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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웃거리는 편집자] 산책은 하찮지만 도움이 된다
  • 환경과조경 2021년 9월

엄마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서로 다른 이유로 산책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지난번 검사 받았을 땐 초록색이었는데, 이번엔 노란색이래.” 골밀도 검사 결과를 말하는 엄마의 표정은 약간 의기소침했다. 그래프에서 초록색 등급에 해당되면 정상인데, 수치가 떨어져 노란색 등급을 받았다는 얘기였다. 때마침 여름도 다가오고 있었다. 옷차림이 가벼워져 더는 지난 계절에 얻은 군살을 가릴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부지런히 아침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다.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 아침이라기보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짧으면 한 시간, 길면 두 시간을 걷다 들어왔다. 조금 일찍 일어나는 날은 산책 준비를 하는 엄마를 볼 수 있었다. 빨래하기 귀찮으니 어제 신던 양말을 줍줍해 신는 모습은 퍽 귀여웠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엄마의 발간 광대와 거기에 묻어난 뿌듯함을 보는 것도 좋았다.

비슷한 시점에 나 또한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했다. 하루 대부분을 안에서 보내는 실내 인간에겐 바깥 공기가 필요했다. 출퇴근길 도합 두 시간을 꼬박 지하철에서 보내는데, 서 있으면 서 있는 대로 사람들 틈에서 답답하고 앉으면 앉는 대로 좀이 쑤셨다. 스마트폰 보는 것도 지겨워질 때면 쓸데없이 슬픈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갑자기 서울에 대형 지진이라도 일어나면 나는 꼼짝 없이 여기 갇히겠구나, 죽어서까지 지하철에 있는 건 정말 싫다…….’ 그런 날은 집에 도착해 낡고 편한 운동화를 찾았다. 퇴근해 생산적으로 시간을 쓰기는커녕 곧장 인스타그램이나 넷플릭스행이었으니 뭐라도 집에 있는 것보단 낫겠지 싶었다. 낮엔 폭염이다 뭐다 난리였지만 열기가 팍 식은 저녁은 걷기 딱 좋았다.

모녀가 사이좋게 같이 산책을 나가는 일은 없었지만(활동 시간대가 다를뿐더러 그렇게 붙어 다니는 사이가 아니다), 공통의 관심사가 생겼다. 우리를 들뜨게 한 이슈는 동네 산책 명소였다. 집 주변에 그치던 각자의 산책 코스는 점차 그 반경을 넓혀갔다. 우람한 나무들이 있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로, 얼마 전 하천 정비 공사를 마쳐 멀끔해진 옆 동네 신상산책로로. 발품 팔아 발견한 저만의 산책 스팟spot을 서로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은 장소는 영축산 순환산책로. 옆 동네 뒤켠 야트막한 산에 생긴 데크 길로, 뒷짐 지고 천천히 걸으면 금세 정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쩜 나무도 거의 안 베고 땅도 많이 안 파헤치면서 그런 길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동네가 참 살기 좋아졌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자주 찾는 곳은 공릉동의 경춘선 숲길이었다. 한적한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선형 공원을 따라 이따금씩 카페가 나타나 눈요기는 물론 가볍게 목을 축이기 좋았다. 연남동의 경의선 숲길만큼 하진 않지만 관광객보다 동네 사람들이 많아 편했다. 산책 나온 귀여운 강아지들과 길 따라 심긴 풀꽃을 곁눈질하다 보면 금방 공원 끝에 닿아 있었다.

며칠 못 갈 거라고 예상했던 우리의 산책은 생각보다 꾸준히 이어졌고, 산책 중 각자 보고 들은 것들을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로 삼았다. 이 더운 날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많더라, 너무 멀리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다리가 빠지는 줄 알았다, 길 위의 지렁이가 사람들한테 밟힐 것 같아서 나뭇가지로 구해줬는데 징그러워서 혼났다……. 소소하다 못해 하찮았지만 그런 걸 나누는 순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도 생각되었다.

고양이들이 밤에 몸을 누이는 장소, 열매를 기대해볼 수 있는 나무, 울다가 잠든 사람들의 집…… 산책할 때 내가 기웃거리고 궁금해하는 것들도 모두 그렇게 하찮다. 그러나 내 마음에 거대한 것과 함께 그토록 소소한 것이 있어, 나는 덜 다치고 오래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일상의 폭력과 구태의연에 함부로 물들지 않을 수 있다.”1

옷장에서 두터운 옷을 다시 꺼내기까지 산책을 이어가볼 생각이다. 몸을 지탱하는 두 다리만큼 일상을 받치는 별 볼 일 없는 순간들도 필요하니까. 바란다면 동네에 더 많은 산책 명소가 생기기를. 덧붙여 시간이 지나도 지금의 엄마처럼만, 즐겁고 바지런하게 동네를 누비는 산책인으로 자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1. 한정원, 시와 산책, 시간의흐름, 2020,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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