며, 고종이 건물을 개축해 순종의 혼례를 역사상 가장 성대하게 치른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근대 여성 교육을 이끈 학교로 변모했다가 이제 공공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안동별궁과 풍문여고를 함께 써넣어 검색해보면 풍문여고 교정 안에 안동별궁이 있는 1950년대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뜬다. 근대식 교사에 옛 별궁 한옥들이 이어져 있고 그 앞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줄 맞춰 조회를 하는 기묘한 광경이다. 게다가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인사동과 북촌 사이라는 도시적 맥락까지 겹친 장소성, 만만치 않다. 설계공모 당선 이후 박물관 건축을 주도한 송하엽 교수(중앙대)의 말처럼, 이곳은 시간을 걷는 공간이다.

 

하지만 공예박물관 외부 공간이 뿜어내는 힘의 원천은 시간도, 기억도 아니다. 그 힘의 열쇠는 빈 땅 그 자체에 있다. 안국역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모두에게 열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공터와 담장을 둘러친 학교 운동장의 차이를 바로 실감할 수 있다. 여름과 가을의 기 싸움이 팽팽하던 오후, 조경 설계로 이 빈 땅의 잠재력을 극대화한 박윤진 소장(오피스박김)을 만나 공터 곳곳을 느릿느릿 산책했다. “처음 방문한 날, 풍문여고 흙 운동장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어요. 설계비만 계산하면 손해일 게 뻔했지만 무조건 프로젝트를 맡기로 마음먹었죠. 담장만 걷어낼 수 있다면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인 오픈스페이스를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어요.”

이미 블로썸 파크(환경과조경20169월호)와 경기도 북부청사 광장(20205월호)뿐 아니라 민간과 공공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작업에서 바닥면 실험과 지형 설계 혁신을 실천해온 오피스박김은, 빠듯한 예산과 층층시하 간섭이라는 서울시 프로젝트의 고질적 난맥을 설계 역량과 노하우로 극복하며 도심 공터의 장소적 가치를 가시화하는 성과를 거뒀다. 애초의 생각처럼 폐쇄적 담장을 허무는 데 성공했음은 물론이다. 풍문여고 담장을 헐면서 옛 안동별궁 담장의 기단석과 행각 터가 발견되었고 문화재위원회는 노출 전시를 결정했다. 야심 찬 계획과 달리 허술하게 완결되기 마련인 공공 도시·건축 프로젝트를 조경가의 안목과 솜씨가 어떻게 살려냈는지, 세세한 설명은 아끼기로 한다. 가보면 바로 느낄 수 있다. 조경가의 안목과 지혜를.

감고당길을 사이에 두고 서울공예박물관 맞은편에는 이건희미술관의 유력 후보지인 송현동 숲이 자리한다. 박물관 교육동 전망대에 오르면 야생의 숲처럼 장엄한 송현동 일대의 녹색 풍경이 멀리 인왕산을 배경으로 넓게 펼쳐진다. 주변 고층 건물에서 찍은 조감 사진은 고밀한 도시 조직, 송현동 숲, 공예박물관 공터의 극명한 대조와 긴장을 전시한다. 열린 공터의 도시적 잠재력을 감각적으로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감고당길에 서서 박물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관람 목적을 가지고 오는 사람 못지않게 목적 없이 그냥들고나는 사람이 많다. 모처럼 도심 산책을 즐기다가, 즐거운 퇴근 걸음으로 안국역으로 향하다가 뻥 뚫린 공간을 보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공터에 들어서는 사람이 적지 않다. , 뭐지? 외마디 혼잣말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의 매력, 담 없는 도시 공터의 의미를 새삼 깨닫게 된다. 공예박물관 앞마당은 길 역할도 톡톡히 해낸다. 부지 서쪽 감고당길과 동쪽 윤보선길을 가로지를 수 있는 한가롭고 여유로운 연결 통로인 셈이다. 박윤진 소장과 나도 통과 동선으로 박물관 앞마당을 사용하는 이들 뒤를 쫓아 윤보선길로 접어들었다. 인왕산에 걸린 노을을 따라 골목을 걷다 보니 마침 그럴싸한 노포 호프집이 등장했다.

유달리 높고 파란 하늘과 불타는 노을 사진으로 SNS가 북적이는 이 가을, 잠시 틈을 내 가볼 만한 조경 작업과 전시도 풍성하다. 오피스박김의 서울공예박물관뿐 아니라 이달 지면에 모은 김아연의 가든카펫’(덕수궁, ‘상상의 정원), 김봉찬·신준호의 어반 포레스트 가든과 정영선의 나의 정원’(피크닉, ‘정원 만들기), 안마당더랩의 일분일초’(소다미술관, ‘오픈 뮤지엄 가든: 우리들의 정원)에서 반나절 가을 나들이의 여유를 맛보시길.

 

아쉬운 소식을 전한다. 20186월호(362)부터 함께 지면을 만든 윤정훈 기자가 402호를 끝으로 환경과조경 생활을 마무리한다. 마흔한 권 잡지 곳곳에 밴 그의 흔적을 기억하며, 새로운 도전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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