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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가 만난 문장들] 우리의 취미는 기대하는 것
  • 환경과조경 2021년 9월

방에는 자주 쓰지는 않지만 버릴 수는 없는 애물 단지들이 가득하다. 방문 뒤 통기타, 책꽂이 위 디지털 건반, 서랍 속 잉크와 딥펜 등등. 얼마 전 동생이 선물해준 오일 파스텔이 이 대열에 합류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넷에 사용법을 검색했다가 그 결과에 놀랐다. 가이드북부터 그리는 과정을 담은 영상, 서툴지만 처음 완성한 그림을 자랑하는 게시물이 가득했다. 많은 사람이 즐기는 취미의 대상이 된다는 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감탄하며 한참이나 여러 웹페이지를 들락날락했다.

내가 조경 잡지의 에디터라는 말에 반가워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은 건축을 좋아한다면서 언젠간 유럽을 여행하며 사진으로만 봤던 건물들을 직접 보고 싶다고 말했다. 독특한 건물이 인스타그램의 피드에 등장하면 그곳을 찾아가 커피라도 한 잔 사서 머물며 사진을 찍는 게 취미라고 덧붙였다. 그런 일도 취미로 삼을 수 있구나 깨달았고, 조경도 취미의 영역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화분에 물을 주고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각하는 사이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고, 머릿속을 잠깐 채웠던 질문은 금세 휘발됐다.

조경과 취미라는 말에 떠올린 장면이 저게 전부라니. 아직도 시야가 좁디좁구나 싶었다. 하지만 지금도 누가 조경과 관련된 취미 활동이 뭐가 있냐고 묻는다면 저 정도밖에 답하지 못할 것 같다. 조경 역시 어떤 공간 또 공간을 이루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인데, 쉽사리 그 공간을 즐기는 일을 취미라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조경이 잘 보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조경하면 흔히 풍성한 나무와 그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바람에 살랑거리는 초화 등을 연상한다.

이 낭만적인 풍경은 18세기 영국 풍경화식 정원과 픽처레스크 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액자 속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드는 이 조경 원리는 현대 조경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피터 워커는 이로 인해 조경이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조경을 양산했다고 질타하기도 했다(보이지 않는 정원들(Invisible Gardens), 1996).

보이지 않는 조경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공원이 있다. 보통 공간이 커지면 그 존재감도 커지기 마련인데, 자연과 똑 닮게 만들어진 공원은 예외다. 정확히 말하면 규모가 커질수록 조경가의 손길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넉넉한 숲을 이룬 나무들은 본래 그 자리에서 자라던 것 같고, 나뭇가지 위를 오가는 동물들은 자연의 보살핌으로 태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풍경은 더욱 자연스러워지고 사람들은 그 자연에 감탄한다. 적절한 자리에 주변과 어우러지도록 난 보행로나 벤치 정도를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으로 인식한다. 자연스러움을 위해 대지가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서운하다고 토로할 수 없다. 공간에 녹아 있는 설계 의도를 읽어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 묻지 않아도 나서서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공원에 홀로 외로이 서서 떠들고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인플루언서 같은 단어는 조경과 멀다고만 생각했는데, 요새는 SNS 게시물의 하단을 채운 해시태그들을 들여다보곤 한다. 구구절절하다고 생각했던 단어의 나열에서 조경을 발견할 때면 웃음이 샌다. 공원을, 정원을, 보이지 않는 생태적 시스템이 구축된 공간을 배경으로 한 모든 사진의 태그에 조경이 등장하고, 취미는 조경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꾸 그려본다. 덧없는 상상이라고 잠깐 멈칫했을 때, 언젠가 나를 위로했던 글 한 편이 기억났다. “기대하세요. 내일의 날씨, 이따가의 점심 메뉴, 오랜만의 시내 외출, 개봉할 영화와 새로운 드라마.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에도 다시 일어나는 힘은, 지치지 않는 기대에서 나옵니다. 오늘 점심으로 먹은 달걀 샌드위치가 형편없었대도, 저녁으로 먹을 소고기 덮밥은 괜찮을 수 있습니다. …… 우리의 취미는 기대하는 것’. 백번을 실망한대도.”1

어느덧 여름이 저물고 세 번째 계절이 다가온다. 코로나19는 사그라질 기미가 없고, 어쩐지 올해도 세워 놓은 목표를 다 이루지 못할 것만 같다. 그래도 또 기대하고 싶다. “기대는 한 번도 죄였던 적이 없으니까.2 준비물 없이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이 취미 생활을 추천한다. 새로운 취미가 앞으로 당신이 겪을 실패와 실망들을 사소하게 느끼게 해주기를.

 

1. 허지원, “실패에 우아할 것”, 정신의학신문2018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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