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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서울공예박물관, 의도와 의도 사이
  • 환경과조경 2021년 10월

도심 한가운데 이런 오픈스페이스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죠.” 서울공예박물관 앞마당으로 들어서며 박윤진 소장(오피스박김)이 말했다. 마른 흙바닥과 부분부분 들어선 석재 포장, 둥그런 잔디밭과 가장자리에 놓인 몇그루 나무가 공간의 전부였다. 박 소장의 이야기를 듣고 뒤를 돌아보니 안국동 일대를 빼곡하게 채운 건물과 도로가 새삼스럽다. 항상 둘러싸여 있어 갑갑한 줄도 몰랐네. 번잡한 풍경으로부터 돌아서 탁 트인 앞마당을 마주한다. 눈이 한결 편안하다. 공백이 있어 더 나은, 필요에 의해 비워 만든 공간이다.

에디터로서 가장 반가운 소식은 새로운 공간의 준공이다. 조경의 경우 가뭄에 콩 나듯 들려오지만, 가을엔 이따금씩 좋은 소식이 날아든다. 미리 받은 설계 자료를 챙겨 사무실 밖을 나선다. 합법적으로(?)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취재의 또 다른 묘미는 공간에 대한 이해와 감흥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곳이든 직접 가보고 안 가보고의 차이는 크니까. 여기에 설계가의 동행이 더해지면 좀 더 흥이 난다. 만든 사람이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무의식 저편에 있던 직업 정신이 소생한다. 아주 잠깐이지만 일할 맛이 난다.

박물관은 본래 오래된 고등학교였다. 건물로 들어가 내부를 구경하는데 박윤진 소장이 계단에서 멈췄다. “이 계단의 느낌, 너무 좋지 않나요?” 박물관 안엔 학교였을 시절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아쉬웠는데, 그나마 계단이 그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익숙한 석재 계단과 그 끝의 황동 신주. 이런 계단이었지. 급식 먹으러 두 칸 세 칸 겁 없이 뛰어 내려가던 시절의 추억이 떠올랐지만 박소장처럼 사랑(?)에 빠지진 않았다. 건물 밖을 나가서야 옛 학교의 계단이 불 지핀 설계 욕구를 어떤 식으로 해소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박물관 맞은편의 도로와 인접한 진입 계단이 그 대상이다. 사각 스테인리스 파이프를 켜켜이 쌓아 만든 계단은 어렴풋하게 옛 계단과 닮아 있었다.

건물 주변부를 부드럽게 침투하는 낮고 평평한 지형은 대상지에 낮게 깔린 과거와 맥을 같이 한다. 흙바닥이 풍문여고의 운동장을 기리듯 석재 및 콘크리트 포장과 잔디밭 또한 땅의 기억을 반영하고 있다. 박물관 뒤편엔 둥치가 아름은 되는 은행나무가 있고, 그 아래로 야트막한 잔디 지형이 펼쳐진다. 진입 공간의 잔디와는 다른 구배로 설계된 이 언덕은 예전 조선 시대 별궁이 있을 때의 지형을 살린 거라고 했다. 당시의 땅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까 궁금해하던 중, 한 남자와 그의 무릎 높이밖에 안 되는 작은 아이가 보였다. 좁은 보폭으로 아장아장 언덕을 오르는 아이의 발을 통해 미세한 지형 변화가 읽히는 듯도 했다.

언덕을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내려갔다. 잔디를 따라 층층이 놓인 선형의 콘크리트 띠 때문인지 내려가는 발걸음은 사뿐사뿐. 반대편에 서니 시선은 자연스럽게 은행나무로 향했다. “은행나무를 셀러브레이션celebration”했다는 설명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 말 때문에 몇 번 더 나무를 보았고, 그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의 흐름과 결을 같이 할 것만 같은 언덕을 두세 번 더 오르내렸다. 수백 년 된 나무가 보아온 풍경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했던 것 같다. 나무도 보고 있었을까? 방금 언덕을 오르던 작은 아이를.

취재를 다녀와 며칠 후, 인터넷 쇼핑을 하던 중 모델이 등지고 있는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공예박물관의 앞마당과 잔디 언덕이었다. 오픈한 지 얼마나 됐다고. 사람들 참 빠르다. 프로젝트 소개를 위해 오피스박김이 제공한 자료에는 다양한 인스타그램 계정에 게시된 공예박물관의 사진도 있었다. 여러 웹사이트에 진열된 공간을 종이 위에 다시 펼치며 생각한다. 이미 많은 사람이 나름대로 잘 즐기고 있는 공간에 담긴 의도를 굳이 알려야 할 필요가 있나? 아 주 그렇다고는 못하지만 마냥 무용하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다. 만든 이의 의도와 의도 사이를 배회할 때 들려오는 어떤 이야기가 있 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이따금 찾아오는 그런 순간이 나쁘지 않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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